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역사

중동의 역사 (메소포다미아)

작성자
무스타파
작성일
2015-09-27 10:15
조회
522

중동의 역사

메소포다미아

메소포타미아는 근동의 두 큰 강인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 사이, 그리고 강을 따라있는 보다 넓
은 지역이 포함된다. 하부 메소포타미아는 아카드(Akkad)와 수메르(Sumer)두 부분으로 나누어 부
르고 있는데, 아랫부분인 수메르는 B.C 4000년에 이르기 수세기까지만 해도 습지였기 때문에 거주
에 부적합한 곳이었다. 메소포타미아 기후는 무덥고 습하고, 겨울비가 없기 때문에 관개시설 없이
는 가장 원시적인 농경만이 가능하였다. 그리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은 종종 봄에 홍수가 오
는데, 비가 많이 오거나 북쪽의 녹은 눈이 흘러 내려와 홍수를 이룬다. 이러한 지역적 영향으로 관
개시설은 거대한 사업으로 강력한 권력을 가진 사람만이 계획, 유지해야 했는데, 이것은 조그마한
도시국가 왕이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이 지역을 지배했음을 알 수 있다.

수메르인들

수메르인들은 특히 지규랫(Ziggurats)건축-산과 비슷한 형태의 피라밋적대 위에 신전을 지었던-
그들이 동쪽의 산이 많은 지역에서 왔으리라 고 추측하고있다. 그러나 그들의 일부 전통은 그들이
역사시대 이전의 오랜 시기 동안 해안 근처에서 살았으리라는 추측도 제기하고 있다. 아마 이들은
하부 메소포타미아의 토착민인 것 같다. 그들은 도시국가 체계를 만들어 왕은 독재정치가 아닌 어
느 정도 민주주의적인 성격으로 통치하였고 국가가 중심이 되어 경제문제를 주도해갔다. 도시국
가들도 자립하였지만 위기시에는 군사적으로 연합하였다.

메소포타미아의 역사

B.C 5000년경: 신석기 시대를 벗어나 채도문화가 발달 B.C4000년경: 수메르인들이 정착하여 청동
기 문화가 발전하게 되는데 이들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발생시킴 . B.C 3000년경:UR,Lagash. Um
ma, Nippur,Kish같은 도시들이 발생 B.C 24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북쪽지역에 살던 아카드인(셈
족)들이 주변국가를 정복하여 통일 왕국을 세움으로서 수메르인들은 셈족의 지배를 받음. B.C 21
000년경: 수메르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셈족으로 몰아내고 Dung가 왕이 되어 다스린다.
B.C 1900년경: Gutr족의 침입을 받아 혼란상태가 됨 B.C 1800년경: Amor인이 메소포타미아 지역
을 정복하고 나라를 세움-바빌로니아 왕국(Babylonia)이 시대에 함무라비왕이 바빌론市에 수도를
정하고, 성문법을 제정하여 국가 발전에 기틀을 세웠으나, 古바빌로니아는 B.C 1600년경 카시트
(Kassite)에 의해 멸망돤다.

B.C 1300년경: 앗시리아(Assyria)인들이 세계전역을 통일하여 세계 대제국을 세움 이들은 철저한
정복정치를 통해 각 지역의 상황을 감시하여 반란의 기미가 있으면 잔악하게 진압하여 속국들을
통치하였다. B.C 625년경: 칼데아(Chaldea)인들이 앗시리아인을 멸망시키고 바빌로니아 왕국을
계승하며 신 바빌로니아 왕국을 세움. B.C 550년경: 페르시아(Perisan)인이 침입하여 바빌로니아
왕국을 멸망시키고 페르시아 왕국을 세움. 소아시아, 이집트까지 정복하고 강력한 통치국가를 유
지하였다. B.C 330년경: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하고 헬레니즘 세계를 건설하였다. 메소포타
미아는 여러 민족이 침략하고 지배하는 동안 여러 왕조의 교체를 통해 복합적인 문화가 형성되었고,
경제, 과학, 법 등 시대별로 각기 독특한 체계를 이룩하였다.

이집트

B.C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이집트를 "나일강이 준 선물"이라고 했을 만큼 주기적인
범람과 나일강이 매년 침전시켜 주는 보드라운 충적토는 토양을 새롭게 해주고, 더구나 용이한 교
통로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강물이 흘러내리는 대로 따라 내려갈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바람이 연
중 대부분 물을 거슬러 남쪽으로 불어왔기 때문에 물을 거슬러 쉽게 항해해 올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집트는 지형상 북으로는 지중해가 있고, 서로는 광활한 사하라사막이 뻗쳐있고, 남으로
는 나일강을 따른 급류와 비좁은 강폭이 있어 서쪽의 연안이나 동북연안의 접근을 쉽게 차단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대외 침략자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델타지대는 下이집트(Lower Egypt)
라고 불리고, 그 남단의 땅 을 上이집트(Upper Egypt)라 부른다.

나일강은 세계에서 가장 긴 강으로 빅토리아호에서 발원하여 누비아 사막읗ㄹ 통과하는 백나일과
에티오피아 타나호에서 발원하는 맑은 청나일이 수단의 하르툼에서 합류하여 5-6개의 대폭포를
거쳐 북쪽으로 흐르는데 멤피스(현 카이로 남쪽 20㎞ 지점)까지 다른 지류의 합류없이 깊은 계곡
을 구불구불 통과한다. 아비도스 근방에서는 두 줄기로 나뉘고 그 중 동쪽 흐름이 주를 이루며 수
목이 무성하다. 멤피스에 와서는 강이 부채꼴 모양으로 여러갈래로 퍼져 넓은 델타지대를 만들고
마지막에 지중해로 흘러 들어간다.

나일강은 매년 정기적으로 6월초에 시작해서 12월초까지 범람한다. 이 범람은 중앙 아프리카대륙
의 열대성 계절강우에 기인한다. 또한 나일강은 상류에 급류와 대폭포가 가로막아 뱃길이 단절되
고 나일강 계곡을 넘어서면 사막이 펼쳐져 있어 외부인의 침입이 곤란하였다. 이에 따라 이집트는
외부문명의 영향에서 격리 고립됨으로써 독특한 독자적 문화를 가지게 되었다.

이집트에게 나일강은 항상 중요하였지만, 고대 이집트인들은 태양을 휠씬 더 중요한 것으로 간주
하였다. 여기에 삶의 진정한 근원이 담겨 있는 것이다. 매일 태양이 질 때는 죽음과 같지만 다시 태
양이 떠오르면 다시 태어나고 삶이 새로워진다. 그것은 강이 매년 생활을 새롭게 하는 것과 마찬
가지이다. 아마도 이런 자연현상이 이집트인들에게 죽음에 대한 승리의 관념을 심어준것 같다. 획
일적인 풍경 또한 이집트인들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강과 두개의 제방 그리고 푸른 경작지가 똑
같이 펼쳐져 있었고, 그 뒤에는 사막과 산들이 동서 방향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것은 이집트인들에
게 놀라운 대칭과 균형에 대한 감각을 제공하였다. 더욱이 이 단조로운 풍경과 다른 것은 모두 생
명으로 가득찬 것으로 간주되어 이집트인들로 하여금 자연에 대한 토템적 사상을 가지게 하였다.

이집트역사

이집트 문화는 하안 문화(Riparian Culture: 강, 호수의 기슭)였다. 최초로 정치적인 동맹이 이루어
졌을 때 나일강 어귀의 삼각주 지역에 북왕국이 생겼고 멤피스와 나일강의 첫 번째 폭포 사이에 남
왕국이 생겼다. 이집트의 실제 역사는 이 초기의 두 왕국의 연합과 함께 시작하는데 이 사건은 기
원전 2900년경 제 1대 왕조의 메네스왕의 통치중에 일어났다. 이집트 역사는 대개 왕조중심으로
분류하고 있다. 연대 특히 제일 초기 시대의 것들은 너무 부정확하여 수 백년이 틀릴 수도 있다.
(이론서마다 이집트 역사가 각기 틀리게 표기되어 있음)여기에서 사용한 신왕국까지의 연대와 분
류는 독일의 이집트학자인 게오르그 슈타인도르프의 것을 따르기로 하겠다.

구왕국(기원전 2900-2270년)은 제 1왕조로부터 제 6왕조까지 이어진다. 이 시기는 문화가 싹틀 전
조의 시기이고 문화의 기초적 형태인 종교와 문자와 예술의 특색이 그 성격을 갖추었던 시기이다.
그것은 또한 기제의 피라미드를 건립한 사람들과 체옵스의 체프렌과 이게리누스 같은 위대한 왕들의
시대인데 그들은 모두 제 4왕조에 속한다.

제 1과도기(기원전 2270-2100년)는 구왕국의 붕괴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것은 봉건제도로 넘어가
는 과도기이며 멤피스에 왕의 권위가 형식적으로 남아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제1 중간기는 제
7왕조로부터 제 10왕조까지로 되어있는데 다 합해서 왕이 30명도 넘는다. 중기 왕국기원전 2100-
1700년)은 헤라크레오폴리트 왕들을 축출하고 다시 나라를 통일한 테베스의 군주들이 통치했던
발전의 시기를 나타낸다. 이시대는 제 11왕조로부터 제 13왕조까지를 포함한다. 이 시대를 우리는
문화의 개화기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 때 피어난 문화양식은 한명의 아메네메트왕과 세명의 세소
스트리스라는 이름을 지닌 네 명의 군주 밑에서 완성되었던, 수없이 많은 뛰어난 건축물들에서 찾
아볼 수 있다.

두번째 과도기(기원전 1700-1500년)는 힉소스왕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힉소스 왕조는 셈족이었는
데 그들은 나일의 땅에 침입하여 정복하고 한 세기 동안 지배했다. 그들은 결국 테베스의 왕들에
의해 쫓겨난다.(제 17왕조). 아주 최근까지만 해도 힉소스 왕조가 쫓겨난 것은 성경에 나오는 유태
인의 춥애굽의 전설과 관련있다고 가정해왔었다. 지금 이 가설은 완전히 배제되었다.

신왕국(기원전 1555-1090)은 정치적으로 위세를 떨친 시대였고 제 18조부터 제 20조에 이르는 "황
제 통치주의자"인 파라오들의 시대였다.

토트메스 3세의 정복은 근동과 관계를 맺게 하였다. 외국인들은 이집트에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당
했고 엄청난 부가 나일의 땅으로 흘러들어 왔다. 훌륭한 건물들이 세워졌다. 아메노피스 3세는 바
빌로니아와 앗시리아의 왕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를 계승한 아메노피스4세(네페르티티의 남편)는
위대한 종교개혁자여서 오래된 종교를 태양 숭배의 양식으로 바꾸려 시도했고 그 이유에서 자신을
이크나톤 - '아톤(태양신)이 만족한사람' - 이라 불렀다. 그는 사막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고 텔-
엘-아마르나라고 불렀는다. 그것은 테베스의 경쟁상대가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종교는 내란들 속
에서 와해되었고 왕의 사후까지 지속하지 못했다. 아메노피스의 사위인 투탄카멘의 통치하에서 왕
궁은 다시 테베스로 옮겼다. 그렇지만 이집트는 제 19왕조의 왕들 밑에서 그 정치적인 권력이 절정
에 달했었다. 후에 람세스 대왕이라 불리는 람세스 2세는 66 년의 통치기간 동안 아부심벨, 카르나
크, 룩소, 아비도스 그리고 멤피스에 있는 기념비적인 건축물들과 라메세움이라 불리는 테베스에
있는 보시 사원에 자신의 무한한 힘을 그대로 나타냈다. 람세스 사후 무질서가 뒤따랐으나 람세스
3세의 21년 동안 계속된 통치기간엔 평화와 질서가 회복되었다. 그 후로는 이집트는 점점 강력해
지는 태양신 아멘(아문또는 아몬)의 성직자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세번째 과도기(기원전 1090-712년)는 소요와 권력의 변동이 심한 시기였다. 제 21왕조에서 제24왕
조에 이르는 왕들 중에서 세숑크 1세가 솔로몬의 사원에 뛰어들었던 예루살렘의 정복자로서 흥미
를 끈다. 제 24대의 왕조 밑에서 이집트는 잠깐동안 이디오피아의 지배를 받았다.

후기(기원전 712-525년)에는 제 25왕조의 에사라돈왕 치하에서 앗시리아인들에게 이집트가 정복
당한 일이 있었다. 제 26왕조는 이디오피아를 잃기는 했지만 다시 한번 나라를 통일할 수있었다.
그리스와의 동맹은 무역과 교류에 활기를 띠게 하였다. 제 26왕조의 마지막 왕인 프삼틱(프삼테
크) 3세는 펠루시움의 전투에서 페르샤의 왕 캄비세스에게 패배했다. 그 후로는 이집트는 페르샤
의 영토가 되었다. 기원전 525년에 이미 이집트의 진정한 문화적 역사적 원동력은 다소 진되었다.
이집트에 대한 페르샤의 지배(기원전 525-332년)는 캄비세스, 다리우스 1세와 크세르크세스 1세
를 거쳐 다리우스 2세 하에서 붕괴했다. 이 기간 동안 이집트의 문화는 과거에 의지하여 명맥을 이
어 왔고 이집트는 '강자들의 전리품'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스와 로마의 지배(기원전 332년-기원후 638년)는 알렉산더 대왕의 이집트 정복과 알렉산드리
아의 건설로 시작되었는데,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 대 도시풍의 초점이 되었다. 알렉산더 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했으나 톨레미 3세에 의해 이집트는 다시 정치적인 자치권과 권력을 찾았다. 예수
탄생 이전의 두 세기 동안에는 톨레미 왕조내에 반목이 많았다. 이집트는 점점 로마의 영향권내로
끌려 들어갔다. 후기의 로마 황제들 밑에서 이집트는 자치권을 찾은 것같이 보였으나 실제로는 로
마의 영토이며 로마제국의 곡창이었고 약탈로 철저하게 빈곤해진 식민지였다. 기원후 640년 이후
로 이집트는 아랍의 칼리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가 후에 터키의 오스만 왕조에 공물을 바졌다.
이집트는 마침내 나폴레옹의 정복에 의해서 복잡한 유럽역사에 휘말려 들어갔다.

그리스-로마인의 등장과 이란 족
기원전 4세기 후반에 중·근동 지역에는 그리스-로마인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 시기는 알렉산
더 대왕의 중·근동 정복시에서 이슬람의 등장시기까지 거의 천년이나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는 동
서의 교류는 중·근동과 유럽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BC. 334년 알렉산더는 소아시아반도의 그
리스를 페르시아인으로부터 되찾았으며 북부 시리아로 진군하여 다리우스 3세가 이끄는 페르시아
군을 이수스(Issus: BC. 333)에서 대파하였다. 그 이후 페르시에 통치하에 있던 이집트를 정복
(BC. 332)하였고,그 다음해에는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인 수사(Susa), 다리우스, 세르섹(Xerxes)의
왕도인 페르세폴리스(Persepolis)를 함락하엮다. 동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의 발흐 alkh, Bactria),
중앙아시아의 부하라(Bukhara), 인더스 강 유역까지 정복하였다. 그 후 바빌론에 돌아와 사망하였는
데 그의 나이 32세였다.

알렉산더의 정복은 동서 문화교류를 촉진시켰다. 그는 다리우스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페르시아의
옷을 입었고 병사들에게도 이를 장려하였다. 또 중·근동지역에 그리스식의 도시를 건설하여 문화
교류를 촉진하였고, 스스로 페르시아제국의 아케메니드 조를 계승한 세력, 즉 다리우스의 후계자로
자처하였다. 이란의 역사서에는 이를 오랑캐 알렉산더가 이란황제로 등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알렉산더 사후 그의 제국은 4명의 장군들에 의해서 분할된다. 가장 유능한 셀루커스(Seleucus)는
시리아, 소아시아 반도의 대부분, 인도국경에 이르는 동부지역을 차지하였고, 소아시아 반도의 나
머지는 안티고누스에게, 마케도니아는 안티 파트로스에게, 프톨레미는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셀루
키드 조는 로마 장군인 폼페이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였다. B.C. 67년에 동부 지중해에 거점을 마
련하여 3년만에 시리아, 팔레스타인, 및 이집트를 병합하였다. 이집트는 당시 프톨레미조의 마지
막 왕인 클레오파트라(BC 69-30)의 통치아래 있었다 . 여왕은 처음에는 동생이자 남편인 프톨레미
12세와 통치했으나, 로마의 지배하에 있을 때(BC 48-30)는 사이에는 혼자 다스렸다. 기원전 48년
에 줄리어스 케사르는 폼페이를 쫓아 이집트까지 왔으나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진 후 그 다음
해 동방을 점령한 후 로마로 돌아간다.

기원전 30년에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한 후 프톨레미조는 셀루키드조와 함께 두 그리스 왕조는 로마
의 통치아래 들어간다. 이 왕조들이 심은 그리스 문화는 그대로 존속하여 셈족의 문화와 결합하여
헬레니즘(Hellenism)으로 알려진 새로운 문화를 낳게 된다. 이 문화는 그 후 천년간이나 중·근동지
역의 지배적 요소로 작용하였으며, 이슬람의 등장 후에는 그리스 과학과 철학이 다시 부흥하여 이
슬람 문화의 구성요소가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기원전 3세기 말경부터 로마제국은 소아시아 반도의 마그네시아에서 셀루키드군을 격파(B.C190),
시리아의 정복(B.C. 64), 이집트의 병합(B.C. 30)을 통하여 중근동 지역에 확고한 통치체계를 갖추
었다. 이체제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케사르(BC 27-AD14 재위)때 더욱 강화되었다. 이때부터
페르시아 지역을 제외한 중동지역은 역사상 처음으로 전 지중해 연안지역을 통합한 로마제국의
일부분이 되었으며 지중해 세계는 인종, 언어, 종교, 문화적 전통에 관계없이 정치적으로 통합되었
다. 이는 알렉산더와 그 후계자들보다 규모면에서 훨씬 큰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통합, 결속
정책은 그의 후계자들에게도 이어졌었는데 공이 큰 지방 사람들에게는 로마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시민권의 획득은 법적 권리와 특권 및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 주었다.

기독교
기독교는 셈족의 종교로 그리스와 로마의 지배로 성장 하였다. 그러나 로마 시대의 박해가 시작되
었는데 그 이유는 일신론자들이 그들의 종교만이 유일하고 진실된 종교로 보았기 때문에 국가의
공식행사에 참여하거나 다른 종교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거나, 또는 로마의 황제나 고위 관리에게
무릎을 꿇고 절할 수가 없었다. 그들에 있어 다른 종교와의 공존이란 개념은 상상할 수 없었기 때
문에 그들의 편이 아닌자는 누구나 그들의 적으로 보았고 국가 공식종교들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A.D 64년에 시작된 네로 황제의 박해정책은 종교적 동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도들은
로마의 중심가에서 나온 대화재 때문에 속죄양이 된 것이다. 그 후 트리얀 황제는 112년에 칙령을
내려 국가의 수호신에게 충성을 서야가지 않는 모든 기독교도를 반역자로 몰아세웠다. 또 각 주의
총독들은 개인적 또는 지방적 이해관계에서 기독교도들을 징벌하였으며, 발레리안 황제는 257년
에 강도를 높여 모든 기독교도의 집회를 금지시켰다. 303년에 나온 디오클리티안 황제(284-305)는
칙령으로 교회건물을 파괴하였고, 서적은 불태워졌으며 기독교도인 관료와 군인은 해고당했다. 그
후 소아시아 반도의 니콜라스 주교도 고문을 받아 죽었는데 그는 성 니콜라스로 불리워졌으며, 나
중에는 산타클라우스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결국 로마의 무자비한 탄압은 비기독교인에도 충격을
주어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등장하여 기독교를 공인하게 된다. 그는 또한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하였
다. 이곳은 비잔티움이라 불린 곳으로 약 1000년 동안은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 그리고 약 500년
동안은 오스만제국의 수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