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역사

중동의 역사 (압바시야조의 계보(1-37대)

작성자
무스타파
작성일
2015-10-17 08:04
조회
492

압바시야조의 계보(1-37대)




알 사파(749) ->알 만수르(754)->알 마흐디(775)->알 하디(785)->알 라쉬드(786)->알 아민(809)->알 마문(813)->알 무타심(833)->알 와틱
(842)->알 무타와킬(847)->알 문타시르(861)->알 무스타인(862)->알 무타즈(866)->알 무스(868)->알 무타미드(870)->알 무타디드(892)->
알 묵타피(902)->알 묵타디르(908)->알 카히르(932)->알 라디(934)->알 물타디(940)->알 무스탁피(944)->알 무티(946)->알 타이(974)->
알 카디르(991)->알 카임(1031)->알 묵타디(1075)->알 무스타즈히르(1094)->알 무스타르쉬드(1118)->알 라쉬드(1135)->알 묵타피(1136)->
알 무스탄지드1160)->알 무스타디(1170)->알 나시르(1180)->알 자히르(1225)->알 무스탄시르(1226)->알 무스타심(1242-1258) 1258년 몽고
군의 바그다드 함락과 압바시야조의 멸망, 일한조의 등장

전기 압바시야조


우마위야조에서 압바시야조로 대체된데에는 많은 아랍인들과 마왈리들이 참여하였다. 이 변혁의 지도층에는 아랍인과 남부아랍부족 출신들
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우마위야조때 정복에 대거 참여했으나 정권의 핵심에는 들어가지 못한 세력들이었다. 또 변혁의 주동세력
인 마왈리들도 페르시아인들과 이집트인, 이라크-시리아 거주민 및 개종을 늦게 한 아랍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압바시야조가 승리한 후
에 제국의 수도는 다마스커스에서 이라크 지역으로 옮겨갔다. 압바시야조의 1대 칼리프 사파(750-754)는 쿠파 근처 유프라테스강의 동쪽에
있는 하쉬미야라는 조그마한 도시에 수도를 정하였으나 안바르로 옮겼으나 제 2대 칼리프인 만수르(754-775)가 실질적인 수도를 건설했는
데 그곳이 바로 바그다드이다. 즉 만수르는 사산제국의 엣 수도였던 크테시폰 근처의 티그리스강 서안에 수도를 정했는데 당시 도시 명칭은
메디나 알 살람이었다. 그러나 이도시의 이름이 페르시아 이름의 바그다드로 더 많이 알려진 것이다. 바그다드의 중심지는 지름이 약 3.3㎞
의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이며 그 속에 칼리프의 궁전과 관료들의 행정부서 건물, 그리고 칼리프의 근위병인 후라산 병정들의 숙소가 있었
는데 이 성곽 밖에는 거대한 상업도시가 급속히 발전하였다. 바그다드로의 천도는 제국의 중심이 지중해의 시리아로부터 비옥하고 관개시설
이 좋은 강의 계곡 평야이며, 수많은 통상로가 교차하는 메소포타미아로 이동한 것이다. 이는 고대 중근동의 전통이 강한 전형적인 다인종 국
가로 변모함을 의미한다. 특히, 페르시아의 전통이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압바시야조의 칼리프


우마위야시대의 칼리프가 전통적인 부족장체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데 비해 압바시야 칼리프는 그의 권위가 신으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하면
서 실질적인 권력의 바탕은 정규순에 두고 권력의 행사는 관료기구를 통하여 행사하는 전제군주가 되었다. 압바시야조에서는 가문의 중요성
보다는 칼리프의 총애가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칼리프의 위엄은 칭호속에서도 알수가 있는데 칼리프는 '하나님의 사성의 대리인'(Khaifa
Rasul Allah)으로부터 바로 하나님의 대리인(Khaifa Allah)으로 그 칭호가 바뀌었다. 즉, 그의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나오는 것으로 보
았다. 우마위야조의 칼리프는 평범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쉽게 접근하여 얘기를 나눌 수 있었으나, 압바시야조의 칼리프는 까다로운
궁전 관리층과 절차 때문에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즉 압바시야조는 군사력을 바탕에 두고 신권을 주장하는 전제군주가 되었다.
압바시야조의 행정기구는 인종차별에 바탕을 두지 않고 국가의 관료층을 마왈리 출신으로 대폭 충원하여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누리게 된
다. 압바시야조에서는 군조직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아랍민병의 중요성이 감소되고 아랍족에게 지불하던 연금은 중단되었다. 오직 정규군만
이 급료를 받게 되었다. 군은 상비군과 지원병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급료를 받았다. 군의 핵심은 압바시야조 창립에 공훈을 세운
후라산 출신의 근위병이었다. 군은 9세기 중반부터는 중앙아시아의 터키계 노예들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맘룩(소유된 자)으로 알려졌다.
중앙정부의 부서(디완)에는 문서부(디완 알 타위끼), 조세부(디완 알 카라즈), 우편정보부(디완 알 바리드 왈 아크바르), 및 군부(디완 알 준
드) 등이 있었다. 이들 부처에서 일하는 관료층은 지위고하를 막론ㅇ하고 모두 재상격인 와지르(wAZIR)의 지휘 감독을 받았다. 이 와지르 직
은 압바시야조에서 처음 도입된 것으로 기원은 페르시아 제국에 있었던 직위였다. 이 직위는 칼리프의 최고 행정권의 집행자이며 전체행정기
구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에 그 권력이 막강하였다.

압바시야조의 경제 상황


농업과 산업, 특히 무역규모가 우마위야조 시대에 비하여 대형화되었다. 밀, 보리, 쌀이 수많은 강 기슭에서 생산되었으며, 은은 주로 동부에
서 금은 서부주(누비야와 수단)에서 구리는 이스파한에서, 철은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및 시실리 섬에서 들어왔다. 압바시야조는 자원이 풍
부하고 유럽과 동부아시아대륙사이의 육교적 위치에 있었으므로 중개무역이 성하였다. 더구나 압바시야조는 정복보다는 선린 정책을 취하였
으므로 국내외의 상업활동이 더욱 발전되었다. 무슬림 상인들은 페르시아만의 시라프, 바스라, 우불라, 항구와 홍해안의 항구에서 인도, 스리
랑카, 동남아시아 제국 및 중국에까지 진출하였다. 동남아시아지역에서의 수입품으로는 비단, 향료, 조미료, 목재 등이었으며, 인도와 중국과
의 무역에서는 해상로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를 통한 육로 교류도 활발하였다. 중국에서의 수입품에는 향료, 비단제품, 토기류, 계피, 종이,
먹, 잉크, 공작, 말, 등이 있었다. 비잔틴 제국으로부터는 금은 그릇, 금화, 약품, 금박비단, 노비, 장신구 등을, 인도로부터는 호랑이, 표범,
코끼리 등의 가죽제품, 루비, 향나무, 코코넛 등을 수입하였다. 무슬림 항해사들은 8세기 경에 중국 광동에 그들의 정착지를 확보하였다.

제국의 분열


우마위야조의 멸망과 압바시야조의 과도기에 9세기 중엽이후 서쪽의 변방지역(북아프리카)과 스페인 지역은 점차 분리 현상을 띠고 있었다.
제국의 중심부인 중근동 지역은 그나마 통일을 지탱하여 9세기 중엽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제국의 영토가 너무나 크고, 중앙 정부의 내분
이 자주 일어나게 되자, 제국은 급격히 아랍 페르시아 및 터키인의 영주가 다스리는 지역으로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압바시야조는 각 지역간
의 경제적, 인종적 관계는 너무 소원하여 단일 시장을 형성할 수가 없었다. 또, 맘룩 출신 장교들의 횡포에 의한 칼리프의 허수아비화 및 환
관, 칼리프의 친척, 고급 관료들의 음모 술수 등이 나타나게 되었고, 칼리프 궁의 생활이 극도로 사치화함으로써 국가 재정이 핍박하게 되어
칼리프의 권위가 떨어지게 되었다. 이에 반비례하여, 지방의 총독, 군사령관, 고급 관료의 권위는 더욱 높아졌고 그에 따라 그들의 위임 지역
을 사유화함으로써 점차 봉건적인 사유 형태로 발전하여 정치적으로 분리, 독립을 갈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허약한 중앙 정부는 이 현상을 묵
묵히 받아들여야 하였다. 더구나, 일반 시민들의 반란이 극에 달하여 중앙 정부의 재정이 핍박하게 되었고, 또 권위를 실추시켰기 때문에 지
방의 분열 현상은 어쩔 수 없었다. 이 서민들의 반란은 대체로 노예, 가난한 농민 및 도시의 천민들이 사회적, 종교적 또는 민족적인 동기에
서 지방의 권력자나 종교 지도자를 등에 업고 일어난 것이었다.

아프리카 지역


서기 756년 압바시야조의 박해를 피해 우마이야조의 칼리프 히샴의 손자인 압둘 라만이 시리아 출신 군인의 도움을 받아 스페인에 움마이야
조를 건립하여 독립하였다. 그 뒤를 이어 785년에 하산 이븐 알리의 증손자 이드리스 이븐 압둘라가 메디나에서 알리의 반란을 주도하다가
실패하자 모로코로 도망하여 그 곳에서 왕국을 건설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드리스 왕조(788-974)는 거의 200년간 지속되었으며, 역사상 최초
의 쉬아 국가였다. 비록 모로코의 주민은 대부분 베르베르족의 순니였지만 중앙정부에 대한 반발심에서 그를 지지하였다. 이드리스 왕조는
북아프리카의 파티마조와 스페인의 우마위야조 사이에 끼어 곤경을 겪다가 결국 파티마조의 침략을 받아 망하였다. 이와 같이 반 압바시야
세력이 스페인과 모로코에 정립하게 되자 위협을 느낀 압바시야조의 칼리프 하룬 알 라쉬드는 튀니지의 카이로완 지역에서 세력을 확립한
순니 출신의 이브라힘 이븐 알 아글라브를 800년에 총독으로 임명하여 그의 기성 조직을 인정하였고, 반 압바시야 세력의 동진을 막게 하였
다. 이 아글라브조(800-909)의 왕은 아미르(Amir)라는 칭호에 만족하여 그들의 주화에 압바시야조의 칼리프 이름을 새김으로써 그 종주권을

인정하였다. 이 왕조는 강력한 해군을 만들어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했으며, 기독교 국가의 해안을 괴롭혔고, 902년에는 시실리 섬을 완전
히 장악하였다. 또 아글라브왕은 수도 카일완에 메카, 메디나 및 예루살렘의 성원에 버금가는 이슬람 성원을 지어 이슬람의 본산을 이루었다.

이란 지역


5대 칼리프 알 라쉬드 당시 이란 출신의 문인들 사이에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의 동등성은 물론이고 이란적인 것이 아랍적인 것보다 더 우월하
다는 슈우비야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이란 문화의 중심지는 후라산 지역이었는데 바그다드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지리적으로 상당
히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룬 알 라쉬드는 그는 이 동부지역의 통치를 마문에게 맡겼다, 압바시야 공주에게서 난 아들 아민을 제 1의 후
계자로 페르시아 노예출신 부인에게서 난 마문을 제 2의 후계자로 임명하였으나 그의 사후 이복형제 사이에 싸움이 발생하여 마문이 승리하
게 되고 그를 도왔던 페르시아 장군 타히르가 동부주를 맡게 되었다. 타히르는 칼리프의 마문을 종주로 받들었으나, 실질적으로 타히르는 자
치를 누렸다. 이 타히르조는 사산조가 망한 뒤 이란인이 세운 최초의 왕국이다.
후라산의 남부 지역에서 야쿱 이븐 라이스가 세력을 확대하여 873년에는 타히르 왕국의 수도인 니샤푸르를 점령하고 동부 페르시아와 아프가)
니스탄 지역을 통합시켰으며, 876년에는 바그다드까지 진출하였다. 이것이 사파르조(867-913)이다. 그 외에도 이지역에서는 샤만조(874-999)

가 발생했는데 칼리프를 섬기는 것 같았으나 실제로는 완전한 독립을 유지하였는데 칼리프의 입장에서는 샤만조의 왕은 단순히 Amir에 불과
했지만 샤만조는 페르시아어를 장려하였고, 수도 부하라에 도서관을 세워 서적을 수집하였다.

비옥한 초생달지역과 이집트


이라크 지역에서는 869년 바스라 지역에서 일하고있던 흑인 노예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들은 잔즈(Zanj: 잰지바르 섬 주민 흑인노예)로 알
려졌다. 그들은 여러번 바스라시와 남부 이라크를 장악하여 바그다드까지 위협하였다. 이집트 총독으로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자기 지위를
굳혀 툴룬조(868-905)를 세워 이집트를 통치하였으며, 무함마드 이븐 투그즈는 익쉬드(Ikhshid)라는 칭호를 받아 다른 주들의 총독보다 격이
높음을 과시하였다. 이 익쉬드조(935-966)는 파티마조의 군대에 의해서 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