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역사

[War & Strategy 15] 욤 키푸르 전쟁

작성자
kislam0
작성일
2018-05-02 08:38
조회
342

[War & Strategy 15] 욤 키푸르 전쟁 | 중동전 참패한 이집트, 철저한 분석으로 복수전 성공 기업도 방향·목표 분명히 정하고, 맞춤형 전술 갖춰야










이집트군 트럭이 1973년 10월 7일 욤 키푸르 전쟁 중 수에즈 운하를 건너고 있다. <사진 : 위키피디아>

중동 전쟁은 1948년 5월 14일 국제연합(UN)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리 독립을 결의하면서 발생했다. 이스라엘 건국을 용인할 수 없었던 중동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한 것이다. 이것이 1차 중동전이다. 1967년까지 3번의 중동전이 발발했지만, 그때마다 이스라엘이 승리했고, 전쟁사에 회자될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이집트는 체면도 체면이지만 큰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수에즈 운하 연안을 이스라엘이 점령하는 바람에 수에즈 운하가 마비된 것이다. 수에즈 운하의 수입이 막대했기 때문에 이집트가 받는 경제적 타격은 엄청났다. 국제 사회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 연안에서 철수를 거부하고, 바레브 라인(Bar Lev Line)이라고 불리는 요새화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집트군의 명예회복

6일 전쟁이라고 불리는 3차 중동전에서 이집트군은 우세한 병력과 무기에도 불구하고 단 3일 만에 시나이 반도를 잃었다. 후퇴하는 이집트군보다 이스라엘군의 진격이 빨랐을 정도로 무참한 패배였다. 이 승리가 준 충격이 커서 무적 이스라엘군의 신화가 생겼을 정도다. 반면 이집트와 아랍 세력은 대책 없는 군대로 낙인 찍혔다.

그러나 이런 평가를 단박에 뒤집는 사건이 생겼다. 1973년 10월 6일 욤 키푸르(Yom Kippur·유대인의 속죄일로 가장 큰 명절) 기간 이집트군이 이스라엘의 바레브 라인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이스라엘군은 바레브 라인에 39m 높이의 모래 방벽을 쌓아 놓았다. 이 방벽은 시간을 벌기 위한 일시적인 저지선이었다. 이스라엘의 막강 전력인 기갑 부대와 항공기는 후방에 있었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자국에 대한 국제 여론이 좋지 않고 침공을 중지하라는 미국의 압력까지 받고 있었다. 그래서 바레브 라인에 병력을 줄이고, 일단 선제공격을 허용한 뒤에 반격한다는 대응 방침을 세웠다. 대신 이집트가 공격을 개시하면 공군이 즉시 출동하고, 2선에 배치한 기갑 부대가 전진해서 이집트 침공 부대를 격파한다는 작전이었다.

이집트군은 바레브 라인을 공격할 때 기발한 아이디어를 선보였다. 독일에서 수입한 고압살수차로 이스라엘의 모래 방벽에 물을 뿌려 단숨에 통로를 뚫었다. 공병은 신속하게 부교를 놓았고, 이집트군 대부대가 도하에 성공했다. 이스라엘은 놀랐지만 아직 자신만만했다. 즉시 이스라엘 전투기가 발진해 이집트 지상군에 달려들었다. 이스라엘 공군은 공중전에서 격추당한 사례가 없을 정도로 무적이었다. 그러나 굉음을 내며 먹이를 향해 하강하던 저승사자들이 하나둘씩 불꽃에 싸여 추락하기 시작했다. 범인은 지대공 미사일이었다. 이스라엘 공군은 이집트의 지대공 미사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찌된 일인지 미사일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 광경을 믿을 수 없었던 이스라엘 조종사들은 더 거세게 공격했지만 가는 족족 추락할 뿐이었다. 단 하루 만에 이스라엘은 전체 공군기 290대 중 180대를 잃었다.

불타는 하늘 아래서 이스라엘의 강철 군단이 굉음을 울리며 수에즈를 향해 돌진했다. 갑자기 탱크 한 대가 폭발했다. 옆에 있던 탱크도 연이어 터져 나갔다. 놀란 전차장들이 기를 쓰고 적의 탱크를 찾았지만 이집트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스라엘 탱크 포수는 이집트군의 2배가 넘는 장거리 포격 능력을 보유했다. 이집트군이 이스라엘 탱크의 사정거리 밖에서 포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탄발사기(RPG)를 의심해 봤지만 RPG의 사정거리는 500m로 탱크포보다 더 짧았다. 마치 유령이 강철 해머를 휘두르는 것 같았다. 단숨에 2개 기갑여단이 거의 전멸했다. 1967년 3일 만에 시나이 반도를 빼앗겼던 이집트군은 3일 만에 수에즈를 되찾았다. 이스라엘은 건국 이래 겪어 보지 못했던 처참한 패전을 맛봤다.

탱크를 파괴한 주범은 소련제 유선유도 대전차미사일이었다. 대전차미사일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실전에서 경험한 것은 처음이었다. 대전차미사일팀은 2인 1조로 참호를 파고 매복해 있다가 탱크포의 사정거리 밖에서 사냥을 시작했다. 초기 형태라 조준병이 망원경을 보며 조이스틱 같은 유도장치를 돌려 수동으로 유도하는 불안한 방식이었지만 사막이란 개방지형은 유도미사일의 명중률을 높였다. 이집트군은 그간의 설움을 딛고 복수전에 성공했다. 성공 비결이 신형 장비만은 절대 아니었다. 3번의 전쟁에서 실패하고 이집트는 비로소 자신과 상대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시도했다. 그리고 자신의 약점과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고 거기에 맞는 맞춤형 목표를 설정했다.

사막전에서 제공권과 기갑 전력의 우위는 결정적이다. 이 두 전력에서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집트군은 장비 운용 능력에서 뒤떨어졌지만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홀로코스트(Holocaust·나치의 유대인 학살)의 악몽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군의 사기, 정신력 등은 상대에게 항상 밀렸다.

더 치명적인 약점은 전투 현장에서의 창의와 융통성이었다. 이스라엘군은 이 부문에서 세계 최고였다. 이집트군도 열심히 훈련하고 명령을 잘 수행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정해진 위치를 지키거나 명령받은 일을 수행할 때였다. 경직되고 현장에서의 융통성이 전혀 없었다. 한마디로 광활한 하늘과 사막에서 난전을 벌이면 우직한 이집트군은 필패했다. 이스라엘군은 전쟁 때마다 이집트군의 이 약점을 파고들어 철저하게 농락했다. 이집트군은 치를 떨었지만, 이는 훈련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 문화, 교육 수준이 뒷받침돼야 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군이 이 부문은 쫓아올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집트도 인정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설욕전을 시작했다.

창의적 전술이란 맞춤형 전술

이집트는 전쟁의 목표를 바레브 라인 함락과 수에즈 탈환으로 한정했다. 정해진 목표, 단순하고 명확한 전투는 이집트군도 헌신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여기에 맞춰 강훈련을 했다. 부교 설치 임무를 맡은 공병대는 300번이 넘는 도하 훈련을 했다. 대신 이스라엘의 독무대였던 시나이의 벌판과 창공으로 나가는 것은 금지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바레브 라인을 기습적으로 점령하는 데 성공해도 이스라엘의 매와 늑대들이 즉시 수에즈로 몰려온다는 것이었다. 이들을 제거해야 수에즈 탈환 작전이 성공한다. 여기서 꺼내든 방안이 미사일을 이용한 대공, 대전차 방어망이었다. 이를 위해 소련의 최신 무기를 얻어내고 1만명이 넘는 소련인을 초빙해 오퍼레이터로 고용했다.

이런 발상의 전환, 적절한 맞춤형 전술의 위력은 이집트군의 기대보다도 엄청났다. 3일 만에 이스라엘의 전투력이 고갈됐다. 당황한 이스라엘 수뇌부는 핵 공격까지 모색했다는 설이 있다. 우리는 창의를 기발한 아이디어로 착각한다. 살수차 공격 같은 이집트군의 기발한 아이디어도 방향과 목표가 분명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창의적 전술이란 맞춤형 전술이다. 맞춤형 전술은 나의 장점과 단점, 전쟁의 이유와 필요를 가장 적절하게 매치하는 것이다.

▒ 임용한
경희대 대학원 사학 박사, 경희대·공군사관학교 한국사·군제사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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