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역사

걸프전과 그 영향

작성자
kislam0
작성일
2016-03-28 08:35
조회
566

걸프전과 그 영향





1. 이락의 상황



걸프지역은 세계원유 확인매장량의 53%가 밀집한 곳이며 또한 천연가스도 약 23%가 매장된 것으로 확인된 세계에너지 공급원이며,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GCC 6개국과 이란 및 이락이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역이다. 걸프지역 국가들은 전세계 석유 생산량의 약 34%를 차지하고 있으며, EU와 일본 등에 석유 수입량의 반 이상을 공급하고 있다. 미국도 석유 수입량의 약 10% 이상을 걸프지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으며, 한국도 석유 수입량의 약 70% 이상을 걸프지역에 의존하고 있다.


이락은 이란과의 전쟁 후에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되었다. 또한 전후 복구 문제가 심각한 상태였으며 남아도는 군사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할 경우 쿠데타 발생 가능성이 존재하고 있었다. 당시 이락은 주요 자금원인 원유가격의 향방에 따라 경제가 큰 영향을 받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친미 성향의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가 증산을 하여 유가를 폭락시킴으로써 이락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후세인은 이의 해결을 위해 쿠웨이트 병합의 야망을 가지게 되었다.


이란-이락전쟁 중 미국은 이락을 지지했으나, 전후 이락이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면서 반미로 돌아섰다. 이에 미국은 이락의 쿠웨이트 합병 직전 대 이락 무역금지 조치를 통과시켰다. 또한 후세인의 화학 무기 조성설을 퍼뜨림으로서 후세인의 이미지를 손상시킨다. 미국은 세계 화학무기 제1위의 소유국이다. 그러므로 세계 화학무기 시장에서의 주도권적인 문제도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과 이락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한 직접적인 원인은 1990년 2월 후세인이 암만에서 열린 아랍정상회담에서 미국 군대, 함대가 중동에 주둔하고 있는 것을 비난하면서 미국이 유가를 농락하고 있다고 연설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이락-미국 사이에 갈등이 깊어진다. 이 연설 직후부터 미국의 이락 비난이 계속되면서 연설 당시 18-20달러 수준이던 유가가 11달러 수준까지 떨어졌다. 이로써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던 이락은 수십억 달러의 손해를 입게 되었다. 후세인은 1990년 5월 28일 바그다드 아랍정상회담에서 미국과 친미 왕정국가들의 유가정책이 이락에 대한 전쟁 행위라고 경고하면서 쿠웨이트 침공을 암묵적으로 내비치게 된다. 1990년 7월 10일 유가문제를 쿼터제로 복귀시키려는 4개국 석유장관회의가 열렸지만 쿠웨이트가 거부하자 후세인은 군사행동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2. 쿠웨이트의 상황


쿠웨이트는 오스만투르크 당시 이락 바스라 주의 한 군(Qadha)이었다. 즉 오스만 왕조 당시의 행정법에 의하면 쿠웨이트는 바스라 주에 소속된 이락의 일부였다. 1897년 바스라 주지사 무흐신 파샤는 쿠웨이트의 세이흐(족장) 무바락 알-사바에게 쿠웨이트 지방의 지방관으로 임명한다는 술탄의 칙령을 통보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그 후 영국이 이 지역에 식민주의적 패권을 펼치게 되는데, 영국의 입장에서 볼 때 쿠웨이트 지역은 정치적,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무역 통로였다. 또한 쿠웨이트에 엄청난 석유 매장량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영국은 쿠웨이트에 영향력을 강화하여 인위적인 국경선을 긋게 되는데, 이것이 구체화된 것은 1916년 프랑스와 맺은 사이크스-피코(Sykes-Picot)조약에서였다. 1899년 영국은 쿠웨이트를 보호령으로 선포하고 이 지역에서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지방토호에 불과했던 사바족을 왕가로 만들어 독립시켰다. 당시 이락은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쿠웨이트를 이락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국경을 침범하자 영국이 군대를 파견하여 이락의 남하를 저지하였다. 그 후 1967년, 1973년, 1978년에도 국경분쟁이 발생하였고 이락과 쿠웨이트의 국경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락 침공전 쿠웨이트의 노동자는 자국인은 40%에 불과하고 60%는 요르단, 팔레스타인, 파키스탄 등 아시아에서 온 노동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 외국 노동자들이 취업인구의 90%를 차지하면서 쿠웨이트를 유지했다. 정치와 경제의 핵심은 200여명의 사바 왕가가 장악했으며, 이들은 막대한 석유수입을 바탕으로 호화생활을 하였다. 이락이 이란과의 전쟁으로 정신이 없을 때 쿠웨이트는 이락 영내 70㎞ 지점에 국경검문소를 만들어 이락을 자극하였다. 1990년 8월 2일 이락이 쿠웨이트를 무력 침공하여 반나절만에 합병함으로써 시작된 걸프전은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군이 무력 개입을 함으로써 확산되었다. 이처럼 걸프전은 매우 다양한 현상을 포함하고 있지만 압축적으로 본다면 세계경제의 원동력인 석유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3. 미국의 대이락 정책


걸프전 당시 이락은 이란과의 전쟁과 경제 운영의 실패, 계속된 유가 하락으로 심각한 경제난에 봉착해 있었다. 장기적인 이란과의 전쟁으로 150만여 명에 달하는 인명 희생과 피폐된 경제에 따른 국민의 불만이 누적된 상태에서 삿담 후세인이 전후 경제 운영에 있어 경제 활성화보다는 군수산업과 전시효과 사업에 치중함으로써 국민들의 불만이 더욱 가중되었다.




이락은 1990년 8월 2일 군사작전을 개시하여 별다른 저항 없이 쿠웨이트를 점령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미국, 서구 및 주변 아랍국들은 이락의 쿠웨이트로부터의 철수와 걸프지역의 확전을 방지하기 위해서 이락에 대하여 강·온 양면정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미국과 쿠웨이트의 요청으로 긴급 소집된 국제연합의 안보리는 이락군의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철수를 촉구하는 결의안(660호)를 통과시키고, 미국의 제의로 이락에 대한 전면적인 경제제재 결의안(661호)을 통과시켰다.


미국 및 서유럽 국가들은 탈냉전 시대의 첫번째 지역분쟁 위기로 등장한 이락의 쿠웨이트 침공을 방치할 경우 세계 지역분쟁 발생을 야기하는 선례가 될 수 있다는 점과 냉전 이후 평화적인 새로운 국제질서의 창출을 위해서 대 이락 강경제재를 취해야 하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걸프 산유지역의 안보는 미국과 서방국가들의 경제안보에 직결되어 있어 걸프사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게 되었다. 특히 미국은 이락의 쿠웨이트로부터의 무조건 철수를 요구하는 유엔 결의 및 경제제재 등 일련의 외교적 해결책을 강구해 왔으나 그 효력이 미미한 것으로 판단, 유엔 안보리의 결의에 따라 대 이락 군사적 응징 조치를 취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락의 쿠웨이트 합병정책이 강화되자 미국은 1991년 1월 15일로 철군시한을 한정하여 이때까지 철군하지 않는 경우에는 무력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사용할 수 있는 국제연합 안보리의 결의안(678호)을 획득하여 이락에 대한 무력적인 응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미국의 유엔을 통한 대 이락 제재조치와 병행하여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 방위 및 대 이락 무력시위 목적으로 미군의 사우디아라비아 파병을 결정하게 되었다. 영국, 프랑스 등 주요 서구 우방국가들도 이 지역에 그들의 군대를 파견하게 되었다. 쿠웨이트 사태로 소집된 아랍정상회담에서 이집트, 시리아, 모로코 등 반 이락 국가들도 사우디아라비아에 파병할 것을 결의하게 된다.



4. 다국적군의 이락 공격


1991년 1월 9일 제네바에서 미국의 베이커 국무장관과 이락의 아지즈 외무장관회담과, 같은 해 1월 12일 케야르 국제연합 사무총장의 바그다드 방문을 통한 중재노력이 이었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미국 의회는 예상되는 걸프전쟁과 관련하여 국내여론을 규합하고 부시 대통령을 중심으로 단결력을 과시했다. 즉 이락의 굴복을 유도하고 전쟁 발발시 그 수행에 있어 부시 대통령에 전권을 위임하고 대 이락 무력 사용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결국 쿠웨이트로부터의 이락의 철수가 1991년 1월 15일까지 이루어지지 않음에 따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다국적군은 1월 17일 새벽 대 이락 기습공격을 감행함으로써 걸프전쟁이 발발하였다.


걸프전쟁은 이락 대 쿠웨이트 전이 아니라 이락 대 다국적군의 전쟁, 더 정확히 이락 대 미국의 전쟁이었다. 미국은 중동에서 사담 후세인과 같은 과격세력을 제거하여 온건국가를 중심으로 새로운 세력균형을 통한 중동질서의 재편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미국은 걸프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전비 부담 가중, 세계의 반전 여론, 아랍권의 반미 감정의 증폭, 사막기후의 급변, 3월 15일 이후에 시작되는 라마단 등이 다국적군에 불리하다는 판단 아래 속전속결의 단기전을 원했다.


1991년 1월 17일 이락에 대한 기습공격으로 전쟁을 시작한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군은 1개월 이상의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황에 대한 성과가 나타나지 않고 장기화의 양상을 보이게 되자, 1991년 2월 23일 지상군을 포함한 전면전을 개시하게 된다. 지상군의 돌입에 따라 완강히 저항하던 이락 진영이 급속히 붕괴되기 시작하고 2월 28일 이락은 국제연합 결의안의 무조건 이행을 선언하고 종전하게 된다. 이를 확인한 부시는 전쟁 승리와 휴전을 선언함으로써 걸프전은 종결된다.



5. 걸프전쟁의 영향


걸프전쟁은 미소의 탈냉전에 따른 신질서의 개편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때 발생함으로써 국지전에 대한 세계의 입장을 확인한 전쟁이었다. 이락에 대한 철저한 응징은 신세계 질서하에서 불법적 침략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미국은 걸프전쟁을 주도하여 성공적으로 종결한데 따른 위상 강화로 정치, 경제, 군사 등 여러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초강국으로 부상하였다.


이락은 전범국으로 낙인찍히게 됨으로써 경제제재 조치 등으로 이락의 중동지역에서의 위상 약화를 가져왔다. 또한 미국의 중동문제 개입에 확실한 길을 열어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경우 전시 이락의 미사일 공격을 감내하여 강경 아랍국들의 참전에 영향을 주지 않음으로써 미국의 막대한 후원과 더불어 중동지역에서의 안정을 도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