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역사

이슬람제국 압바스조(750~1256년)

작성자
무스타파
작성일
2015-05-09 05:08
조회
475

이슬람제국 압바스조(750~1256년)


압바스조를 이슬람제국이라 부르는 것은 이 왕조에서부터 종래 아랍의 특권적인 지위가 상실되고 인종과 민족을 초월한 이슬람제국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정복민으로서의 아랍민족 우월주의는 퇴색하고 지배층이 페르시아인을 비롯한 비아랍계 무슬림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면서 자연히 무슬림 평등 원칙이 확립되었다. 또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제국의 수도를 옮김으로써 정치, 군사, 문화, 경제의 무게 중심이 동쪽으로 이동되었다. 지중해 쪽에 모아지던 관심이 동방으로 돌려졌다. 페르시아의 왕정제, 관료제 및 행정제도에 영향을 받게 되고 관심도 증가되었다.
새로 건설된 거대한 도시 바그다드는 번창하는 세계 동서무역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활발히 상업활동에 종사하기 시작해 8세기 이후 무슬림 상인들은 바닷길의 주인공이 되었다. 아랍의 배들이 수마트라, 인도, 중국으로 항해하였고 아프리카의 동쪽 해안을 따라 마다가스카르트 나아갔다.

압바스조는 제5대 칼리파 하룬 알 라쉬드(798~809년 제위)와 그의 아들인 제7대 칼리파 알 마아문(813~817년 재위)시대에 절정기를 맞았다. 하룬 라쉬드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주인공이다. 이 시기는 중앙집권적 관료체제가 재정비되고 육로 비단길에 이어 활발히 해상 비단길이 개척되었으며 학문장려와 문예증진에도 힘써 그야말로 이슬람 문화의 황금시대였다. 특히 칼리파 알 마아문 때에는 많은 그리스, 로마 고전들이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이 즈음에 페르시아인 이븐 쿠르다 지바(886년 사망)는 자신의 지리 안내서 제도로와 제왕국지(845년)에서 중국의 맞은 편에 신라국이 있음을 기록해 놓아 이미 이시기에 우리나라와 아랍 이슬람세계 간에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철학, 의학, 문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눈부시게 발달했다. 후일 이를 다시 다시 유럽에 전해줌으로써 유럽의 르네상스가 있게 했고 근대 자연과학 발전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 수학에서는 아라비아 숫자와 영의 개념 확립, 대수학과 삼각법의 발달, 역학과 천문학, 연금술과 화학 등이 특히 발달하였고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알코올Alcohol, 알카리Alkali, 화학Chemistry, 대수Algebra, 역법Almanac, 연금술Alchemy, 설탕Sugar, 목화Cotton 등 수많은 아랍어 차용어들에서도 그 영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권력국가론을 처음으로 전개한 중세의 뛰어난 무슬림 역사 철학가 이븐 칼둔(1332~1406년)은 자신의 저서 무깟디마(역사소설)에서 왕조는 개인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수명을 가지고 있다 고 말하면서 어느 국가든지 정복, 왕조 창건, 전성기 도달, 쇠퇴, 몰락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고 분석하였다. 그의 말처럼 압바스조는 번영의 최고점에서 급속히 쇠퇴의 길로 빠져들어 갔다.

역사가들은 압바스조 칼리파제의 역사를 크게 번성기와 쇠락기의 둘로 나누고 전기 압바스조, 후기 압바스조로 부르고 있다. 후기는 중앙 정부가 터키 노예 용병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다가 (842년 부터) 급기야는 부와이흐(945년 침입)와 실주크(1055년 침입) 같은 이민족의 힘으로 바그다드가 점령되어 칼리파는 통치권을 빼았기고 명목상의 허수아비 칼리파제를 유지했던 시기이다. 이때에는 지방에서 우후죽순처럼 아랍, 페르시아, 투르키인 지방군주들이 창궐하여 독립적인 여러 군소 왕국을 세우고 난립하였다. 이들은 아미르 또는 술탄의 칭호를 사용하면서 대개는 압바스조에 복속하고 압바스 칼리파제의 종주권을 인정하였으나 그들 중 일부는 공존관게에서 벗어나 강력한 독립왕정을 세우고는 칼리파에게 도전하기도 하였다.

바그다드에서 볼 때 북아프리카, 스페인, 시리아 등 서부 쪽 이슬람세계에서 발흥한 대표적인 독립왕조로는 스페인의 우마이야조(756~1036년) 모로코의 이드리스조(788~974년) 튀니지의 아글라보조(800~909년) 북시리아의 함단조(905~1004년) 이집트의 뚤룬조(868~905년) 이크쉬드조(935~969년) 파티마조(909~1171년)아이유브조(1169~1252년) 맘무르크조(1250~1517년)이 있고 동부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쪽인 동부 이슬람세계에서의 독립왕조로는 타히르조(821~873년) 싸파리조(867~903년) 사만조(819~1005년) 까라칸조(819~1211년) 가즈나조(977~1186년 부와이흐조(945~1055년) 셀주크조(1038~1194년) 콰레즘조(1077~1231년) 등을 들수 있다.

쇠락의 이유는 칼리파 알 무으타심(833~842년 재임)때 어릴 때부터 군인으로 훈련받은 맘루크(노예)라 부르던 터키 노예 용병들을 궁성의 경호원으로 고용하면서 심어졌다. 이들은 오늘날 투르키스탄 쪽의 용맹을 날리던 용병들로 모두가 투르크족은 아니고 쿠르드족과 다른 중앙아시아인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연적, 혈연적 연계가 없었으므로 오직 칼리파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칠 수 있었다. 칼리파는 중앙정부에서의 고조된 아랍인과 페르시아인 간의 갈등관계를 드러내 놓지 않고 파괴시킬 친위대로 이들을 기용하는 한편 제국의 안전을 도모하는 효과적인 군인으로 훈련, 육성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맘루크들은 그들이 갖게 된 힘을 자각하게 되자 스스로 지배권을 장악한 정치 집단으로 변해갔다. 861년 그들은 혼탁해진 정국을 바로잡으려 했던 칼리파 알 무타왁킬(847~861년 재위)을 오히려 살해하였다. 그 후 945년까지 압바스 칼리파의 옥좌는 맘루크들의 마음대로 세위지고 폐위대곤 한다. 두 세기가 넘게 북유럽과 중국을 제외한 거의 전세계를 호령해온 위대한 아랍 이슬람제국은 이렇게 쇠락하고 있었다.

바그다드의 중앙집권체계에서 떨어져 나간 독립왕조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국가를 세운 것은 파띠마조이다. 이 왕조의 이름은 예언자의 딸이자 칼리파 알리의
부인었던 파띠마로부터 따왔다. 과격한 쉬아 이스마일파였던 이들은 북아프리카로 진출하기 이전에는 시리아에서 압바스조 칼리파의 타도를 외치면서 반정운동
을 벌였는데 북아프리카로 와서는 이글라브조와 이드리스조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969년에는 구 카이로인 푸스따드를 점령하고 이집트와 이크쉬드조마저 병합하
여 북아프리카 전역을 세력권 안에 넣었다. 파띠마조는 수도를 신 카이로 알 까히라(승리의 도시라는 뜻)에 정하고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로 세력을 확장하여 드
디어 히자즈의 성도인 메카, 메디나의 보호자로 나섰으며 전성기인 칼리파 알 무스탄씨르(1034~1194년 재위) 때에는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시칠리아, 이집트,
시리아, 서부 아라비아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통치하게 된다. 오늘날의 중동은 사실상 이때 두 지역으로 갈라져 한동안 서부 쪽은 파띠마조 치하에, 동북쪽은
바그다드의 압바스조 치하에 남아 있었다.

파띠마조가 세력의 판도를 넓혀가고 있을 때 바그다드의 압바스 칼리파들은 80년이 넘는 터키 맘루크들의 괴뢰 칼리파 신세에 뒤이어서 또 다른 더 큰 불행속에
놓이게 되었다. 북페르시아에서 발흥하여 점차 세력을 남부로 확장하던 페르시아의 부외이흐들이 945년 바그다드를 점령하고는 그 후 110년 동안 바그다드를 지
배한 것이다. 부와이흐들은 쉬아 들이었다. 이들은 이 기간 동안 그들의 마음대로 칼리파를 권좌에 앉히기도 하고 때로는 폐위시키기도 했다. 이같이 칼리파의
정치적 권력은 무너질 대로 무너졌지만 칼리파가 지닌 전통적 존엄성은 그래도 아직 살아 있는 때였다. 전통적인 칼리파제 이론에 따르면 무슬림세계의 수장은
당연히 칼리파이고 그가 곧 명예의 근원지였다. 그러므로 부와이흐 아미르(군주, 통치자)들은 칼리파가 내려주는 술탄 칭호와 영예의 의복, 왕관, 깃발 등을 수
여받고 겉모양일지라도 칼리파에게 복종하고 칼리파가 갖는 이슬람세계에서의 정신적 상징성을 유지시켜야만 했다. 칼리파가 전 무슬림세계의 최고 우두머리라는
신앙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칼리파로부터 받는 권력의 서임장이나 영예로운 지위와 칭호는 그의 통치를 합법화할 수 있는 보증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