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역사

중동의 현대사, 이스라엘의 독립과 팔레스타인 문제

작성자
무스타파
작성일
2015-12-14 16:57
조회
397

<중동의 현대사>
이스라엘의 독립과 팔레스타인 문제



제1차 세계대전 후 시리아 및 팔레스타인은 세 개의 점령 행정구로 나뉘어져 있었다. 남부는 팔레스타인으로 영국의 지배하에, 동부는 아까바에서 알렙포에 이르는 시리아 내륙부로 아랍의 지배하에, 서부는 레바논 티루스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시리아의 연안지대로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아랍 민족들은 각지에서 민족주의 운동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쳐 나간다. 1918년 아랍군이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팔레스타인에서 시온주의자의 움직임이 현저해지면서 팔레스타인의 민족주의 운동도 싹트게 된다.
팔레스타인에서 탄생한 민족주의 조직들은 시온주의의 진출에 충격을 받고 '반시온주의'란 공동의 목표하에 뭉치게 된다.
1920년 2월 팔레스타인의 영국군부가 발포어선언의 실천 공시로 아랍주민의 항의 데모가 발생하여 팔레스타인 각지에 확산된다. 데모의 성격은 반 시온주의, 반유대주의였다. 1919년 빠리강화회의에서 조인된 베르사이조약과 국제연맹 규약은 팔레스타인의 위임통치 성립의 기반이 된다. 1923년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국의 위임통치 시작으로 팔레스타인은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관된다. 이때 고등판무관으로 친유대 성향의 사무엘이 부임하고 1925년까지 팔레스타인의 유대사회는 급격히 발전하게 된다. 유대인은 계속적인 이민증대책 실시와 더불어 이에 따른 외교활동을 전개한다. 위임통치정도 유대인 이민의 확대를 추진하면서 유대국가건설은 서서히 성장하게 된다. 여기에 드는 재정은 '유대민족기금' 및 '팔레스타인 건설기금'으로 추진되었다.
팔레스타인 거주 유대인은 1918년 영국 점령 당시 5만 6000명에서 1939년 44만 5606명으로 늘어나 총인구(150만 1698)의 30%를 차지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유대인기구'를 통하여 유대인의 이민을 조직적으로 장려하였다. 유대인들의 이민은 팔레스타인 거주민들에게 심리적 불안 요인을 일으키게 하고, 1929년에는 통곡의 벽 사건이 일어나 유대인과 팔레스타인간에 유혈폭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통곡의 벽 사건(서벽 사건)

1928년 9월 유대교의 속죄일 전날 예루살렘의 성지 서벽에서 유대교도가 남녀신도를 가르기 위하여 경계를 설정한데서 기인한다. 이러한 경계설정은 종교적 현상의 변경이라는 아랍측의 강한 반발을 일으켰으며, 영국관헌의 행동은 유대교들의 분노를 샀다. 이 사건은 아랍민족주의의 고취에 이용되었으며 또한 유대인의 감정을 악화시켰다. 그리하여 1929년 8월 서안 앞에서 강행된 유대인의 시위와 거기에 대항한 아랍측의 시위가 충돌되어 팔레스타인 전역에 확대되어 민족문제화 되었다.

1930년대 독일의 나찌즘의 등장으로 유대인의 박해가 절정을 이룬다. 이로 인하여 유대인들의 유럽탈출이 대거 이루어지게 되고 팔레스타인으로의 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Holocaust)는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민을 급증시켰고, 그때 팔레스타인에 이주한 유대인들은 1948년의 이스라엘 건국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결국 팔레스타인 지역 유대인 수의 증가는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대두를 촉발시켰고, 이는 당시 이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영국에 대한 저항과 동시에 반시온주의에 집약되면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는 아랍민족주의의 일환이며, 반영, 반유대인 민족저항운동에서 고조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7년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위임통치를 포기하고 팔레스타인 문제를 UN에 이관하게 된다. UN은 1947년 5월 팔레스타인 문제를 특별총회를 개최하여 논의하게 된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UN의 팔레스타인 분할안이다.
UN의 팔레스타인 분할안의 내용은 유대측에게 팔레스타인 영토의 56% (5579 평방마일)를, 아랍측에게는 44%(4421 평방마일)를 할당한다. 그러나 UN에 의한 팔레스타인 분할안은 유대인들이 인구비에서 1/3, 소유지 면적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의 7%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아랍인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러한 분할안은 UN이 미국의 주도하에 있었고 미국정치는 유대인의 입김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아랍측의 반발이 거세어지자 미국과 UN은 분할안을 폐기하고 신탁통치안을 제시했으나, 다수표 획득 실패로 신탁통치안도 폐기된다. 이러한 와중에 유대측 시온주의자들은 독립에 대비한 사전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유대측의 5개월간의 'E 계획'과 '달렛 계획'이다.

E 계획

목적은 UN 분할안에서 아랍인들을 몰아내기 위한 물리적 폭력 을 가하는 것으로 지뢰폭발, 야간습격, 방화 등이었다.

달렛 계획

아랍세력의 근거를 사전에 분쇄하는 작전으로 실패한 E 계획에 대한 보완적 조치로 더 강압적이고 군사적 작전의 폭이 훨씬 넓었다. 달렛 계획의 궁극적 목적은 팔레스타인 공동체의 파괴를 통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하는데 있었다. 달렛 계획의 상징적인 군사작적으로 악명 높은 것이 '딜 야신'의 대학살이었다. 1948년 4월 9일 유대의 테러조직이 예루살렘의 서쪽에 위치한 인구 400명의 아랍인 촌 딜 야신을 무차별 공격하여 남녀노소 245명을 살해한 참극을 말한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건국은 유대인들의 조직적인 독립준비와 미국의 지원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볼 수 있다.

나세르의 이념


나세르의 아랍민족주의의 이념 아래 뭉쳤던 통일아랍공화국(United Arab Republic; UAR)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보수세력과 그 양자 사이에서 저울질하고 있던 레바논, 공산주의 정권으로 경계의 대상이 되고 있던 이락, 또한 북부 아프리카의 마그립의 세력은 막 독립한 상태에 있었다.
1958년 아랍세계는 이집트 중심의 UAR와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끌고 있었다. UAR는 레바논의 친서구 정책에 불만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사우디아라비아와 레바논, 요르단에 혁명교육을 수출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UAR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서로 경계하는 긴장된 관계였다. 이집트는 사우디아라비아에 학생, 교사, 군인, 관광객 등의 정보원을 보내어 혁명을 고무시키고 있었다.
나세르는 레바논내의 무슬림들을 이용하여 레바논 문제에 개입하였다. 나세르의 시리아에 대한 접근도 레바논 내 아랍민족주의자들을 선동하여 친이집트 환경을 만들었다. 나세르는 아랍주의를 대이스라엘 투쟁의 일환으로 평가하고 있었으며, 1950년대 말 혁명 사상을 주변 국가에 수출하는 세력을 홍보정책으로 이용하였다. 나세르의 혁명 철학은 이집트의 대외정책 방향을 3가지로 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랍주의정책, 이슬람주의정책, 비동맹외교정책이다.
UAR는 3년 8개월의 단명으로 끝났지만 아랍민족주의의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아랍의 통합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슬람교의 정체성 문제는 계속되는 아랍민족 통합사상의 핵심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랍민족주의 운동의 방향은 이슬람교의 정체성과 더불어 아랍연맹에서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