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역사

전 근대 원리주의 이슬람 부흥운동 (사누시야 운동)

작성자
무스타파
작성일
2015-07-08 08:53
조회
376

전 근대 원리주의 이슬람 부흥운동 2


2. 사누시야 운동

북아프리카의 리비아에서 일어난 사누시야 운동은 유럽 식민주의 열강들의 팽창주의 정책에 대항하여 사회적 종교투쟁을 벌인 대표적인 이슬람 부흥운동 중의 하나이다. 이 운동의 창시자인 무함마드 빈 알리 알 사누시(1787~1859년)는 알제리의 무자히르 부족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수피 종단을 따랐다. 그는 당시 서부 이슬람세계의 학문 중심지였던 페즈의 알 까라윈 대학에서 공부하고 모로코의 수피들, 특히 티자니야 종단의 수피들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후일 그는 카이로의 알 아즈하르 대학에서도 수학(1842년)하였지만 그보다 앞서 1825년에는 히자즈로 나가 메카와 메디나의 저명한 학자들과 교류를 하였는데 메카에서는 유명한 수피학자 아흐마드 빈 이드리스의 문하생이 되었고 이슬람 법과 하디스 학자로 곧 명성을 날리게 된다.

그는 부족주의와 지역주의로 갈라진 무슬림들의 정치적 분열을 비난하면서 이슬람적 단결과 연대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슬람법이 전통만을 고수하던 울라마들에 의해 오히려 왜곡되었다고 믿으면서 울라마들의 개인적 법판단의 문호를 차단한 보수주의 울라마들의 입장을 반대하였다. 그는 스스로 무즈타히드임을 선언하고 자신이 어려서부터 배우고 익힌 말리키 법에 대해서 스스로의 개인적 법판단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후일 알 아즈하르 보수주의 울라마들의 분노를 샀으며 일부 수피 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받게 되었다. 수피주의에 빠져 여러 종단에 가입하기도 했던 그는 수피사상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는 수피 종단에 명확한 증거나 확증을 요구하였고 순니 법학과 수피 사상의 혼합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그가 중간 매체를 부정하고 꾸란 과 순나의 증거와 확증에 의지했다는 사실에서 우선 그의 살라피야 사상의 경향을 엿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 그가 영혼의 투쟁과 심신의 정화를 통해 진리를 얻으려 했다는 점에서는 수피적 경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같이 그의 사상의 형성은 증거주의 방식과 조명주의 방식이 혼합되어 있으나 대체로 앞의 방식 즉 살라피야적인 면에 더 기울여져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법학과 하디스뿐만 아니라 천문학과 자연 과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누시야 사상과 운동의 기초는 그가 히자즈에 있는 동안 다듬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30년 알제리가 프랑스에 점령되고 북서부 아프리카에 식민주의 정책이 시작되자 그는 서구 식민 제국주의의 위험을 실감하고는 이슬람 세력의 통합과 이에 대항할 지하드 준비에 골몰하였다. 현대 물질문명을 바탕으로 한 서구 군사력의 도전에 직면하여 그는, 오스만 터키 정권은 서구를 물리치려 노력하는 아랍 공동체에 단지 하나의 족쇄 같은 존재에 불과할 따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슬람 공동체가 단결하기 위해서는 자연적, 종파적으로 견해차이를 조장하고 있는 엄격한 전통주의와 보수주의, 미신적 관행같은 공동체 내의 부정적 요소들을 과감히 척결해야만 하고 서구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인내와 절제, 관용과 형제애, 지하드 의식같은 이슬람 가르침 속의 정신력을 기르고 이슬람의 부활 의식을 고취하며 함양시켜 나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수피 종단의 자위야 조직과 그 운영에 관한 그의 독특한 철학이 나오게 된다. 그는 자위야를 고대와 현대의 이슬람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로 삼고 이를 통해 새로운 무슬림사회 구성의 모델을 제시하고 장기간 계획하고 갈망해온 사회개혁을 실천하려 했다. 사누시는 1837년 메카의 아부 까비스 산에 최초의 자위야를 설립하여 그 자신의 따리까인 사누시 종단을 열기 시작하였다. 그 후 알제리가 프랑스 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리비아 해안의 알 바이다에 두번쩨 자위야를 건설한 이후 아라비아 반도에 25개와 아프리카에 무려 총 188개에 달하는 사누시야 자위야를 세웠는데, 리바아에 97개, 이집트에 47개, 수단에 17개, 튀니지에 2개가 있었다.

자위야 프로그램은 급진적 행동주의의 길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슬람의 형재애 사상을 바탕으로 수피적 센터와 숙소를 건립하여 예배 장소와 군사훈련과 사회복지 활동을 하는 장소로 쓰고 각 자위야에는 경작농지가 있어 자급농업이 가능하고 수공업 등 자영의 공동작업이 의무화 되어 있었다.자위야에는 종단을 대표하는 지도자 알 무깟딤과 재정, 경제를 담당하는 와킬(대리인)교육 및 결혼계약 등의 일을 하는 쉐이크가 있었다. 주변 부족의 지도자들은 자위야의 운영위원에 공동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이 자위야는 병영이자 예배장소이며 종단의 중심이었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꾸란 낭송과 염주에만 집착하는 자는 자위야의 백성에 속할 수 없다 면서 자위야 공동체 생활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일주일 중 목요일은 농작과 수공업을 위해 공동작업을 하는 날로, 금요일은 기마술과 병기 사용술, 전투기술 훈련을 실시하는 날로 의무화 하였다.

시누시야 무슬림은 이슬람국가의 건설과 이슬람 전파를 목표로 삼고 이를 동시에 수행하였다. 자위야에서 훈련받은 이들은 이슬람 선교를 위해 여러 지역으로 파견되었는데, 자힐리야 시대의 것같이 변질된 전통과 관례를 따르던 중소도시 무슬림들이나 사막의 베두인들에게 새로이 사누시야 개혁 이슬람을 전파하였다. 또 아프리카 중심부에 살던 다신론과 우상숭배 부족들에게도 새로이 이슬람이 전파되었다. 예를 들면 파티쉬(토속 신앙, 우상)를 섬기던 원주민들을 이슬람화한 것이다. 사누시야 운동은 오늘날 아프리카의 중앙과 서부 지역으로 번져가 와다이, 알 바까리, 부루쿠, 나이지리아, 부르노, 콩고, 카메룬, 다무, 다후미 등지에 많은 새 무슬림 개종자들이 등장하였고 특히 차드 호수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아프리카에는 4백만 명에 이르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이와 같이 사누시야 운동은 동쪽으로는 소말리에서 서쪽으로는 세네갈에 이르기까지 사하라 중 남부의 아프리카 지역에 무슬림 벨트를 형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중앙아프리카에 라비흐조, 아흐마드조, 사무라조 등이 일어나게 한다.

사누시야 운동은 이슬람을 전파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북부와 중부를 잠식해 들어온 유럽 식민주의에 대항한 아랍 이슬람 군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자위야는 기마술과 전투 기술을 익히는 훈련장이었고 사누시야 가르침의 정수는 한마디로 지하드 사상이었다. 종단의 지도자들은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언제든지 지하드를 행할 수 있도록 무슬림들에게 경각심과 신앙심을 불어넣었다. 그 결과 이들은 수단에 진군한 프랑스에 대항하여 약 15년(1901~1914년)투쟁하였고, 리비아에 침공한 이탈리아에 대항하여 1911년부터 약 30년간 정신적, 군사적 힘과 추진력을 제공해주었다. 계속된 투쟁으로 사누시야 운동은 서구 식민주의 침략에 대한 저항운동이 되었다. 그들은 오스만 터키의 아랍 무슬림 지배와 통치 체제를 부정했다. 그리고 그들의 무능력과 무기력을 비난하였다. 사누시야 무슬림들 역시 칼리파 지위가 꾸라이쉬 부족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누시의 후계자이자 아들인 싸이드 알 마흐디(1859~1902년 통치)와 그의 동생 아흐마드 앗 샤리프(1902~1918년 통치)모두는 유럽인과 터키인 모두에 투쟁하는 지하드를 선언하였다.
제2차대전 중 영국정부는 사누시의 손자이자 20년간 이집트에 추방되어 있던 싸이드 무함마드 이드리스를 정신적 수장으로서만이 아니라 시레나이카의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인 아미르로서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1951년 리비아의 이드리스1세로 왕위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