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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키 법학파의 창시자 말리키 빈 아나스 Abu Adbullah Malik b. Anas

작성자
kislam0
작성일
2018-02-01 08:33
조회
229

말리키 법학파의 창시자

말리키 빈 아나스 Abu Adbullah Malik b. Anas. 709-795

하디스의 대가

 

 

아부 압둘라 말리크 빈 아나스는 순니파 이슬람 4대 법학파들 중 하나인 말리키파의 창시자이다.

그는 위대한 이슬람 법학자 중 하나였으며,  아부 하니파와 함께 이슬람 법학을 개척한 법학자였

다. 그는 현존하는 이슬람법과 종교적 수행의식을 법전으로 편찬한 초기 인물들 중 하나였다. 말

리키 법학파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이슬람 문화의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는 바로 샤리아다.  이슬람의 성서 '꾸란'에 명시된 것과 같

이 하나님의 의지를 표현한 것과  예언자 무함마드의 지침으로 구성된  샤리아는 언제나 법률 이

상의 의미로 해석되었다.  신의 의지이자 지침인 법률은 무슬림 사회에 제공되는  청사진과 같이

무슬림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본이었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망으로  무슬림들의 새로운 삶은 4명의 정통 칼리파(아부 바크르, 오마르,

오스만, 알리)의 손에 남겨지게 되었다. 이후 4명의 정통 칼리파들이 사망하자 권력은 우미이야

조(661-750)의 손으로 넘어갔고, 이 기간 동안  이슬람법은 판사 제도를  통해 일정 정도 발전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권력은 법을 움직이는 칼리파의 손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우마이

야 조에서 압바스 조로 넘어가면서, 무슬림들이 사는 지역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지는 모든 무

슬림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이슬람법의 체계화가 이루어졌다. 이

시기 이전에는 한 지역의 이슬람법이 다른 지역의 이슬람법과 다른 경우 도 있었다.

 

따랏 관심사는 하나님의 의지가 실제로 무엇인지 어떻게 '꾸란'이 해석되어야 하는지, 얼마만큼

해석되어야 하는지  예언자 무함마드가 무엇을 말하고 행동했는지,  그리고 이런 출처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는지 등이었다.  왜냐하면 참고해야 할 다른 출처들 중에는 '꾸란'이나 무함마드의 순

나 중 어느 하나를  양자택일해야 할 확정적 결정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법의 출처는 학자

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분석 수단을 이용해서 면밀하게 조사되었다.  이러한 조사는 '꾸란'구

절에 대한 정확한 주석과 주의 깊은 분석으로 시작되었으며,  무함마드 빈 자리르 알 따바리(92

3년 사망)의 기념비적인 역작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꾸란'에 대한 해석이 몇가지 체계적인 학

설로 발전하면서,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을 집대성하는  작업에 대한 신뢰  문제는 또 다른 중

요한 사안으로 간주되었다.

 

말리크의 주요 관심사는 당시의 많은 율법학자들과 함께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무함마드

가 실제로 말하고 행했던 언행들을 수집하고 확정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 많은 학자들은 무

함마드의 언행을 수집하기 위해 그와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나 지인들을 찾아서 이

슬람 세계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면서 피할 수 없었던 문제

는 기억의 관점이 사람마다 다르고 잘못된 이야기가  어디에서부터 나왔는지를  알 수 없기 때

문에 이렇게 수집한 이이기들의 신뢰성을 측정할 것인가였다. 이슬람의 첫 번째 1세기가 끝날

즈음, 이슬람 세계의 주요 중심지는 하디스  전승자들의 모임이 존재하였다.  메디나에 거주했

던 말리크는  예언자 무함마드에 관한 이야기를 가까운 곳에서 접할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

었다.  왜냐하면 메디나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시대 동안 그의 주요 거처였으며, 최초의 이슬람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꾸란'이외의 다른 출처가 있을 수 없다는 그의  생각에 대한 다른 사람

들의 반대때문에 서술형식이 완성되기까지는 보다 긴 시간이 걸렸지만, 예언자 무함마드의 하

디스의 계승은 구전과 서술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비록 똑같은  형식의 구비 문학의 모음집에

도 적용되었지만, 이런 이야기나 기담이나 사건의 서술들을 모아 놓은 것을 하디스라 불렀다.

 

각각의 하디스는 두 가지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는 하디스의 실제 내용들어었고 두

번째는 원래의 출처로부터 파생되었던 하디스 전달자들의 계보였다. 전달자들은 바로 예언자

무함마드 자신이기도 하였고, 그렇지 않을 경우(무함마드와 같은 시기에 살았던) 동료들 혹은

(무함마드 사망 후 다음 세대) 후계자들이 되기도 하였다.

 

샤리아와 그 적용 방법은 많은 종교학자들과 법률가들에 의해 발전하였으며, 이들 중 아부 하

니파,  알 말리크 아흐마드 빈 한발  그리고 알 샤피이는 순니파 이슬람에서 특별히 높은 자리

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의 주요 일대기는 이븐 칼리칸(1282년  사망)에 의해  집필되었으며

그는 이들에 관해 흥미로운  기담뿐만 아니라 사실적인 내용들도 기록했다.  말리크의 외모는

키는 크고 말쑥하며, 앞이마는 벗겨졌고, 콧수염과 머리는 잿빛이었고, 혈색이 좋아 보였다.

 

말리크 빈 아나스는 성스러운 도시  메디나에서 태어나고 살았으며 죽었다. 그의 유년기에 대

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참고 서적에 따라 그의 출생은 서기 709년에서 716년까지 다양

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사망은 795년으로 일치하고 있다.  그의 유년 시절에 대한 많은 이야기

들이 있지만,  대부분은 그가 3년 동안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다는  이야기와 같이 주로 전설적

인 내용들이 많다.  어떤 자료는 말리크가 아주 잘 생겼다고 말하고, 다른 자료는 그가 가수가

되고 싶어 했으나 너무 못생겨서 직업을 바꾸라는 충고를 들었다고 전하고 있기도 하다.

 

말리크에게는 다수의 스승들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수는 9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많은

자료들은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록을 수집하는 학자들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는 메디나에서 수학할 때 하나피 법학파의 창시자인 아부 하나피를 알게 되었

으며, 영향력 있는 샤피이 법학파의 창시자인 샤피이의 스승이기도 하였다. 그는 관직을 맡지

않았는데, 이는 그 당시에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압바스 조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는 메디나

를 방문해서 예언자 무함마드의 무덤에 경의를 표했으며,  말리크를 만나 자신의 숙소를 방문

해서 두 아들에게 가르침을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말라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

다.

 

"칼리파시여! 학문에는 위엄이 있어야 하며, 학문은 사람들에게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칼리파는 자신의 요청을 거부한 말리크를 감옥에 가두는 대신  그에게 사과를 하도록 요구했

고, 두 아들을 말리크의 교실로 보냈으며,  두 아들은 평민들과 함께  앉아서 가르침을 받았다

고 전해지고 있다.

 

 

최초의 하디스집 '키탑 알 무왓따'

 

말리크는 예언자의 전통을 헌신적으로 지켰으며, 정화의례를 마친 상태에서만 예언자의 전통

을 전파하였다. 그는 '키탑 알 무왓따'라는 저서를 내놓으면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많은 저서

들을 집필하였다고 전해지지만, 그 진위 여부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이있다.'키탑 알 무왓따'

는 이슬람법의 첫 번째 개요서라는 점에서  그 자체가 매우 놀랄만한 작품이었다 . 이 책은 약

200여 개의 하디스를 담고 있었다.  '키탑 알 무왓따'를 저술한 그의 주요 의도는 그가 살던 시

대의 메디나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법률적 종교적 관습들을 법전화 하는 것이었다. 그는 현

지 사람들의 의견 일치(이즈마아)와 같이 하디스가 어떻게 실제로 사람들에 의해 공통적으로

실천되었는가를 기본 전제로 삼았다.  그는 때로는 '꾸란'과  예언자의 순나를 참고하였다. 그

는 '꾸란'의 예외적인 사항에 대해  선택을 해야 할 경우에는  예언자의 순나보다 현지 덕망가

들의 의견 일치에 더 주안점을 두었다. 한편 그는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어떤 특정 이슈에 대해

서는 독자적 판단을 내릴 정도로 자유로운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말리크의 저서는  예배시간, 세정, '꾸란', 장례, 자카트(희사), 단식, 하지(성지순례). 상속, 결

혼, 이혼, 보상금 등 주제별로 편집되었다.  그의 저서는 후학들의 다른 저서들보다 덜 정확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서가 중요한 것은 모든 무슬림들이 따르고 개선해야 할 모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말리크와 그의 모든 저서들은 무슬림들 사이에서 많은 신뢰를 받았다. 예를 들어, 샤피이는 말

리크의 저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꾸란' 다음으로 말리크의 저서만큼 건전한 책은 지구상에 없다."

 

그의 이름은 위대한 정통 하디스 모음집인 '알 부카리'와 '알 무슬림'에서 자주 인용되었다. 말

리키 법학파는 스페인의 이슬람 제국을 포함해서 주로 서구 무슬림들 사이에서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높은 권위를 얻었으며, 이집트에서도 많은 추종자들을 확보하였다. 말리크는 인생

의 말년으로 접어들면서 더욱 더 영적인 명상에 빠져들었으며, 서기 795년 85세의 나이로 사망

하였다.

 

 

 

김동환. 한국외국어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