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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위대한 통치자 메흐메디 2세

작성자
kislam0
작성일
2016-10-18 08:46
조회
637

오스만 제국의 위대한 통치자 메흐메디 2세 (Mehmed 2 Harih, 1432-1481)

메흐메디의 직위

술탄 무라드 2세(1차 재위 1421-1444, 2차 재위 1446-1451)가 사망하자 마니사 지역에서 주지사 직책을 수행하며 행정과 군사 경험을 쌓던 메흐매디가 1451년 2월 18일 왕위를 계승(재위 1451-1481)했다. 메흐매디는 30년 전 자신의 아버지 무라드가 왕위에 오를 때에 비해서 더 안정된 기반 위에서 출발했다. 술탄 위를 게승한 직후 메흐매디 2세는 자신의 형제인 아흐메트가 장차 왕권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염려 때문에 아흐메트를 처형하도록 했다.

주변국과의 평화협정

메흐매드 2세는 선왕들이 이루지 못한 콘스탄티노풀 점령을 우선적으로 실현하여 대제국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비잔틴이 유지되고 있는 한, 유럽 국가들은 비잔틴을 지원하기 위해서 연합하여 오스만 제국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메흐매드는 콘스탄티노풀 점령을 시도하기 전에 주변국과의 갈등이나 문제를 해결하는데 우선순위를 두었다.

메흐매드는 발칸에 위치한 세르비아와 왈라치아 간의 평화협정을 각각 연장하여 유럽 지역에서 필요 이상으로 군사력을 소모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다. 동부 아나톨리아에서 카라만 공국과의 관계는 예민한 상황이었는데, 카라만은 중부와 동부 아나톨리아의 넓은 지역에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메흐매드는 왕위 계승 직후 카라만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군대를 파견했는데, 오스만 군대가 아크세히르에 접근 했을 때 카라만 공국의 지배자 이브라힘이 사절을 보내서 오스만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겠다고 제의를 했으며, 양국의 유대관게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에서 자신의 딸을 메흐매드에게 시집을 보냈다. 메흐매드는 데브쉬르메 출신이 주축을 이룬 군대를 왕궁 근위대로 활용함으로써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투르크계 관료 세력의 도전을 차단하는데 주력했다. 데브쉬르메 제도는 오스만의 점령지인 발칸 반도의 기독교계 소년들을 징집하여 엄격한 훈련과 터키화 교육을 통해서 술탄의 전위부대에 배속하는 방식이다.

콘스탄티노풀 공격을 위한 준비

오스만 국가가 제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발칸 지역에서 영토를 확장해야 했으므로 콘스탄티노풀 성곽에서 명맥을 유지한 채 군소 국가로 전략한 비잔틴 점령이 필수였다. 비잔틴 제국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며 동방무역의 중개를 통해서 연명해가는 소국가로 전락한 상태였다. 기독교 세력인 유럽은 기독교권의 최전방에 위치한 비잔틴을 지원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술탄 메흐메드는 비잔틴을 공격하기 전에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선, 보스포러스 해협의 아시아 쪽 연안에 술탄 배야지트 통치기(1389-1402)에 건축한 아나톨리아 성채에서 1km정도의 맞은편에 루멜리 성을 축조하도록 지시했다. 보스포로스 해협 양안에 축조된 성곽을 이용하여 보스포로스 통행권을 장악하고 흑해나 지중해를 통과하는 선박이나 함선을 통체하는 동시에 비잔틴의 대외 출구를 차단하여 군사 및 경제 활동에 압박을 가할 수 있었다. 또한 보스포로스 해협의 방어와 콘스탄티노풀 포위에 필요한 함선 400척을 건조시켰다. 유럽 국가들 비잔틴을 지원할 군대를 파병할 가능성을 고려하여 발칸 지역에 오스만 국가의 수비군을 대비시켜 두었다. 대포 제제술에 능한 무슬리히딘과 사루자 세크반 및 비잔틴에서 망명한 으르반의 협력으로 공격용 대포를 만들어 배치했다. 루멜리 성채에서 발사할 수 있는 박격포와 콘스틴티노풀 포위에 사용할 이동용 발사대 등을 만들었다.

술탄 메흐메디는 왕위에 오른 지 2년 내에 비잔틴 공격을 위한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20만 명으로 구성된 군대와 400척의 함선과 각종 대포로 무장을 마친 술탄 메흐메디는 1453년 4월 초에 콘스탄티노풀을 공격할 적당한 순간을 기다렸다. 술탄 메흐메디가 콘스탄티노풀을 공격하는 계획에 반대 세력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재상인 찬다르르 할릴을 비롯한 일부 투르트계 관료들은 콘스탄티노풀 공격이 유럽 국가들의 십자군 원정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그러나 술탄 메흐메드는 이교도들을 공략해야 한다는 가지, 즉 전사의 전통에 따라서 오스만 국가의 안위에 위협이 되는 비잔틴을 정복해야 하는 당위성을 강조하여 전투 준비를 추진했던 것이다.

콘스탄티노풀의 점령을 위한 전투

실질적인 콘스탄티노풀 공격은 1453년 2월에 시작되었다. 콘스탄티노풀 공격은 동서 양쪽 방향에서 전개되는 방식으로 계획되었다. 당시 오스만 국가의 수도였던 에데르네에서 출발한 오스만 군대는 비잔틴 성벽의 서쪽을 주로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비잔틴의 성벽을 막강한 화력을 가진 대포들을 성벽 인근 거리에 배치했다. 아시아 지역인 아나톨리아에서 징집된 병사들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통과해 유럽 지역 연안에 축조된 루멜리 성채에 집결해 마르마라 해 연안에 있는 항구들을 점령하고 바다에서 비잔틴의 동쪽 성벽을 주로 공략하는 정략을 세웠다. 오스만 국가의 공격적 태세와는 달리 비잔틴 군대는 약화되어 있었고, 비잔틴의 성벽을 방어할 충분한 병력을 갖추지 못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잔틴도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방어 태세를 갖추었으며 비잔틴 성벽의 동북쪽으로 들어오는 골든혼 양안을 쇠밧줄로 연결하여 오스만 함선의 진입을 차단하였다.

술탄 메흐메디는 공격 준비를 마치고 나서 비잔틴 황제에게 마흐므트 파샤를 사신으로 보내 유혈 충돌을 피하고 항복하도록 제의했다. 비잔틴 황제 콘스탄틴이 제의를 거절함으로써 오스만 군대는 1453년 4월 6일 비잔틴 성벽에 대포를 발사하여 콘스탄티노풀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비잔틴 군대와 이들을 지원하는 제노바 군대가 협력하여 도시를 초기에 적절히 방어했다. 콘스탄틴 황제도 최선을 다하며 군대와 국민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성벽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콘스탄티노풀을 포위한지 10일 째 되는 날 보급품을 실은 5척의 제노바 함선이 콘스탄티노풀 성벽 동북쪽으로 통하는 골든혼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술탄 메흐메디는 골든혼 양안에 연결된 쇠밧줄 때문에 오스만 함선의 골든혼 진입이 차단당하자 기상천외한 방법을 고안했다. 그것은 골든혼 양안의 쇠밧줄과 대포 공격을 우회하여 야음을 타서 오스만 함선을 육지로 운반하여 골든혼 내해에 띄우는 전략이었다. 함선 밑에 기름을 입힌 둥근 통나무를 깔아서 그 위로 배를 끌어 야간에 육지를 통해 골든혼 내해로 이동시킬 수 있어서 육지를 통한 선박 이동 작전의 성공으로 비잔틴은 사기가 크게 떨어졌고 상대적으로 오스만 군대의 공격력은 상승했다. 술탄 메흐메드는 1453년 5월 28일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53일간 지속된 오스만 군대의 포위 작전과 육지와 해상에서 이루어진 비잔틴 성곽에 대한 포격으로 마침내 비잔틴 성벽이 허물어지게 됐으며 이를 통해 오스만 병사들이 콘스탄티노풀 시내로 대대적으로 진입했다. 이 때 비잔틴 황제도 성벽을 방어하다가 전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슬람의 관행에 따라 오스만 병사들은 3일 동안 약탈하고 저항하는 자들을 살해했다. 술탄 메흐메디는 저항하는 비잔틴 병사들을 살해하는 것을 허용했지만 장차 오스만 제국의 중심지가 될 도시가 손상되지 않도록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잔틴의 일부 거주민이나 사병들은 골든혼 맞은편에 위치한 칼라타의 제노바인 거류지로 피신해서 생명을 보존했다.

술탄 메흐메디는 콘스탄티노풀의 가치를 이해하고 있었기에 도시의 파괴를 바라지 않았다. 오스만 군대의 콘스탄티노풀 공격 이전이 이미 비잔틴은 도시의 인구가 감소했고 경제적 활기가 사라졌었다. 콘스탄티노풀 점령 직전의 비잔틴 인구는 6-7만 명 정도로 추산될 정도였다. 콘스탄티노풀이 오스만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으므로 투루크인들은 그곳을 이스탄불로 개칭하여 불렀다. 술탄 메흐메디는 새로운 이슬람 도시인 이스탄불을 정복한 후 기존 도시민으로부터 약탈을 가능한 한 제한하도록 노력했으며, 그가 도시 재건을 시도한 시점에는 이 도시에 인구가 약 1 만명 정도가 남아 있었다. 술탄 메흐메디는 칙령을 발표해 자신의 술탄 위를 인정하고 세금을 내는 사람은 종교를 불문하고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도록 했다. 또한 이스탄불에 인구 증가를 촉진시킬 방안으로 발칸 지역이나 아나톨리아로부터 이주자를 받아들이게 하는 동시에 도시의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 면세 특권을 허락해 주었다. 이스탄불 인구 증가 촉진정책에 부응하여 오스만 제국의 각지로부터 무슬림을 비롯해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슬라브인 등이 이주해 왔고, 서유럽에 거주하는 다수의 유대인들이 박해를 피해서 이스탄불로 이주했다. 전쟁 포로들은 도로 건설에서 일한다는 조건으로 자유를 얻었고, 발칸 지역의 농민들은 과수를 재배할 목적으로 이스탄불과 그 주변에 정착했다.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 정복이 유럽에 미치는 영향

이스탄불이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자 유럽과 오스만 제국 간의 관계에 몇 가지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유럽은 오스만 제국을 공격할 수 있는 최고의 전략지를 상실하였고, 오스만 제국 군대의 위력을 더 이상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무역과 군사 중심지인 이스탄불을 점령한 것은 유럽이나 아나톨리아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권을 쉽게 받아들였다.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 정복은 동방 무역로의 핵심지를 지배하는 것을 의미했으므로 유럽 무역상들이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됐으며 오스만 제국은 이를 통해 상당한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위치를 차지했다.

오스만 제국의 확장

술탄 메흐메디는 이스탄불 정복 이후 세르비아 수도인 세멘테르와 은광 지대가 있는 스매테레보를 공략하였으며 1459년 벨그라드를 제외한 세르비아를 오스만 제국에 흡수했다. 1460년에 에게 해의 모리아를 정복하도록 마흐루트 파샤의 지휘 하에 군대를 파병했다.모리아 병합으로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 재해권을 확보하려는 해상 세력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왈라치아는 술탄 베야지트 통치기(재위 1389-1402)에 조공을 바치기로 서약했으나 메흐메디의 술탄 계승 이후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따라서 술탄 메흐메디는 왈라치아의 군주인 블라드를 응징하기 위해 오스만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떠났다. 블라트는 1462년 오스만 군대에 의해서 격퇴되어 항가리로 도주했으며로 왈라치아의 군주권을 블라드의 동생이 차지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의 해군력이 동지중해에서 팽창되면서 해상 왕국인 베네치와의 경쟁이 불가피해졌다. 베네치아는 1474년에 오스만 제국과 1년간의 상호 불가침조약 기간이 종결되면서 양 세력 간에 동지중해 재해권을 놓고 긴장이 고조되었다. 마침내, 양 국가는 알바니아 북부에 위치한 스쿠다리를 두고 격돌하였다. 베네치아로 들어가는 아드리아 해의 전략지인 수쿠타리는 동지중해 재해권을 선점하는데 중요한 전략지였기 때문이다. 수쿠다리는 오스만 군대의 맹공격으로 점령되었으며, 전후 보상을 두고 오스만 제국과 베네치아 사이에 1479년 1월 26일 이스탄불에서 협상이 타결되었다. 협상에 베네치아는 연공으로 1만 베네치아 금화를 지불하고, 베네치아 국기를 단 선박의 지중해 통행을 보장받게 되었다.

아마스라는 제노비아인들의 흑해 무역 중개지였다. 술탄 메흐메디는 육지와 해상에서 양면 공격을 추진하여 1459년 아마스라를 점령했다. 재상 마흐무드 파샤가 지휘하는 150척의 함선을 이용해 해상에서 공격하고 술탄도 내륙 도시 불루를 통해서 공격했다. 1460년에는 흑해변의 시노프 항을 술탄 메흐메디가 공격하자 시노프의 지도자 이스마일이 항복하여 시노프가 오스만 제국으로 흡수되었다. 흑해변 동쪽에 위치한 트라브존 또한 1461년 오스만 제국에 병합되었다. 흑해변의 대도시를 차례로 병합한 술탄 메흐메디는 코냐와 카라만 중심으로 아나톨리아 남부 지역을 지배하는 카라만 공국을 공략했다. 카라만 공국은 오스만 제국에 저항하기 위해 베네치아와 발칸 국가들간의 연대를 모색하기도 했다.

술탄 메흐메드는 카라만 공국 원정에 참가하여 1466년 코냐와 카라만 제역을 점령했다. 술탄 메흐메드는 흑해변의 도시와 아나톨리아 내륙을 점령한 뒤 지중해로 진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오스만 해군은 성 요한 기사단이 지배하는 로도스 섬을 차지하고자 했다. 로도스는 지중해와 에게해를 연결하는 섬이기 때문에 전략적 가치가 매우 컸다. 술탄 메흐메드는 메시히 파샤를 파견해 로도스 점령을 명했다. 그러나 메시흐 파샤가 로도스 점령에 실패하자 1481년 봄에 술탄 메흐메드가 군대를 지휘에 원정을 떠났다. 술탄이 게브제에 도착할 즈음에 발병하여 일단 지휘 본부를 설치했는데, 1481년 5월 3일 야전 막사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김대성. 한국외국어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