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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빈 까심(이슬람 세력 확장을 위한 인도아대륙 점령)

작성자
kislam0
작성일
2017-10-16 08:36
조회
230

무함마드 빈 까심

이슬람 세력 확장을 위한 인도아대륙 점령



무함마드 빈 까심은 17세의 나이에 인더스강을 따라 신드와 편잡 지역을 점령한 우마이야 조의 장군

이 었다. 그의 업적은 이슬람이 인도아 지역을 통치하는 초석이 되었다.

무함마드 빈 까심의 군사적인 위업은 17세의 어린 나이로, 대륙을 아우르는 가장 위협적인 군대에 맞

섰다는 것과 불과 2년에 불과한 시일 내에 6천의 소수 병력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머 중세 전쟁사에

있어 황금기를 장식한 것이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레인 풀은 까심의 군사적 위업을 '역사의 매혹적인

로맨스'라고 표현하였다.


무함마드 까심은 이슬람군이 세 개의 대륙을 호령하던 무렵에 출생하였다. 그는 사까피 부족 출신으

로 까심 빈 유수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까심이 어렸을 때 사망하였다. 그는 우마이야 조

의 이라크 총독이었던 알 핮자즈 이븐 유수프 알 사까피의 후원으로 전쟁과 통치법 등을 배우며 성장

하게 된다. 까심은 신드로 파견되기 전, 핮자즈의 딸인 사촌 주바이다와 결혼을 하였다.


당시 우마이야 조는 이슬람의 세력 팽창에 주력하였다. 서쪽에서는 무사 빈 누사이르가 북아프리카

를 정복하였다. 무사와 그의 유능한 부관 타리끄 빈 지야드는 전광석화와 같이 이베리아 반도를 점

령하였다. 동쪽에서는 쿠다이바 빈 무슬림이 적군 타타르를 격파하고 중앙아시아를 무슬림의 기치

아래 놓이게 하였다. 712년 신드 지역에서 무함마드 빈 까심이 등장하여 두 해가 안되는 시일에 신

드와 풀탄에 이르는 바하왈푸르 등 발루치스탄 전역을 복속하였다. 그 당시 신드는 채수 (타쉬켄트

를 칭함)의 아들, 위대한 정치가이자 행정가인 라자다히르의 통치하에 있었고, 인도아대륙을 형성하

고 있었다.


라자 다히르의 국가는 인도아대륙 내의 가장 강력한 국가였고 신드, 마크란, 구즈라트, 마르와르 그

리고 편잡의 절반으로 구성되었다. 수도는 데발 로 인도양 근처의 인더스강 제방가에 위치하고 있었

다. 이슬람 칼리파에 맞서는 반군들에게 쉼터를 제공했고, 그의 부하들은 실론에서 아라비아로 무역

을 하는 무슬림 상인들의 재산을 약탈하곤 하였다. 라자의 부하들은 무슬림 상인들의 상품을 약탈할

뿐 아니라. 가족들을 구금하기도 하였다. 라자는 칼리파의 항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석방

을 거부하였다. 결국 이러한 점이 신드 공격의 빌미가 되었다.


무함마드 빈 까심의 숙부이자 장인인 이라크의 총독이었던, 핫자즈 빈 유수프는 군사 행동을 준비하

고, 6천명의 단위 부대로 구성된 부대의 지휘권을 젊은 까심에게 위임하였다. 까심 장군은 전광석화

와 같이 진군하여 테발을 포위하였다. 까심 장군은 거대한 투석기와 불덩어리, 두 가지의 신무기를

운용하였다. 투석기는 돌덩어리를 퍼붓고 불덩이로 적을태웠다. 비록 그의 군대는 소규모였으나 코

끼리와 명사수의 지원을 받는 십만의 군대와 필적할 정도로 강력했다.


그러나 라자 다히르는 혼자가 아니었다. 인도아대륙 전역에 걸친 통치력을 갖고 있는 힌두 통치자

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전투를 오래 끌어서 적을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전술을 구사했다. 라자 다

히르는 데발이라는 난공불락의 요새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데발에서 무슬림군의 승리는 '우르스'라

명명된 거대한 투석기의 운용에 기인했다. 우루스에서 투석된 돌덩이는 거대한 신전에 떨어졌다.

떨어진 돌들은 적들에게 나쁜 징조로 여겨졌으며, 투석기가 발사되면 적들은 엄청난 손실을 내며

패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함마드 빈 까심은 712년과 714년 사이의 짧은 기간 동안 라자 다헤르의 강력한 연합군과의 열 한

차례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데발을 점령하고 나서 까심은 네르완으로

진격했고 별다른 저항 없이 그 곳을 점령했다. 그 후 베라로 진출하여 라자 비자이 라이를 물리쳤다.

다음으로 세삼과 아쉬하 요새 전투에서 큰 저항 없이 세환을 점령했다.


그는 인더스강 서안으로 이동하여 짐피르 부근에서, 인더스강 동쪽에 위치한 자이 신그 휘하의 라

자 다히르의 강력한 군대와 조우하게 되었다. 무함마드 빈 까심은 넓은 강을 건넌다는 톡특한 계획

을 수립했다. 배들을 묶어 강폭과 동일하게 하였으며, 각각의 배에 5명의 궁수를 탑승시키고 선수

에는 투석기를 배치하였다 . 각 선박은 체계적으로 이동하였고 궁수의 사격으로 강 건너편의 적들

은 물러섰다. 투석기가 강어귀에 도착하고 무슬림 병력들이 상륙하여 적들에게 타격을 가해 큰 손

실을 주었다.


무슬림군은 짐피를 사로잡고 라자 다히르군을 추격하였다. 라와르 요새 전투는 인도군이 우세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패한 기념비적인 전투로 라자 다히르는 이 전투에서 살해당한다 . 또 격렬하게

싸웠던 전투는 브라흐마나바드 전투로, 까심은 이곳에서 자이 신그가 이끄는 4천명의 군사와 격돌

하였다. 자이 신그는 카슈미르로 패퇴하였다. 무슬림군은 혈전을 거듭하여 아로르를 생포하였다.

무슬림군의 진격은 식카로 행했고 그것에서 많은 전리품을 획득하였다.



현명하고 공명정대한 통치자



무슬림군의 성공은 우세한 군사 전술과 각개 병사의 기량 그리고 까심의 지휘력에서 기인했다. 또

한 무슬림군은 잘 훈련되고 기량이 우수했다. 까심은 포위전과 개활전에 능하였고 그의 복안과 예

비 부대의 운용이 승리의 원인이 되었다. 정복 이후, 무함마드 빈 까심의 임무는 안정적인 통치 기

반의 수립이었다. 점령 지역이 소수의 무슬림이 다수의 비무슬림을 통치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점

령 초기 까심은 종교세를 내는 비무슬림의 종교 관습을 간섭하지 않는 대신 무슬림의 통치를 받아

들일 것을 요구하는 화,해 정책을 유지하였다.


또한 점령지에 이슬람 샤리아를 근간으로 하는 법령을 유지시키는 한편, 원주민의 고유한 관습법

과 부족장의 권위를 용인하는 정책을 취하기도 하였다. 힌두교도와 불교도들을 행정 고문으로 위

촉하기도 하였고 지즈야, 자카트와 같은 이슬람식 조세 제도를 확립하였다.


무함마드 빈 까심은 전쟁이 있을 때나 평화로울 때 모두훌륭한 인재였다. 그는 유능한 행정가임

을 증명했다. 두 해 동안 농업 개혁과 같은 현명하고 공명정대한 통치를 했고, 무슬림과 비무슬림

모두가 그를 따르게 되었다.




최재훈. 단국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