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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주크의 명 재상 니잠 알 물크

작성자
kislam0
작성일
2017-11-21 08:30
조회
278

셀주크의 명 재상

니잠 알 물크



이란 출신으로 셀주크 투르크 제국 시대의 가장 뛰어난 재상이자. 정치가로 본명은 아부 알리 알

하산 빈 알리 빈 이샤크 알 투시다. 니잠 알 물크는 셀주크 제국이 등장하자 초기 술탄들을 섬기

면서, 공지자로 출발했고, 특히 제3대 술탄 말리크 샤를 위하여 쓴 '시야세트나메'는 전 세계에

가장 잘 알려진 명저이다. 그는 학문과 예술을 보호장려하고 각지에 학교를 세웠는데, 그의 뛰어

난 교육 철학과 바람직한 통치 기법을 전수하는 최고의 전당으로 '니자미야'란 이름으로 불렀다.

셀주크 투르크 통치 영역인 이슬람 세계 각지에 세워진 나자미야 중에는 바그다드의 니자미야가

가장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중세 이슬람 세계 최대의 철학 겸 신학자로 꼽히는 가잘리(1111년 사망)도 이곳에서 강의를 맡았

다. 니자미야를 대표하던 대학자 가잘리는 전통 신학과 수피와의 갈등으로 인한 이념적 혼란을

학문적으로 정립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가잘리 덕분에 이단으로 몰렸던 수피주의는 정통신

학의 주요한 뿌리로서,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투르크 사회에 확산되어 갔다. 포용적이고 학문적

전통을 중시하던 니자미야 학풍의 결과였다.


니잠 알 물크는 이란 북쪽 후라산 지방의 투스에서 태어났으며, 첫 공직 생활을 가즈나 조에서 시

작한 후 1059년에는 이미 후라산 지방의 최고 행정관으로 등용될 만큼 성장했다. 1063년 이후로

그는 재상으로서 셀주크 가문을 받들었는데, 그의 역할과 정치적 수완은 알프 아르슬란(1063년-

1072년)과 말리크 샤 1세(1072-1092)의 통치 기간 동안 최고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셀주크

제국의 행정 체계에 가장 심대한 영향을 끼친 재상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이 때문에 니잠 물크

는 '국가의 질서'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였다.


니잠 알물크가 알프 이슬란에게 발탁되어 재상에 올라 탁월한 국가행정 능력을 선보이는 계기는

당시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권력 투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셀주크 투르크와 알프 아르슬란

은 치열한 권력 투쟁 끝에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쿠탈미쉬를 1064년 전투에서 격퇴하고 라이에

입성하였다. 쿠탈미쉬의 잔존 세력은 비잔틴 영역으로 쫓겨나 후일 터키 셀주크 조의 건설 주역

이 된다. 결국 모든 경쟁 세력을 제거하고 투구룰을 이은 샐주크 조의 새로운 술탄으로 등극한

알프 이슬란은 자신의 국가를 책임질 새 재상으로 이미 경영능력을 평가받은 니잠 알물크를 발

탁하게 된다. 니잠 알 물크는 술탄 알프 아르슬란과 그를 이은 술탄 말리크 샤를 도와 셀주크 조

가 주변 이슬람 세계를 통일하여 대제국으로 성장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1092년 이후 셀주크 조의 분열 양상이 심각해졌는데, 주된 이유는 말리크 샤와 니잠 알

물크와의 불화 때문이었다. 셀주크 조의 안정과 강성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니잠 알 물크와 술탄

과의 불화 이유는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말리크 샤의 왕비 테르킨 하툰의 야욕과 니잠 알 물

크의 견제, 그리고 그의 아들인 마르브 총독과 술탄 세력 사이의 불화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이

다.


테르킨 하툰은 황태자인 베르그야룩 대신에 자신의 어린 아들인 마흐무드를 술탄에 책봉하고자

했고, 이를 니잠 알 물크가 극력 반대했다. 이 때문에 그는 1092년 이스파한에서 바그다드로 가

는 도중 라마단의 10번째 날에 암살당했다. 아랍 문헌들은 그가 가마를 타고 이동하던 도중에

페르시아의 니하반드에 있던 악명 높은 이스마일파의 암살단 단원이 찌른 단검에의해 사망했다

고 기록하고 있다. 이 암살자는 수피주의자인 테르비쉬로 위장해서 그에게 접근했다고 전한다.

결국 1092년에 니잠 알 물크가 극단적 쉬아 종파인 이스마일파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테르킨 하

툰이 천거한 타즈 알물크가 새 재상이 되고, 왕비의 아들을 황태자로 책봉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어 같은 해 11월에 말리크 샤마저 독살되고, 마흐무드가 어린나이로 술탄에 등극하였다. 각지

영주들은 일제히 반발하였고, 셀주크 조의 분열과 약화는 급속히 진행되었다.


대표 저서 '시야세트나메'



니잠 알 물크는 압바스 조와 셀주크 가문 사이의 정치적 간극을 이어주는 가교가 되어 두 왕조가

처음에는 부와이흐 조에, 후에는 파띠마 조에 공동 대응토록 하는 데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재상으로서 권위를 보여주었고 훌륭한 행정적 업적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바그다드의 니자

마야로 대표 되는 많은 수의 대학을 여러도시에 세웠다 . 참고로 니자미야라는 명칭은 그의 사후

에 붙여진 것이다. 이 학교들은 중세 이후 유럽에 설립한 많은 대학들의 전형이 되었다.


그의 탁월한 행정 경험과 경륜은 '시야세트나메'라는 방대한 양의 책으로 남아있다. 이 외에도 자

신의 아들인 아불 파트 파크르와 알 말리크를 위해서 집필한 '다스투르 알 우자'라는 책을 남겼다.


셀주크 시대의 문학 고전으로 간주되는 그의 저서 '시야세트나메'에서, 그는 정치가의 도리뿐만

아니라 치세의 구체적 요령을 유려한 문체와 뛰어난 감동으로 설파하고 있다. 술탄 알프 아르슬

란과 말리크 샤에 걸쳐 재상을 역임한 그의 노력의 결과, 대 셀주크는 황금기를 맞아 문화의 융성

을 누렸다. 시야세트나메는 셀주크 조 전반의 통치와 제도의 정비는 물론, 이후 투르크 이슬람 국

가의 기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1) 우선 정치조직에서 이슬람-터키 시대에는 이슬람-이란적인 요소를 강하게 담고 있다. 술탄을

보좌하는 궁성 조직으로는 하지브, 춥다르, 무기고를 관장하는 실라흐다르, 술과 음료 일을 보는

샤랍다르, 술탄의 민원 사무처인 웨킬리 하스 등이 있다.


와지르 아잠, 즉 수상이 주도하는 내각은 디와니 살타나트라 불렀는데, 대 셀주크 시대에 네 개

부처가 있었다.

(1) 디와니 투구라 (내외신을 다루는 외교 부처)

(2) 디와니 아스티파 (정세 업무 및 국가 재정 업무를 총괄하는 재정 부처)

(3) 디와니 이르즈 (전쟁과 군사 업무를 관장하는 국방 부처)

(4) 디와니 이쉬라프 (군사, 사법 관계를 제외한 국가 행정을 총괄하는 총무 부처)


각 부처의 장관은 와지르 라 불렀다. 영토는 총독, 사령관의 통치하에 있는 각 주와 왕족이나 왕자

들에게 분봉된 지역으로 크게 양분되었다. 중앙정부에 예속된 각 주의 총독은 쉬흐네 라고 불렀으

며, 각 도시와 마을에는 재산권을 관장하는 아미드, 재정 및 조세 업무를 담당하는 아밀, 라이스라

불리는 민선 군수 및 시장, 지방 행정을 돌보는 무흐타십 이라는 관리가 있었다. 그리고 왕족인 말

리크가 영주로 통치하는 지방정부에는 아타베이가 말리크를 보좌하였다. 아타베이는 왕자들의 교

육과 국가통치에 대한 자문을 담당하는 자로서, 자신이 가르친 왕자가 왕위에 오르는 경우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며 국가 행정에 참여하였다. 셀주크 조 말기에 중앙정부가 약화되고 왕권 투쟁이 첨

예화되자, 아타베이 통치 시대를 열기도 했다. 그 밖의 국가 특별 기관으로는 페이크 또는 페랜테

라 불리는 체신 우편국, 교역로의 경찰 업무를 담당하는 리바트, 문히 라는 관리가 운영하는 비밀

정보국 등이 있었다.


2) 법 제도를 보면, 초기 이슬람-터키 사회의 법 체계는 이원화되어 있었다. 즉, 종교법과 일반법

이 그것이다. 샤리아 즉 이슬람법 테두리 안에서 재판하는 종교 법정에는 까디 라는 재판관이 술

탄에 의해 임명되었다. 수도에는 까디의 장 즉 대법원장에 해당하는 까디 알 쿠다트가 전국의 까

디들을 통제 감독하였다. 까디는 결혼, 이혼, 상속, 부채 관계, 무역 마찰 같은 문제를 이슬람법

에 따라 재판하였다. 국사범과 일반 범죄를 다루는 일반 법정에도 재판관이 임명되었다. 주요 문

제를 다루는 최고 법정은 디와니 메잘림이라 불렀는데, 이곳에는 아미 다드라는 최고 재판장이

있어, 술탄의 부재 시 그를 대신해 재판을 진행하였다. 각 주나 영주들의 지방 국가에는, 술탄을

대리하여 말리크(영주)나 와지르(장관), 왈리(총독), 라이스(군수, 시장)등이 일반 법정을 관장하

였다.


군인과 군 내부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별도로 군사 법정이 설치되었는데, 이곳의 심리는 카다

아스케르 라는 최고 사령관에 의해 처리되었다. 정의, 자유, 평등이라는 이슬람-터키 국가의 이

념에 따라 일반적으로 사법과 행정은 분리되었다. 재판관인 까디는 관리들의 세속적 간섭 없이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서 이슬람법에 따라 문제를 처리하였다. 모든 당사자들은 판결에 대한

항소권을 가졌다.


3) 군사 제도를 보면 다음과 같은 부대로 편성되었다.

-굴라만 샤라이 : 각지역에서 모병하여 특수 훈련으로 양성된 술탄 직속의 특수 부대, 병력 규모

는 약 4000명이고, 매년 네 차례의 봉급을 지급받았다.

-하사 오르두 : 말리크 샤 시대에 설립된 약 46,000명 규모의 근위대, 여러 투르크족들로 구성되

었으며, 이끄타 라는 토지 일부를 분봉 받았다.

그 밖에도 말리크(영주)나 지사들에 소속된 부대, 중앙정부 소속의 일반 정규군, 이크타를 받는

기마 부대 등이 있었다.


군인들에게 녹봉 대신 토지를 지급하는 제도인 이크다는 이슬람 초기 칼리파 오마르 시대부터

적용되었다. 원래 점령지의 토지 수확 중 일부를 세금으로 중앙정부에 납부하도록 한 이크다 제

도는 셀쿠크 시대에 와서 군인들의 녹봉으로 전환되었다.즉, 점령지 토지의 수입 일부를 전공을

세운 군인들에게 지급하였는데, 군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토지(이크다)에 가서 거주하며 세금

을 거두어들이는 한편, 그 세금 수익으로 일정한 수의 병사를 양성하여 전시에 군사를 공급하게

하였다. 군인들을 위한 이크다 제도는 오스만 제국 시대의 티마르로 발전되었다.


4) 토지 제도는 크게 세 종류로 분류되었다. 술탄 직속령인 하스와 전공 군인들에게 분봉되어 경

작이 의뢰되는 이끄타, 그리고 일반 경작지 하라즈였다. 전국에 대한 호구 조사가 실시되어 모든

국민이 조세의 의무를 지는데, 관리의 지나친 징세로 인한 백성의 수탈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

를 갖고 있었다. 하스와 하라즈의 수익은 술탄이나 국가에 귀속되었고, 이끄타에서의 수익은 소

유주인 전공군인들이 차지하여, 그 대가로 병사를 양성하였다. 이크타에서 일하는 소작농으로부

터 거두어들이는 세금의 액수는 지방, 기후, 경작 품목에 따라 내각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이끄타

의 주인은 규정 세율 이상을 소작농으로부터 징수할 수 없었다. 이끄타 소유주의 정도가 지나친

소작농에 대한 수탈에는 내각이나 술탄에게 직접 탄원할 수 있는 창구가 마련되어 있었고, 수탈

을 피해 다른 경작지로의 이주가 허용되었다.


이슬람-터키 국가에서 무슬림 투르크인들에게 여유 있는 경제 생활을 보장해 준 또 다른 제도는

이힐릭인데, 이는 일종의 종교적 성격을 띤 제조업 조합이었다. 이는 무슬림들에게만 제한적으

로 여러 가지 경제적 혜택을 주는 제도였기 때문에 유목 생활에서 도시 생활로 전환한 투르크인

제조업자들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더욱이 아히릭 제도권 밖의 비무슬림 제조업자들을 개종시

키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투르크 농민들은 당시 유럽 봉건 사회의 농노의 사회, 경제적 지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

다. 터키 셀주크 시대에 몽골군의 침입으로 토지 제도가 와해되어 이끄타의 개인 소유가 성행하

였다. 이로써 병사의 양성이 중된됨은 물론, 전공을 세운 군인에게 포상할 이끄타가 부족하여 국

가는 큰 혼란에 빠졌다. 결국 이러한 사태는 셀주크의 멸망을 가속화시킨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세계 최초의 대학, 니자미야 설립



니잠 알 물크의 이름을 딴 니자미야라는 이슬람 대학은 중세 이슬람 세계의 가장 중요한 학문적

산실이 되었다. 동시에 순니 이슬람 사상의 굳건한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다. 니자미야가 설치됨

으로써 서아시아 이슬람 -터키 세계의 학문의 번성은 절정에 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니자미야는 당시 카이로에 있는 쉬아 계통인 이스마일파의 알 아즈하르 대학에 대항해 순니 이

슬람 세계의 이념적 체계를 정비하기 위해, 1066년대 셀주크 조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에 의해 운

영된 니자미야는 세계 최초의 대학으로 종교 이론의 체계화뿐만 아니라, 철학, 어문학, 수학 등

다양한 학문 연구의 산실이었고, 이슬람-터키 세계의 문화와 과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니잠

알 물크의 이름을 딴 바그다드의 니지미야는 곧 이스파한, 니샤푸르, 발크, 헤라트, 바스라 등지

에도 설립되었다. 니자미야에는 봉급을 받는 교수와 풍부한 장서를 가진 도서관이 있었다. 또한

학생들의 교육은 무료일 뿐만 아니라 기숙사와 약간의 장학금도 지급되었다. 니자미야의 교육 시

스템은 인근 투르크 국가들 뿐 아니라, 후일 터키 셀주크 조와 오스만 제국에서도 마드라사(신학

교)로 발전되어 이슬람 세계에서 최고의 교육장이 되었다.



이희수. 한양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