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역사

증동의 역사 몽고족과 맘룩(1250-1517)시대

작성자
무스타파
작성일
2015-11-18 07:21
조회
429

증동의 역사

몽고족의 침공


첫 번째 몽고족의 침공은 1218-1222년 사이에 동북부 이란을 휩쓸었다. 그러나 1227년 징기스칸의 죽음으로 40여년간 칼리프는
몽고족의 위험을 느끼지 못하였다. 1254년 몽고제국의 황제 몽케의 동생 훌라구가 이란지역으로 진격하였고 마침내 1258년 바그
다드가 함락되었다. 훌라구는 쉬아파이자 그의 고문인 나시룻딘의 충고로 순니주민을 무차별하게 학살하였으며 바그다드시는 약
탈과 방화가 자행되었다. 이로써 500년을 이어오던 압바시야조(750-1258)는 망하게 되고 순니이슬람 공동체가 누리고 있었던 단
일성이 무너져 갔다. 또 무슬림 세계는 당시 수많은 군소국가로 갈라져 있었고 이 분열이 심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칼리프의 사형
에도 불구하고 압바시야조를 위해 원조를 제공한 세력이 없었다. 또한 지중해 지역은 십자군들 때문에 오랬동안 시달린데 대해 압
바시야조의 칼리프가 아무런 정신적 물질적 힘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의 원인이 있었다. 아시아 지역의 군소국가는 큰 저항없이 몽
고군의 발굽아래 짓밟혔으며 이집트의 맘룩조만 몽고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이슬람 전통을 보전하여 압바시야조의 정신적 계승자
가 되었다.



몽고족과 맘룩(1250-1517)시대


몽고족의 침입이 이슬람세계에 미친 영향은 십자군 원정보다 훨씬 강하였다. 무슬림들의 눈에는 몽고족은 완전한 이방인이었고
야만인으로 보였는데 상당한 수의 기독교인들이 몽고인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고 그 결과 수많은 무슬림들이 학살되고 수천년간
쌓아올린 메소포타미아의 관개시설이 파괴되었다. 몽고인이 이슬람에 개종하자 그들의 독실성을 증명하려고 교리에 집착하였으
므로 이슬람은 더욱 완고하고 배타적이 되었다.


시나이 반도에서 몽고족을 물리친 이집트의 맘룩조는 매우 특이한 국가체제를 가지게 된다. 맘룩은 본래 노예상인들에 의하여 반
야만 상태로 흑해 부근에서 수입되어 아유브조의 근위병이 되었다. 따라서 이들의 신분은 노예였지만 이들이 지배하는 이집트가
이슬람 명맥을 한동안 이었고 무슬림에게 희망을 안겨준 곳으로 변하였다.


몽고는 지금의 이란과 이라크지역에 걸쳐 일한국을 세워 이집트와 비옥한 초생달지역을 잇는 맘룩조와 대립하였다. 일한국과 맘
룩조의 경계선은 시리아와 이라크 사이를 가로질러 있었다. 이슬람 세계는 이란, 이라크 중심과 -이라크 중심의 양극화 현상이
나타났다.


맘룩조는 또다시 바흐리조(1250-1390)와 부르지조(1382-1517)로 나눌수 있는데 바흐리조는 아유브조의 알 살리흐가 그의 노예군을
나일강의 섬에 주둔시켰기 때문에 강(Bahr)에서 유래되었고 인종적으로는 주로 터키족과 몽고족이었다. 부르지조도 역시 바흐리 맘룩
술탄 칼라분이 창설하였으며 인종적으로는 서부 코카서스 지방의 서카시아 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 맘룩 왕조는 몽고족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살아남아 있던 십자군을 팔레스타인 지역의 지중해 연안에서 완전히 몰아내어 후환을
제거하였는데 오직 키프로스 섬만이 16세기가 될 때까지 기독교 지역으로 남아있었다. 이 맘룩조가 250년간 유지된데에는 무역에서 찾
을 수 있는데 십자군 원정에 뒤따른 갈등상태에서 지중해권과 인도양권의 무역은 거의 중단되었다. 오직 이집트만이 중계무역을 독점하
였기 때문에 번성하였다. 북부를 잇는 교통로는 몽고의 일한국과 킵차크 한국에 의하여 차단되어 있었고 14세기말에 티무르가 중동을
휩쓰는 대원정을 하였기 때문에 장기간 차단되어 이집트의 맘룩조가 덕을 보게 된 것이다.


이 시대에 이슬람의 선교활동은 인도양 해안에 많이 나타났다. 이슬람은 북인도에 자리를 굳히고 남부 인도로 진출하고 있었고 예멘의
무슬림 상인은 9세기 경부터 예멘 및 아랍만의 본거지에서 출범하여 동아프리카연안과 인도네시아 지역에 무역기지를 만들어 정주하였으
며, 포교활동도 성공을 거두었다. 더구나 하나피 법학파에 속하는 오스만터키가 이집트를 정복한 후에 샤피이 법학파에 속하는 많은 학
자들이 말레이 인도네시아 등으로 이주하여 오늘날 이지역의 이슬람 율법체계의 바탕이 되었다. 일한국의 통치아래 있었던 이란에서는
몽고지배층의 묵인하에 초기 쉬아파가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이란의 국교적 지위를 확립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몽고 지배층도
이슬람화되어갔다.


일한국(1256-1353)


일한국의 정치체계는 중국식으로 개편되었으나 전통적인 재상제도인 와지르는 존속되었다. 통치자는 군의 총사령관으로 몽고인 장군의
모임인 쿠릴타이의 자문을 받아 징기스칸의 법률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였다. 몽고는 전아시아 대륙을 통치하였고 종교에 대해 관대하
였으므로 로마 교황청도 흑해를 통해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또한 이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이 동방견문록의 저자인 마르코폴로였다.


이탈리아 상인들도 1204년의 4차 십자군 원정이후 흑해를 통한 무역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일한국의 통상활동은 별로 활발하지 못했고
중개무역 기지로서의 역할만을 하였다. 일한국의 지위가 왕성할 때에도 맘룩 이집트의 통상활동을 제지하거나 견재할 생각은 없었다.
일한국은 약 80년간 존속하면서 대규모 건축사업을 벌였는데 지금까지 남아이는 것은 아제르바이잔의 술타니야에 술탄 올 제이투 영묘,
테헤란 근처 베라민에 있는 성원과 야지드 시의 성원 등이다. 징기스칸의 원나라는 3개의 칸국을 두고 있었는데 일한국, 차카타이 한국,
킵착한국의 통치자는 모두 이슬람에 개종하였다. 킵차크한국(1226-1481)은 볼가강 하류인 현 러시아 남부인 그레미아 근처에서 15세
기까지 지탱하였다. 이 나라의 몽고인들은 일한국의 몽고인들처럼 터키인에 동화되어 버렸다.


차카타이 한국은 중앙아시아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문화적, 경제적으로 세 한국중에서 가장 뒤떨어진 한국이었다. 또 그 거주민들은
대체로 유목민이었으므로 국가적 단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후 징기스칸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티무르가 나타나 차카타이 한국을 멸
망시키고 강력한 왕조를 건설하였는데 몽고적인 전통에 이슬람적인 윤리를 결합하여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14세기 후반에 러시아 내
륙에서 북인도까지 중국의 변경에서 시리아와 소아시아 반도에 이르는 방대한 대륙을 정복하였다.

이 티무르조(1370-1506)는 그가 죽은 뒤 약화되었으며 나중에는 이란화되어 건물양식뿐만 아니라 행정기구의 공용어도 페르시아어를
사용하게 된다. 그 이후 이슬람 세계는 티무르의 후손인 바부르가 세운 인도의 무갈제국(1526-1858), 쉬아이란의 사파위조(1501-1732),
및 오스만제국(1281-1924)으로 나누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