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역사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1

작성자
kislam0
작성일
2017-04-22 11:37
조회
500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1

 

 

혜초는 신라의 승려로 어릴 때 출가하여 723년 당나라로 유학 가서 그곳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의 제자가 되었다. 그 뒤 불교의 성지인 인도로 가서 석가가 불교의 이치를 깨달은 부다가야를 비롯하여, 그 깨달음을 처음으로 설교한 녹야원, 석가가 세상을 떠난 곳인 쿠시나가라 등을 두루 순례하였다.

 

그 후 당나라에 머물면서 금강지의 법통을 이은 불공삼장의 6대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불경을 연구하고 번역하면서 제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힘쓰다가 그곳에서 열반하였다. 그가 인도를 여행하면서 쓴 기행문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프랑스 학자 펠리오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세계적으로 중요한 자료로서 파리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왕오천축국전>은 신라 스님 혜초가 727년 인도와 주변의 여러 나라를 순례하고 돌아와 쓴 여행기이다. 여기서 '천축국'은 지금의 인도를 말한며, 당시 인도가 다섯지방, 즉 동천축, 서천축, 남천축, 북천축, 중앙천축으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오천축국'이다. 그리고 '왕'이란 말은 그곳에 갔었다는 한 자 말이다. <왕오천축국전>은 인도 지방 여행기라는 뜻이다.

 

'대식(大寔)'은 '대식(大食)'의 고자(古字)로서 '아랍'을 지칭한다. 아랍에 대한 한역명은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대체로 중국 당대 이전에는 '대익(大益, 혹은 대의 大衣)' 조지(條枝, 條支)'라 일컫다가 당대 이후 이슬람의 대거 동진과 함게 '대식(大食)'으로 개칭하였으며, 명대부터 근세까지는 다시 아랍의 음사인 아랄필(阿剌必) 혹은 아랍백을 쓰게 되었다.

 

한국의 경우, 혜초의 이 여행기에 나타난 '대식(大寔)'이 아랍에 관한 기록의 효시이다. 통일신라시대부터 한반도와 아랍-이슬람 제국 간에는 분명히 접촉이 있었으나 한국측 문헌에는 관련 기록이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야 대식 상인들의 고려 내왕에 관한 기사를 [고려사] 권 5의 [현종세가]와 권 6의 [정종세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식'이란 단어의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 일설은 조지설인데, 조지는 한대와 3국 시대 때 현 시리아 지방에 대한 지칭으로서, 당대 이후 아랍을 가리키는 대식과는 그 원류에세 무관하다. 그 일설은 조지설(條枝設)인데, 조지는 한대(漢代)와 3국 시대 때 현 시리아 지방에 대한 지칭으로서, 당대 아랍을 가리키는 대식과는 그 원류에서 무관하다. 대식이란 명칭의 유래에 관한 설 가운데서 가장 유력한 설은 '타지설'이다. 이 설에 따르면 페르시아인들이 아랍을 '타지(Tazi)'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중국에 와전되어 대식으로 음역되었다는 것이다. 페르시아인들이 아랍을 '타지'라고 부른 유래를 찾아보면, 그들과 인접한 페르시아인들이 이 '타이'를 유사음인 '타지'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과 페르시아 간의 내왕이 밀접해짐에 따라 페르사이인들이 말하는 '타지'가 중국에 전해져서 비로서 중국인들이 아랍을 대식으로 음사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자 '식(食))'자의 고음 중에 '이(異)'음이 있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중국인들이 페르시아인들에 의한 와전음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직접 '타이'의 정확한 대음으로 발음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근자에 와서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이 '타지설'을 거의 정설로 수용하고 그에 입각해 대식의 유래를 인지하고 있다.

 

대식이란 말이 현존 중국 문헌 중에 최초로 출현한 예는 당나라 도출고승 의정이 인도 구도 여행기 [대당서역구법고승전] [현조전(玄照傳]에서 '다씨'가 아랍의 현역명인 대식인지의 여부에 관해서는 이의도 있으나, 상하 문맥으로 보아 대식이 맞는 것으로 추측된다. 관용 대식으로 나타난 첫 문헌은 두환의 [경행기]를 인용한 두우의 [통전]이다. 두환은 당나라 천보 연간 고구려 유민의 후예인 맹장 고선지 휘하에 전개된 탈라스 전투(751년)에서 이슬람군의 포로가 되어 압바스조 이슬람 제국에 12년간 체류한 뒤 남해로를 통해 광주(廣州)로 돌아왔다. 그리고 [경행기]란 견문록을 저술했는데. 그 대부분이 망실되어 [통전]에 약간의 인용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견문록에서 두환은 대식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대식은 일명 '아구라라고 하며 대식 왕은 '모문(慕門)이라고 부른다. ...(대식인들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하루에 다섯 번씩 하나님께 예배한다"  이 글에서 '아구라는 당시 압바스조의 수도 쿠파의 별칭이며, '모문'은 '아미르 무어미닌, 신자들의 장(長), 즉 칼리파의 아호)'에서 '아미르'자가 탈락된 것으로 짐작된다. 대식왕을 모문이라고 부르는 점으로 보아 대식은 도시인 아구라의 별칭이 아니라, 나라인 압바스조를 지칭함이 분명하다.

 

정확한 국명으로서 대식을 거론한 최초의 기록은 혜초의 본 여행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북천축국을 두루 여행한 후 당시 아랍이 통치하고 있던 페르시아를 돌아보고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토화라국에서 서쪽으로 한 달을 가면 파사국(페르시아 현 이란)에 이른다.  이 나라 왕은 전에 대식을 지배했었다. ... 그러던 이 나라가 지금은 도리어 대식에게 병합되어 버렸다" 혜초는 이 글에서 페르시아와 아랍(대식) 간의 정복과 피정복의 역사를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의 '식(寔)' 자는 '식(食)'와 동음이므로, 후일 고문자인 '식(寔)'자 대신 평이한 글자인 '식(食)'자를 택했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앞의 기사를 비롯해 혜초의 대식에 관한 기술은 중세 아랍-이슬람 문명과 한 문명 간의 교류사 연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한 문명권 내에서의 아랍에 관한 첫 기술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의정의 '다씨'는 문단 중 한마디 지나가는 말에 불과하고, [통전]의 대식 관련 기사는 중국인으로서 첫 현지 견문기라는 데는 의미가 있지만, 헤초가 대식을 소개한 때로부터 약 50년 후에 있었던 일이다.

 

한국의 문헌 중 [고려사]에서는 고려 초인 1024년과 1025년 그리고 15년 뒤인 1040년에 도합 수 백명 명의 대식 상인들이 교역을 위해 고려의 수도 개경에 왔다는 기사가 있다. [고려사]에는 "대식국은 서역에 있다"라고만 하였지 그 구체적 지칭 대상이나 위치는 밝히지 않았다. 최남선이 대식을 '페르샤(페르시아)'라고 오인 ([조선 상식 문답], 삼성문화고 16, 1972, 222쪽)한 점으로 보아, 근세에 이르기까지 학계에서마저도 대식에 관한 정확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웃인 일본의 경우는 일찍부터 대식이라는 명칭을 사용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첫 출처는 [속일본서기] 권 19이다. 이 책에는 당 천조 12년(753년)에 일본의 견당부사가 대식국 사절의 상좌에 앉아서 현종을 알현했다는 기사가 있다. 이와 같이 대식은 중세 이슬람의 동진 물결을 타고 한 문명권 내의 중국이나 한국, 일본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출처 : 주간 무슬림 10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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