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역사

이란-이락전쟁과 그 영향

작성자
kislam0
작성일
2016-03-19 09:47
조회
550

이란-이락전쟁과 그 영향


1. 이란의 상황

이란은 고대 페르시아 제국을 형성하였으며, 그리스, 아랍, 터키 및 몽고 등의 지배를 받았고, 19세기에는 영국과 러시아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1925년에 팔레비 왕조가 건국되었고, 1935년에는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국호를 변경했다. 이란에서는 1962년 서구화 지향의 백색혁명이 시작되었는데, 1963년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주도한 반백색혁명의 폭동으로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게 되고 호메이니(Ayatollah Ruhollah Khomeini)는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15년간에 걸친 망명생활의 대부분을 이락에서 보내게 되면서 시아파 지도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1977년 재미 유학생들에 의해 반정부시위가 발생하고, 1978년에는 반정부 시위 활동이 이란의 주요 도시로 확산되었다. 팔레비왕 치하의 이란은 정치와 종교의 분권을 도모하였는데, 이로써 종교인의 사회적 지위 저하와 사회문제 해결에 대한 성직자 참여가 위축되었으며 독실한 신자의 불만을 격화시켰다. 이러한 불만이 계속되어 호메이니의 이슬람혁명이 세속적인 팔레비조를 뒤엎게 되었다. 1979년 팔레비왕은 망명을 하게 되고, 호메이니는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게 된다. 즉 이란의 이슬람혁명이 성공을 이룬 것이다. 결국 국민투표로 이슬람공화국이 선포되고 이란 학생들에 의한 미대사관 인질사태가 발생하여 미국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혁명정부는 신헌법을 제정하게 되고, 이러한 와중에 1980년에는 이락과는 국경분쟁으로 전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2. 이란의 이슬람혁명
1979년 2월에 일어난 이란의 이슬람혁명은 팔레비 왕권의 지나친 친서구화 정책 및 권위주의적인 통치에 대한 반발과 더불어, 장기간 정치·종교적인 면에서 세력을 키워왔던 호메이니에 의한 반서구 이슬람세력의 반발로 일어난 정통 이슬람주의의 산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혁명으로 인하여 걸프연안의 세력 구도는 큰 변동을 겪게 되었다. 왕정제의 붕괴로 인한 걸프연안 왕정국들이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즉 전통적 보수왕정제 국가들은 이 사건으로 자신들의 지배 체제가 시대적으로 변혁을 겪게될 것으로 예상하게 되었다. 더욱이 이란의 시아파 지도자들은 혁명 직후 걸프연안 왕정국들에 거주하는 다수파인 순니파가 시아파 무슬림들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시아파 무슬림들은 일제히 봉기하여 걸프연안 왕정국가들을 타도하라고 부추기게 된다. 특히 이란의 호메이니의 혁명수출정책이 주변 지역으로 파급되어 이락은 불안을 느끼게 된다.



3. 이락의 상황
이락은 1932년 영국의 위임통치에서 벗어나 독립하였으며, 하심(Hashimite)왕가에 의하여 입헌군주제가 성립되었으며, 1958년 혁명 전까지는 친미·친서방 국가였다. 그러나 1958년 까심(Abd al-Karim Qasim)장군의 군사혁명으로 왕정이 타도되고, 공화국으로 정치체계가 변화되었다. 혁명 이후 이락은 1968년 바크르 장군의 쿠데타까지 3 차례의 정권 변화를 경험하였다.
1963년 민족주의 청년 장교단 주도의 군사쿠데타가 발생하고, 바아스당 정권이 출현하면서 아레프(Aref)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66년 아레프 대통령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고, 형인 모함맛 아레프(Mohammad Aref)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68년에는 바아스당내 온건파 쿠데타로 아레프 정권이 붕괴되고, 바크르가 집권하였다. 1975년 이란과 신국경협정(샤트 알-아랍수로 문제)을 조인(알제리 협정)하고, 쿠르드족과의 내전을 잠정적으로 종식하였다. 1979년 삿담 후세인(Saddam Hussein)이 바크르 대통령으로부터 정권을 인수하게 되고, 1980년에는 이란과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후세인은 1980년 국민헌장에서 비동맹원칙을 발표하면서 아랍결속을 촉구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사다트의 이스라엘 방문으로 상실한 지도력을 후세인 자신이 차지함으로써 아랍세계의 지도자로 부상하려는 의도와 함께 국제적으로 비동맹주의 원칙을 주장함으로써, 1982년 비동맹 정상회담을 바그다드에서 개최하고 국내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구축할 뿐만 아니라 비동맹세계의 지도자로 등장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락은 군사적으로는 구 소련으로부터 우수한 무기를 도입하여 지역 군사대국으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또한 1975년 이란과의 국경분쟁과 쿠르드족의 분리 요구 문제 등으로 국방에 많은 지출을 하였다. 이락은 지리적으로 아랍국가로는 유일하게 이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는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이란인의 불만 등으로 대립 관계를 계속하였다.
1980년 9월 후세인은 알제리 협정을 폐기하고 샤트-알 아랍수로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란은 이락 경비선에 공격을 명명하고 이락의 전면적 공세의 대응으로 이란-이락전쟁이 시작되었다.



3. 전쟁의 전개

1) 이란-이락전쟁 발발의 직접적 배경
이란과 이락간의 아랍권의 맹주권 및 영토 분쟁으로 인하여 발생한 1980년 9월의 이란-이락전쟁은 특히 양국의 국경지역인 샤트 알-아랍(Shatt al-Arab)수로에 관한 영유권 문제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전쟁 발발은 표면적으로는 샤트 알-아랍수로의 영유권 문제와 이란이 강제로 점령한 호르무즈 해협의 3개 도서의 반환 문제로 야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전쟁은 맹주권, 즉 이락의 후세인의 정치적 야망과, 혁명 수출을 위한 호메이니의 혁명관이 서로 상충하면서 일어난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먼저 샤트 알-아랍 수로의 경우, 걸프만과 연결되어 있어 경제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므로 양국간 분쟁의 원인이 되었으며, 이란과 이락의 관계에 있어 변수로서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32년 이락이 독립하면서 이란과 이락간에 국경조정 문제가 제기된 이래 이 수로는 1937년 이란·이락의 국경협정에서 임시로 그 경계선을 수로의 동안으로 결정함으로써 이락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이란측은 국제법상의 관례를 들어 수로의 계곡선을 국경선으로 정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영국이 이락측을 지지하고 나섬으로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 후에도 이란은 수로의 경계를 계곡선으로 하기 위하여 이락과의 협상을 수 차례 시도했으나, 이락의 경우 일단 자국 소유로 인정된 지역을 이란에 반환할 의사는 당연히 없었다. 그리하여 수로 문제는 계속적인 문제점으로 남아 있었고, 1960년대 말∼70년대 초, 이락이 국내의 쿠르드족의 반란 문제로 고심하고 있었을 때 이란은 쿠르드족을 지원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이락은 1975년 알제리에서 개최된 이슬람국가들의 정상회담에서 이란측이 쿠르드족의 반란군에게 일체의 원조를 중단하는 대신에, 수로의 양국경계로서 계곡선으로 하는 지정 문제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1979년 후세인이 이락의 대통령이 되면서 알제리 협정의 폐기를 선언하였다. 그는 샤트 알-아랍수로의 이락 영유권을 선언하고, 1971년 팔레비 정권이 걸프만 안보의 보장이라는 명목으로 점령한 아부 무사, 톰브 등의 도서에서의 이란군 철수를 요구하였다. 이와 같은 양국간의 국경 문제에 대한 충돌이 결국 이란-이락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2) 전쟁의 발발
이락은 전쟁 초기계획으로 이란의 유전, 정유시설, 운반 루트의 파괴와 이러한 산업지역을 테헤란 정부와 단절시킴으로써 혼란에 빠뜨리는 결과를 예상하였다. 이락은 바그다드와 가까운 중부 접경지대로 진격하고 다음 목표인 샤트 알-아랍수로를 넘어 후제스탄의 주요 도시인 호람샤흐르와 아바단을 점령하였다.


이락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양국간의 전쟁은 점차 이란의 반격으로 상호공방이 교차되면서 장기전으로 돌입하게 된다. 이란의 경우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슬람혁명은 팔레비 정권을 붕괴시키는데는 성공했지만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혁명 이전부터 계속된 시위와 파업은 다국적기업의 철수, 석유 수입의 감소 등으로 이란의 경제는 1982년 초 최하수준을 기록하였다. 또 산업생산 능력이 40%를 밑돌았고 실업률이 40%를 육박했으며, 전 분야에서 고질적인 부족 현상은 부품과 원자재, 섬유류에서 매우 극심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쿠르드족과 발루치족 그리고 후제스탄 아랍인에 의한 소수민족의 소요와 자치 요구 및 1980년 사전 발각된 쿠데타 등으로 정치적 불안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란 내의 정치적, 경제적 불안과 이락의 침공은 이란에게 유리한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란은 위기를 이용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즉 적의 조직적 근절과 성직자에 보다 의존하는 국가 건설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위기를 이용하였다. 대중의 관심 대상을 국외에서 찾음으로써 국내적 불만이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려 하였다. 또한 이 전쟁은 혁명에 대한 개인적 의지에 관계없이 모든 이란인을 전쟁에 참여시키는 민족적 동원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이란 혁명정권은 혁명임무가 완수되어졌다고 국내 정세를 평가할 때까지 이락과의 전쟁을 대가 없이 종결지으려 하지 않았다.



4. 전쟁의 영향
장기전으로 약 8년간 교전했던 이락과 이란은 1987년 UN의 종전권고 결의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1988년 8월에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란혁명,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란-이락전쟁은 걸프지역 국가들과 중동지역의 석유에 의존하는 서방세계에 대단한 충격을 주고 그 대책을 강구케 하였다.


1980년 미국의 카터는 걸프에서 미국의 이익이 외부 도발에 도전 받을 경우 군사력을 통해서라도 방어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카터 독트린'). 이러한 경고는 이란의 혁명(친서방적 팔레비 정권 붕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걸프 연안국들이 안보에 위협을 느낀 후에 취해진 조처이다. 이란-이락전쟁 발발 후 아랍국가들에게 나타난 현상 중 하나는 심화된 양극화 현상이었다. 이란을 지원했던 아랍국가들은 시리아, 리비아, 남예멘(사회주의)과 같이 친소련 국가들이었으며, 이락을 지원했던 국가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및 걸프 연안국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