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역사

중동의 역사 (파티마조, 부와이흐조, 중앙아시아 카라한조)

작성자
무스타파
작성일
2015-10-31 15:51
조회
489

파티마조(909-1171)


사이드 이븐 후세인은 909년에 베르베르 부족의 도움으로 아글라브조의 수도인 라카다를 함락하고 나라를 세우는데 성공하는데 그는 스스로를 '이맘 우바이둘라 알 마흐디'라 칭하고 무함맏의 딸인 파티마와 6대 이맘의 아들인 이스마일의 후손임을 주장하였다. 파티마조의 등장은이슬람 세계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오게 되는데 모로코에 있던 이드리스 왕조(788-974)의 수도인 페즈를 921년에 점령하여 전 영토를 병합하였다. 이 파티마조는 일곱 이맘파(알리에서 이스마일까지 7명의 이맘만 인정, 이란-이라크의 쉬아파는 12명의 이맘을 인정하고 있음)였으므로, 압바시아의 칼리프를 형식상으로도 인정하지 않았고, 더 나아가서 자기들만이 이슬람 공동체(Umma)의 합법적인 지도자임을 주장하였다. 그는 자기가 진정한 칼리프라고 주장하였으므로 무슬림 세계는 바그다드, 스페인의 칼리프와 더불어 3명의 칼리프가 난립하게 된다. 그들은 북아프리카의 영역에만 만족하지 않고 찬탈자인 압바시야조에 대항함은 물론이고 그들을 멸망시켜 동부의 통치권도 빼앗으려 하였다. 우바이둘라는 914년과 921년 두 번에 걸쳐 압바시야의 통치아래에 있던 이집트를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파티마조의 제 4대 칼리프 알 무이즈는 963년에 당시 익쉬드조의 통치 아래 있었던 이집트를 정복하고 수도를 카이로로 옮겼다. 이로써 무슬림 세계는 압바시야의 동부와 파티마조의 서부로 분열 대립되었다.



부와이흐조 (945-1055)

카스피해 남쪽의 다일람 지역에서 페르시아의 열두 이맘파 쉬아의 부와이흐가 발생하여 바그다드의 칼리프를 침공하여 세력을 확대하여 통치하였다. 그러나 당시 거주민의 절대다수가 순니였으므로 부와이흐조는 '무이즈 알 다울라(왕국의 간성)' 라는 칭호를 받아 칼리프를 자기의 허수아비로 만들었으며, 통치의 상징으로 자기의 이름도 금요일 집단예배에서 칼리프의 이름과 더불어 올렸고, 그의 이름을 주화에도 새겨 넣었다. 부와이흐조의 통치기간 동안 그들은 칼리프를 마음대로 즉위 또는 폐위시켰다.



중앙아시아 카라한조(Ilig Khan 992-1211)


가즈나조(Ghazna ,997-1186) 사만조는 이란의 정신적 유산과 이슬람교를 터키족에 퍼뜨리는데 공헌하였는데 가즈나 조는 이러한 사만조의 유업을 계승하여 이어나갔다. 가즈나조는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지역에서 부하라 지역으로 들어온 터키인이 이끄는 씨족과 전쟁을 치루게 되는데 이 씨족 중에서 셀죽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카라한조와 비슷한 시기에 번성을 하면서 셀죽조를 이끌게 된다. 결국 970년경에 카자흐스탄 지역에서 셀죽조가 창건된다. 셀죽조의 창시자는 투그릴벡과 차그릴 벡 이었는데 그들은 가즈나조의 술탄 마수드로부터 후라산 주를 빼앗고 가즈나조를 페르시아의 국경밖으로 밀어내어 인도에서만 명맥을 잇게 하였다. 그들은 부와이흐조와도 전쟁을 하여 중앙 및 서부 이란을 점령하여 이스파한에 근거를 굳히고 1055년 바그다드를 함락시켜 칼리프에 대한 부와이흐의 참정을 끝맺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칼리프는 쉬아 부와이흐의 통치를 벗고 순니의 셀죽크의 보호아래 놓이게 된다. 결국 압바시야 시대의 동부지역은 200년에 걸친 분열과 혼란 끝에 셀죽조가 통일을 이루어 이란지역, 메소포타미아 지역, 시리아 지역이 단일 행정관할아래 놓이게 되었다. 셀죽조는 이전 세기에 끊임없이 일어나던 지방에서의 반란을 진압하고 영토내의 질서를 유지하였으며, 평온을 확립하였다. 셀죽조 아래에서 무슬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와지르인 니잠 알 물크를 배출하였는데 그는 천문대의 건립을 지원하였으며, 동부 영역의 불교 학교의 본을 따 수많은 학교를 세웠다. 이 가운데 가장 이름이 난 것이 니자미야 학원으로 이 학원은 카이로에 있는 이스마일파 학원인 알 아자르에 대항하는 순니 이슬람의 근거지가 되었다. 니자미야 학풍은 알 아샤리의 신학 이론을 기본으로 하여 오늘날 순니 신학의 바탕이 되었고, 이슬람 신학의 대학자인 알 가잘 리가 더욱 발전시켰다.

셀죽조는 신학과 과학을 장려하는 한편 강경한 외교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정책에 의해 소아시아 반도에 잇는 비잔틴의 방위선을 영구히 압도하는데 성공하였다. 셀죽조는 비잔틴 제국의 침략을 물리쳤으며, 비잔틴 황제 로마누스 4세는 무슬림군의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 결국 무슬림군은 에게해까지 밀고 들어가 소아시아 반도의 동부와 중앙부를 모두 셀주크 통치아래 넣었다. 그 후 1118년 무함마드의 사망을 계기로 셀주크 왕조는 여러 공국으로 분리되었다. 각 공국은 젊은 왕자의 스승이었던 아타백들의 손에 손에 정권이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소아시아 지역의 셀죽조만은 약 1세기 동안 그들의 권력을 지탱할 수 있었는데 이 왕조는 룸(Rum, Roma에사 나옴)의 셀죽조로 알려졌으며 오늘날 터키공화국의 모체가되었다. 이 기간동안에 소아시아반도의 인구 대부분이 기독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하였고 후에는 그리스어도 버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