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역사

제4차 중동전쟁

작성자
무스타파
작성일
2016-02-27 09:52
조회
517

제4차 중동전쟁(1973, '라마단전쟁, 10월전쟁', '욤킵푸르(속죄의 날) 전쟁')

1) 전쟁의 전개

1970년 9월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의 급서로 부통령이었던 사다트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사다트는 취임 후 나세르의 측근들을 제거하고 친소련정책을 탈피하면서 친서방-친미의 노선을 걷게 된다. 이집트는 제3차 중동전쟁 후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랍 온건국들로부터 경제원조를 받게 되는데, 사다트 이후 이집트는 온건적이며 실용주의적 방향으로 정책이 변화되고 있었다. 이집트의 이러한 정책은 제3차 중동전쟁 이후 대중동정책의 추구에 있어서 소극적이었던 미국의 중동정책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집트의 사다트는 과거 3 차례 중동전쟁에서 잃었던 영토 회복을 위해 서서히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목적은 1973년 6월 시리아의 아사드 대통령과 회동하면서 전쟁의 목적을 피점령지의 회복에 한정한다는 것을 명백히 하였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수에즈 전선과 골란고원의 양전선에서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제4차 중동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는 나세르가 입은 치욕적인 패배를 불식하고 아울러 사다트 자신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1973년 10월은 이슬람력으로 라마단이었는데 당시 사다트는 군인들에게 단식을 시키지 않고 전쟁 준비를 하였다. 전쟁 초기 이스라엘의 피해는 막심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개전 6일만에 반격을 시작하여 초기 열세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군은 골란전선에서는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로 향하여 진격하고 있었고, 시나이 반도에서는 이집트군이 수에즈 동안 지역을 확보하여 더 이상 진격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인접 아랍국들 즉 요르단,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기갑부대와 비행대대 등을 시리아에 파견하는 적극성을 보임에 따라 사다트는 다시 공격에 나서게 되나, 이미 골란고원에서의 이스라엘의 승리가 결정적이었으므로 이스라엘이 주병력을 시나이 전선에 투임함에 따라 별 효과를 보지 못하게 된다.

결국 이스라엘의 용의주도한 작전에 따라 시나이 반도의 이집트 주력부대가 포위됨으로써 또다시 패배하게 되었다. 10월 25일 UN 안전보장 이사회에서 UN군의 긴급 파견을 결정하고 28일 UN 1진이 수에즈운하에 도착함으로써 제4차 중동전쟁은 마무리를 지었으며, 11월 11일 이집트-이스라엘은 휴전협정에 조인하게 되었다.


2) 제4차 중동전쟁의 영향

전쟁 중에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가 감행한 '석유의 무기화는 메이저와 산유국간의 관계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메이저에 대한 산유국의 발언권 강화는 석유가의 결정을 메이저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OPEC의 결의로써 효력이 발생한다는 대변화가 현실화되었다. 이때 석유가가 4배나 뛰면서 고유가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또한 중동 비중의 상승은 PLO의 이미지 상승을 가져오게 되고 1973년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서 개최된 아랍정상회담에서 "PLO를 팔레스타인 주민의 유일하고 합법적인 대표"로 승인함으로서 PLO는 팔레스타인의 '유일한 합법적 기관'으로 정착되었다. 이에 따라 국제연합도 PLO를 외부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는 자결권과 민족 독립과 주권을 가질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게 되었다. 즉 PLO가 테러리스트가 아닌 정치적 단체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또한 미국의 경우 대중동 관계 개선이 활성화되면서 중동의 평화를 위해서 미국의 작용이 필요 불가결하다는 결론을 내었다. 결국 1974년 미국무장관 키신저의 노력으로 이집트-이스라엘간의 1차 병력 철수가 합의되었고, 시리아-이스라엘 병력 철수, 이집트-이스라엘간의 시나이 병력 철수 문제가 합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