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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 이슬람화를 이끈 사령관 무사 빈 누사이르

작성자
kislam0
작성일
2017-08-17 08:50
조회
260

 

북아프리카 이슬람화를 이끈 사령관 무사 빈 누사이르 (640-716)

전쟁의 영웅


이슬람의 군사적 팽창은 종교의 확산과 문화의 보급이라는 관점에서 이슬람의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특히 유럽과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마그립 지역(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지역)

의 정복은 유럽과 북아프리카의 기독교 지역을 이슬람화 했다는 종교적 의미 이외에도 중세 이후, 동

서 문명 교류의 하나의 계기로서 그 문명사적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세계 전쟁사의 주요 인물들이 그러하듯 이슬람의 정복사에서도 전략과 전술을 겸비한 영웅적 인물이

존재한다. 무사 빈 누사이르는 이슬람의 마그립 정복과 이베리아 반도의 정복을 주도한 인물로 이슬

람의 역사적 영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는 '꾸란'이 계시된 이후 출생한 세대에 속하나, 이슬람

의 영토 확장으로 세력 팽창을 시작한 초기의 인물로 이슬람의 전파에 영향력을 행사한 주요 인물로

평가 받는다.

 

그의 나이 40세부터 80세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패배가 없었다는 역사적 기록은 무사 빈 누사이

르가 전쟁의 영웅으로 얼마나 맹위를 떨쳤는지를 나타낸다.

 

"나는 항상 경계하고,  인내심을 가졌으며, 칼로써 나를 보호했고,  알라에게 도움을 구하고, 승리를

기도했다."

 

그의 말에서 강한 종교적 이념과 승부욕을 느낄 수 있다.

 

생애

 

무사 빈 누사이르는 640년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 메디나 인근 지역에서 출생했다. 무사의 부친은

유대인으로 이슬람으로 전향한 노예 출신이었으나 당시 시리아의 총독이었던 무아위야 빈 아비 수

피얀의 정책 조언자로서 활동했다. "콘스탄티노풀 점령을 위해서는 양쪽에서 공격을 가해야 한다."

 

누사이르의 조언은 후에 무아위야가  서유럽을 정복할 계획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무아

위야의 신임을 얻은 누사이르의 활동은  무사가 어린 시절부터 양질의 교육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후에 그를 전쟁 영웅으로 만드는 데 밑바탕이 되었다. 종교적 신념과 굽히지 않는 소신은 유년시절

아버지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 누사이르는 무아위야를 돕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무아위야가 제4대 정통 칼리파였던 알리와 전쟁을 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이와같이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 아버지의 모습은 훗날 무사에게 영향을 미쳐 인간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알라에게 복종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우선시 된다는 것을 신조로 삼게 되었다.

 

그는 15세 때부터 이미 시리아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고 지중해 동부에서 로마 제국 해군과의 전쟁

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684년 마르완 빈 알 하캄 시대에 그의 아들인  압둘 아지즈와  친분을 쌓으

며 이집트 지역의 총 사령관이 되었다.  북아프리카의 완전한 이슬람화를 구상하던 무사는 로마의

주로 남아읬던 일부 지역을 되찾기 위해 전력을 다하게 된다. 이를 위해 무사가 인지한 가장 중

요한 과제는 북아프리카의 토착 민족인 베르베르족을 어떻게 포용할 것인가 였다.  베르베르족은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와 관습을 지니고 있었고 그들의 문화를 어떻게 포용하며 이슬람화 시킬 것

인가가 북아프리카의 완전한 이슬람화의 관건이었다.

 

당시 북아프리카 지역은 튀니지 까이라완에 전진 기지를 삼은 우끄바 빈 나피아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빈 나파이는 북아프리카의 토착민이었던  베르베르족의 전통을 강력히 부인하고 그들을

통합하고 동화시키려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와 같은 정책은 베르베르족의 강력한 저항을 이끌

어 냈고, 지역 사회 구성원의 통합에 실패한 우끄바 빈 나피는 결국 사임하였다. 705년 빈 나피이

의 뒤를 이어 이 지역을 통치하게 된  무사 빈 누사이르는 전임 통치자와 다르게  베르베르족에게

이슬람의 종교적 가치와 문화를 강요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전통을 잘 감싸주어 많은 베르베르족

이 이슬람으로 전향하였다.

 

 

북아프리카의 완전 정복과 이베리아 반도로의 진출

 

무사 빈 누사이르가 내부적으로 민족 간의 통합과 이슬람을 공고히 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면 대

외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절멸시키고자 전략을 수립하였다.  그는

첫째,  왕족 출신의 전문 사령관을 배치하여 전략 수립과 전술 감행에 효율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보다 책임감 있고  전문적인 수뇌부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둘째, 군대의 구성원과의 지속적인

접촉, 직접적 대화를 통해 군사들을 독려하여 오랜 기간 전쟁을 경험해야하는 군사들의 심리적인

상황을 파악하고 개인적인 대화를 통해 사기 진작을 시도하고자 했다.  셋째, 전진 기지를 까이라

완에서  서쪽으로 점진적으로 이동시킴으로써  로마 군대를 압박하여 심리적인  주도권을 쥐고자

하였다. 적을 압박하고,  과감한 실행에 기초한 그의 타고난 전략과 전술은 전쟁에서 지속적인 승

리를 거두는 결과를 가져왔다.

 

북아프리카의 완전 정복과 이베리아 반도로의 진출의 첫 번째 실행 단계로 무사는 모로코로 군대

를 파견하였다.  당시 모로코에 거주하던 토착민,  베르베르족은 이미 이슬람을 접하고 있었고 일

해안의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이슬람화 된 상태여서 많은 베르베르족 청년들이 이슬람

군대로 편입되었다. 무사는 그의 탁월한 전략적 선택으로 베르베르족 출신인 타리끄 빈 지야드를

모로코 북부 해안 지역인 탕헤르의 통치자로 발탁했다.

 

타리끄는 이베리아 반도 상륙 후 코르도바를 목표로 진군하였다.  당시 서코트 왕국이 이슬람 세

력에게 결정적으로 전세가 밀리기 시작한 파델레테 전투는 바로 이슬람 군대의 코르도바 진격을

막기 위한 전투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타리끄는 코르도바로 진격하여  코르도바를 수월하게 점

령했고,  파델레테 전투 시점에 무사가 병력을 이끌고  타리끄를 지원하기 위해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했다.  타리끄가 현제의 스페인 내륙 지방을 점령하는 동안  무사는 세비야를 정복하였고 현

제의 포르투칼 지역으로 원정을 떠나 서코트 왕국의 잔여 세력을 무찔렀다.  이에 무사의 아들인

압둘 아지즈가 합세하여 포르투칼의 코임브라와 산타렘 뮤라시아를 정복하였다. 또한 무사는 사

라고사, 오비에도를  타리끄는 카스티야 지방의 아스토르가를 마지막으로 이베리아 정복의 종지

부를  찍었다. 이로부터 약 800년 동안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

베리아 반도의  이슬람화는 유럽에 이슬람을 전파했다는 그 의미만으로도 당시 무슬림들을 고무

시킬 만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슬람 군대가 이베리아 번도로 진격할 수 있었던 데에는 무사의  전략과 타리끄의 전술이 유효

했으나,  당시 로마의 속주였던 세우타 총독의 협조가  이슬람군대의 정복에 일조했다고 전해진

다. 역사서에 의하면 해안 연안에  로마의 통치권 하에 있던 세우타의 줄리앙  총독은 당시 서고

왕국의 로데릭 왕의 폭정을 문제삼아 무어인, 즉 이슬람군대에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할 것을

청하게 된다. 줄리안 총독의 딸이 톨레도 지방에서 로데릭 왕에게 욕보인 사건에 대한 줄리앙

저항심에 비롯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빈 누사이르의 말년

 

대부분의 이랍어 문헌은 무시 빈 누사이르의 말년을 영광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무사는

40년 동안 전투에서의 무패라는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초라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무사 빈

누사이르와 타리끄 빈 지야드는 막대한 전리품을 가지고 다마스쿠스로 귀환하였으나 정치적 음

모로 암울한 말년을 보냈다.  다마스쿠스 귀환시 무사를 신임하던 알 왈리드 1세가 병석에 누워

있었고, 그의 동생인 술레이만 빈 압둘 말리크가 대신 무사 일행을 맞이하였다. 술레이만 빈 압

둘 말리크는 이베리아 반도의 안달루스 정복을 죽어가는 형의 업적이 아닌 자신의 업적으로 내

세우고 싶은 나머지 무사 일행에게 다마스쿠스의 시내  행군을 미뤄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무사는 이를 거부하고 다마스쿠스를 행군하여 모든 영광을 알 왈리드에게 바쳤다. 자신의 소신

을 굽히지 않는 무사의 모습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술레이만은 무사의 행동에 격분

해 무사의 직위를 해제시키고 전리품을 몰수했으며, 무사의 목에 끈을 묶어 다마스쿠스 거리를

행군하겠끔 하여 굴욕을 안겨주었다.  이에 무사는 '오, 칼리파여! 저는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자

격이 있습니다.' 라고 항의하며 평생을  칼리파의 모스크에서 빌며 지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리파의 노여움은 무사에게만 그친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에게도 이어졌다. 무사의 아들 압둘

지즈는 로드리고  왕의 딸인 스페인 여성과 혼인하였으나  암살당하고 그의 머리는 무사에게

내어졌다. 이에 슬퍼한 무사는 여생을 칼리파를 저주하며 암울하게 보냈다.

 

 

김효정 명지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