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역사

십자군 전쟁과 영웅 살라딘

작성자
무스타파
작성일
2015-05-14 06:40
조회
504

십자군 전쟁과 영웅 살라딘


4세기 동안 비잔티움은 동쪽으로부터의 이슬람세력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 그러나 비잔틴제국은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알렉사우스
콤메누스(1081~1118) 황제는 교황 우르반 2세에게 이교도 침입자를 막아 줄 원군을 요청하였다. 1095년 11월 27일 교황은 동방의 기독교
형제를 구조하기 위해 신병모집에 나섰다. 성지로 가는 서구의 성지순례 루트를 안전하게 다시 복구시키겠다는 대의를 내걸고 이슬람 땅으로
진출할 전사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하였다.

서유럽 기독교들이 시작한 중동침입, 이른바 첫 번째 십자군 원정은 성공적이었다. 예루살렘이 1099년 점령되어 무슬림과 유대교도 주민들이
무참하게 대학살당하였다. 예루살렘에 라틴왕국이, 그리고 안티옥, 에데사, 트리풀리에 세 개의 십자군 공국들이 세워졌다. 이때 바그다드의
압바스 칼리파나 셀주크 술탄은 그들의 관심밖에 있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땅에서의 이 같은 불행에 냉담하였다. 당시 셀주크는 1092년 술탄
말리크샤의 죽음 이후, 아들 간에 내전이 일어나고 급속히 정치적 분열현상을 보이며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이집트의 파띠마조도 붕괴
직전이어서 이슬람을 위해 예루살렘을 되찾겠다는 어떤노력도 할 수 없었다. 시리아의 지방 아미르 아미르들이 세운 터키정권들만이 상호 적대
상태에 있으면서 각기 상대방에게 대항하기 위해 십자군과 손을 잡거나 또는 십자군과 싸우기 위해 제휴하곤 했다.

이슬람세계에 온 서구인들은 문명의 큰 격차를 실감하고는 경이로와 했고 반대로 무슬림들은 십자군의 야만적 행동과 원시적 수준인 의료지식
에 깜짝 놀랐다. 서유럽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비잔틴 문화와 선진 이슬람 문화를 접하면서 큰 자극을 받게 되었다. 무슬림세계의 눈에 비친
십자군 원정은 대수롭지않은 사건이었고 심각한 위협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십자군 국가들은 그저 묵인되어 계속 존속했을 뿐이다. 그러면서
도 이웃간의 불화와 충돌은 불가피했다. 결국 나누어져 있던 무슬림 지방정권들이 단결하여 지하드(성전)를 선언하였다.

모술지역의 아타백인 이마드 앗딘 잔기(1127~1146년 재위)가 등장하여 알렙포를 손에 넣고 해안도시 에데사 마저 1144년 탈환하면서 전세는
바뀌어갔다. 그리고 이슬람 역사에 또 다른 영웅이 탄생하는 순간이 왔다. 1187년 잔기의 휘하에 있던 쿠르드출신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회복
하였다. 그리고는 88년 전 십자군들이 저질렀던 포악스런 약탈행위와는 정반대로 투항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용서와 화합의 선
정을 베풀었다. 마침내 십자군 전쟁은 끝이 났다. 살라딘의 기사도적 관용정신은 서구에서도 높이 평가되었고, 단테의 신곡에도 등장하듯이
무슬림세계에서 그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살라딘(1169~1193년 재위)은 파띠마조를 멸하고, 이집트에 아이유브왕조(1169~1252년)를 세웠다. 이 왕조의 영토는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 모술에 이르고 북부 메소포다미아도 포함했다. 살라딘은 이집트에 순니 신앙을 회복시켰다. 그리고 바그다드에 있는 압바스조 칼리
파의 종주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바그다드의 압바스 칼리파는 비록 권세는 없지만 상징적인 이슬람세계의 수장권자였
다. 그러나 아이브유 왕조는 후계자들간의 분쟁으로 얼마가지 못하고 13세기 중반부터 쇠잔해지더니 맘루크국에 의해 멸망했다. 맘루크들은
13세기 말 세력의 판도를 시리아로 넓혀 살라딘처럼 다시 시리아와 이집트를 그들의 영토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맘루크국(1250~1517년)이
이슬람 역사에 새롭게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