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역사

제1차 중동전쟁

작성자
무스타파
작성일
2015-12-20 14:07
조회
413

중동전쟁 제1차

1. 제1차 중동전쟁(1948, '팔레스타인전쟁'(아랍측 명칭), '독립전쟁'(이스라엘측 명칭))

1) 전쟁의 발발


1948년 5월 14일 영국군의 철수로 유대민족주의자들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독립이 선포된다. 벤 구리온과 12명의 각료로 임시정부를 수립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점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독립선포는 아랍제국들의 즉각적인 반발을 사게 되고, 아랍국가들의 대 이스라엘 선전포고가 일어나게 된다. 즉 제1차 중동전쟁은 이집트의 파루크 국왕, 트란스요르단의 압둘라 국왕, 이락의 파이살 국왕,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우드 국왕 등 인접 왕국의 군대와 시리아, 레바논 등의 군대까지 동원되어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2) 전쟁의 전개


전쟁 초기에는 아랍제국의 연합에 의한 이스라엘의 협공이었기 때문에 전세가 아랍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지속됨에 따라 아랍진영 내에 불협화음이 발생하게 된다. 즉 트란스요르단의 압둘라왕은 비교적 강군으로 알려진 아랍군단을 전쟁 발발과 동시에 서안에 진주시켜 예루살렘의 성지(신예루살렘)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압둘라왕에 의한 서안의 점령은 다른 아랍제국의 지도자들에게 서안의 병합 가능성이라는 의구심을 품게 하였다. 이러한 불협화음은 아랍국가들간 상호불신감을 조성하여 결과적으로 전쟁 수행상에 난맥상을 드러냈다. 즉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 독립국 탄생에 대한 반발로 이루어진 아랍제국은 전쟁 수행과 더불어 이해 관계가 서로 상충되면서 행동 통일에 균열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결국 아랍제국들은 대 이스라엘 전쟁 수행이라는 일차적인 전쟁 목표를 망각하고, 트란스요르단 아랍군단의 활동 견제와 더불어 분열을 가져오게 되고 이는 대 이스라엘 전쟁의 실패를 야기하게 된다.


아랍국가들의 대 이스라엘 전쟁의 실패 요인은 내면적으로는 아랍진영 내의 응집력이 결여로 볼 수 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 프랑스의 쇠퇴와 미국, 소련의 성장이라는 국제정치의 미묘한 변화를 읽고 있지 못한 것도 실패의 요인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랍국가들은 UN 안보리의 정전 권고를 쉽게 받아들이기도 하였고, 사소한 문제로 전쟁을 재개하기도 하는 등 일괄된 전쟁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전투의 단절은 이스라엘이 해외에서 무기를 수입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게 하였다. 특히 전쟁 초기 제2차 세계대전시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과 소련이 이스라엘을 적극 지원하였는데,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에 압력을 넣어 이스라엘에 성능 좋은 신무기 공급을 주선하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전쟁 발발시의 전세가 이스라엘측에 불리하였으나, 전쟁의 중단과 재개의 과정을 밟으면서 대 이스라엘전은 이스라엘에 점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패배의 과정을 밟으면서 제1차 중동전쟁은 1948년 11월 6일 UN 안전보장이사회의 휴전결의 채택으로 일시 중지되고 1949년 1월 이스라엘 대표와 이집트 대표가 휴전회담을 시작하게 된다. 마침내 1949년 2월 14일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3월 22일 이스라엘과 레바논이 휴전협정을 체결한다. 때를 같이 하여 4월 3일에는 이스라엘-요르단, 7월 20일에 이스라엘-시리아가 휴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제1차 중동전쟁은 종결된다. 이락의 경우 전쟁은 수행했으나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종결상태가 되었다.


제1차 중동전쟁 후 국제연합은 UN 휴전감시기구를 만들었으며, 아랍-이스라엘은 쌍방의 '혼합휴전위원회'의 설치를 합의하게 된다. 제1차 중동전쟁은 아랍측의 불협화음과 아랍제국의 국제 감각의 결여 및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제2차 세계대전후 강국이 된 미-소의 지원과 이스라엘 군대조직인 '하가나'의 전략으로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고 볼 수 있다.



3) 전쟁의 영향


역설적으로 제1차 중동전쟁 후 이스라엘의 영토는 확장되었다. 과거 UN 분할안에 의한 이스라엘의 영토 크기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56%이었으나, 휴전 후 이스라엘-아랍간의 국경재조정은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에게 유리하게 적용되어 팔레스타인 영토의 80%(2만 662㎢)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신예루살렘 지역도 포함되었다. 결국 아랍측에게 남은 팔레스타인 영토는 20%에 불과했는데, 트란스요르단이 점령한 예루살렘의 구시가를 비롯한 요르단강 서안지역(West Bank)과 이집트 정부가 점령한 가자지구를 의미한다.


트란스요르단의 압둘라 국왕은 국명을 요르단하심왕국(Hashemite Kingdom of Jordan)으로 바꾸었으며, 1950년 서안지역을 자국 영토로 병합시켰다. 압둘라 왕에 의한 서안지역의 병합은 팔레스타인 주민의 입장에서 볼 때 아랍민족주의 또는 아랍대의를 배신한 행위였으며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압둘라 왕은 1951년 7월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선각자의 한 사람인 하지 아민 후세이니파가 사주한 하수인에 의해서 암살된다. 압둘라 왕이 병합한 서안지역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아랍의 완전 패배로 이스라엘의 점령지가 되었다.


제1차 중동전쟁의 아랍측 패배는 약 90만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대이동을 낳게 했으며, 그들은 피난민으로서 인접 아랍제국들에 분산되었으며 UN 난민구제사업기관의 구제 대상이 되었다. 아랍측의 패배는 일부 아랍국민들에게 정치적 각성을 일으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집트의 경우 나세르를 중심으로 자유장교단이 부패한 파루크 국왕체제를 붕괴시켜 공화국으로 출범하게 된다. 나세르가 그 뒤에 이집트 대통령에 취임한다. 전쟁 패배에 대한 반성과 거기에 수반된 정치적 각성은 이집트혁명으로 승화되었고, 이집트혁명은 그 뒤 중동정치역학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제1차 중동전쟁의 아랍측 패배는 나세르의 등장에 촉매가 되었으며, 나세르가 주창한 아랍민족주의는 적어도 그 국제정치적 및 중동정치적 상황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