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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법학 체계와 이론의 완성자 앗 샤피이(Muhammad b. Idris as-Shafi)

작성자
kislam0
작성일
2018-04-23 08:28
조회
272

이슬람 법학 체계와 이론의 완성자

앗 샤피이(Muhammad b. Idris as-Shafi. 768-820)





위대한 무슬림 법학자



무함마드 빈 이드리스 앗 샤피이는 이슬람 4대 법학파 중 하나인 샤피이 학파를 연 학자다.

그는 이슬람 법학을 체계화시킨 법학자로 교수였으며, 시인이자 수필가였다. 진정 그는 위

대한 무슬림 법학자다. 이슬람법을 보다 공고히 체계화시키고 과학적 기초 위에 법학을 올

려놓는데 공헌하였다. 특히 이슬람 4대 법원 중의 하나인 예언자 무함마드의 하디스를 엄

격히 선별해 법학 체계에 적용함으로써 전통적 순나의 개념을 예언자 순나의 개념으로 대

체시켜 놓았다.





생애



앗 샤피이는 768년(이슬람력 150) 팔레스타인 가자에서 태어났다. 그는 예언자 무함마드와

같은 꾸라이쉬 혈통으로 제7대 선조 압두 알 마나프의 후손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

를 여의웠고 가난하게 자랐다. 미망인이 된 그의 어머니는 그를 선조들의 고향 메카로 데려

갔고, 그는 모스크에서 첫 교육을 받았다. 그는 메카에서 '꾸란'을 배웠다. 그는 베드윈 족

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고, 이 시기에 고대 아랍시의 기초를 익혔다. 처음에 그는 아랍

언어학과 문학공부에 주로 흥미를 가졌지만, 그의 총명함을 아끼는 사람들로부터 꾸란 하

디스, 이슬람법학 원리 공부에 집중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이후 그는 무슬림 아부 칼리드

알 진지와 수피얀빈 우야이나로부터 하디스와 이슬람 법학에 대해 배웠다.



앗 샤피이는 9살에 꾸란을 완전히 암송하면서 탁월한 암기력을 소유한 천재성을 보였다. 그

의 인생의 전환점은 법학자 말리크의 저서 '알 무앗따'를 읽으면서 찾아왔다. 이책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전통들뿐만 아니라 초기 메디나 법학자들의 결정들을 담고 있었다. 그는 저서

전부를 암기했고, 이에 만족하지 않고 메디나로 가서 이맘 말리크의 가름침을 받기로 결심

한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그는 이를 위해 메카 주지사에게 메디나 주지사와 이맘 말리크에

게 보낸 추천서를 부탁했다. 추천서에 수록된 내용을 보고 놀란 이맘 말리크는 앗 샤피이와

만났고, 그는 알 말리크의 제자가 되었다. 배움에 대한 앗 샤피이의 열정으로 한 젊은 학자

는 당대의 유능한 스승으로부터 배움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또한 그는 이를 계기로 무슬림

세계의 여러 지역으로부터 온 존경받는 수 많은 학자들과도 만나게 되었다. 이맘 말리크는

앗 샤피이를 그의 조교로 임명하였고, 그가 수업시간 말미에 학생들에게 '알 무왓타를 암송

하도록 했다.



796년 이맘 말리크 사망 후 앗 샤피이는 잠시 예멘에서 공직에 몸담기도 했지만, 반란에 연

루되어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다행이 그의 학식을 높이 평가한 칼리프 하룬 라쉬드는 그

를 석방하였으며, 이후 그는 바그다드로 이동하였다. 앗 샤피이는 메디나에서 이맘 말리크

의 문하생이 되어 말리크 법학을 수학하였으며, 이후 바그다드에서 하나피 법학까지 통달

하기에 이르렀다. 이맘 아부 말리크의 가르침에 깊은 영향을 받은 앗 샤피이는 이들의 이슬

람법체계 윈리들을 정리하였고, 이를 독자적인 법이론으로 발전시켰으며, 샤피이 법학파로

계승발전시켰다. 그는 고전적 이슬람법 이론의 쳬계를 통합 정리하여 과학화하였으며 이슬

람 법학인 피끄의 기초를 다졌다. 피끄는 고유하고 순수한 이슬람 법학이었으며, 어떤 다른

사상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804년 앗 샤피이는 하란을 거쳐 시리아와 이집트로 갔다. 그는 이맘 말리크의 제자로 이집

트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는 카이로에서 6년간 이슬람 법학을 가르치며 지냈고

810년에 바그다드에 도착해 교수로 자리를 잡았다. 이라크의 수많은 학식 있는 학자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815년에 다시 이집트로 돌아와서 정착하였다. 그가 이라크와 이

집트에서 보낸 시기는 광법위하게 활동한 시기였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강의와 집필로

보냈다. 그는 일상생활을 매우 체계적이고 질서 있게 보냈으며, 좀처럼 일과가 바뀌지 않

았다.



앗샤피이는 전통 보수주의와 독자적 합리주의 연구에서 중재자가 될 수 있는 절충주의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합리적 가능성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전통주의적 입장에서 법원

과 법학을 탐구했다. 그의 저서는 대화체 기법을 사용하였다 . 그는 저서 '논저'에서 이슬

람법 체계의 법원들을 설명하였고, 하나피 법학파와 말리키 법학파 간의 중용을 채택하

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저술과 강의들의 모음집인 '모(母의 서'는 그가 지적 소유의 대가

임을 입증하여 주었다. 앗 샤피이는 법학의 과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 새로운 이슬람

적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나 논증에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앗 샤피이가 개발한

독특한 것이었다.





법의근원



피끄는 모든 인간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정하였고, 이슬람의 근원에 바탕을 두고 올바

른 길로 나아가도록 방향을 정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따라서 피끄는 법보다 상위에 있었

으며, 인생의 길이었다. 그것은 예배, 단식, 구빈, 성지순례 같은 종교적 의무들에 대한 규

정이었다. 또한 형법과 민법을 세부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행위는 둘

사이의 몇 단계 등급에 따라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으로 나뉘었다. 피끄에 바탕을 둔 이슬

람적 근원은 물론 '꾸란'이 최우선이었다. '꾸란'은 포괄적이었으며, 이에 따라 모든 다른

법률들은 일정부분 계시에 근거를 두었다. 그러나 '꾸란'은 많은 규칙과 규정들의 항목들

을 명시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그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예언자 무함마드의 순나였다.



앗 샤피이에게 예언자는 필연적으로 '꾸란'의 '만들어진 육신'이었으며, 그의 관행(순나)

은 계시로 규정된 올바른 행위의 모델 역할을 수행하는 근거였다. 이런 점에서 앗 샤피이

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순나에 무함마드는 물론 그의 동료들과 계승자들에게도 똑같은 권

위를 부여했던 말리크 법학파와 견해를 달리했다. 앗 샤피이는 하디스를 예언자 무함마

드의 순나로 한정했고, 무함마드의 위치를 실질적으로 '꾸란'과 동등한 위치로 올려놓았

다. 그리고 이로부터 예언자의 무결점 개념을 발전시켰다. 순나의 중요성은 '꾸란'에서의

핵심을 설명하고 예증하는 것이었지만, 순나는 '꾸란' 구절들을 반대하거나 폐기할 수 없

었다. 앗 샤피이는 예언자 순나를 완전하게 인정하였다.



세 번째 법원은 합의 또는 일치였다. 이 법원은 앗 샤피이 이전에 광법위하게 사용되었

으나, 문제는 '누구에 의한 합의'인가였다. 앗 샤피이는 한 지역과 다른 지역 간에 차이

가 있다고 인정된 법률들에 대해 전반적으로 이슬람적 지식을 가진 재판관들이 인정하

는 이슬람 공동체의 정의로 해석을 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꾸란'이나 하디스에서 인용

되지 않은 이슬람 이전의 관행들을 종종 승인했던 관례들을 찾게 되었다. 결국 이즈미야

의 장점은 원칙적으로 법률이 융통성 있게 적용되도록 하고 변화를 유지해 갈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법의 근원 또는 뿌리는 유추의 사용이었다. 끼야스는 '꾸란'이나 순나에 언급된

경우와 상황을 유추해보는 것으로 어떤 한 개인의 의견을 포함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

었다. 특히 개인적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꾸란'과 하디스를 잘 알고 있는 학식있는

무슬림 학자들이었다. 이런 방법은 앗 샤피이 이전, 특히 하나피 법학파에서 공통적으

로 사용되었던 반면, 보수주의적인 한발리 법학파는 '꾸란'에서 찾을 수 없었고, 지지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비이슬람적 혁신으로 간주하였다. 한발리의 입장에 대해 앗 샤피이

는 그렇게 열광적이지 않았지만, 만약 '꾸란', 순나 또는 이즈마아에 의해 성립될 수 없

는 교훈이라면 마지막 수단으로서 그 필요성만을 인정했다. 따라서 이성의 사용, 또는

이즈티하드는 사실상 블필요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법학자들은 그들의 의사 결정을 위

해 과거의 판결들에서 그 법적 근원을 찾게 되었다. 피끄 과학의 성립으로 앗 샤피이는

포괄적이고 일관된 법률 체제를 제공하는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샤피이 법학파는 하나

피파, 말리키파와 더불어, 그리고 뒤를이어 출현하는 한발리파와 함께 순니 4대 법학파

의 하나가 되었다.





샤피이 법학파의 확산



앗 샤피이의 주요 행동 중심지는 바그다드와 카이로였다. 무엇보다 그는 '꾸란'을 최우

시 하였고, 다음으로 순나를 추구했다. 그는 전통주의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인물로

서 바그다드 사람들은 그를 '예언자 전통의 대변자'라 불렀다. 이맘 샤피의 가르침은

바그다드와 카이로에서 이라크와 이집트 전지역 그리고 사우디의 희자즈 지역까지 퍼

져나갔다. 가장 유명한 그의 제자로는 알 무자니, 알 부와이티, 알 라빕 술라이만, 이븐

한발 그리고 알 카라비시 등이 있다.



앗 샤피이는 풍부한 여행 경험과 폭넓은 경험을 가진 학자였다. 그는 메디나의 전통주

의자들의 학식과 이라크의 합리주의자들의 시각을 결합하여 이슬람 세계에서 다양한

삶의 경험을 했다 . 앗 샤피이는 깊이 있는 학식에 앞서 이슬람 역사의 전형적인 영웅

들이 지녔던 자질, 즉 헌신과 진실, 그리고 관대함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왕족으로

부터 받은 선물일지라도 하인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성지에 들어서기 전에 메카에 자

선을 베풀었다. 그는 겸손과 융통성을 진니 인물이었으며 그의 이러한 성품은 그의 저

서들이 이슬람 세계의 모든 시대, 모든 세대, 모든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다는 점으로

입증될 수 있다.



샤피이 법학파는 인도네시아, 말레시아, 이집트, 소말리아, 에멘, 인도 남부 지역 등

이슬람 세계의 광법위한 지역에 널리 확산되었고, 이슬람 법학 체계 발전에 큰 족적

을 남겼다.



앗 샤피이는 820년 (이슬람력 204) 사망할 때까지 이집트에서 여생을 보냈다. 아므르

빈 알 아스 사원에는 매일 동틀 무렵부터 오후까지 앗 샤피이의 강의를 듣기 위해 수

백명의 남녀 무슬림들이 운집했다. 앗 샤피이는 매일 '꾸란' 예언자의 전승들(하디스),

이슬람법(법학), 그리고 언어와 문학을 강의했다. 그는 카이로에서 사망할 때까지 후

진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100여권이 넘는 저서들을 남겼다. 그의 대표적 저서들로는

'논저', '모(母)의 서(書)', '법학에 관한 상술서' 가 있다.







이효분 국방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