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역사

오스만 터키제국 시대

작성자
무스타파
작성일
2015-05-24 09:27
조회
698

오스만 터키제국 시대

1 오스만 제국의 발흥

소아시아에는 13세기 말 몽골군을 피해 도주한 터키 유목민들이 난입하고 변경지역에서는 전쟁이 잦아졌다. 그리고 많은 터키전사들이 이교도의 땅을 빼앗아 무슬림의 땅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비잔틴에 대항에 새로운 정복전쟁의 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들을 가지(성전사)라고 불렀는데 비잔틴 제국의 서부 아나톨리아 거의 모든 지역을 차지하고 소공국을 이루고 있었다. 명목상 몽골칸에 조공을 바치던 속국의 위치였지만 차차 이들은 독립하게 되었다. 이들 중 한 사람이 오스만이라는 이름을 가진 위대한 새 왕조의 창건자였다. 그는 4세기 동안 중동 이슬람세계의 거의 전부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만든다.

초기 오스만(서양에서는 오토만)인들은 성전사 중에서도 지혜와 용기, 정치수완과 능력에서 돋보였다. 많은면에서 이들은 이슬람 초기의 정통 칼리파를 닮으려고 했다. 그들은 새로 점령한 기독교 거주민을 관용적인 태도로 대하고, 열정적이며 단순한 교리와 신앙으로 교화시키려 했다. 그 결과 기독교인들 상당수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기에 이른다. 또 개종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오스만 통치의 확고한 정의, 공정함 같은 것에 매료당하고 오스만인들을 적극 환영하였다. 무정부적이고 무질서 속의 비잔틴제국 통치자들의 폭정에 비하여 무슬림 오스만인들의 통치는 해방 그 자체를 의미했다.

11세기 후잔 오스만의 손자이자 위대한 오스만 터키조의 술탄인 무라드 1세(1360~1389년 재위)는 발칸의 기독교 국가로 깊숙히 진군하여 젊은 제국의 영토를 넓혀갔다. 1385년 소피아를, 다음해에는 니시를, 그 다음해에는 살로니카를 함락시켰다. 그는 비무슬림들을 완전한 시민권자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고위 관직에 오르는 것도 허용하는 관용의 정책을 시행했다. 그 결과 다언어, 다인종, 다종족의 오스만 터키조는 매우 광범위한 지역으로 커져가기 시작했는데 사실 이것은 여러 면에서 과거의 로마제국 팽창사를 상당히 닮아 있었다.

무라드는 발칸을 정복하였다. 그의 아들 바예지드 1세(1389~1402년 재위)는 소아시아 전역을 얻는데 일생을 바쳤고 콘스탄티노풀을 함락시키는데 전력투구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뜻하지 않은 새로운 정복자가 동방에서 출현했 하였다. 마치 2세기 전 바람처럼 휘몰아쳤던 몽골 칸들의 화신처럼 티무르(1370~1405년 재위)가 단숨에 중동을 휩쓰며 나타났다. 이 공포의 영웅 티무르는 중동 이슬람 지역에 세워졌던 몽골의 차카타이 한국, 일 칸국을 차례로 병합하고 아나톨리아로 공격해 왔다. 티무르는 무적이었다. 결국 앙카라 전투(1402년)에서 바예지드 군대는 대패하고 그는 포로가 되었다. 아직 유년기에 있던 오스만조로서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티무르는 바예지드가 병합했던 성전사들의 소공국들을 다시 복속시켰다. 그러나 그는 말 머리를 돌려 중국을 점령하려고 새 원정길에 올랐다가 죽고 말았다. 티무르는 위대한 정복자였지만 위대한 제국의 건설자는 못 되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제국은 급속히 쇠약해지며 분할되었다.

오스만인들은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한 세기가 지나지 않아 오스만제국에는 진정한 영도자가 탄생하게 된다. 오스만 최고의 영웅 술탄 마흐므드 2세(첫 재위1444~1446년, 2차 재위 1451~1481년)가 술탄 위에 오른 것이다. 그의 이름 앞에는 정복왕이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그는 1453년5월 29일 마침내 콘스탄티노풀을 점령한다.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잔재들이 말끔히 청소되었고 콘스탄티노풀은 이스탄불로 개명되어 근세까지 500년 가까이 오스만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 뒤 유럽인들은 오스만 터키의 팽창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풀이 점령되자 발칸의 터키인들은 그 후 2세기 동안 유럽인들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강력한 이 신흥세력은 맞설 수 없는 골칫거리였다. 터키는 이와 같이 위협적 존재로서 오랫동안 서구인들에게 각인되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터키인, 아랍인, 중동인, 무슬림을 연상하면 유럽인들이 늘 이상할 정도로 편견과 오해, 적대감을 갖게 된 요인으로 작용해 온 것 같다. 1529년과 1683년 두 차례 오스만군은 비엔나 점령의 문을 두드렸다. 1521년 벨그라드가 함락되었고 다음해에는 로데스섬이 점령되었으며 1526년에는 항가리군을 대파하고 비엔나로 향했다. 무기와 군사력에서 특히 화력에서 오스만군은 월등하였고 신속히 전력을 보강 할 수 있는 가공할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때 비엔나 침공이 성공했다면 유럽이 이슬람화되는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이때보다 8세기 전인 서기 718년 스페인을 점령했던 아랍군이 피레네를 넘어 프랑스로 침입해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732년 샤를 마르텔이 이끈 프랑크군은 북진하던 아랍 무슬림군을 투르와 프와티의 중간 지점에서 막아냈는데 이 전투 역시 서구 기독교인들로서는 유럽의 이슬람화를 막은 매우 중요한 일전이었다.

2 오스만 제국의 발흥

오스만제국은 건국초기 두 세기 동안 넘쳐나는 에너지를 유럽 원정에 쏟았다. 그렇지만 정복자 마흐마드의 손자 셀림 1세(1512~1520년 재위)는 그의 야심을 아시아로 돌렸다. 그는 이슬람 역사에 새 장을 여는 또 한사람의 정복자였다. 한편 페르시아에서는 샤 이스마일 1세(1501~1524년 재위)의 영도 아래 사파비조(1501~1786년)가 세워져 팽창일로에 있었다. 백성들 대다수가 쉬아파였으므로 이스미일은 쉬아 교리를 시피바조의 공식종교로 선언했다. 이스마일은 아제르바이잔, 서남부 이란을 정복하고 1508년에는 이라크를 점령했으며 디야르바크르, 동북부 이란 마저 평정하여 명실공히 옛 페르시아제국의 꿈을 실현했다. 이제 중동 이슬람세계로 눈을 돌린 오스만제국의 셀림과 사파비조의 이스마일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중동 이슬람세계의 향후 패자를 가르는 대회전이 1514년, 타브리즈 근처의 찰디란 계곡에서 치러졌다. 승리는 셀림 쪽이었다. 셀림은 디야르바크르를 병합하고 샤이스마일의 페르시아 세력을 제압해 놓을 수 있었다.

순니 오스만제국과 쉬아 사파비조 사이에는 그 후 두 세기가 넘는 긴 대립의 수렁 속에서 간헐적인 교전상태가 되었다. 군사적으로는 오스만인이 대체로 우위에 있었지만 페르시아의 문화적 영향은 오스만 터키제국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났다. 비록 오스만이 17세기에는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지배하는 퉁치권의 주인이 되었지만 아랍어를 말하는 이 지역 주민 대다수는 쉬아파로서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샤 이스마일은 근대 페르시아, 즉 이란의 건설자로 간주된다. 오스만인과는 달리 사파비인들은 정복사업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중동및 이슬람의 역사에서 차지하려고 또 빼앗기지 않으려고 항상 다투던 메소포다미아 지역과는 달리 페르시아 제국의 땅은 오늘날까지 거의 같은 형태로 남아 있다. 데체로 일찍그어진 경계선 안에서 민족적 종교적 부흥이 일어나곤 했을 뿐이다.

샤 이스마일의 후계자 중에서 가장 걸출한 인물은 샤 압바스(1587~1629년 재위)였다.그는 뛰어난 군사지도자이자 행정가였으며 문예의 후견인이고 보호자였다. 열광적인 쉬아 무슬림이였지만 그는 기독교인들에게도 매우 관용적이었다. 오스만제국에 빼았겼던 타브리즈와 이리크 영토를 재 탈환하고 수도를 이스파한으로 옮긴 후 사파비조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의 사후 사파비왕조는 무능력한 후계자들 치하에서 점점 쇠퇴하였다. 그러나 주변 이웃나라로부터의 여러 차례 침략이 있긴 했지만 오스만제국과 같이 현대에 이르러서도 손발이 잘리고 국토가 분할되는 운명을 맞지는 않았다.페르시아의 사파비조는 카자르조(1780~1924)와 팔레비조(1925~1979년)를 거쳐 오늘날의 이란으로 이어진다.

오스만 터키의 셀림 1세 역시 중동 이슬람세계를 정복한 과거 역사의 주인공들처럼 똑같은 정복의 길을 걸었다. 찰디란에서 페르시아를 격퇴시킨 후 곧 시리아로 향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을 지나 이집트로 나아갔다. 신월 옥토는 차례로 그의 수중에 떨어졌다. 맘루크들은 용감한 전사들이었지만 이제 나약할대로 나약해져 사기가 충천하고 잘 훈련된 오스만 군대의 적수가 되지는 못되었다. 1516년 8월 알렙포 근처의 마르즈 다비 전투에서 노령의 술탄 깐수 알 가우리(1501~1516년 재위)는 전사하고 맘루크 굼대는 전멸하였다. 다마스크스에 입성한 셀림은 다음해(1517년) 맘루크들의 이집트, 시리아 통치 역사의 막을 내린다. 카이로의 마지막 압바스 칼리파 알 무타와킬은 이스탄불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칼리파의 모든 권리가 오스만 술탄에게로 이양된다. 공식적 양도의 상징으로 예언자 무함마드의 망토와 칼리파 오마르의 검 등(이 유믈은 현재 이스탄불의 톱카피 사라이 박불관에 소장 되었음)성스런 유품들이 오스만 술탄에게로 건네졌다.

그뒤 이슬람 칼리파제는 오스만 가계에서 이었다. 셀림은 승전 후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메카 통치자인 아랍 세리프가 파견한 사절단을 접견하였다. 세리프의 아들이 이끌고 온 이 사절단은 메카의 카아바의 열쇠들을 그에게 바쳤다. 그리고 셀림은 두 성도의 봉사자(카딤 알 하라마이니 앗 샤라파이니)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메카, 메디나 두 성지의 보호자가 된 것이다. 이 타이틀은 이슬람세계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이슬람신앙의 다섯 기둥 중의 하나인 순례의무를 보장해 주는 성지보호자의 위치는 신앙의 수호자 라는 상징적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오스만제국은 이집트를 정복한 후 메카, 메디나는 물론 카이로, 다마수쿠스, 예루살렘, 바그다드 등 이슬람역사의 모태가 되는 모든 대도시를 장악하였다. 그 뒤 모로코 국경에 이르기까지 멀리 북부 아프리카 무슬림 모두가 오스만제국의 종주권을 받아들였고 예멘도 1537년 오스만제국이 파견하는 파샤의 관할 내에 있는 총독관구가 되었다.

아랍어를 말하는 소위 아랍권 중에서 극서에 위치한 모로코와 남동 아라비아의 오만, 중앙 아라비아 반도의 베두인들만이 오스만의 지배 밖에 남았을 뿐이다. 비록 오스만 술탄이 이슬람의 칼리파 라는 공식 칭호를 사용한 것은 1774년 러시아와 체결한 쿠츠그 카이나르즈 조약 때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스만제국이 이집트의 맘루크국을 정복한 이래 최근 20세기 까지 이슬람 순니 세계를 대표하는 종주국의 자리를 지켜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3 오스만제국의 쇠퇴와 칼리파제의 폐지

오스만 제국은 찬란한 이슬람문명의 상속자였다. 이 위대한 문명을 잇고 또 거듭 창조해내었다. 그 최고 절정기는 셀림 1세의 아들 술레이만 2세(1520~1566년 재위, 그에게는 위대한 술탄 이라는 칭호가 붙는다)때였다. 술레이만은 1526년 항가리군에 대승한 후 항가리를 병합했으며 또한 북아프리카를 제국 영토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1529년 비엔나를 취하려던 비엔나 첫 공격은 실패했다. 그는 군사원정의 위대한 정복자라기 보다는 치세와 여러 업적에 빛나는 최고의 성군이었다. 탁월한 행정가로 엄격하고 정의로웠으며 자비롭고 인도적인 술탄이었다. 그는 학문과 예술을 진흥시킨 문예 창달의 보호자이기도 하였다. 다른 위대한 문명들처럼 오스만이 이룬 문화도 다양한 외부 문화들을 흡수하고 융합하면서 이룩되었다. 초기 술탄들은 비잔틴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셀림 1세와 술레이만 2세 때에는 페르시아와 이집트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 술레이만 통치기에는 서페르시아의 타브리즈에서 명공과 장인들을 뽑아왔고 당시 최고의 건축가인 아나톨리아 출신 시난(1588년 죽음)은 이스탄불을 아름답게 꾸몄다. 이스탄불은 진정으로 동양과 서양의 문명이 합류되는 세계 최고의 도시였다.

번영의 절정에서 오스만제국도 쇠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역사가들은 술레이만 2세가 사망한 16세기 후반부터 제국이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때는 제국이 창건된지 2세기가 지난 때로 오스만제국사(1299~1924년)의 절반이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 후 뛰어난 재상들(마흐므드와 쾨프릴뤼와 그의 아들 아흐마드 쾨프릴뤼)이 제국을 개혁하고 부흥시키려 했지만 제국은 쇠퇴의 길을 계속 내려갔을 뿐이다. 국면을 전환시킬 수 있는 결정적 기회는 1683년 비엔나에 대한 두 번째 공략이었다. 그러나 두 달 후 오스만 군대는 남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했고 성공하지 못했다. 그 뒤 무적이라던 오스만 군의 이미지는 점점 유럽에서 깨어지기 시작한다

대제국이 유럽의 병자로 쇠락한 요인을 간단히 진단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변화하는 시대적 요구와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가장 분명한 예가 예니체리 제도일 것이다. 이 제도는 14세기에 무라드 1세가 젊은 기독교인 노예나 포로들을 개종시켜 신병으로 모집하고 독특한 훈련을 시킨 뒤 근위병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 기원이 되었다. 튼튼한 골격과 빼어난 지성의 소년들을 선발하여 최고도의 훈련을 시켜 예니체리 군단을 만든 것이다. 이들은 오랫동안 오스만 군대의 핵심을 이루었다. 이들은 결혼이 금지되었으므로 독신으로 살면서 오직 술탄에게 헌신하는 충성스런 삶이 이들 생애의 목표였다. 이들에게는 군대가 가정이고 동료가 가족이었다. 오스만제국이 팽창해갈 때 예니체리는 정복지에서 일어나는 가종 폭동과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주력부대였다. 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 전체의 체제 안전을 도모하고 유지하는 중심 세력이었다. 그러나 엄격하던 이 제도에도 16세기 말 부터 틈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내부에 부패와 타락현상이 나타났다. 예니체리 군대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면서 특권집단으로 커갔다.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그들은 자신들만의 강한 집단연대 속에서 어떤 변화도 격렬히 반대하는 폐쇠적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다. 군사조직, 체제, 훈련기술, 장비 등 여러 면에서 외적에 비해 우세했던 제국이 쇠퇴해졌음에도 에니체리는 군을 근대화시키고 개혁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특권이 줄어들고 박탈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러한 기운이 돌자 폭동을 일으켰다. 그 뒤 오스만 군대의 힘은 쇠약해져 그동안 일취월장해 온 서방의 군세를 따라 잡기에는 이미 늦어 버렸다. 그리고 제국은 점차 전반적으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예니체리 같은 또 다른 완고한 제도는 술탄 제도 자체에도 있었다. 그것은 권력이양 같은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전제제 그 자체였다. 술탄들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제위 형제살해의 전통을 이어갔다. 잠재적 라이벌인 형제와 조카에 대한 교살명령 때문에 술탄궁은 불신과 의혹이 들끓는 가마솥이 되었고 어떤 때는 가장 능력이 없는 이들이 계승자가 되기도 했다.

오스만제국은 군사적 가치관과 사상이 지배하는 거대한 군사조직이었다. 그것은 제국팽창의 원동력이기도 했지만 그러한 군국주의는 산업과 상업을 지나치게 경시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그 결과 제국이 전성기에 있던 때 경제적으로는 이미 새로운 무역로를 찾고 산업화의 길을 걷고있던 유럽 기독교 국가들에게 추월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월등하던 군사적 정치면에서도 영향을 받게된다. 제국의 경제력 쇠퇴요인 중 1497년 포루투칼 인들이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극동 쪽으로 새로운 동서 교역루트를 열었다는 사실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다. 그때 까지 이집트와 홍해를 통해 유럽과 아시아로 이어지던 예전의 교역로가 자연히 타격을 받게 된 것이다. 물론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곳은 이집트였다. 시리아 상인들은 알렉산드레타로부터 알렙포를 거쳐 바그다드, 바스라로 나가는 육상루트에 전념하였다. 그 덕에 동양에서 서양으로 가는 중개무역은 그런대로 살아남았다. 그렇지만 과거 오스만제국이 비무슬림들을 보호해주기 위해 무역활동의 여러 면에서 법적, 재정적 이권과 특혜를 주었던 바로 그 당사자들(서구인들)에게로 이제는 주권이 넘어가게 되었다. 중동 이슬람세계 무슬림들의 경제는 두드러지게 퇴보한 반면 유럽은 산업적, 상업적, 재정적 전성기에 들어선 것이다.

오스만제국에는 세습되는 귀족이나 계급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배층은 형성될 수 밖에 없었는데, 군 장교, 민간원로인, 종교인들이 바로 그들로서 이들이 술탄의 권위를 대신하였다. 그들 아래에는 라야(평민, 백성)가 있었는데, 이들은 농촌의 농부와 도시의 장인그룹을 포함하는 일반대중을 말한다. 처음에는 라야가 무슬림 통치자 아래의 벡성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이었다. 뒤에 와서 이 단어는 비무슬림에게 한정되어 사용하였다. 다시 말해 무슬림들에게는 부과하지 않는 인두세를 내는 비무슬림 백성에게만 붙여지게 된 것이다. 이들은 거의 오스만제국의 유럽 쪽 정복지 백성들로 국가의 주요 세입원이었다. 이들은 밀레트(자치공동체)로 편제되고 그들의 족장이나 주교의 통치를 받았다.

오스만제국의 중동 및 아프리카지역 아랍인들은 2등 계급 시민으로 대우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라크 등 중요 지역에는 오스만 지배층이 총독이나 중요 행정관료로 파견되어 그들 위에 군림하면서 특권을 누렸다. 이집트에서는 오스만 통치가 직접 행해진 3세기 동안 100명이 넘는 터키인 파샤들이 파견되어 술탄의 대리인 노릇을 하였다. 이들 관료들은 지역언어인 아랍어를 말하지 않고 터키어를 사용했으며 자주 다른 지역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통치를 하였지만 그 땅의 터키 식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시에 오스만 제국의 백성이던 비터키 무슬림을 터키화시키려는 시도도 또한 없었다. 단지 아랍인 공동체에서 극히 소수만이 제1언어로 터키어를 택하여 배워 오스만 지배계층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모든 아랍인들은 예전과 똑같은 생활을 하였다. 단지 터키 단어들만 아랍화 하였는데 그것도 군사용어거나 음식에 관련된 단어뿐이었다.

오스만제국은 군사적 가치관과 사상이 지배하는 거대한 군사조직이었다. 그것은 제국팽창의 원동력이기도 했지만 그러한 군국주의는 산업과 상업을 지나치게 경시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그 결과 제국이 전성기에 있던 때 경제적으로는 이미 새로운 무역로를 찾고 산업화의 길을 걷고있던 유럽 기독교 국가들에게 추월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월등하던 군사적 정치면에서도 영향을 받게된다. 제국의 경제력 쇠퇴요인 중 1497년 포루투칼 인들이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극동 쪽으로 새로운 동서 교역루트를 열었다는 사실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다. 그때 까지 이집트와 홍해를 통해 유럽과 아시아로 이어지던 예전의 교역로가 자연히 타격을 받게 된 것이다. 물론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곳은 이집트였다. 시리아 상인들은 알렉산드레타로부터 알렙포를 거쳐 바그다드, 바스라로 나가는 육상루트에 전념하였다. 그 덕에 동양에서 서양으로 가는 중개무역은 그런대로 살아남았다. 그렇지만 과거 오스만제국이 비무슬림들을 보호해주기 위해 무역활동의 여러 면에서 법적, 재정적 이권과 특혜를 주었던 바로 그 당사자들(서구인들)에게로 이제는 주권이 넘어가게 되었다. 중동 이슬람세계 무슬림들의 경제는 두드러지게 퇴보한 반면 유럽은 산업적, 상업적, 재정적 전성기에 들어선 것이다.

오스만제국에는 세습되는 귀족이나 계급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배층은 형성될 수 밖에 없었는데, 군 장교, 민간원로인, 종교인들이 바로 그들로서 이들이 술탄의 권위를 대신하였다. 그들 아래에는 라야(평민, 백성)가 있었는데, 이들은 농촌의 농부와 도시의 장인그룹을 포함하는 일반대중을 말한다. 처음에는 라야가 무슬림 통치자 아래의 벡성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이었다. 뒤에 와서 이 단어는 비무슬림에게 한정되어 사용하였다. 다시 말해 무슬림들에게는 부과하지 않는 인두세를 내는 비무슬림 백성에게만 붙여지게 된 것이다. 이들은 거의 오스만제국의 유럽 쪽 정복지 백성들로 국가의 주요 세입원이었다. 이들은 밀레트(자치공동체)로 편제되고 그들의 족장이나 주교의 통치를 받았다.

오스만제국의 중동 및 아프리카지역 아랍인들은 2등 계급 시민으로 대우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라크 등 중요 지역에는 오스만 지배층이 총독이나 중요 행정관료로 파견되어 그들 위에 군림하면서 특권을 누렸다. 이집트에서는 오스만 통치가 직접 행해진 3세기 동안 100명이 넘는 터키인 파샤들이 파견되어 술탄의 대리인 노릇을 하였다. 이들 관료들은 지역언어인 아랍어를 말하지 않고 터키어를 사용했으며 자주 다른 지역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통치를 하였지만 그 땅의 터키 식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시에 오스만 제국의 백성이던 비터키 무슬림을 터키화시키려는 시도도 또한 없었다. 단지 아랍인 공동체에서 극히 소수만이 제1언어로 터키어를 택하여 배워 오스만 지배계층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모든 아랍인들은 예전과 똑같은 생활을 하였다. 단지 터키 단어들만 아랍화 하였는데 그것도 군사용어거나 음식에 관련된 단어뿐이었다.

오스만군의 두 번째 비엔나 공격 실패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683년의 일로 이 시점은 한마디로 오스만제국이 유럽 무대에서 퇴각하기 시작하는 분기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7세기 말 오스만제국은 강력한 새 라이벌 러시아를 만난다. 피터 대제는 위대한 유럽-아시아인 러시아를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였는데 오스만제국은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그 후 두 세기 동안 간헐적으로 러시아와 터키 전쟁이 있었다.

비록 오스만제국이 유럽으로부터 서서히 철수해가고 쇠락하였으나 그래도 오스만 군대는 쉽게 꺾을 수 없는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18세기 말에 술탄 무스타파 3세는 러시아의 캐서린 대제와 맺은 쿠츠크 카이나르 조약으로 그의 기독교 백성들 일부에 대한 지배권과 크리미아의 무슬림 타타르인들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해야만 했다. 오스만제국은 지금껏 당해보지 못한 굴욕감을 느껴야 했다. 그렇지만 이때에도 술탄은 그가 이슬람의 칼리파임을 세계만방에 선언하였고 그 후 1차 세계대전을 맞을 때까지 오스만 터키는 이슬람세계의 종주국으로서 계속 건재함을 괴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스만 터키가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패하자 오스만제국은 유럽의 기독교 승전국들 앞에서 이슬람세계의 종주국임을 상징해왔던 이슬람 칼리파제국으로서의 자리를 포기해야만 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가 이끈 터키 민족주의 개혁파는 세속주의 신생 터키 공화국을 세운 후 1924년 오스만 칼리파제를 공식 폐지했다. 오스만 칼리파제는 1517년 이집트 맘루크국을 정복한 술탄 셀림 1세가 카이로 압바스 칼리파제를 이양받아 4세기가 넘는 동안 오스만 터키에서 존속되어온 순니 세계의 영예로운 통치제도였다. 이 제도의 시간적 종식을 의미한 이 칼리파제 폐지 사건은 이슬람 현대사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으로 간주된다. 무슬림 개혁론자들과 전통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고 그들 사이에 이슬람 칼리파제 부활을 위한 운동이 간헐적으로 일어 났으나 번번히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무슬림들은 칼리파 없는 공위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7세기 이슬람의 발흥에서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이슬람세계는 세계 문명의 발전과 창달의 역사를 이끌어왔다. 오랜 세월 동안 풍요로운 삶과 문화의 중심지는 다마스쿠스, 바그다드, 코르도바, 이스탄불, 이스파한, 부하라, 사마라칸트,델리와 같은 무슬림 도시들이었다. 하지만 19세기에 접어 들면서부터 이슬람사회체제는 자본주의와 산업혁명.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한 서구의 근대물질에 압도당했다. 역사가들은 나폴레옹 1세가 이집트를 침공한 사건(1798년)을 바야흐로 세계역사의 주도권이 서구로 넘어간 기점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말하고 있다. 실제로 이때부터 서구의 군대와 자본이 무슬림 땅에 넘쳐났으며 그 후 19~20세기가 지나는 두 세기 내내 이슬람사회는 거의가 서구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침입을 받고 그들의 지배 또는 영향력하에 놓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