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역사

제2차 중동전쟁

작성자
무스타파
작성일
2016-01-15 20:16
조회
423

2. 제2차 중동전쟁(1956, '수에즈전쟁', '시나이전쟁')

1) 당시 상황


1952년 자유장교단의 혁명으로 공화제로 이행한 이집트 혁명정부는 점차 정치적 안정기를 찾기 시작했다. 이집트는 아스완 댐 건설사업을 결정하고 미국과 서유럽의 재정지원을 약속 받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과 서유럽으로부터 군대증설을 위하여 도움을 구했으나, 1950년의 협정(영-프-미의 무기제한협정)에 의하여 군대증설은 무산되었다.


나기브 초대 대통령은 혁명의 주체세력인 나세르에 의하여 1954년 추방되었으며, 나세르는 1954년 10월 영국군의 수에즈 운하로부터의 철수에 대한 협정을 성립시킨다. 식민지 세력의 추출은 아랍민족주의의 고조화에도 기여했다. 이는 나세르의 지도력의 상승을 의미하게 된다. 1955년에 나세르는 개혁 정책의 일환으로 군대 강화에 역점을 두게 되고, 이집트군의 강화를 위해서 소련과 무기구입협정을 체결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무기를 도입하였다. 1955년 비동맹회의가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개최될 때 나세르는 동서 양진영의 틈 속에서 제3세계의 갈 길을 제시함으로써 비동맹운동을 선도하였다. 1956년 6월 22일 나세르는 이집트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나세르는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강경책을 썼으나, 서방측을 적대시하는 정책을 취하지는 않았다. 또 나세르는 이집트군의 강화를 위해서 소련에 접근했으나, 친사회주의 노선을 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제1차 중동전쟁 당시 소련이 이스라엘을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소련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나세르의 대서구적 입장에 강경노선을 취하게 한 것은 오히려 미국이었는데, 미국은 이집트의 중립노선을 비판하고 있었으며, 특히 소련에 접근하고 있는 국가들을 적대시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은 국제통화기금의 이집트 아스완댐 건설을 위한 2억불 차관을 취소케 하였다. 특히 미국은 이집트가 계속 체코제 무기를 구입하는 것에 대하여대이집트 제재조치를 강구하게 되었고, 1956년 7월 아스완 댐공사에 대한 차관 취소는 나세르의 혁명사업에 대한 도전을 의미하게 되었다. 차관 취소는 이집트에 커다란 타격을 주어 나세르의 감정을 자극하게 된다. 이에 따라 1956년 7월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게 되었다. 즉 수에즈 운하에서 나오는 수입을 아스완 댐 건설 자금으로 사용한다는 계획이었다. 또한 이스라엘 선박에 대하여 국제수로인 수에즈 운하와 홍해에서 이스라엘의 최남단 도시 에일라트에 이르는 아까바만 티란해협의 통과권을 금지하였다.





2) 수에즈운하의 중요성


수에즈운하는 지중해, 홍해, 인도양을 연결하는 국제수로로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대륙을 잇는 세계 최대의 해양 운하이다. 이 운하는 아랍만의 석유를 유럽에 수송하는 에너지 수송로이며, 아시아 및 태평양을 유럽과 연결시키면서 이어지는 국제경제로인 비단길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것은 또 유럽 안보문제와 강대국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한 각축장이 되어 왔다. 한편으로는 리비아, 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 에티오피아, 예멘, 소말리아와 지리적으로 연결돼 있으므로 정치적 환경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랍과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된 분쟁은 아랍의 운명을 지키는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분쟁 양식으로 나타났다. 수에즈운하의 경우 정치적 의미가 상징적으로 나타난 전략지대이기 때문에 항상 아랍과 이스라엘의 마지노선이 되었다. 국제수로이자 경제적 무역로로서 수에즈운하를 이용하는 전세계국가들은 수에즈운하 안보를 유럽안보 또는 국제안보로서 해석하고 있다. 즉 걸프의 석유와 이집트의 수에즈운하는 국제정치 및 세계경제 환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안이다. 제4차 중동전쟁 후 수에즈운하는 자유항해권을 보장받으면서 국제적으로 안정적 수로로 정착되었다.





3) 전쟁의 발발과 전개


수에즈운하회사의 국유화는 영국-프랑스 양국에 의한 수에즈운하 점령을 행동하도록 하는 사태가 되었다. 또한 프랑스는 이스라엘에게 대이집트 실력 행사에 참가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스라엘은 이 당시 가자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이집트의 특수부대와 빈번한 충돌이 있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국가안전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또한 티란해협의 봉쇄는 이스라엘측에 이집트 공격의 구실을 제공해 주었다. 1955년 2월 이스라엘은 그들의 국내 안전을 구실로 가자지역에 대한 대공세를 감행한 일이 있으며, 그것은 나세르로 하여금 이집트군의 무기 근대화, 아랍연맹의 강화 등을 가능케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내심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참전 요청에 의한 가자지역의 이집트 군대의 분쇄에 대한 사안은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기회가 되었다. 또한 이집트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선언되고 있던 티란해협의 봉쇄는 이스라엘 입장에서 볼 때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조치였다. 결국 이스라엘은 그들의 국가 이익에서 볼 때 무력동원도 불사할 만큼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은 그들의 군대를 신속하게 시나이 반도로 투하시켜 시나이 반도의 요충지를 점령하였다. 영-프 양국은 이집트 공군기지를 폭격하여 이집트 공군을 지상에서 거의 파괴하였으며 공수부대의 기민한 작전으로 수에즈 운하를 점령하였다. 1956년 11월 4일 영국과 프랑스의 공수부대가 이집트의 부르 사이드에 투하되기에 이르렀다. 이집트 군대는 체코 무기의 도입으로 우수한 무기를 보유했음에도 이스라엘의 전쟁 수행의 우수성으로 패배를 거듭한다.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중동에서의 세력 신장을 견제하기 위하여 영-프의 군사행동을 비난하게 되고 엄정중립을 선언하였다. 소련도 영-프 양국의 군사개입에 강력한 비난 성명을 냄과 동시에 평화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다고 경고하면서, 이들에 대한 대륙간탄 도미사일 공격 등을 시사하면서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의 침략행위를 위협하였다. 소련은 미국과 공동 개입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이를 거절하고 영-프에 대하여 소련이 중동에 군사 파견시 미국이 영-프를 돕지 않을 것이라고 시사하였다. 이러한 미소의 압력은 영-프-이로 하여금 휴전에 서명토록 했다.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는 하였지만 미국과 소련의 압력으로 원상태로 돌아가야 했다. 결국 1956년 11월 23일 정전이 이루어졌으며, 24일에 UN총회에서 영-프-이 3개 점령군의 즉각 철수가 결의된다. 1956년 12월 5-22일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이집트에서 철수하고 이스라엘은 다음해 3월에야 시나이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4) 전쟁의 결과와 영향


제2차 중동전쟁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영-프-이의 수에즈운하 점령과 시나이 반도 진주는 점령군의 일방적인 승리였으나, 이들 3국은 국제 정치적으로는 패배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나세르는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국제적으로 공인 받은 결과가 되어 이집트의 국익을 확보하게 되었다.
나세르는 미국, 소련 양국의 입장 표명으로 인하여 정치적인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아랍민족주의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보수적인 아랍국가의 왕들에게 경종이 되었다. 즉 친영적인 이락 왕국의 파이살 2세는 아랍민족주의의 고조화로 인한 1958년 7월 14일 까심장군의 쿠데타로 쫓겨나고, 이락 왕국은 붕괴되고 공화국이 된다.


나세르 대통령은 정치적 승리를 바탕으로 아랍민족주의의 고조화와 그 승화를 바탕으로 1958년 이집트-시리아와의 국가통합을 이룬다. 그러나 이는 3년 뒤인 1961년 붕괴하게 되는데 이는 아랍민족주의의 본질적 한계를 의미하게 된다. 또한 나세르는 통합 실패 후 제1차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 점령지에서 추방되어 요르단강 서안, 가자지구, 요르단, 레바논 등지에 흩어져 있던 약 90만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민족단위로 취급함으로써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를 각성시키고 이스라엘을 타도하여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수립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선동에 자극되어 한때는 약 30개의 팔레스타인 해방조직이 난무하기도 하였다.


나세르는 수에즈운하 국유화 이후 아랍 민족주의의 구심화로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눈을 뜨게 되고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후견인이 되고자 하였다. 나세르의 주선에 의해 1964년 1월 제1차 아랍정상회의에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결성된 것과 이 조직이 상당한 기간 나세르에 충성하고 추종하는 기관으로 발전한 것은 이와 같은 나세르의 정책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제2차 중동전은 미국과 소련에 있어 대중동진출의 경쟁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철수함에 따라 새로운 힘의 공백상태가 초래되었으며, 미국과 소련의 진출이 치열해진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왕정을 유지하고 있는 아랍의 보수세력, 그리고 산유국과의 접근을 통해 중동지역에 진출하고자 했으며, 소련은 주로 공화국인 아랍의 혁신세력에 손을 뻗치게 된다. 미국의 현대무기가 서독을 통해 이스라엘에 공급되었으며, 소련의 대규모 군사, 경제적 원조가 이집트, 시리아, 이락 등에 제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