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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르네상스를 일으킨 칼리파 알 마아문 (Al-Mamun)

작성자
kislam0
작성일
2016-08-01 10:06
조회
412

이슬람 르네상스를 일으킨 칼리파
알 마아문 (Al-Mamun. 786-833)



바드다드의 르네상스 시대를 연 통치자


역사는 알 마아문을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도 또는 앞선 무슬림 통치자들이 성취한 것과 같은 어떤 군사적 정복으로도 기억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슬람 학문을 적극 후원하고 바그다드에 '지혜의 집'을 지어 바그다드 르네상스 시대를 맞게 하였으며, 그 후 무슬림 신학자, 철학자, 예술가, 과학자들이 성취한 이슬람 문명을 서구에 전하여 유럽에 르네상스가 있게 한 인류 문명사의 가장 위대한 통치자로 기억한다. 알 마아문은 제7대 압바스조 칼리파로서 압바스 제국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위대힌 지적 운동을 창시하여 그리스와 고대 시리아어로 된 서적들, 페르시아와 고대 인도의 과학서들을 아랍어로 번역하고 힉문 연구와 문화 창달에 힘씀으로써 찬란한 이슬람 문화를 이룩하게 한 칼리파다.





칼리파 승계를 위한 형제의 대결



제5대 칼리파 하룬 알 라쉬드 당시 압바스 조는 국력 면에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으며, 하룬 알 라시드의 통치기에 위대한 문화적 부흥을 시작하고 있었다. 하룬 알 라쉬드는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그의 호화럽고 유명한 궁전은 아라비안 나이트에 묘사되어 유명해졌다. 그러나 문학작품이 아니라 역사적인 면에서 동서 문예 부흥의 뿌리를 심은 더 위대한 사람은 그의 아들 알 마아문이었다. 하룬 알 라쉬드가 칼리파가 되던 해에 두 아들이 태어났다. 첫 아들은 아부 알 압바스 압달라 알 마아문(신뢰받는 사람이란 뜻의 이름)이고, 둘째 아들은 알 아민(믿음직한 사람이란 뜻의 이름)이었다. 알 마아문이 6개월 형이었지만, 하룬 알 라쉬드의 계승자로 지명된 것은 당시 5세였던 알 아민이었다. 그 이유는 알 아민이 제2대 압바스조 칼리파 알 만수르의 손녀이자 부인인 주바이다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알 마아문은 어머니가 마라질이라는 이름의 페르시아 여자 노예 출신이었기 때문에 순수한 혈통을 주장할 수 없었다.


그러나 두 형제가 성장함에 따라 하룬은 알 마아문이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알 아민보다 더 우수하다는 것을 깨닫고 알 아민을 후계자로 정한 것을 재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다이바가 계속해서 자신의 아들이 차기 칼리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하룬은 두 아들을 시험해 보자고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만약 칼리파가 되면 무엇일 할 것인지 물어보는 시험이었다. 충동적인 알 아민은 칼리파 위에 오르면 아버지에게 선물과 땅을 선사할 것이라고 답한 반면, 알 마아문은 칼리파 지위는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자리이며 아버지를 섬길 것이며 필요하다면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 후 799년 하룬은 알 마아문이 제1의 후계자가 되기를 바랐지만 그를 제2의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하룬은 두 가지 문서를 작성하였다. 알 아민이 서명한 하나의 문서는 만약 알 아민이 알 마아문의 칼리파 위 계승 권리에 도전하면 칼리파 지위를 몰수하겠다는 내용이고, 또 하나는 알 마아문이 알 아민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으로 알 마아문이 서명하였다. 두 서류에는 증인까지 서명하였고 하룬이 802년 메카 성지를 순례할 때 카아바 성전 내에 보관하였다. 그 즈음 알 마아문은 후라산을 관할하는 총독으로 임명되어 바그다드를 떠나게 되었고 알 아민은 계속 바그다드에 머물렀다.


809년 하룬이 사망한 후, 하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두 아들 간의 경쟁이 표면화되었다. 두 형제는 다른 가치관으로 충돌했다. 알 마아문은 지적이고 독실하고 야망이 있었던 반면, 알 아민은 경솔하면서 방종하고 술과 여자를 좋아하였다. 또한, 알 아민은 자신의 혈통 때문에 아랍의 순니 이슬람을 대표한 반면, 알 마아문은 페르시아 쉬아 이슬람을 대표하였다. 아랍-이슬람은 보수적이며 전통적이지만 페르시아-이슬람은 철학, 종교, 예술 분야의 풍부한 이슬람 문화와 함께 보다 개혁적고도 비정통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대결을 맞이하였다. 처음에는 알 마아문이 바그다드에서 새로운 칼리파에게 경의를 표했으나, 알 마아문은 자신의 강력한 근거지인 후라산에서 자신의 군대와 첩자들을 이미 훈련시키고 있었다. 810년, 알 아민은 금요 기도회에 자신의 어린 아들 무사를 자신 다음에 바로 호명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는 아들 무사가 후계자가 된다는 뜻이었으므로 알 마아문에게 모욕적인 일이었다. 알 마아문은 이는 부친의 유언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알 아민은 아버지의 유언을 카아바 신전에서 꺼내어 불태워버리라고 명령하였다. 그 후 알 아민은 4만명의 병사를 보내 알 마아문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그의 장수가 자만하여 경솔하게 군사를 지휘하여 오히려 주체적인 후라산 장수들이 지휘하는 바람에 알 마아문의 4천 병력에 패배하고 말았다. 812년, 알 마아문은 바그다드를 포위하였고, 다음 해 알 아민은 바그다드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혀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알 마아문은 그로부터 6년 동안 칼리파의 역활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그는 모든 사람 특히 아랍-무슬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제국 서부 지역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 그리고 동부 지역에서 알 마아문은 쉬아파 무슬림들과 제휴한다면 외교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정통 칼리파 시대의 제4대 칼리파이자 알리의 후손인 이맘 알리 빈 무사 알 리다가 칼리파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알 마아문은 더 나아가 검은 깃발과 제복을 초록색(검은색은 압바스 조를 상징)으로 교체하도록 명령하기까지 하였으며 이는 순니파 아랍 무슬림들을 더욱 격분하게 했다. 그 후, 알 리다는 알 마아문보다 일찍 817년에 사망하였다. 알 마아문은 마침내 819년 바그다드로 입성하여 공식적으로 칼리파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통치기간 내내 반란을 진압해야만 했었다.



문예부흥 사업



알 마아문은 선친인 하룬 알 라시드가 시작한 문예부흥 사업을 계속 추진하였다. 바그다드는 지식의 중심지였을 뿐만아니라, 유프라테스강과 가깝고 페르시아만과 멀지 않기 때문에, 중요한 무역 산업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이슬람 사상에 대한 공헌이다. 알 마아문은 특별히 공들여 추진한 중요한 사업이 외국 서적 번역이었다. 이 사업으로 이슬람 세계는 새로운 지식에 눈을 뜨게 되었다. 특히 그리스화의 추진으로 그리스어와 사상들을 도입한 것은 의미가 있다. 시리아 번역가 알 할라즈 빈 마타르는 천문학과 지리학 이론들을 밝려주는 알렉산드리아 과학자 프롤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천문학 집대성)'의 아랍어판을 만들었다. 알 할라즈는 또한 기하학의 기초를 제공해 준 유클리드의 '원론'을 번역하기도 했다.

또 눈에 띄는 번역가로는 의사인 유한나 빈 마사와이흐(서구에는 메수로 불림)가 있는데 그는 의학 서적과 철학 서적들을 번역하였다. 또한 알 마아문은 바그다드에 바이툴 히크마(지혜의 집)라는 아카데미를 설립하였는데, 이곳에는 천문대와 대규모 도서관도 있었다.



무으타질라파에 대한 후원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알 마아문은 쉬아 이맘 알 리다 사망 이후 무으타질라파(이슬람의 이성주의 신학파)의 교리 쪽으로 기울었다. 무으타질라파는 자신들의 일반적인 이름보다 '공정과 유일성의 사람들'이라고 불리길 좋아했다. 이는 그들이 신의 유일성과 계시물에 대한 이성의 중요성에 관심이 있었음을 뜻한다. 무으타질라파는 그리스 철학을 이슬람 신학과 융합하여 독자적이고 정교한 신학 체계를 완성했기 때문에 이슬람 신학사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무으타질라파의 주된 관심 사항은 다음과 같이 간략히 요약할 수 있다.


1) 신과 그 속성: '꾸란'은 신의 본성과 속성을 나타내는 많은 구절들을 포함하고 있다. 즉, '신은 양 손(3:73, 26:71), 두 눈(11:37), 얼굴(2:115)을 지니고 있다' 등이다. 또한 꾸란은 신이 말하고 듣고 본다고 표현한다. 무으타질라파는 이러한 표현은 은유적인 것으로 봐야 한다고 믿었다. 예를 들면, 신의 '양 손'은 실제로 신의 '은총'에 대한 언급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으타질라파는 그것이 신의 유일성이라는 개념에 도전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신은 '하나'로서 '속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이슬람이 삼위일체 교리를 가진 기독교와 운명을 같이 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무으타질라파에게 삼위일체는 다신교적인 것이며 심의 의인화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2) 꾸란 창조 : 꾸란 은 특정 시점 (예를 들면, 무함마드가 실제로 계시를 받은 시점)에 창조되었는가 아니면 영원히 존재해왔다는 것인가? 무으타질라파는 꾸란이 영원히 존재해왔다는 견해를 거부하였는데, 꾸란이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신의 유일성에 도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오로지 신만이 영원하며 어떤 것도 신과 함께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기독교적 함축성에 관심이 있었다.


3) 자유의지와 책임 : 무으타질라파는 인간이 처벌되거나 보상받으려면 자신들의 행위에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신이 악을 벌해야 하는 당위성으로 얽매어 있으므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도가 달리 없다고 주장하였다. 신의 행동은 신이 행동을 의도했기 때문에 오로지 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이 단지 정의롭고 선한 것들만을 의도했다. 이성은 그 자체로 보편적이고 자연적인 선과 악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게 해준다고 주장하였다.


827년 알 마아문은 무으타질라파의 교리, 특히 '꾸란' 창조 개념을 국가 종교로 선언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모든 재판관들은 이 교리에 서명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직책을 박탈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사실, 알 마아문은 일종의 미흐나(종교 재판)을 시작하였는데 이는 이슬람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바로 이 기간 중에 순니 이슬람 4대 법학파중의 하나인 한발리파의 창시자 이븐 한발이 미흐나 법정에 소환되었는데, '꾸란'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2년간 감옥에 가뒀지만 헛된 일이었다. 무으타질라파의 교리는 제10대 칼리파 알 무으타씸 시대(833-842)까지 계속되다가 그 후에는 폐지되어 쇠퇴하였다. 어쨋든 알 마아문은 이성주의를 옹호하는 위대한 칼리파였다. 아버지는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았지만, 알 마아문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문명화되었던 비잔틴, 페르시아, 인도의 과학과 철학을 이슬람 세계에 도입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발전시켰다. 이는 무슬림들의 힘과 위상을 크게 드높였으며, 그의 통치 기간에 바그다드는 세계의 지적 중심이 되었다. 무으타질라파의 교의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실은 이슬람을 이전의 전통적이고 모방적인 모습에서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모습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곽순례, 한국외국어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