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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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주의 법학자의 거두 아부 하니파 Abu Hanifa)

작성자
kislam0
작성일
2018-01-29 08:52
조회
223

이성주의 법학자의 거두 아부 하니파 Abu Hanifa 699-767





체계적인 법적 체제의 수립


아부 하니파는 이슬람 순니 주요 4대 법학파들 중 하나인 하나피파의 창시자이다. 그는 이성과

자유의지를 강조했던 이성주의 신학자였으며, 법관이었다. 그가 창시했던 하나피 법학파는 오

늘날 무슬림 공동체에서 가장 넓은 지역으로 세력을 확산한 법학파이다. 페르시아인이었던 그

는 이슬람의 위대한 법학자들 중 하나였으며, 이슬람 법학을 개척한 사람이었다. 이 당시 많은

사람들은 각 지역별로 법률적 세부 사항이 서로 다르고 체계화가 부족한 것에 대해 개혁과 조

정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8세기의 이슬람 세계는 지역적으로 광대했으나, 이념적 법률적 통합의 측면에서는 아직도 미숙

한 단계였다. 632년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망은 더 이상 성스러운 계시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지

만, 무슬림들은 신(알라)이 자신들에게 계시했던 '꾸란'에 명시되어 있는 올바른 길, 샤리아를

따르는 것을 여전히 그들의 의무로 생각했다. 무슬림들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삶과 가르침인 순

나를 지침으로 여기고 따랐다. '꾸란'이 가르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고, 예언자 무함마드가 언

급하고 행했던 것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4명의 정통 칼리파 시기 전반부에

무슬림 공동체의 결정과 새로운 관심사는 칼리파들이 원하는 대로 처리되었다. 정통 칼리파들

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행보와 발자취를 진실하게 따랐다고 인정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모두 올

바르게 인도된 통치자들로 간주되었다,


우마이야 조(661-750)의 지배와 더불어 많은 법적 판단에 어려움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보

다 체계적인 법적 체계의 수립이 요구되었으며, 여기에는 꾸란'과 법관의 개인적 판단, 그리

고 특정지역의 관행에 의거하여 판단하는 법 제도의 수립이 포함되었다. 이슬람 초기에는 법

학이 체계화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판사들이 법률에 관한 사항들을 충분히 공부하지 못했다.

더욱이 각 지역마다 법률 체계도 서로 달랐다. 따라서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법 제도의 수립은

만족스러운 수준이 아니었다. 이즈음에 무슬림들 사이에서는 논란이 벌어졌다. 논란의 핵심은

만약 모든 무슬림들이 신의 율법에 따라 생활해야 한다면 무슬림들이 어디에 사는지에 상관없

이 무슬림 개개인에게 적용되는 법도 차이가 있었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논란의 과정을 거쳐 8세기에 이슬람법을 표준화하려고 시도했던 많은 이슬람 학자들이

등장했다. 이들 중에는 아부 하니파, 말리크 빈 아나스, 무함마드 앗 샤피이, 아흐마드 한발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각각 하나피 법학파, 말리키 법학파, 샤피이 법학파, 한발리 법학파의 지

도자 겸 창시자로 존경받았다. 압바스 조(750-1258) 통치 기간 초기에 4대 법학파들의 법적 심

리 패턴들은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졌으며, 이슬람 제국 전체에 적용될 수 있는 하나의 법전으

로 발전하였다. 압바스 조는 중앙집권적 국가로 등장하였으며, 이는 법적 표준화외 규정 재정

의 필요성을 증대시키면서 관료주의적 통치로 이어졌다.



하나피 법학파



아부 하니파 알 누으만 빈 사비트는 699년 출생했다. 그의 할아버지 주타는 오늘날 아프가니

스탄의 수도인 카불로부터 오늘날 이라크의 쿠파까지 노예로 끌려왔으며, 타임 알라 빈 싸울

라바라는 아랍 부족에 의해 자유인으로 해방되었다. 이로 인해 그와 그의 후손들은 싸울라바

부족의 이름을 따 '알 타이미'라 불리기도 했다. 그는 쿠파에 거주하였으며, 카즈라 불리는

일종의 비단을 만들어 파는 상인으로 일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종교법을 공부했으며, 이로

인해 일반적으로 샤리아의 가장 탁월한 권위자로 간주되었다. 그는 종교법을 가르치며 많은

수의 제자들을 모았으나, 한 번도 판사의 직위를 얻지는 못했다. 그는 종교법을 가르치는 선

생님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지만, 이슬람 법을 만드는 일에 실제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의 주요 활동은 '꾸란'과 순나를 암기하고, 그 지식을 모으고 잘 가다듬어 전파하는 것이었

다.


아부 하니파의 이름에서 유래된 하나피 법학파는 그의 제자 아부 유수프와 알 샤이바니에 의

해 설립되었다. 그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들과 말리크에 의해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발전했는

데, 말리크는 그와 동시대의 인물이었으며 메디나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아부 하니파는 어

떤 법학 저서도 발표하지 않았다. 그는 직접 저술 방식보다 제자들과 자신의 견해를 토론 한

후 이를 제자들이 받아 적어 저술하는 방법을 선호했다. 이렇게 저술된 책들 중 일부는 아부

하니파 학설의 주요 원전이 되었다. 많은 무슬림 학자들이 무슬림 교리 또는 신조(아랍어로

'aqida이며 '묶다' 또는 '계약하다'를 의미함)를 기술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교리는 기독교의

니케어 신경과 같이 요약된 교리로 발전하지 못했다. 위대한 율법으로 알려진 무슬림 신조는

아부 하니파가 이슬람 전통에 따라서 무슬림 공동체를 위해 작성하였다. 이 신조는 아부 하

니파 개인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의 제자들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아부 하니파의 견해와 방법론은 그를 합리주의로부를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그의 학파는 종

종 '무르지아파(연기론자들)'이라 불렀다. 왜냐하면 그들은 중죄란 믿음으로 상쇄되고 중죄

인들에 대한 형벌은 영원하지 않다며 행위보다는 믿음을 장려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무

르지아파는 현세에서 가상의 중죄인에 대한 심판을 연기했으며 죄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취

했다. 무르지아파는 카리지파('나가다'에서 유래)에 대한 반발로 등장했다. 원래부터 극단적

인 성격을 지녔던 카리지파는 평등주의자와 청교도주의를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매우 신중하

게 '꾸란'에 근거한 운동을 추구하였다. 카리지파의 교리에 의하면 중죄인은 죽음으로 벌을

받는 사실상의 배교자로 취급되었으며, 구원을 박탈당했다. 카리지파는 일말의 양심의 가책

이나 거리낌 없이 현세에서 죄인들을 처벌하였다. 하지만 아부 하니파는 무르지아파라고 불

렀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무슬림은 개인적 믿음에 대해 (최후의 심판의 날 판결 이전

까지) 불확실성의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에게 보다 중요한 문제는 신자의 내적 양

심이었으며, 죄에 대한 심판은 오직 신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하나피 법학파는 말리키파와 같이 법관들에게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개인적 의사

를 반영하고 독자적인 이성을 수행하도록 장려하였다. 이것은 바로 이슬람법에서 이즈티하

드(개인적 판단)라고 알려진 중요한 원리원칙이었다. 조건은 법관들이 독자적인 이성적 사

고방식으로 업무를 수행할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좀

더 자격을 갖춘 법관들의 이전 결정들을 모방하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이다. 특히 영향력이 있

었던 법학자 알샤피이의 시기 이후 증가했던 관심사는 이슬람법의 궁극적 정체로 결과 되었

던 유능한 법학자들에 의한 타끌리드의 특별한 강조였다. 아부 하니파에 붙여진 이성주의자

(합리주의자)라는 칭호는 법적 결정을 내리기 위해 '꾸란'의 정신에 입각하여 이성을 활용하

는 것이다. 하지만 이즈티하드를 통한 결정들이 단순하게 개인적 판단이 아니라 '꾸란'의 정

신에 입각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이성(또는 추론)의 사용이 법학의 원리

에 의해 세밀하게 제한되어야 한다.


최종적이고 결정적이라고 여겨지는 '꾸란'의 계시는 해석이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꾸란'

의 많은 불분명하다. 이런 추리적(또는 사색적) 구절들은 이지티하드가 허용된다. 하지만 독

자적인 개인적 판단은 단순한 의견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꾸란'의 전후 문맥이나 순

나라는 예언자의 언행에 의해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언자 무함마드는 '꾸란'의 암송

자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해설가였기 때문이다.


하나피 법학파는 '꾸란' 이외에도 근본적인 원리원칙과 신성한 명령들로부터 파생될 수 있는

해석 방법을 개발하였다. 여기에는 이성적 유추인 끼야스와 선을 추구하는 법적 판단의 선택

인 이스티흐산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전승보다는 끼야스를 더 중시하였다. 그는 정통 하디

스를 법원으로 채택했지만 '꾸란'에 근거한 유추의 방법론에 더 의존했던 것이다. 하나피 법

학파는 끼야스를 가장 많이 적용하는 학파였다. 이것은 결국 개인적 견해, 즉 이성의 적용 폭

이 넓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만큼 자유스럽고 유동적인 사고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파는 "법은 불가변적인 것이 아니다. 환경과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자유롭고 융통성있게 합리성을 추구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스티흐산은 초기 무슬림

공동체의 지도자들(예언자의 동료들)과 그들의 직계 추종자들의 권위를 강조했던 것으로 알

려져 있다. 이스티흐산은 사회의 변화 요구에 대하여 이슬람법을 적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스티흐산은 보다 더 많은 유연성과 법학의 발전을 허용했으며, 법과 현실 사회 사

이의 간극을 연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문제는 법관들이 법률적 선택이라는 애매한 어휘를

사용하면서, 꾸란과 순나의 규정에 의거해야 하는 문제들을 판단하기 위해 투쟁하기 보다는

이스티흐산을 철저히 거부하였다. 한편 더욱 모호한 부분은 아부 하니파가 주관적인 개인적

견해라고 번역될 수 있는 라이 방법론을 지지했다는 점이다. 그는 전승이나 관행보다는 라이

를 더 존중하고 의존하면서 법적 판단을 하였다. 하지만 라이에 의한 결정들은 법학자의 개

인적 판단이나 간접적으로 '꾸란'이나 순나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아부 하니파는 자신의 법

적 결정을 도출하는 데 건전한 의견을 사용했는데, 이는 그의 제자들이 자신들의 이성적 판

단을 추가하는 것을 허용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때로는 제자들의 생각이 스승의 견해와 다

른 경우도 있었다.



아부 하니파의 죽음



아부 하니파는 767년 바그다드의 감옥에서 사망했다. 그의 무덤 위의 돔은 그가 죽은 수세기

후인 1066년에 세워졌다. 어떤 사람들은 압바스 조의 칼리파 알 만수르가 그를 바그다드로

불러 판사로 임명하였으나 그 가 이를 거부하여 투옥되었다고 믿고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가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은 온건 쉬아파 집단 자이드파의 반란을 지원했기 때문에 투옥되

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후손들 중 그의 아들 하마드와 손자 이스마일은 종교법에 매우 뛰

어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추종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압바스 조의 법원에서 명망있는

지위를 얻었다. 이는 하나피 법학파가 압바스 조 칼리파들을 이슬람법으로 묶기 보다는 그

들의 요구사항을 유연하게 들어주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대목이다. 그의 제자들 중 토지세

법의 초안을 작성했던 아부 유수프는 칼리파 하룬 알 라쉬드 통치하에서 최초의 대법관이되

었으며, 이는 하나피 법학파라는 집단이 공식적으로 지지를 얻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하

나피 법학파는 4대 순니 법학파들 중에서 가장 자유로운 법학파로 남아 있다. 현재 하나피

법학파는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아프가니스탄에서 터키)까지, 하 이집트(카이로와 삼각주

지방), 그리고 인도아대륙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김동환 한국외국어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