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역사

중동의 역사 (칼리프제 등장)

작성자
무스타파
작성일
2015-10-08 16:36
조회
557

칼리프제 등장과 역사



무함맏드가 후계자(칼리프, Khalifah) 문제에 관하여 언급 없이 사망하자, 이슬람공동체는 부족회의에서 선출하는 아랍전통에 따라서 후계자를 선출하게 되었다. 그 결과 무함맏드의 후처인 아이샤(Aishah)의 아버지이며 오랜 친구인 아부 바크르(Abu Bakr, 632-634)를 선출하게 되는데 그가 곧 제1대 칼리프이다. 그는 예언자가 포교를 시작할 때에 개종한 첫번째 인물로서 칼리프로 선출된 후 그의 칭호는 '알라의 사도의 후계자 또는 대리인'(Khalifat Rasul Allah)이었다. 이것이 곧 칼리프제의 시작이다. 초기의 칼리프는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이었다. 그러나 후기에 칼리프의 정치적 권력의 상실로 종교적 역할만이 남게 된다. 초기의 칼리프들은 통치자라기보다는 동등한 구성원 중의 대표자에 지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아부 바크르와 그의 후계자는 주로 정치와 군사 문제에 열중하였다. 즉 시리아지역과 이라크 지역을 공격하여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 두지역은 당시 대강국이었던 페르시아의 사산제국과 비잔틴제국의 영역이었다. 당시 무슬림들이 이지역을 공격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으나 베두윈들의 관습인 약탈을 하기 위해 침략한 것이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다. 아부 바크르는 예언자의 사후에 일어난 여러 아랍부족의 반란을 진압하여 이슬람공동체의 체제를 갖추었다. 칼리프가 될 수 있는 몇가지 조건으로 연장자로서 재정적 조건이 갖
추어져 있어야 하고 자손들을 두고 있어야 한다. 아부 바크르는 어려서부터 무함맛과 죽마고우였고, 성장해서는 정치적, 사상적 동지였으며 정치헌금을 많이 냈던 인물이었다. 무함맛이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할 때 모든 사람들이 그를 정신병자 취급했지만 아부 바크르는 예언자의 말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랐다. 예언자의 첫부인 하디자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딸 아이샤가 예언자의 두 번째 부인이 되면서 밀접한 친인척 관계가 맺어지게 된다.


아부 바크르의 통치기간 중에 이슬람이 일상생활의 종교로 발전하면서 각 무슬림의 생활 철학이 되었는데 피를 먹지 말라는 꾸란의 계율에 따라 이슬람식 도살법이 마련되었고 비이슬람인의 성지출입이 금지되면서 메카와 메디나가 성역화 되었다. 그가 63세로 사망했을 때 국가 지도자의 재산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라는 무함마드의 말에 따라 칼리프는 예언자 사망 후 그의 재산을 모두 국고로 환원시켰다.


제2대 칼리프 우마르(Umar, 634-644)는 페르시아의 사산제국과 비잔틴제국의 영토인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하여 실질적인 이슬람제국의 창시자가 되었다. 우마르는 무함맛보다 4년 먼저 멕카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웅변에 능숙했고 용맹성과 정의감으로 인하여 예언자는 그를 사자의 아버지(Abu Asad)라 불렀다. 그는 성장 후 시리아까지 오가면서 대상무역을 하였다. 초기에는 이슬람을 가장 강렬하게 반대했던 인물이다. 무함맛이 에언자 임무를 수행한지 5년경 이슬람을 받아들인 그의 여동생을 학대하는 과정에서 이슬람을 받아들였다고 보고 있다. 그 후 이슬람 전파에 가장 공헌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1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에 대한 시비가 있었을 대 아부 바크르에게 충성한다는 선서를 하였는데 감히 누구도 반기를 들지 못했다. 아부 바크르가 그의 임종이 다가왔음을 느끼고 무슬림간의 불화와 반목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서 오마르를 후계자로 선임하였다. 그는 꾸란을 수집하고 편집하여 오늘날 전해지게 만들었다.




그는 이슬람의 황금기를 만든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635년에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는 무슬림군의 포위로 항복하였으며, 636년에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야곱이 신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곳에 우마르 사원을 건립해으며 예루살렘을 멬카와 메디나에 이어 세 번째 이슬람교의 성지로 성역화하였다. 636년에 5만의 비잔틴군은 그 반수인 무슬림군에 패하여 시리아는 640년까지 완전히 무슬림의 소유물이 되었다. 639년에는 비잔틴 제국의 곡창이었던 이집트로 쳐들어가 곡창지대는 무슬림의 손에 넘어갔다. 결국 이곳은 나일강 상류와 리비아로 진격하는 무슬림군의 발판이 되었다. 641년에 이집트의 푸스타트에 최초의 아랍수도를 건설하였는데 지금은 올드 카이로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이집트는 BC. 30년 로마에 정복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시저는 이집트를 곡창지대로 만들어 로마인들을 충족시켰다. 그 후 이집트는 페르시아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가 다시 아랍인들에게 정복된 것이다. 또한 637년 무슬림군은 페르시아군을 히라 근처의 카다시야에서 패퇴시키고 페르
시아의 수도 크테시폰을 함락하였다. 이후 무슬림군은 페르시아 지역을 평정하고 페르시아황제 야즈다지르는 651년 암살당함으로써 1200년 간을 이어온 페르시아는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당시 무슬림들은 이라크 남부의 바스라와 쿠파에 두 도시를 건설하였는데 20년이 지난후에 바스라는 가장 중요한 상업 중심지가 되었고, 인도와 중국, 아프리카의 상인들이 진귀한 상품들을 가지고 몰려들었다. 오마르는 영웅주의나 권위주의를 배척하여 명언을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자기가 아니면 국정을 운영할 수 없다는 생각은 오만과 거만에서 비롯된 그릇된 철학이요, 그 인물이 아니고는 이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는 보통사람들의 생각도 겸허한 생각에서 나온 그릇된 철학이다. 영웅과 바보는 자기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국민들이 만들어주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우마르는 정복사업을 활발히 펼치다가 페르시아의 한 노예에게 피살되었다. 그가 피살된 후 우스만이 칼리프로 추대된다.


우스만(Uthman, 644-656)은 부유한 상인 출신으로 메카의 꾸라이쉬 부족 가운데 지배적 위치에 있었던 움마이야 씨족 출신이었다. 이들은 무함마드와 이슬람에 처음에는 적대적이었으나 메카 함락 후 이슬람에 개종하였다. 때문에 제 1, 2대 칼리프 선임시에는 사회적 경제적 비중에 맞는 정치적 발언권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스만은 일찍이 무함마드를 추종하여 신임받게 되어 그의 가까운 교우가 되었다. 그리하여 2대 칼리프 사망을 계기로 칼리프 선출시 우스만과 알 리가 가장 강력하게 경쟁하게 되었다. 결국 우마이야 가문은 우스만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함으로써 우스만이 선출된다. 3대 우마위야 가문의 우스만은 방대한 영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자기가 신임할 수 있는 친족을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이 때문에 반대파로부터 족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꾸란의 정본을 편집하게 하여 이와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것은 모조리 불태웠다. 이것은 독실한 신자의 분노를 쌓게 하였다. 총독의 권력강화는 중앙집권적 권력형태를 초래하게 되었다. 총독세력에는 메카와 메디나의 오아시스 부족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정복사업의 제일선에 있었던 베두윈 부족 출신의 불만을 만들게 되었다.


결국 정복지 거주 전사들의 불만이 우스만의 살해로 이어지게 되고 그 뒤를 이어 무함맏의 사촌이며 사위인 알리가 (656-661)4대 칼리프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알리가 우스만의 살해에 대한 조사를 철저히 않자 친우스만 세력과 불화가 발생하게 되고 마침내 시리아지역의 총독인 무아위야와 권력분립현상이 도래하게 된다. 무아위야의 아래에는 시리아인, 비아랍계의 신무슬림, 정권에서 소외된 남부 아랍인들이 모여들게 되었고 알리의 아래에는 히자즈 거주민과 그가 취임즉시 메디나에서 쿠파로 수도를 옮긴 후 쿠파의 주민이 결집하였다. 결국 양편은 657년 7월에 유프라테스의 서쪽언덕에 서 대진한 결과 무승부로 막을 내리면서 정세는 알리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어 무아위야의 지위는 알리와 동등하게 되었다. 결국 이슬람 공동체는 동쪽은 알리, 서쪽은 무아위야의지지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이러한 분단상태에서 알리가 쿠파의 한 사원에서 암살당한다. 알리의 장남 하산이 칼리프직을 계승하여 무아위야에게 대항했으나 후원자들이 빠짐으로써 집권 5개월 만에 칼리프직을 포기하고 무아위야가 이슬람제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결국 661년 무아위야는 쿠파에 입성하여 우마이야조가 성립된다.

제3대 칼리프 우스만(Uthman, 644-656), 제4대 칼리프 알리(Ali, 656-661) 등은 예언자의 대리인이었으므로 예언자적 기능인 계시는 받을 수 없었으나, 메디나의 중앙성원에서 집단예배를 이끄는 이맘의 역할과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들 네 칼리프의 통치시기를 정통칼리프(al-Khulafa al-Rashidun) 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일반적으로 칼리프는 카톨릭 교회의 로마교황과 비유하고 있지만, 종교체계가 다르므로 성격상의 차이가 매우 크다. 이슬람교에서는 국가와 교회는 분리되어 있지 않고 또한 원칙적으로 성직자 제도가 없다. 따라서 신학자인 울라마의 조직체계도 카톨릭처럼 규격화되어 있지 않았다. 대체로 세속계의 통치자는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 열중하는 반면, 울라마는 이슬람성원의 관리, 사법부의 업무, 및 학문연구와 교육에 치중한 것이다.

우마이야조는 무아위야에서 시작된다. 무아위야 이후의 칼리프는 세습군주제 형태가 된다. 무아위야는 알리의 아들 하산과 체결한 조약에서 다음 후계자의 선정은 무슬림들의 선택에 맡기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아위야는 이 조약을 깨트리고 그의 아들 야지드를 다음 황태자로 선포하였다. 이로 인하여 불화가 발생하자 종교에 바탕을 둔 신정체계를 신분제도로 구축하여 세습군주제를 구축하였다. 결국 시리아의 정치권력의 영향을 받은 그는 페르시아와 비잔틴제국의 세습적 군주제도를 모방하였다. 그가 수도를 쿠파에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로 옮긴 후 쿠파에는 알리 지지세력이 많았다. 시리아는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원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압바스조시대의 이슬람 학자들은 무아위야에게 칼리프의 칭호를 붙이지 않았다. 750년 압바스조가 집권할 때까지 움마이야조 90년 동안은 칼리프체제가 단절된 시기였다.

우마위야왕조


1무아위야1(661)->2 야지드(680)->3 무아위야2(683)->4마르완(683)->5압둘말리크(685-705)->6.왈리드1(705-715)->7.술레이만(715-717)-> 8오마르2(717-720)->9야지드2(720-724)->10히샴(724-743)->11왈리드2->12야지드3(743)->13이브라힘(744)->14마르완2(744-750)

무아위야의 영토확장
중앙아시아지역의 헤라트, 카불, 우즈벸키스탄의 부카라를 정복하고 북아프리카에서는 대서양연안까지 정복하였다. 670년경에는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였다. 680년 무아위야 사망, 그의 아들 야지드가 통치권을 계승하였다. 야지드는 어릴 때 유목생활을 하였다. 야지드의 재임 3년 반 동안 3대 중대사건 발생

1) 알리의 차남 후세인 살해사건


야지드가 칼리프직을 계승했을 때 메디나의 일부 귀족층이 반발 함. 야지드의 가장 큰 정적 후세인은 그의 조카를 쿠파로 보내 상황 파악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총독 우베이둘라에게 피살당하고, 후세인은 그의 조카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의 추종자들 200여명과 쿠파로가나 모두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게 된다. 후세인의 목은 움마위야제국의 수도 다마스커스의 야지드에게 보내지고만다. 이 사건은 우마위야 가문에 대한 쉬아인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알리지지파들은 예언자의 손자가 죽임을 당한데 대해 쉬아인들의 가슴속에 깊이 각인되고 쉬아인들은 고문을 받게되고 반 우마위야조로 나타난다. 그 결과 우마위야조에 대한 반대세력은 알리의 후손중에서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고 쉬아정당이 조직화된다. 그 후 쉬아인들은 후세인의 죽음을 순교로보고 그 날을 애도하기 위해 그가 피살된 1월 10일을 애도의 날로 정하였다.

2) 성지 메디나가 약탈당함


메디나 사람들은 야지드에게 호전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파기하는가 하면 야지드가 임명한 총독을 추방하고 우마위야 당원들의 권리를 침해하자 무슬림 이븐 우끄바란 장군을 보내 메디나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그 곳을 점령한 그는 병사들과 3일동안 약탈을 자행하였다.






3) 메카의 카바신전이 공격받음.


후세인이 피살되자 주베이르의 아들 압둘라가 자신이 바로 멬카의 칼리프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이라크지역과 이집트 지역에서 지지를 받았다. 야지드는 메디나를 공격한 무슬림에게 메카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무슬림이 사망하고 누메이리의 아들 후세인이 메카 공격에 나섰다. 이공격으로 메카의 카바 신전이 크게 파손되었다. 그 와중에 야지드가 사망하자 후세인은 멬카 공격을 중지하고 압달라에게 충성하기로 맹세했다. 야지드 사망 후 그의 아들 무아위야 이분 야지드가 후계자가 되었으나 어리고 허약한 지도력으로 그는 칼리프 선택권을 무슬림들에게 넘겨주었다. 6개월만에 무아위야가 사망하자 세력이 양분되었다. 남부출신의 예멘계 아랍인들은 우마위야 가문에서 칼리프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북부출신 아랍인들은 주베이르의 아들 압둘라쪽으로 기울었다. 우마위야 가문의 불화가 계속되다가 시리아 지역에서는 하캄의 아들 마르완이 추대되었고, 684년에는 마르즈 라히트 전투로 시리아를 비롯한 아랍지역과 이란의 쿠라산 지역에서 반목과 불화가 깊어갔다. 마르즈 라히트 전투이후 이슬람제국은 칼리프 마르완(684-685)은 시리아와 이집트를 주베이르의 아들 압둘라는 메카와 메디나, 이라크의 바스라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마르완은 야지드의 미망인과 결혼했는데 그는 그의 아내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는 야지드의 아들 칼리드를 데리고 왔는데 칼리드가 칼리프직을 요구했으나 마르완의 아들 압둘말리크(685-705)가 칼리프직을 계승하였다.


압둘말리크 즉위시 정세는 움마위야 왕조가 붕괴될 정도로 불안하였다. 그는 쿠파에 있는 무크타르를 제압하고, 메카와 메디나의 압둘라 주베이르를 핫자즈장군을 통하여 제압한 후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압둘말리크는 디완이라는 행정부처를 두었다. 디완 알 카라즈- 토지세를 징수하고 부과하는 부처 디완 알 카탐- 정부법령을 수립, 인준, 옥쇄관리 담당 디완 알 라사일 -제반 통신업무 서기, 시인, 비서 등이 있었다. 디완 알 무스타그할랏은 일반세금업무 디완 알 준드-군업무 주관 696년 새로운 아랍주화를 발행하고, 정책- 행정업무를 아랍식으로 개편, 행정언어는 아랍어 우선 정책, 등기부기록 및 조세업무는 페르시아에서는 페르시아어로, 시리아에서는 그리스로 취급되다가 704년 아랍어로 번역 됨. 705년에는 이집트에 아랍어가 소개되고 움마위야의 왈리드 칼리프가 무함마드 이븐 압둘 말리크를 이집트 총독으로 임명하면서 아랍어는 통치자의 언어가 됨. 아랍어 우선정책으로 아랍어를 모르는 페르시아인이나 기독교인들이 공직에서 해임되고 그 자리를 아랍인
들이 차지하였다.

아랍제국의 영토가 팽창되면서 부가 축적되고 그들의 관복에 그리스인들과 페르시아 인들이 사용하던 문형을 넣어서 입다가 이 언어들을 아랍어로 번역시켜 넣었다. 그러나 이러한 크리스챤 문구들이 이슬람교리와 모순됨을 발견하고 우상숭배를 배척하고 있는 이슬람은 어떤 조형이나 상이 새겨진 것들을 삭제하고 이슬람 문구로 교체하였다.

움마이야 시대 아랍인의 지위


우마위야 시대는 아랍인이 우위에 있었는데 아랍인은 민족이라기보다는 출생에 의해서 결정되는 세습적인 계급을 형성하고 있었음. 아랍족은 국정의 사무기관인 디완의 인명부에 기재된 전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음. 그들은 Zakat외에는 세금을 지불하지 않았음. 또한 그들만의 병영도시인 암사르에 살수 있는 특권과 연금이나 수당을 전장에서 나오는 약탈물이나 정복된 지역에서 나오는 세입가운대 물자나 현금의 형태로 지급받았다. 그들은 움마위야조 등장전에 아라비아 반도 밖의 토지를 소유하기 시작했는데 무아위야 1세 이후 지주가 꾸준히 증가하였다. 그들은 비아랍 지주로부터 토지를 구매하거나 칼리프나 총독으로부터 하사받는 방법으로 토지를 획득하였다. 그들은 지주로서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였다.

비아랍인의 지위


디칸 : 페르시아 계통의 지주들은 비잔틴 제국의 전직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우마위야조의 행정에 적극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각주의 세금을 책정하여 징수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그들 자신의 세금은 면제 또는 경감시켰다.

마왈리-아랍지배계급이 막대한 경제력을 소유함으로써 새로운 사회계층이 생겨남. 즉 아랍 상류층을 상대로 생계를 유지하는 비아랍계 무슬림으로 마왈리라고 불리웠다. 이들은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이집트, 베르베르 및 비아랍계 개종자였다. 또는 아랍계였지만 기독교도나 유태교도였기 때문에 이슬람에 늦게 개종해서 아랍지배계급에 포함되지 않은 이들도 이에 포함되었다. 이들은 이론상으로는 아랍인들과 동등했으나 경제적 사회적으로 평등하지 않았음. 이들 중 일부는 이슬람국가에 바친 공헌도 때문에 Zakat만 지불했으나 대부분은 딤미와 같은 세율을 납부하였다. 딤미(비무슬림)-'성서의 추종자'로 기독교도와 유태교도들임 고율의 인두세와 토지세를 납부하였다. 이들은 이슬람법에 따라 인두세를 물고 무슬림의 집단행사에 방해만되지 않으면 보호되었다. 또한 성서의 추종자로 간주되지 않는 이란의 배화교도(조로아스터)도 이 개념에 포함시켰다.

쉬아운동


마왈리들의 불만은 쉬아(알리의 당) 종교운동과 결합되어 나타남. 칼리프 알 리가 수도를 메디나에서 쿠파로 옮겼으나 우마위야조가 수도를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로 옮겨간것도 자극제가 되었음. 또한 후세인 피살후 이슬람의 종파로서 성장하기 시작 함. 쉬아는 세습제의 관습에 젖은 비아랍계 무슬림들에게 호소력이 컸는데 결국 쉬아주의는 국가와 기존질서에 대한 반대를 종교적인 용어로 표현한 것이었다. 즉 국가와 기존질서에 영합하는 것은 주류파, 즉 순니에 자동적으로 속하게 되었다. 수이아파의 저항운동은 아랍인에 대한 민족적 반항보다는 교리상의 논점과 그에 따른 국가관을 지닌 추종자의 아랍상류층에 대한 사회적인 비난이었다.

우마위야의 지지세력도 아랍인들에게 국한된것만은 아니었는데 페르시아의 봉건 귀족들 가운데 도망가지 않고 이슬람에 개종하여 정복자와 협력한 대가로 경제적, 사회적 특권을 그대로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개종당시에도 배화교에서 정통 이슬람을 택했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서민, 농민들은 지주와 맞서고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의 재야세력인 쉬아를 택했다. 이들은 쉬아교리에 그들의 옛종교들을 첨가하였는데 여기에서 나온 것이 마흐디(올바르게 인도된 사람) 사상이다. 이 마흐디 사상은 순수한 지도자상에서 시작되었으나 구세주의적 종교 지도자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압둘말리크 이후의 정복 사업


압둘말리크의 후계자 왈리드(705-715) 당시 우마위야의 권력이 정점에 도달한 시기임. 이라크주의 총독 알 하자즈는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 장군을 중앙아시아원정을 명령함. 쿠타이바는 705년-713년까지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지방과 부하라와 사마르칸트를 점령하여 옥수스(Oxus) 강의 건너편 땅에 아랍세력의 뿌리를 박고 승전하였으며, 710년에는 무함마드 이븐 알 카심 장군을 인더스 강에 파견하여 인도의 신드(Sind)주를 점령함으로써 오늘날 파키스탄의 모태가 되었다. 710년에는 아프리카총독인 무사 이븐 누사이르가 베르베르족 출신의 타릭 장군을 스페인에 보내어 이베리아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아랍족과 베르베르 혼합부대는 서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732년 파리 동남방의 프와티에와 투르사이의 중간지점에서 샤를르 마르텔의 프랑스군에게 저지당했다. 술레이만(715-717)의 통치시에는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대원정이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 원정이 비잔틴의 수의 수도에 대한 마지막 대공갹으로 원정의 결과 콘스탄티노플 해협에서 시리아의 육군과 함대가 분쇄되어 제국의 바탕인 군사력의 손실이 매우 컸다.

1무아위야1(661)->2 야지드(680)->3 무아위야2(683)->4마르완(683)->5압둘말리크(685-705)->6.왈리드1(705-715)->7.술레이만(715-717)-> 8오마르2(717-720)->9야지드2(720-724)->10히샴(724-743)->11왈리드2->12야지드3(743)->13이브라힘(744)->14마르완2(744-750)

우마위야조의 멸망


술레이만의 후계자 우마르2세(717-720 우마르 이븐 압둘 아지즈)는 마왈리들의 세금을 줄이려고 재정개혁을 실시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수많은 딤미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하여 세입은 더욱 줄어들었다. 그러나 우마르는 마왈리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재정을 통한 유화정책에 힘써 아랍제국의 통일성을 유지하는데 노력했다. 그는 마왈리들이 아무런 제약없이 병영도시에 정착하는 것을 허용하고 비무슬림만이 내야하는 인두세(지즈야, Jizya)와 토지세(하라즈, Kharaz)를 마왈리가 납부하는 것을 중지시켰다. 또한 지방에 주둔하고 잇는 아랍전사들에게는 모두 시리아 수준으로 급료액을 인상시켜 주었으며, 가족수당도 지급하였다. 이로 인하여 딤미들의 세율이 무거워져 많은 딤미들이 이슬람에 개종하였다. 우마르 2세의 후계자 야지드 2세(720-724년)와 히샴((724-743)의 치하에서 새로운 재정체제를 마련하였는데, 정확한 내용은 알기어렵다. 딤미들은 하라즈(토지세)와 인두세를 납부하여야 했다 히샴의 사망후 움마위야조는 내부분열을 일으켜 급속히 몰락해갔다. 왈리
드2세가743, 야지드3(743)->13이브라힘(744)->마르완(744-750)으로 이어지던 움마위야 왕조는 내부분열을 일으켜 급속히 쇠퇴하였다.


당시 하쉬미야 당은 극단적인 쉬아파로서 일부 마왈리들의 지지를 받았다. 아부하쉼의 양자인 무함마드 이븐 알리 이븐 알 압바스는 하쉬미 야당의 지도자가 되어 활동했는데 747년 하쉬미야당은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의 거점은 후라산(현재 이란동북부, 테헤란동쪽)에 있었으며, 이지역의 아랍인들은 주로 바스라 출신으로 670년경에 정착하였다. 이들이 쉬아교리의 하쉬미 야당이다. 우마위야조의 군대가 하쉬미야군에게 패하자 압바시야가의 아불 압바스(사파:피의 복수자)가 칼리프가 되어 압바시야조(750년)가 창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