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역사

아랍제국, 우마이야조(661~750년) 정복지의 아랍화와 이슬람화

작성자
무스타파
작성일
2015-05-07 23:28
조회
458

아랍제국, 우마이야조(661~750년)

 

정복지의 아랍화와 이슬람화

아랍 무슬림군이 승리하여 이슬람을 전파한 광활한 영토들에서는 아랍화와 이슬람화라는 과정이 서서히 진행되었다. 이라크에서, 대시리아에서, 이집트에서 그리고 마그립 지역 북아프리카에서 아랍어는 빠른 속도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단지 북이라크의 쿠르드족과 알제리와 모로코에 있던 베르베르인들만이 아랍어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의 고유 언어를 지켰다.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에서 그리스어는 아랍어가 공식 공용어가 될 때까지 한동안 행정어로 남아 있었지만 비옥한 초생달 지역 일부에서 쓰여지던 아람어는 급속히 아랍어로 대체 되었다. 아람어는 이제 다마수쿠스의 북쪽과 북이라크의 한두 마을 외에는 존속하지 않는다. 유사하게 고대 이집트어의 하나인 콥틱어도 아랍의 침입 이래 점진적으로 소멸되고 대규모로 아랍화가 이루어지면서 완전히 아랍어로 동화되었다. 콥틱어는 콥틱교회 종교언어로서만 남아 있다. 이러한 아랍화가 곧 오늘날의 아랍권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슬람화는 아랍화와는 다른 양상을 띠었다. 그것은 기존 기독교인과 유대인 공동체 때문이다. 오늘날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에서 그들은 이슬람에서 성서의 백성들로 존중받고 합법적으로 신앙을 고수하고 살아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슬람전파는 아랍어의 확장보다 훨씬 더 넓은 지역으로 광역화되었다. 그것은 빠르게 사마르칸트까지 전파되었고 또 인도 국경을 넘어섰다. 거대한 인구를 가진 인도대륙, 중국, 동남아가 이슬람을 받아 들였다. 이 지역에서의 아랍어는 단지 종교언어로 제한되었다. 페르시아 언어와 문화는 둘 다 아랍인의 정복과 이슬람화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았다. 비록 페르시아의 파르시어가 아랍어 문자를 채택했지만 언어와 문자는 그대로 보존되었다. 오늘날 세계 무슬림의 약 1/5만이 아랍어를 말하고 있다.

터키들인들은 아랍인에게 정복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10세기부터 대규모로 이슬람에 귀의하였다. 그들은 종교, 과학, 문화 용어에서 아랍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터키어도 아랍문자를 쓰고 있었다. 12세기 페르시아어가 서아시아의 문학언어가 되었을 때 터키어는 두 번째 언어상의 침범을 당했다. 터키 작가들이 페르시아어를 사용하였고 아랍어의 문법적 구성을 아랍어 단어들과 마찬가지로 채용해서 터키어의 복합어를 만들어 내는데 응용하였다. 아랍어, 페르시아어, 터키어는 중동지역 주민들이 쓰고 말하는 언어가 되었다. 현대 민족주의자들의 편의적인 분류는 바로 그 언어를 말하는 사람이 아랍인이고 이란인이며 터키인이라는 것이다.

두 소수민족만이 동화를 거부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고수하였다. 아르메니아인과 쿠르드인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기원전 6세기부터 민족적 존속을 유지해왔는데 지금의 동터키와 구소련 트랜스코카서스 지역 일부에 살면서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인들로서 그들의 공동체가 가장 오래된 기독교 국가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15세기에 이슬람제국에 정복당하기 전까지 수세기 동안 독립왕국을 지켜왔다. 지금도 비록 중동및 그 위쪽 지역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을지라도 그들은 그들만의 언어, 종교, 문화에 오직 충성을 바치며 남아 있다. 쿠르드인들은 고대역사에서 자주 아르메니아인들과 겹치는 산악민족이다. 그들 언어는 페르시아어와 같이 인도-유럽어족으로 분류된다. 그들은 한번도 독립된 국가를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덜 흩어져 있으며 오늘날 북서 이란으로부터 북동 이라크와 시리아를 통해 터키에 이르는 아크형 영토에서 살고 있다.

엄격하고 공정하며 간소하면서도 금욕적이고 꾸밈이 없는 이슬람은 오랫동안 페르시아와 비잔틴 치하에서 고율의 세금과 학정으로 고통받던 지역 주민들에게 편안함과 친근감을 주었고 따라서 손쉽게 그들을 개종시키거나 그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러한 맥락에서 오늘날의 아랍 및 중동의 무슬림들은 초기 이슬람 시대의 조상들이 가졌던 원래의 이슬람으로 돌아간다면 지금도 그들의 영광된 역사를 재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 속에 살고 있다. 초기 이슬람 시대에는 불과 몇십만 명을 넘지 않는 순수한 아랍 혈통의 전사들이 군대의 귀족계급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슬람을 새로 받아들인 정복지의 비아랍인들 즉 페르시아인, 이집트인, 혼합된 종족인 레반트인,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인 모두를 마왈리(비아랍 무슬림)라 불렀다.

처음에 이들은 일정한 조세를 내야 하는 피보호민, 예속평민의 지위였다. 따라서 역사가들은 정통 칼리파 시대와 우마이야조까지를 아랍인 통치한 아랍제국시대 라고 부른다. 아랍이 이 민족을 지배하며 이슬람움마를 통치한 아랍인 주도의 이슬람 역사시대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슬람과 아라비아(지역)의 관계가 불가분의 관계이기는 하지만 이슬람에서 인종적, 종족적, 지역적 구분을 두는 것은 이슬람의 원리 꾸란 의 정신에 엄격히 반대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중동및 이슬람지역 곳곳에서는 이슬람의 원리 꾸란의 정신에 엄격히 반대되는 일이 었다. 그런데 중동및 이슬람력 곳곳에서는 마왈라 여인들과 결혼이 매우 흔해졌기 때문에 혼혈과 동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순수 아랍인들은 점차로 귀족 의식을 버리게 되었고 아랍이라는 단어는 아라비아반도의 베두인 유목민을 가리키는 인종적 의미의 아랍에서 이제는 문화와 언어를 아랍어로 갖고있는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문화적 개념의 아랍으로 그 의미가 바꾸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적 의미의 아랍이다.


무슬림 주류의 태도와 무르지아파의 등장

칼리파 오스만의 죽음과 칼리파 알리의 즉위에 즈음하여 무슬림 각자는 자기의 태도를 결정해야 했다. 오스만의 살해에 대한 복수에 동조하든지 또는 알리의 정권에 지지를 보내든지 혹은 중립을 지키든지에 따라 무아위야파와 알리파 그리고 중립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때 대다수의 무슬림들은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파의 태도를 취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입장을 중립 또는 주류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아직 구심점이 없는 중간적 태도를 취한 것이고 카외리지의 발생 이후에도 카와지리파나 쉬아파를 이단시 하기보다는 그들이 이슬람의 전통과 관행에 새로운 변혁을 시도했기 때문에 그러한 뜻에서 그들의 행동에 비드아(혁신)라는 용어를 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용어가 가진 내면의 의미는 소위 참된 믿음과 관행은 예언자와 그 직계 교우들이 가졌던 믿음과 관행이라는 것인데 여기서 벗어난 것은 모두 변혁적인 것이며 이것은 곧 이단적인 비드아 라는 것이다. 이들은 지류를 이루어 떠나간 종파 사람들에 대해서 다양한 평을 하면서 그들 자신의 입장과 교리는 한결같은 전통과 관행으로서 그것은 무함마드와 그의 교우들의 믿음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중립주의적 입장의 대변자로 거론되는 대표적 인물로는 칼리파 오마르의 아들인 압둘라 빈 오마르를 들수 있다. 그는 오스만이 사망한 후 알리와 무아위야의 투쟁에서 중립적 입장을 취했고 무아위야가 자기의 아들 야지드를 칼리파위의 법적 상속인으로 지명하고 충성의 맹세를 요구하였을 때에도 이를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이것 역시 혁신 또는 변혁적 행동인 비드아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무아위야가 사망한 이후 후세인이나 이븐 앗 주바이르와는 달리 야지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시대적 주류의 현상을 신의 뜻에 의한 정명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대부분의 생애를 메디니에서 조용히 보냈으며 이 때문에 그의 중립적 입장은 정치에 대한 불개입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입장은 이슬람 역사에서 대다수 무슬림들이 쫓는 일반적 경향이 되었다.

중도나 중립적 입장을 취했던 이들 무슬림 주류가 어떤 조직된 형태를 취했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이들은 알라의 말씀인 꾸란 과 무함마드의 순나에 근거한 이슬람국가의 존립을 생각했던 거대한 여론 집단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마이야조의 대부분 시기에 순나의 개념은 아직 확연하게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고 단지 대도시의 학자군(울라마)이 인정한 관행 정도로 이해되고 있었다. 그민큼 우미이야조는 비종교적이었고 세속적인 입장을 취했다. 꾸란 과 순나의 현실적 의미와 관련하여 카와지리파는 행동의 근거를 꾸란 에서만 찾음으로서 이들 무슬림 주류와 전혀 다른 입장을 취했고 반면에 초기 쉬아파의 일부 극단론자들은 꾸란 의 내용보다는 카리스마적인 인물을 이맘으로 내세워 그를 모든 관행의 근원으로 삼으려 했다. 카와지리와 일부 초기 쉬아파의 이러한 상반된 논리에 반해 공동체의 여론과 주류의 정서는 칼리파제국의 이슬람적 성격을 유지하는 데 관심을 더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 이들은 꾸란 과 종래의 관행에 근거한 정의와 공정의 원칙을 기본논리로 삼았다. 그러나 아직 완벽하고 완전한 형태는 아니었다. 중도파 사이에도 많은 견해차이가 나타났다. 그러면서도 이들의 공통된 입장은 국가와 이슬람의 원리원칙에 대한 애착이라 할 수 있었다. 바로 이와 같은 애착이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을 위한 충성과 열정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이 중립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입장을 온건하게 표시한 파가 무르지아 파다. 그들은 믿음이 움마의 구성윈이 되는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자신이 신자가 되었다는 점을 다른 신자 앞에 보이고 또 그들로부터 인정받으면 곧 동등한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누가 무슬림이고 또 누가 진정한 무슬림이냐 하는 문제는 즉, 인간과 신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점은 한마디로 신자가 신앙 공동체에 속해 있느냐 아니냐라는 데 달려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곧 이슬람적인 생활양식과 믿음능 실천에 옮기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말이었다. 신자가 큰 죄를 범하였다고 신자가 아니라고 단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그러한 단죄의 결정행위는 오로지 신의 고유한 권한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들은 인간의 행동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행위를 삼갔다. 다시 말해 인간의 죄와 무죄를 인간이 심판해서는 안 되고 그 판결은 오직 신의 심판에 맡겨야 하며 이것은 곧 최후의 심판의 날 까지 연기하자는 것이다.

무르지아라는 말의 어원인 동명사 이르자으(연기,미룸)는 여러 의미로 풀이되지만 대표적인 의미가 중죄이에 대한 심판을 부활의 날까지 연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죄인에 대한 심판의 연기는 자연히 중죄인은 아직 신자이다. 라는 견해로 이어졌는데 이것은 중죄인은 신자의 대열에서 벗어난다 라고 주장하던 카와지리파의 과격행동주의 논의와 정반대의 입장이었다. 카와지리들은 십핀전투에서 중재회의를 받아들인 칼리파 알리를 중죄인으로 단죄하고 배신자로 보았으며 탄핵의 대상으로 삼아 결국 살해하였다. 일반적으로 무르지아파의 주요 관심사는 무슬림 공동체의 단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정치적 의사 표시를 삼가게 되었는데 이러한 무르지아파의 사고와 행위는 우마이야조 지배자들의 취향에 맞아 떨어져 그들의 지배 원리에 이용되었다. 대체로 무르지아파는 카외지리파의 극단적 반대자로 여겨졌다. 이는 비록 우마이야 지배자들이 죄(정치적. 종교적 어떤 죄든)를 범했다 할지라도 무르지아들은 과격행동주의자들이었던 카외리지들과는 달리 일시적으로 그들의 죄에 대한 심판을 부활의 날까지 연기해야 하므로 현세의 지배자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행동을 믿음 다음의 위치에 두고 믿음이 굳건히 있는 한 믿음에 죄과에 의해 손상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또한 이들은 쉬아파의 견해에도 반대했다. 결코 알리를 오스만 보다 우위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알리와 오스만에 대한 심판을 연기하고 이들의 신앙과 불신을 입증하려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무르지아파의 입장은 우리는 오스만과 알리의 문제에 대한 결정과 판결을 신에게 맡긴다는 것이고 우리는 죄를 지었다고 누구나 불신자로 선언하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이만(믿음)으로부터 배제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다. 결국 이들의 입장은 무함마드 공동체의 죄인들은 모두 불신자가 아니라 여전히 신자이다 라는 것이다.

무르지아파도 우마이야조가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한 것을 옳게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우마이야조에 대해 지니고 있던 반감을 정치적 행위로 표출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종교적 연구 즉 순나(관행, 특히 예언자와 그의 직계 후계자들의 관행) 연구에 매진했다. 메디나 학자를 중심으로 한 그들은 실용적이며 현실주의적인 온건한 태도로 점차 극단적인 다른 종파를 온건화시키고 동화시켜 순니파를 생성했다. 압바스조에 들어서서 그들의 중도적인던 신앙의 실천력이 보완된 후 이것이 순니의 입장이 된 것이다.

무르지아파 사이에도 신앙과 비신앙, 유일신 개념, 꾸란 의 본질과 해설, 종말론, 죽음을 면할 수 없는 큰 죄와 큰 죄인의 용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 예언자의 완전 무결성, 신의 본질과 속성, 운명예정설 및 신앙심의 증감 여부 등에 대한 견해가 통일되어 있지는 않았다. 이에 대해 그들은 첫째, 신자는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 따라서 행동해야 한다는 견해, 둘째, 개인의 이성적 판단에 따라서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므로 올바른 지도자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는 견해, 셋째, 이 문제에 대해 태도를 보류하는 파 등 세 갈래로 갈라졌다. 이 세 입장은 점차 이론적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져, 첫째, 믿음과 자유의지에 관한 단정 연기의 입장, 둘째, 믿음과 강제에 관한 단정 연기의 입장, 셋째, 행위보다 믿음에 우선을 주지만 운명예정설이나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는 입장 등의 세 분파로 나누어졌다. 두 번째 파는 운명예정설을 추종했기 때문에 자바리야 로 알려졌다. 그들은 인간이 신의 강제에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유의지를 강조한 세 번째 파는 690년경에 까다리야 파라는 이름으로 무르지아파에서 분리해 나왔다. 이들은 신에 의해 인간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정명 이라는 뜻의 범위를 축소시켰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행동의 창조자이며 또 그의 의지는 구속받지 않고 자유라는 것이다.

칼리파 히샴(724~743년 재위)의 사망 후 우마이야조는 내부 분열을 일으켜 1년동안 칼리파가 4번이나 바꾸면서 급속히 쇠퇴하였다. 부족간의 분쟁은 더욱 심해졌고 쉬아파와 카와지리파의 반정부 운동은 다시 활발해져 갔다. 심지어 시리아 내에서도 중앙정부의 권위가 도전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지막 칼리파인 마르완 2세(744~749년 재위)는 총명하고 유능한 통치자였으나 너무 늦게 권좌에 올랐기 때문에 우마이야조를 구할 수 없었다. 우마이야가의 종말은 자칭 하쉬미야(예언자 무함마드 가계를 지지하는 파)당에서 시작되었다. 하쉬미 야당의 지도자이며 압바스 가문 출신인 이브라힘은 745년 자신의 마왈리 가운데 한 사람인 아부 무슬림을 자기의 대리인으로 삼아 후라산에 보냈다. 그는 그곳에서 747년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 세력은 분쟁 중이던 우마이야 지지 아랍 부족을 제압하고 이 지역을 석권하게 되었다. 이들은 서쪽으로 진격을 시작하였고 잡 강에서 우마이야조의 마지막 저항을 쳐부수고 우마이야가를 멸망시켰다(750년) 그리고 압바스가의 아불 압바스가 앗 사파 라는 이름으로 압바스의 초대 칼리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