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역사

중동의 역사 (오스만 조)

작성자
무스타파
작성일
2015-11-30 06:13
조회
406

오스만 조


룸의 셀죽조가 망한 자리에 수많은 터키의 영주 가운데 가장 미약한 존재였던 오스만은 100년만에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대제국으로 성장한다. 일한국의 말기인 1335년 이후 중동은 혼란상태에 빠져들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가운데 오스만조가 성장하게 된다. 그 이유는 지리적으로 비잔틴 제국과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비잔틴 세력을 누를 수 있게 되었다. 오스만의 후계자 오르한 때 실질적인 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티무르의 침략 당시에는 주춤하다가 1453년에 이르러서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이슬람제국을 형성하게 된다. 즉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3대륙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하고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이라 개명하게 된다.


오스만군은 술탄 셀림 1세(1512-1520) 때인1516-1517년 사이에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지역을 정복하였으며, 그의 아들 술레이만 2세 때에 이라크지역에서도 제국의 세력을 확장하여 오늘날의 이란-이라크 국경지대에까지 영향력을 미쳤고 1521년에는 유럽쪽의 벨그라드를 1541년에는 헝가리를 점령하였다. 또한 해군을 조직하여 1540년 베니스를 비롯하여 유럽연합 함대를 무찔러 지중해의 해상권을 획득하였다. 정복사업의 성공으로 알제리의 영토도 병합하고 이란국경지역과 아라비아반도의 거의 전부인 아랍만 지역의 북부해안지대와 홍해안 지역을, 아프리카에서는 모로코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전역을 통합하였다. 이러한 대정복의 성공은 오스만조의 지배층이 스스로 엄격한 규율과 자제속에 살았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무슬림은 모두 단결해서 하나의 움마를 건설해야 한다는 욕구 때문이엇다. 즉 무슬림은 압바시야조 중기 이후 분열되어 왔으며, 몽고족의 침입이후 단결의 상징인 칼리프조차 없어졌다. 그러나 셀림 1세가 칼리프가 되면서 무슬림은 다시 단결하게 되었다.


오스만제국의 쇠퇴는 유럽제국의 번영과 때를 같이하여 나타난다. 17세기 말까지 오스만 제국은 유럽국가의 연합공격에 시달렸다.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헝가리와 루마니아의 일부지역을 빼앗겨 오스만조가 오스트리아와 대등한 위치에서 조약을 체결하였고, 1645-1669년 사이에는 베니스와의 오랜전쟁에서 크레타 섬을1676년에는 폴란드와의 전쟁으로 포돌리엔지역을 정복하고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두 번이나 포위하였지만 1699년불가리아와 세르비아를 일시적으로 빼앗기고 트란실바니아는 영원히 뺏김으로써 허약성이 노출되고 18세기 초에는 러시아가 발칸반도로 진출하게 되자 세력이 더욱 약해졌다. 결국 이란지역에서 쉬아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사파위조(1500-1772)가 등장하고 이란의 샤 압바스 1세가 1603년 아제르바이잔, 코카서스 및 이라크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그 뒤 오스만제국이 이라크지역을 빼앗았으나, 1638년 카스르 에쉬린 조약에서 아제르바이잔과 코카서스 지역을 이란에 넘겨주는 식의 최종적인 국경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1768년 -1774년 오스만-러시아 전쟁, 1787-1792년의 오스만-러시아,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만이 참패를 당하고 1798년에 나폴레옹 1세가 1주일만에 이집트를 점령하자 오스만조는 유럽에 밀려 오스만국내에서는 개혁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즉 기존 군대조직은 그대로 두고 유럽의 군대조직에 따라 별개의ㅣ 군조직을 만듦으로서 오히려 양 군대가 충돌하게 된다.


또한 외세의 침입과 더불어 세르비아에서 두 번이나 반란이 일어나 자치가 허용되었고 그리스에서는 독립전쟁(1821-1830)이 일어나 독립되었고, 1802년에는 영국군이 이집트와 이스탄불을 침입하고, 러시아군도 베사라비아, 몰다비아 및 왈라치아 등을 점령함으로써 제국은 분열되어갔다. 한편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 리가 아라비아 반도, 시리아 및 아나톨리아 반도의 동남부를 정복하고 오스만군을 밀어내고 있었다. 이 때 영국과 프랑스는 무함마드 알 리가 이스탄불에 도착하면 제국을 다시 통일할 것을 염려하여 오스만의 마흐무드 2세를 도왔으므로 이를 이용해 오스만은 개혁에 착수한다. 마흐무드 2세가 착수한 개혁운동은 1839년 탄지마트라 불렸는데 광범위한 법률제정이 포함되어 잇었다. 이 탄지마트 운동은 프랑스의 모형을 본뜬 중앙집권체제 강화와 세제개혁, 인권과 재산보호 및, 군조직의 개혁, 교육제도의 개혁으로 전개되었다. 이 운동으로 말미암아 오스만제국의 지식인은 유럽의 문헌을 접하게 되었으며, 많은 유럽의 서적들이 보급되었다. 그 이후에도 개혁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오스만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보급되었다.


이란지역에서는 사파위조(이스마일이 페르시아 건국)와 그 뒤를 이은 얍사르조가 등장하고 그 후 카자르조가 등장하여 1924년까지 존속한다.
18세기 초부터 밀어닥친 유럽세력의 동진은 중동의 전통적 무슬림 정치질서를 무너뜨려 갔다. 1차 세계대전을 고비로 이슬람의 정치체제는 파괴되어 갔고 유럽세력에 의한 강압식 주입식의 변혁이 강행되어 많은 부작용이 나타나게 된다. 중동의 정치체제를 대표했던 오스만 터키와 카자르조는 명목상의 독립은 유지하였으나 아랍인 거주지역은 영국, 프랑스, 양국의 신탁 통치령이나 보호독립국으로 바뀐다. 이 때에 유럽세력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민족주의가 왕성하게 생겨나게 되고 민족국가를 달성하려는 반식민 독립운동이 성장한다. 1900년대에는 초에서 중반까지 이러한 노력이 계속되어 각종 대중매체의 보급과 함께 중동에 커다란 정치적 변화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1939년에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게 되고 세게는 영국과 프랑스, 미국, 소련의 연합국과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양세력으로 나누어지게 되면서 이를 이용하여 수많은 식민지가 독립을 향해 노력하게 된다. 이러한 물결이 중동에서도 이루어져 신탁통치와 식민지령은 물론, 명목상의 독립을 유지한 독립국가에서도 실제적인 독립이 강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터키
오스만 터키는 1차 세계대전중 연합국간에 맺어진 오스만 터키 제국 분할계획이 러시아에 의하여 1918년 폭로되자 터키인의 저항이 극에 달하여 무스타파 케말이라는 영웅을 낳게 되었다. 그는 '터키는 터키인에게'라는 구호를 외치며 터키인의 단결을 호소하여 과거로부터 내려오던 술탄정부는 빛을 읽게 되고 1920년 터키 국민을 대표하는 국민회의를 앙카라에 소집하여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행정수반으로 취임하였다. 그리하여 파리에서 맺은 평화조약에서 터키자체의 분할은 면했으나 남은 것은 소아시아 반도와 이스탄불 주변뿐이었다. 1922년에 신정부는 술탄위를 폐지하고 2년후에 칼리프제도 폐지함으로써 중동에서 칼리프제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제 1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더불어 비 터키인 거주 영토는 거의 빼앗기고 현재지역만 남게 된 것이다.




이란


이란은 카자르조가 러시아 및 영국의 영향아래서 지탱해 오다가 의회내의 울라마 세력이 카자르조의 마지막 국왕인 아흐마드 샤를 폐위시키고 레자 샤를 국왕으로 추대하게 되는데 이가 곧 팔레비조의 시작이다.(1925-1979) 팔레비조는 파르티아(Parthia)에서 유래하였다.
신 왕조의 출범과 함께 이란은 현대화가 시작되었는데 1935년 국호를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고치고 개혁이 진행되어 갔다.


아라비아 반도와 비옥한 초생달 지역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1차 세계 대전 후 멕카를 거점으로 한 후세인 이븐 알리의 하쉼가, 하일을 중심으로 한 라쉬드가 리야드를 본거지로 하는 사우디가의 대립이 계속되었는데, 사우드가는 소박한 초창기의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의 기치아래 구체적으로 사회상을 개혁하려고 했고, 하쉼가의 후세인은 성지 멕카와 예언자 무함맏의 직계손이라는 혈통을 내세워 아랍인 거주지역을 통합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후세인은 아랍민족주의자들로부터 아랍인의 대변자로 인식되고 있었다.


1914년 오스만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가담하여 영국과 싸울 때 영국은 아랍인들을 이용하기 위해서 아라비아의 태수 후세인에게 아랍국가의 독립을 약속한다. 이것이 후세인-맥마흔 서한(1914-1916)이다. 그러나 영국의 중동 전문가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의 베이루트 주재 영사 조오지 피코는 1916년에 맺은 비밀 협정에서 터키, 시리아, 이라크 등을 영국, 프랑스, 러시아 간에 분할하려는 의도가 있었는데 공산혁명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한 소련 정부에 의해 폭로되었다. 이것이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이다. 1919년 파리 평화협상에서 후세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통일아랍국의 꿈은 깨어졌으나, 그의 아들 압둘라와 파이잘이 각각 요르단과 이라크의 왕위를 약속받는다. 여기에서 영국은 베이루트와 그 연안지역 즉, 레바논을 제외한 전 아랍지역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이라크의 하쉼왕가는 1958년 혁명이 일어나 공화정이 되었는데 그 이전까지 요르단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그 후 점차 개선되었다. 1924년에 터키에서 칼리프의 직위의 폐지가 공표되자 후세인은 스스로 칼리프로 자처하게 되나 사우드가의 압ㄷㄹ 알 아지즈가 무슬림 형제단을 이끌고 히자즈 지역을 공격하고, 멕카마저 점령당함으로써 하쉼가는 권세가 끝나게 된다. 사우드가는 1921년 이미 라쉬드가를 공격하여 병합하였기 때문에 일부해안지역을 제외하고는 아라비아 반도내의 유일한 세력이 되었다.


결국 사우드가의 압드 알 아지즈는 1926년에 히자즈 왕, 다음해에는 나즈드(리야드를 중심으로 한 지역)와 히자즈지역을 병합하여 1932년에 이 영역을 통합하여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을 형성하였다. 1952년에 사우디 왕국은 현대식의 내각이 구성되어 아지즈가 사망한후 그의 아들 이븐 사우드가 왕이 되었다.


1971년 영국이 수에즈 운하에서 군사기지를 완전히 철수시킴으로서 영국에서 독립한 국가들은 사우디 아라비아가 실질적인 보호자구실을 하였는데,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오만, UAE 등의 나라들이다. 또한 예멘은 1965년에 왕가가 무너졌고 리비아도 1969년에 공화정이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를 거치면서 북아프리카 지역과 비옥한 초생달지역에서도 독립이 가속화 되는데 사우디는 1927년 왕국을 선포하였고, 알제리(프랑스, 1962), 수단(영,프1956), 모로코(프랑스, 1956), 리비아(1951), 레바논(1943, 프랑스), 바레인(1971, 영국), 시리아(프, 1946년), UAE(영, 1971), 에멘(1918), 오만(1951), 요르단(영 1946), 이라크(영 1932)이집트 (영 1922), 이스라엘(1948), 카타르(영, 1971), 쿠웨이트(1961)터키(1923, 공화국 선포), 튀니지(프 1956)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