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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제국 영토를 극대화시킨 칼리파 왈리드 1세

작성자
kislam0
작성일
2016-07-11 09:58
조회
498

이슬람제국 영토를 극대화시킨 칼리파
왈리드 1세 (Al-Walid. Abd al-Malik, 668-715)



우마이야조 제 2의 창건자


우미이야조 제6대 칼리파 왈리드 1세는 칼리파 무아위야집권 기간 중인 668년에 출생한 것으로(일설에 의하면 674년) 추정된다. 그의 어머니는 북부 아랍 부족인 카이스족 출신으로 왈리다 빈트 빈 디아즈였다. 그의 할아버지인 우마이야 조 제4대 칼리파 마르완(재위 684-685)은 그의 아버지인 압둘 말리크 (재위 685-705) 뒤를 이어 삼촌 압둘 아지즈가 칼리파 직을 계승하도록 정해 놓았다. 그러나 아버지 칼리파 압둘 말리크는 그의 형제 압둘 아지즈 대신에 자신의 아들 왈리드가 계승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압둘 아지즈는 그런 형의 의사를 거부하였고, 이로 인해 우마이야 가문에 정치적 긴장이 생겨났다. 그런데 별안간 압둘 아지즈가 압둘 말리크보다 먼저 사망하게 되었고, 왈리드는 704년 어떤 반대도 없이 자연스럽게 아버지 칼리파 압둘 말리크를 계승할 인물로 결정되었다. 압둘 말리크는 제2대 칼리파 야지드 빈 무아위야 이후 발생한 내란으로 흔들리던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 제국을 안정시켰다. 그는 난을 일으킨 이븐 앗 주바이르 같은 우마이야 칼리파제에 대한 도전자와 이븐 알 아쉬아슈 같은 반란자들을 말끔히 소탕함으로써 우마이야 조의 전성기를 맞이하기 위한 기초 단계를 다졌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를 우마이야 조 제2의 창건자로 부른다. 그리고 705년 왈리드가 칼리파가 되자 우마이야 제국은 외부적으로는 동서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고 내부적으로는 부를 축적하면서 평화로운 전성기를 맞게 된다.



행정 개혁과 대규모 건축사업



칼리파 압둘 말리크는 반역의 기운이 강한 이라크의 군영 도시에 정착해 있는 무슬림군을 무장해제 시켰다. 이후 모든 동방원정에는 이라크군 대신에 시리아군이 동원되었다. 시리아군은 알 와시트에 새로 건설된 군영도시를 거점으로 이라크의 치안을 담당했다. 쿠 파와 바스라의 무슬림들은 자신들이 건설한 제국에서 무기력한 백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692년부터 715년까지 이라크 총독을 지낸 핫자즈는 이라크 아랍 부족민을 달래기는커녕 그들을 추방하겠다고 위협했다. 우마이야조에 대한 반란의 진원지인 이라크는 압둘 말리크 시대부터 가혹한 정책의 대상이었는데, 이는 왈리드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이런 가혹한 정책이 40년간 계속되면서 우마이야 제국의 안정이 유지될 수 있었다.



압둘 말리크에 의해서 시작된 행정개혁은 왈리드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그리스어나 페르시아어로 된 납세자 명부는 아랍어로 번역되었고, 이에 따라서 세제가 정비되었다. 각종 공문서와 보고서도 아랍어로 작성되었다. 제국의 재정을 든든히 하기 위하여 여러 지역의 재정이 계속 재정비 되었다. 제국의 번영으로 쌓이는 부를 이용하여 왈리드는 대규모 건축을 진행하였다. 메디나, 다마스쿠스, 예루살렘에는 대규모의 사원이 건축되었다. 그는 많은 길을 만들었으며, 특히 성지가 있는 히자즈 지방에 이르는 길을 만들고 잘 정비하였다. 그리고 길 주위에는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우물을 팠다. 그는 고아나 신체장애자와 같은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돈을 사용했으며,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사람들에게 봉급을 지불하였다. 또한 사회적 약자를을 위한 병원과 숙소를 짓기도 했다.





이슬람 제국 영토를 극대회시킨 칼리파



왈리드의 많은 업적 가운데에서도 가장 위대한 일은 정복 사업을 통하여 이슬람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넓힌 것이다. 칼리파 오마르 때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던 정복 사업은 제국의 내란 때문에 늦어지거나 멈추곤 하였다. 그런데 왈리드 때에 축적된 제국의 힘이 발산되면서 폭발적으로 정복이 진행되었다. 그의 치세 10년 동안 광대한 지역이 이슬람 제국에 병합되고 이슬람 문명과 그 영향력이 최고조로 올라갔다. 그러나 이슬람 전파의 보급이 우선이었던 오마르 때와는 달리 왈리드 시대의 새로운 정복은 실질적으로 물질과 부를 획득할 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래서 오마르 시대의 정복 사업은 이슬람의 팽창이라고 불려졌지만, 왈리드 시대의 정복 사업은 아랍의 영토 팽창이라고 불렸다.



이 정복 사업을 주도한 인물은 꾸타이바 빈 무슬림, 무함마드 빈 까심, 무사 빈 누사이르 세 장군이었다. 이들이 이루어낸 아랍의 무력 팽창은 이슬람의 확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때에 정복된 땅은 점차 이슬람화 되어 정치적 영토의 확장뿐만 아니라 종교적 영역의 확장도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슬람 칼리파 권위에 충성하는 새로운 무슬림 신민들이 증가했다. 결국 왈리드 때의 정복 사업은 물질과 부의 획득이 우선인 정복이었으나 그 결과는 오마르 때의 정복과 동일하게 이슬람 세계 확대와 무슬림 증가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아랍 정복자들은 정복 지역의 주민들을 이슬람화 하기 위하여 여러가지로 노력하였다. 금요 예배에 참석하는 피정복민들에게 금전적 보상을 하고 아랍어로만 읽고 암기해야 하는 '꾸란'을 페르시아어로 낭송하는 것까지 허용하기로 하였다.

왈리드 때에 이룩된 이슬람 제국은 그 이전에 생겨났던 어떤 제국보다 그 규모가 컸다. 이런 왈리드의 정복 사업은 다음과 같이 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1) 이라크 동북쪽 중앙아시아 지역


무슬림들은 칼리파 오스만 시대부터 이라크 동북쪽 중앙아시아 지역으로의 팽창을 원하였다. 여러 차례 이 지역에 대한 원정이 시도되었으나, 노련한 유목민 전사인 투르크족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 지역은 정치적으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았다. 이라크의 총독 핫자즈는 꾸타이바 빈 무슬림을 제국의 서쪽 지방인 후라산 지역의 지사로 임명하였다. 그곳에서 메르브, 발크, 바이칸드, 안와 등을 점령하면서 제국의 영토를 넓혔으며, 많은 전리품을 획득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부카라, 코와리즘, 사마르칸드를 점령할 수 있었으며, 사마르칸드는 점령 후에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중심 도시가 되었다. 그는 아무르 다리아 강을 건너서 동진을 하여 투카리스탄의 페르가나에 이른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욱 진군하여 북쪽의 또 다른 강인 시르 다르야 강의 카잔다에 도달하였다. 그곳에서 투르크인들의 강력한 저항을 물리치고, 동진하여 카우카트와 카쉬가르까지 점령하였다. 계속하여 동진하던 중 칼리파 왈리드의 서거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진격하여 중국의 당나라 국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꾸타바가 점령했던 지역 모두가 계속해서 우마이야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당시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던 투르크인들은 우수한 유목민 전사로서 비록 정치적으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이슬람 제국인 우마이야 제국이나 중국의 당나라가 호락호락하게 그들을 지배할 수는 없었다. 두 제국이 그들을 일시적으로 굴복시킬 수는 있었어도, 계속 지배하기에는 그들이 너무 강했다. 그럼에도 꾸타이바가 중앙아시아의 정복은 이 지역의 이슬람화의 출발점이 되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슬람의 땅인 다르 알 이슬람이 되었던 것이다. 이 위대한 꾸타이바의 정복은 705년에서 712년에 일어났다.


2) 이라크 동남쪽 신드 방면



인도인들이 인도에 거주하는 아립인들을 공격하자, 이라크 총독 핫자즈는 그의 사위이자 마크람의 통치자인 무함마드 빈 알 까심에게 인도를 정복하라고 지시했다. 명령을 받고나서 708년에 인도 쪽으로 동진을 시작하여 인더스강 입구의 데이블 항을 점령한 후에 이슬람 사원을 그곳에 세웠다. 그는 계속하여 인더스강까지 진격하여 나갔다. 그 당시 인더스강은 신드강이라 불렀으며, 무함마드는 이 강을 미흐란강으로 개명하였다. 신드강에 신드왕 다히르가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와서 무함마드의 군대와 전투를 벌렸으며, 다히르는 피살되고 무함마드는 승리하였다.


710년부터 712년 사이에 무함마드는 발루치스탄, 하이다라바드 등 주요 지역을 점령하였고, 북쪽으로 진격하여 남부 편잡의 물탄에 이르렀다. 물탄은 인도인들의 성지였으며, 많은 인도인들이 이곳으로 순례를 왔다. 무슬림들은 물탄 다신교도들의 사원을 점령하여 엄청난 금은보화를 획득할 수 있었다. 무함마드의 인도 침입과 점령은 인도에 이슬람 확산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무슬림의 인도 침입과 점령은 이슬람 제국과 인도와의 교류를 증가시켰으며, 인도의 철학, 수학 등이 이슬람 제국으로 들어와 학문의 발전에 기여하게 되었다.


3) 모로코와 스페인 방면


7세기가 거의 끝나가는 698년 카르타고가 무슬림군에 점령되면서 북부 아프리카에서 비잔틴 세력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708년 무사 빈 누사이르가 아프리카의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새로운 역사의 장이 시작되었다. 새 총독 무사는 호전적이고 미신과 토속 신앙을 고수하는 베르베르 원주민들을 무력으로 무릎 꿇게 하고 그들 스스로 이슬람을 받아들이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710년 북부 아프리카 전역을 점령하는 데에 성공하고, 북아프리카를 아랍-이슬람화 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한편 유럽을 마주보는 탕헤르에는 그의 베르베르족 부하 타리끄 빈 지야드가 지역 대장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총독 무사는 711년 타리끄에게 7천명의 베르베르족 전사와 함께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스페인 남부 안달라루시야 지방을 쳐들어갈것을 지시하였다. 이후 타리끄는 무사가 보낸 5천명의 지원병으로 라마단 달 중순 좌와디강에서 서고트 왕 로데릭 왕의 10만 대군과 접전하여 대승을 거둔다.


예상하지 못했던 타리끄의 대승 소식을 접한 무사는 부하의 성공을 못마땅해 하며, 진격 중지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나서 1만 8천명의 아랍-베르베르 혼성군을 거느리고 안달루스를 건너가 아쉬빌리아를 점령한다. 그 뒤, 톨레도까지 진격한 타리끄를 따라잡고 진격 중지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구금하였다. 타리끄는 자신의 억울함을 칼리파 왈리드에게 호소하였고, 칼리파는 총독 무사에게 그의 석방과 복직을 명하였다. 이후의 무슬림군의 스페인 정복은 전쟁이라기 보다는 승리의 행진과도 같았다.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온지 2년도 되지 않아 무사의 군대는 비스코이만에 도달하여 스페인 전역을 손에 넣게 되었다. 무사는 프랑스 남부로 원정을 계속하려고 하였으나, 무사의 영향력이 걷잡을 수 없이 커가는 것을 두려워한 칼리파는 그에게 수도 다마스쿠스로 출두하도록 소환 명령을 내렸다. 칼리파는 무사의 점령 지역이 총독으로서는 너무 커지면서, 그가 독립할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칼리파의 정치적 보복



승전의 장군으로서 다마스쿠스에 귀환한 무사에게는 커다란 보상 대신에 칼리파 왈리드 사망 후 새로 등극한 칼리파 술레이만의 정치적 보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모든 직위와 재산을 몰수당한 후에 구금되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칼리파 술레이만은 그가 칼리파가 되는 것을 방해했던 왈리드의 부하들을 탄압하여, 무사뿐만 아니라 무함마드 이븐 까심과 꾸타이마 빈 무슬림도 비슷하게 비참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게 했다. 이라크 총독 핫자즈만 그의 원대로 칼리파 왈리드보다 먼저 사망하여 칼리파 술레이만의 정치적 보복을 피할 수 있었다.


칼리파 왈리드는 위대한 군주이기는 했으나, 커다란 약점이 있었다. 웅변이나 연설에 능숙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그 당시에는 아랍어를 잘 못하는 비무슬림과 섞이는 도시를 피하여 사막에서 순수 아랍어를 하는 유목민과 생활하는 것이 권장되던 시절이다. 그의 아버지 압둘 말리크는 그런 것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들 왈리드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하였다.


"아랍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없는 사람은 아랍을 통치할 수 없다."


이 충고에 따라 왈리드는 아랍 문법학자를 궁궐로 초대하여 아랍어 공부에 매달렸으나, 천부적으로 말 재주가 부족하였는지 그 결과는 별로였다고 한다. 이라크의 총독 핫자즈는 왈리드의 아버지 압둘 말리크를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고, 압둘 말리크는 그를 소중히 여겼으며, 왈리드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지도하였다. 그러나 왈리드는 겉으로는 핫자즈를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행동하였으나, 속으로는 부담스러워 했다. 또 핫자즈를 총독 자리에 그대로 두기는 했으나, 그가 죽자 기뻐하였다고 한다. 왈리드는 715년 운명하였다.




송경근. 조선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