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역사

제3차 중동전쟁

작성자
무스타파
작성일
2016-02-03 11:21
조회
427

제3차 중동전쟁(1967, '6월전쟁', '6일전쟁')



1) 전쟁의 원인과 전개


제3차 중동전의 원초적 동기는 시리아와 이스라엘간의 빈번한 충돌에서 찾을 수 있다. 시리아의 바아스당은 가장 강력한 반유대주의 및 반서구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었는데, 바아스당의 실권을 장악한 아민 하페즈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강경정책을 취하였다.


1966년 10월 이집트와 군사동맹을 맺은 시리아는 대이스라엘 강경책을 더욱 촉진시키게 되었다. 당시 시리아-이스라엘간에는 골란고원을 둘러싸고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는데, 1967년 4월 제1차 중동전쟁의 정전협정에서 비무장지대로 설정된 골란고원 일대에 이스라엘이 농작물을 경작한다는 일방적인 조치를 발표하여 대시리아 감정을 격발시켰다. 이것이 이스라엘-시리아간의 무력충돌을 유발시킨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리아와 요르단은 이집트의 개입을 요청하게 되었고 나세르는 이스라엘이 시리아를 공격한다면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공격할 것이라고 천명하게 된다. 나세르는 요르단 및 이락과 동맹관계를 맺어 대이스라엘전에 대한 준비를 서둘렀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측에 미리포착되고 있었는데 이스라엘은 1967년 5월 29일에 전시체제에 돌입해 있었다.


1967년 6월 5일 새벽 이스라엘 공군은 공격 3시간만에 아랍제국의 비행기 400여대를 폭격하였다. 이중 286대가 이집트의 비행기였으니 이집트는 초기에 이미 기선을 제압 당하였던 것이다. 이 때 이스라엘의 비행기 손실은 19대 밖에 되지 않았다. 이집트는 아랍국가들의 맹주격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기습 공격의 주대상은 이집트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전쟁발발과 동시에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스라엘군은 시나이 반도를 지나 수에즈운하까지 진주하였다. 이스라엘의 기습공격으로 이집트의 군장비가 거의 파괴되어 전쟁 시작 4일만에 UN의 정전 권고를 수락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시리아는 제3차 중동 전쟁의 기본 동기를 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전과 동시에 대이스라엘전에서 적극성을 띠지 않았으며 이집트와의 협조체제도 미약했다.


이스라엘군은 시나이 작전이 끝난 6월 8일 주력부대를 골란고원의 시리아 전쟁에 이동시켰고, 시리아는 이스라엘의 기갑부대의 도착과 동시에 UN의 정전권고를 수락하였다. 요르단 전투에서도 이스라엘에 제공권이 완전히 위축되어 6월 7일 정전을 수락하였다. 즉 제3차 중동전쟁은 요르단과는 불과 3일전쟁이며, 이집트와는 4일전쟁, 시리아와는 5일전쟁이었으며, 6일만에 전쟁에 참가한 아랍국들은 모두 UN의 정전권고를 수락하였던 것이다.




2) 제3차 중동전쟁의 영향


이집트의 경우 군비현대화에 20억 달러가 소요되었으나 이스라엘에 유린당함으로써, 아랍세계에서 맹주국으로 부상하려던 이집트의 이미지는 추락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나세르의 아랍민족주의의 대의의 구심점과 리더십이 균열되기 시작하였다. 전쟁의 패배로 이집트의 사회·경제적 여건은 혼란으로 치닫게 되고 나세르의 대외정책은 친소정책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그 이유는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측의 일방적 승리는 미국의 지원으로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중동의 진보적인 아랍국가들은 미국과의 단교를 서슴지 않았다. 전쟁으로 인한 이집트의 경제 여건 악화 또한 대아랍정책의 수립에 있어서 온건노선으로 선회케 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전쟁직후인 1967년 8월 20일 수단의 하르툼에서 개최된 아랍정상회담에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전쟁에 호소하는 것은 무의미함을 지적하고 반면에 아랍연합에 의한 대이스라엘 견제를 결의하였으며, 이것이 구체화된 것이 "이스라엘과는 협상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을 인정하지도 않으며, 이스라엘과는 평화를 구하지도 않는다"는 소위 '삼부정책'의 합의로 나타났던 것이다. 나세르는 전쟁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할 것을 표명했으나, 이집트 군중 및 아랍세계의 동정으로 사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3차 중동전쟁의 아랍측의 대패는 아랍국가들의 반성을 촉구했으며, 아랍은 단결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는 사고를 가지게 되었다. 제3차 중동전쟁에서 가자지역, 구예루살렘지역, 요르단강 서안지역, 골란고원, 시나이 반도의 8,600㎢가 새로이 이스라엘의 점령지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들어간 영토 면적은 이스라엘 독립 초기의 8배가 넘는 102,400㎢로 확대된 것은 중요한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즉 이로 인한 팔레스틴 난민의 확대는 PLO 활동을 더욱 활성화시키게 되고, PLO의 활동은 더욱 과격해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결과로 중동지역은 1969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걸쳐 PLO의 분파들의 대이스라엘 게릴라 활동 또는 하이재킹으로 점철되었다.





* 팔레스타인해방기구(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PLO)


1948년 제1차 중동전쟁 후에 약 40만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인근 아랍국가에 가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요르단, 시리아, 가자지구 요르단강 서안 점령지구와 레바논의 난민 수용소에 수용되었는데, 거기에 대략 64만 4000명의 난민들이 30여년 동안 살았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그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아랍의 연합전선에 의존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실해지자 1964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창설되기에 이르렀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젱에서 이스라엘이 아랍영토를 병합한 뒤, 야세르 아라파트가 영도하는 PLO의 알파타가 이스라엘을 제거하고 아랍땅을 회복하는 활동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1974년에는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과 '검은 9월단' 등의 테러 조직들을 산하에 두고 있는 PLO가 팔레스타인 인민의 합법적 대표 기구로 아랍지도자들의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PLO와 협상하는 것을 집요하게 거부해 왔다. 이에 피의 역사가 점철되는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1991년 제1차 중동회담 후 미국과 아랍국가들의 중재하에 라빈 이츠하크 이스라엘 대통령과 아라파트가 평화협상을 시작하였고, 이는 마침내 팔레스타인국가당국(Palestine National Authority; PNA)을 구성하여 요르단강 서안지역과 가자지구를 운영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