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역사

전 근대 원리주의 이슬람 부흥운동 (살라피아 사상과 원리주의 )

작성자
무스타파
작성일
2015-06-27 11:44
조회
403

1. 살라피아 사상과 원리주의

17세기 유럽은 거대한 이슬람의 도전을 두려움 속에서 지켜보아야 했다. 무슬림군은 1658년 헝거리를 침공하고 1669년에는 크레타를 정복했다. 1672년에는 폴란드를 공격하고 6년이 지나지 않아 무슬림군은 러시아제국을 패퇴시키며 우크라이나에 들어갔다. 그리고 1683년에는 비엔나를 포위공격한다.

이같이 역동적이던 이슬람제국의 팽창주의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심각하게 쇠퇴하였다. 군사적 충돌과 반란, 중앙집권제의 약화, 경제적 퇴보 등 여러 내, 외부적안 요인들로 인해 오스만 터키를 비롯한 무슬림 세계의 여러나라들은 정치적 분열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쇠퇴기를 맞았다. 중세기 내내 상대적으로 우월했던 서구에 대한 무슬림 세력의 판도가 뒤바뀌게 되는 전환기를 맞은 것이다. 16~17세기에는 서구인들의 동방무역이 확장을 거듭했고 18세기에는 대부분의 무슬림세계가 그들의 경제적, 군사적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유럽의 사상과 신문물이 이슬람 공동체 내부에 유입되면서 무슬림사회에는 이슬람 전통을 도외시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부패와 방종의 생활이 만연하였다.

그 뒤 19세기를 거쳐 20세기 초까지 유럽은 거의 모든 무슬림세계를 장악하고 지배세력을 부상하였다. 북아프리카에서는 프랑스가, 중동 및 남아시아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동아시아에서는 네델란드와 영국이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유럽의 식민 제국주의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이 식민 제국주의는 또다시 무슬림세계에 정치적, 경제적 위기뿐만 아니라 종교적, 문화적 위기를 촉발시켜 결국 무슬림들은 정치적, 문화적 주권 모두를 유럽 기독교인들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과거의 무슬림들은 몽골의 지배를 잘 견뎌냈지만, 몽골치하에서는 이슬람이 받아들여졌다. 이제는 사정이 판이하게 달라졌다. 유럽의 식민 통치법이 이슬람법과 규범들을 대체하여 들어섰고 교육, 행정, 사법, 사회복지 등에 관련된 모든 제도와 관행들이 변경되었다.

무슬림세계가 유럽 기독교 세력에 정치적, 군사적으로 종속되면서 무슬림세계는 쇠퇴하고 몰락했을 뿐만 아니라 신성한 가르침과 교의에까지 위기가 닥치게 되었다. 무슬림 선각자들은 이러한 현상에 종교적 의문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이슬람 공동체에서 과연 무엇이 잘못인가? 서구의 성공은 기독교 문명의 우월성 때문인가? 무슬림사회의 쇠퇴는 구성원들의 무신앙 때문인가? 무슬림들은 이제 비무슬림들의 서구법으로 지배되는 사회에서 과연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갈 수 있을까? 어떤 방법으로 무슬림의 정체성과 신앙에 대한 이러한 도전에 대응해야 하는가?

다양한 반응이 자이비판과 더불어 쇠퇴 원인에 대한 성찰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자성의 목소리는 무슬림 공동체의 쇠퇴 원인이 진정한 이슬람으로부터 일탈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순수한 이슬람, 원래의 이슬람으로의 회귀만이 무슬림사회의 부흥과 재건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은 무슬림 사회가 종교적 개신과 개혁을 도모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근대 무슬림 사상가들은 이러한 이슬람 개혁주의를 새롭게 다듬고 주창하면서, 이슬람의 부흥과 공동체 사회의 쇄신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이슬람 부흥운동의 물결은 18세기에 놀라운 생명력을 갖고 이슬람세계의 무슬림 공동체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사실 무슬림 공동체는 개신과 개혁에 관한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이슬람이 다른 종교와 달리 신앙과 실천의 종교이고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지 않는 정교일치체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카와리지의 반정운동, 쉬아들의 혁명, 무으타질라파의 이성주의 도전, 이슬람법의 형성과 발전, 수피주의의 등장 등 이 모든 것이 무슬림들의 의식 개혁과 공동체 사회의 쇄신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주동자들은 한결같이 그들 운동의 원천을 꾸란 과 예언자 순나(관행)인 하디스에 두었고 개신과 개혁을 통한 순수한 이슬람으로의 회귀를 목표로 하였다. 이슬라흐(개혁, 개선)는 꾸란 의 용어로, 예언자들이 죄지은 그들의 공동체를 경고하고 신의 올바른 길로 그들을 되돌아오게 요구할 때 사용되곤 하였다. (꾸란 7:170,11:117,28:19)

한편 타즈디드(쇄신, 갱신)는 예언자 순나에 근거한다. 신께서는 그들의 신앙을 개신할 사람들을 매 세기 초에 움마에 보내실 것이다. 따라서 무슬림들은 이슬람의 갱신자 무잣디드가 진정한 이슬람을 복원시키고 실현하기 위해 매 세기 초에 보내어진다고 믿고 있다. 어쩻든 개신과 개혁이라는 두 용어는 이슬람의 부활과 부흥운동의 핵심으로서 이슬람 원리로의 복귀를 목표로 하며, 대체로 다음과 같은 개념을 전재로 한 것이었다. 첫째, 올바른 무슬림 공동체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인도하고 세웠던 메디나 공동체와 같은 이슬람 초기의 공동체이다. 둘 째, 무슬림 공동체가 쇠퇴한 요인은 미신적 관행과 이단적 혁신을 의미하는 비드아 때문이다. 이에 대한 척결이 개신과 개혁의 선결과제이다. 셋 째, 10세기 이후 순니 무슬림들의 일반적 경향은 이슬람 4대 법학파(하나피,말리키, 샤피이,한발리)의 가르침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무깔리둔(타끌리드를 쫓는 자)의 길을 걷는 것이지만, 부흥자들은 여기서 벗어나 이즈티하드(독자적 법 판단) 를 해야 하며 이즈티하드를 실행할 권리를 주장한다.

원래의 이슬람으로 돌아가자 는 현대의 이슬람 부흥운동은 서구 언론과 메스컴을 통하여 이슬람 원리주의 혹은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오늘날 무슬림세계에서는 이 원리주의를 아랍어로 우슬리아로 번역하고 있으나, 원리주의라는 용어는 어디까지나 서구세계, 특히 영어권에서 붙인 것으로 무슬림 세계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다. 무슬림들은 대체로 이슬람 부흥 주의와 부흥운동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하여 쓰고 있다. 그리고 이슬람 원리주의자들과 부흥주의자들이 전통 보수적 경향과 이러한 원리주의의 색깔을 띠고 일찍부터 사용해 온 용어로는 살라피아가 있다. 이것은 꾸란과 예언자 순나를 원문 그대로 이해하고 결코 은유적 해석을 하지 않으며, 또 이슬람초기의 살라프(선조, 조상)들이 후대에 뛰어난 법학파나 신학자보다 꾸란과 순나에 더 정통하였음으로 그들이 남긴 관행은 이슬람 원리에 가장 맞는 것들로서 꼭 존경하고 쫓아야 할 것들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살라피아 사상이 처음 등장한 것은 한발리 법학파의 창시자 이맘 아흐마드 빈 한발(780~855년)이 무으타질라파와 논쟁을 벌인 압바스조 제7대 칼리파 마아문 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 무슬림들은 이슬람을 이해할 때 꾸란과 예언자 순나의 원문인 누쑤쓰만으로 대개 만족하였다. 그러나 이슬람의 대정복기를 거쳐 광활한 영토의 대제국이 형성되자 패르시아, 이집트, 그리스, 로마, 인도 등 정복지의 디양한 문화유산들이 융합되고, 이슬람 공동체는 정치, 종교, 사회의 여러 면에서 복잡한 문제들이 야기되는 새로운 시대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외래사상의 종교적, 논리적 공격에 직면해서 이슬람을 방어하고 옹호하는 논증과 구체적 증거를 제시해야 할 경우들이 생겼났다. 이러한 종교와 사상 논쟁을 위해서 이성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논쟁법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필요에 부흥하여 무슬림 공동체에서는 꾸란 과 순나의 원문인 누쑤쓰의 이면세계로 시선을 확대시킨 사변 신학자들이 출현한다. 이들은 이성과 유추, 은유적 해석법을 이용하여 피정복지의 사상적, 철학적 도전에 대응했으며 이슬람교리를 옹호하려 했다. 이런한 사변신학자들의 선두주자는 정의와 유일신론의 백성들로 불리던 무으타질라파였다.

그러나 이들이 사용한 증거주의와 이성 중심의 철학적 방법론은 그들의 사상을 일반화시키지 못했으며 일반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일반 대중의 지적 능력은 항시 누쑤쓰에만 머물렀으며 누쑤쓰에 집착하였다. 그리고 일부 정통 울라마들은 사변신학파들의 엘리트적이고 선민적인 사고방식과 지나친 이성적 논리전개에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칼리파 마아문이 무으타질라파의 교리를 국교로 공인하고 꾸란 창조설 같은 무으타지라파의 이성에 의한 은유적 해석법을 옹호하고 지원하자 이맘 이븐 한발이 이에 반기를 들게 되었다. 대표적인 정통 울라마였던 그는 무으타질라파가 주장하던 꾸란 창조설을 이슬람 원리에 어긋나는 변혁적 논리, 즉 비드아로 선언하고 원래의 이슬람은 은유적 해석을 하지 않는 누쑤쓰의 이슬람이며, 그것이 바로 예언자 무함마드와 싸하바를 포함한 초기 무슬림들인 살라프들이 보존한 이슬람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성과 철학사상에 근거한 이들 무으타질라파의 교의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단정하여 사변신학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에 몰두하는 행위는 악이라고 말하였다.

아흐마드 빈 한발의 뒤를 이어 살라피아 사상을 체계화하여 펼친 인물은 이븐 타이미야(1328년 사망)와 그의 제자 이븐 까임 알 자우지야(1350년 사망)이다. 한발리 학파의 추종자인 이들은 보수적 경향의 반이성주의자로서 수피주의에 회의적이었으며, 이븐 한발 시대에 형식화된 살라피야 이론을 한층 더 구체화하였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싸하바 시대와 그 뒤를 이은 따비운(싸하바 다음 세대)시대의 관행이 어떤 다른 법학파나 신학파의 체계적 논리, 논증 연역보다 더 가치있다는 것이다. 초기 이슬람 공동체는 순수한 이슬람, 원래의 이슬람을 실현하였지만 후대로 갈수록 진리에서 벗어난 인위적, 이성적, 외래적 요소들이 부가되었고 그것이 후대의 이슬람신학과 교리, 종교적 관행속에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시대에는 수피주의, 범신론, 사변, 신학, 철학사상, 미신적 관행들이 넘쳐났는데, 이러한 비드아 때문에 이슬람이 오염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븐 타이미야는 이것을 제거하고 씻어낸 순수하고 건전한 살라프 앗 쌀리흐(올바른 선조들)의 관행으로 돌아갈 것을 역설한 것이다. 그는 자신을 무즈타히드(이즈티하드의 실행자)로 간주하였다. 필요한 경우에는 계시와 예언자의 전승을 각 시대 환경에 맞추어 새롭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이즈티하드를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살라피야 사상은 18세기 와하비야 운동으로 맥이 이어진다. 이 운동은 이슬람 종교의 부흥과 무슬림사회에 만연된 변혁과 이단의 미신적 교리를 정화하기 위해 아라비아반도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북아프리카의 사누시아 운동과 마흐디야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이슬람의 부활을 외치며 꾸란 과 순나로 돌아가야 한다는 살라피아 사상의 근원적인 맥을 재현한 것이다. 그 뒤 서구 식민주의가 본격적으로 이슬람세계에 들어오면서 이슬람 공동체는 서구 사상과 제도의 영향으로 더욱 변질된 정치, 경제, 사회구조를 갖게되었다. 뿐만 아니라 종교도 이교적 경향이나 세속주의 풍조를 띠고 날로 변질되어 가는 위기사항을 맞게 되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슬람의 개혁과 부흥운동이 새롭게 전개되었는데, 이 때에도 물론 살라피야 사상은 이러한 개혁과 부흥운동 및 시대적 사조의 중심이었다.

이 장은 이러한 이슬람개혁 사상과 부흥운동을 고찰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18세기 이후 이슬람부흥 운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무슬림 사상가와 개혁가들의 주요 사상과 활동을 살펴보고, 그들의 이론이나 운동의 상호작용과, 반작용, 특성, 방향, 영향 등을 분석 비교하고 고찰해봄으로써 근, 현대 이슬람의 동향과 이슬람사상의 큰 흐름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손주영
전 한국 외국어 대학 아랍어과 교수
전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