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역사

전 근대 원리주의 이슬람 부흥운동 (마흐디야 운동)

작성자
무스타파
작성일
2015-08-04 09:24
조회
380

마흐디야 운동

수단에서 일어난 마흐디야 운동의 창시자 무함마드 아흐마드(1844~1885년)는 1881년 스스로를 마흐디(구세자)로 선언하였다. 순니 무슬림들은 쉬아와 달리 메시아 교리를 갖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수단인들은 그를 마흐디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무함마드 아흐마드가 압제자로부터 공동체를 구하고 진정한 이슬람과 정의로운 사회를 복원시키기 위해 신이 보낸 메시아적 인물, 즉 신성하게 인도된 자 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은 수단 사회의 오랜 수피 경향 때문이었다. 수단사회는 수피학자와 순니 법학자들이 주도해 왔다. 법학자들은 대개 정부조직과 행정기관의 주요 업무를 담당한 고위층이었으므로 일반 대중과 격리되어 있었지만 수피학자들은 일상의 종교생활 때문에 일반 대중에게 밀접히 다가가 있었다. 여러 수피 종단들이 일반 대중 무슬림들의 생활 속에 깊이 파고들어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피의 유산 중에는 기다리는 마흐디 사상이 있다. 여기서 마흐디는 미래에 등장하게 될 신화적인 지도자를 의미하는데, 이는 중세의 수피 대가 무히 앗 딘 빈 아라비(1165~1240년)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회의 악과 부조리를 척결하고 부족집단간 갈등과 모순을 타파하며 정의를 실현하는 전설적인 인물이 바로 기다리는 마흐디 라는 것이다. 수단에서는 이미 이와 같이 마흐디 출현에 대한 분위기가 이미 성숙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함마드 아흐마드는 1844년 8월 12일 단깔라에서 15키로 떨어진 라밥섬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수단 혁명의 지도자가 되어 수단인들을 한 도가니 속에 용해시켜 수단 역사상 최초로 단일 민족 공동체를 창출해낸다. 아마도 이러한 업적이 수단인들로 하여금 그를 전설적인 인물인 기다리는 마흐디로 평가하게 한 배경일 것이다.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카르뚬에서 공부하였다. 수단의 카르뚬에 최초의 전문 교육기관이 설립된 것은 1863년 이었다. 그는 1868년 법학자가 되었다. 그는 수피사상에 몰두하였고 신에 대한 경외심 속에 금욕생활을 하였다. 1880년 그가 속했던 삼마니아 종단의 쉐이크 알 꾸라쉬 릿드 알 지븐이 사망하자 그는 종단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수피 공동체의 개혁을 구상하고 예언자 시대의 공동체 사회로 수단 사회가 거듭나기 위한 구체적인 개혁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이 초능력의 인물로서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예언자를 보았으며, 그로부터 마흐디야 사상을 전수 받았고 지하드를 위임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1881년 6월 29일 자신이 마흐디임을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 모두는 그가 마흐디임을 믿고 새로운 종교사회 건설에 동참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터키와 서구 지배로부터 벗어난 수단은 독립과 자유를 쟁취해야 하며 이슬람을 회복시키기 위한 수단 민족 모두가 봉기할 것을 축구하였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라마단 달에 아바 섬으로 이주할 것을 명령하면서 지하드를 준비했다. 그는 지하드 수행이 핫즈(순례)보다 앞서는 의무라고 가르쳤다. 터키 불신자들 치하에서 이루어지는 순례는 무의미하며 알라를 위해 다듬는 칼은 70년의 예배보다 더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지하드 수행의 원동력을 외세에 대항하려는 수단 민중의 의식 개혁과 신앙심에서 찾으려 했다. 알코올, 도박, 서양음악은 무슬림사회를 타락시키는 비이슬람적인 외래의 것들로 배척하고 추방해야 할 것들었다. 아바 섬에서 마흐디는 정부군에 대항하여 1881년 8월 2일 최초의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새로운 정부조작을 구성하였다. 바이트 알 말(재무성)을 설치하고 자신의 휘하에 4명의 칼리파(대리인)를 두었다. 이들은 4명의 정통 칼리파를 상징했으며 자신은 예언자 직위를 계승한 마흐디였다. 1885년 6월 26일 당시 카르툼의 영국 수비대장 찰스 조지 고든 장군은 마흐디 추종자들을 공격하였으나 피살되고 말았다. 그 후 마흐디야 운동은 전세계의 주목을 끌게 되었고 수단의 전 지역을 장악하게 된다.

마흐디가 성취한 군사적 승리는 이집트의 오라비 혁명(1882년)정신에 고무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는 자신이 왕의 종이나 술탄의 신하가 결코 아님을 거듭 주장하였다. 고든 장군은 그에게 카르디판의 통치권을 주겠다고 제의한 바 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거부하였다고 한다. 나의 마흐디 지위는 신과 예언자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나는 왕도 어떤 관직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신의 예언자의 칼리파일 뿐이며 내게는 권력이나 통치권이 필요하지 않다. 나는 속세의 물질이나 영화를 원하지 않는다.

그후 사람들은 그의 강직함과 초인적 능력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였고 나뭇잎이나 계란에 마흐디 이름을 적어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였다. 당시 수단 같은 후진사회에서는 비 논리적이고 초자연적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이외로 엄청난 사회적 결속력을 발휘하게 되었고 실제로 이는 마흐디 혁명으로 표출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흐디 진영으로 이주했다. 재산가는 자신의 재물을 제공하였고 가난한 자는 자신의 영혼을 이 전설적 지도자에게 바쳤다. 와하비야 운동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금욕주의는 추종자들에게 영적 우월성과 힘을 주었고 특히 노예와 주인이 협조하여 같은 처지에서 전투하는 것까지 가능하게 한 그의 평등화 정책은 저층 무슬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영향력을 갖게 하였다. 그 후 마흐디야 운동과 사상은 아랍의 전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마흐디야 사상과 운동의 골자 역시 꾸란 과 순나로의 회귀와 중세 이후의 미신적 관행을 부정하는 것이었고 이즈티하다의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진정한 이슬람을 구현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복원하기 위해 신으로부터 보내졌다는 그의 마흐디 사상은 12번째 이맘이 마흐디로서 종말의 시간에 이 땅에 돌아올 것이라는 쉬아들의 마흐디 사상과는 원론적으로 구별되는 것이었다. 또한 무즈티하드로써 지위를 주장하는 다른 이슬람 부흥론자들과는 달리 그는 신의 대리인으로서 영감을 받았고 신성하게 임명받았다는 점을 천명하였는데 이것도 그의 독특한 점이다. 그렇지만 7세기에 무함마드가 실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상에서 신의 통치를 실행할 의지를 표명하고 초기 이슬람사회와 같은 모범이 되는 이슬람 공동체를 재건하겠다는 그의 계획은 다른 이슬람 원리주의자나 부흥론자들이 똑같이 공유하는 살라피야 주의적 착상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오스만 터키에 대한 그의 적대적 태도와 투쟁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주거와 의상에서도 터키인들과의 차별을 요구하였다. 터키인들과 비슷해지려고 하는 모든 행위들은 불신이니 이를 따르지 말고 그들의 의상도 입지도 말라. 그들이 나의 적인 것처럼 너희가 그들을 따른다면 너희도 나의 적이 되느니라. 그런고로 터키인의 상징이나 표지, 의복 모두를 버리도록 하라.

마흐디의 이러한 가르침은 민족적 자존과 각성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흐디는 터키인들에 대한 투쟁과 지하드가 예언자로부터 명령받은 의무적 실천사항임을 강조하였다. 그들이 싸우는 적대자가 정부군일지라도 그 군대는 이집트 정부의 군대이고 이는 곧 터키 정부의 군대를 의미했다 수단이 정치적으로 이집트에 합병된 이후 수단인들은 이집트 케디브 정권을 오스만 터키 정권과 동일시 했으며 더욱이 1882년 오라비 혁명 후 이집트가 영국에 장악되자 그들의 투쟁은 케디브 정권과의 관계 단절 및 축출뿐만 아니라 동시에 반터키, 반영국, 반식민제국주의에 대한 지하드가 되었다. 초기 이슬람 시대의 카와리지들처럼 마흐디는 그들의 공동체 밖에 다른 무슬림들, 오스만 터키인과 이집트의 통치자들에 대적하는 지하드관을 정당화시켰던 것이다.

마흐디야 운동은 불과 15년간 지속되었지만 한 국가체제를 유지하며 존속하였다. 마흐디야 사상과 종교이념으로 통치되는 이슬람국가를 세우고 이슬람의 정당화 수단 무슬림의 통합에 힘쓰고, 샤리아를 국가의 유일한 법으로 채택하엿다. 그러나 1899년 9월2일 영국식민주의 토벌대의 키체너르 장군에게 수도 움두르만이 함락되자 근대 수단의 선구자로 간주되는 이 마흐디야 국가는 종말을 맞았다. 무함마드 아흐마드는 1885년 움므 다베크라트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생전에 성인숭배와 묘지참배 의식을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생전에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마흐디야 운동은 민족주의 운동으로 수피종단의 종교운동으로, 외세를 몰아내고 이슬람국가를 세운 정치운동으로 사회 각성운동으로 수단의 역사 속에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