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역사

1. 예언자 무함마드 시대

작성자
무스타파
작성일
2015-05-06 11:17
조회
1185

간추린 이슬람역사


1. 예언자 무함마드 시대

1)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반도

아라비아 반도는 홍해와 인도양 그리고 페르시아만에 둘러싸인 아시아 대룩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300만km2의 거대한 땅덩어리이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큰 반도로서 그 넓이가 인도대륙보다 크다. 그러나 반도의 대부분은 사막이고 드문드문 있는 오아시스에서나 물과 종려나무를 발견할 수 있는 사막지대이다. 여름에 인도양 계절풍의 영향으로 강수가 있는 예멘 산간 지방과 겨울에 강수가 있는 알 아흐다르 산맥 지방을 제외하면 연 강수량은 100mm 정도에 불과하다. 지형은 모래언덕과 산악지대로서 산에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고 거친 암석에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가 되면 마치 용광로에서 갓 나온 쇠와 같이 검붉게 보이고 모래에 뒤덮인 산은 백설로 뒤덮인 산처럼 벌거벗겨진 돌덩어리이며 그 색깔은 다양하다.

아라비아 반도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살고 있었다. 목초지를 찿아 움직이는 유목민 베두인과 오아시스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농경민이다. 그러나 이들은 사막이라는 환경 때문에 완전한 유목민도 농경민도 아니었다. 이미 서기전 10세기 이전부터 가축으로 사용한 낙타를 이용하여 반 유목, 반 정착 생활을 하면서 상업에 종사하거나 약탈을 자행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생활이 관습화된 이유는 사막지역이므로 생산력이 낮고 이 때문에 일어나는 만성적인 식량부족 현상 때문이었다. 이러한 척박한 환경 속에서 개인 단위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들의 생활 단위는 부족이나 씨족이었고 부족은 자기 씨족을 대표하거나 소 가문 연합을 대표하는 장로들의 모임에 따라 움직였다. 장로들의 모임은 쉐이크 라 불리는 부족장을 지도자로 뽑았는데 그 기준은 용기와 덕망, 포용력이었다. 극소수의 부족장은 세습되었으나 대부분은 장로들의 선거를 통해 결정되었다. 장로들은 그들의 부족한 생계수입을 메우기 위해서 다른 부족을 습격한다든지 시리아와 인도양을 오가는 대상을 보호하는 일 등 중요사안과 대외 활동을 ㄱㄹ정하였다. 각 부족원은 자기 부족 집단에 대하여 권리와 의무를 갖고 부족의 보호 안에서 생활하였다. 부적은 자기 부족 구성원의 손익을 부족 전체의 손익으로 간주했다. 부족의 축제와 제사는 카힌 이라는 사제 계급이 관장했고 부족 구성원들 간의 분쟁은 중재인인 하킴이 맡았다. 다른 부족과 전투 시에는 젊은 군사 지휘자 까이드가 담당했다. 나이 든 원로인 쉐이크가 전쟁을 맡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라비아반도의 주인은 아랍인이다. 이들은 북아랍인과 남아랍인으로 나누어 지는데, 언어, 생활양식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였다. 남아랍인은 농경이 가능한 예멘에 주로 살았으며 일찍이 기원전 7세기부터 중앙집권적 국가를 이루고 살았다. 예멘은 고대 아라비아반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모여살며 영화를 누리던 곳이다. 산악지대이기는 하나 계절풍의 영향으로 비교적 강우량이 풍부하였다. 주민을 먹여 살릴 만한 곡물이 산출되었고 이 지역에서 재배되는 향료는 최고급품으로 여겨졌다. 반면에 북아랍인은 반도 중부와 북부에 살았는데 대부분이 유목민이었고 부족제도하의 생활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아랍인의 근원을 이루는 사람들은 북아랍인이다. 그리고 오늘날 아랍인이라고 하면 아라비아 반도의 거주민뿐만 아니라 서남아시아 주민 대다수와 북아프리카 거주민 전부를 지칭하는 것으로 확대되어 사용된다.

이슬람 발생 이전의 시대를 아랍인들은 자힐리아(암흑)시대라고 부른다. 이때의 아랍인들은 대부분 각자의 부족신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부족내 각 가정의 경우에는 대부분 부족신 외에 자기 가정에서 가장 좋아하는 신을 따로 섬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신들은 종교적 신앙의 대상일뿐만 아니라 일상생할의 정신적 기둥이었다.

이슬람 이전부터 아라비아반도에는 아랍 고유의 신앙 이외에 외래신앙인 유대교와 기독교가 들어와 있었다. 이슬람이 출현하기 직전에 아라비아반도 주위에는 두 강대국인 비잔틴 로마와 사산조가 있었으며 이 두나라의 위성국으로서 아랍인으로 구성된 소규모 국가가 아라비아반도 쪽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하나는 갓산국으로 기독교 단성론을 추종했으며 다른 하나는 라흠국으로 기독교 경교파를 따랐다. 특히 라흠국의 수도인 히라는 경교파 선교사들이 아라비아반도를 상대로 선교활동을 하던 근거지였다. 예멘의 기독교는 아비시니아 왕국에서 최초로 전래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남부 이라크와 예멘 사이에는 아라비아반도를 대각선으로 연결하는 교통로가 있고 그 교통로 상에 나즈란이 위치한다. 나즈란이 예멘에 있던 기독교 세력의 중심지가 된 것은 히라의 기독교 경교파 선교사의 활동에 의한 것 같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부인 카디자의 사촌 와라까 빈 나우팔을 비롯하여 꾸라이쉬 부족 중에서도 기독교에 귀의한 자가 여럿 있었는데 이러한 기독교 경교파의 영향이 꾸란의 여러 구절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한편 유대교 세력도 예멘에서 강했는데 그 이유는 히자즈 지방에 유대교도들의 취락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곳이 나중에 메디나로 불리게 된 야스립이었다.


2) 이슬람 공동체의 형성

6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비잔틴제국과 페르시아 사산조 간의 오랜 전쟁으로 말미암아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왕래하던 대상들은 다른 지역보다 아라비아반도를 더욱 안전한 통행로로 선호하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아라비아 반도를 더욱 안전한 통행로로 선호하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아라비아반도 내의 몇몇 도시들은 무역중계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도시는 메카였다. 570년 이 도시의 지배 부족이며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후손인 꾸라이쉬족에서 무함마드가 출생한다. 그는 꾸라이쉬족의 하심가에서 유복자로 출생하였으며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사망하여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그래서 그의 삼촌 아부 딸립이 그를 양육하였다. 성인이 되어서 부유한 과부 카디자에게 고용되어 사막을 횡단하며 교역을 맡아하던 대상의 일을 하다가 카디자와 결혼하여 경제적인 안정을 얻게 되었으며 중년에 이르도록 평범한 상인으로서의 생활을 계속했다. 그 둘 사이엣서 4명의 딸과 2명의 아들이 태어났으나 아들은 모두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생활의 여유를 얻게 된 무함마드는 610년 메카 근교의 히라 동굴에서 묵상과 사색을 하던 중 어느날 역사에 남는 위대한 종교적 체험을 하게된다. 이 체험은 그 자신의 생애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전세계 인류의 삶의 많은부분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종교체험을 통하여 알라 이외에는 신이 없다 는 유일신 신앙을 갖게되고 신으로부터 메세지를 이 땅에 전하는 신의 사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메카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하층민들과 중소상인 계층만 그의 가르침을 추종했다. 그의 지지자는 극소수였기 때문에 대 상인을 중심으로 한 지도층은 그의 선교활동에 무관심했다. 그러나 점차 무함마드의 추종자가 늘어나자 메카 지배층의 이해관계를 위협하기 시작하자 그들에 대하여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 심해지는 탄압에 견디지 못한 일부 추종자가 615년 경에는 기독교 국가인 아비시니아로 피신하기도 했다.

무함마드 자신도 하심가의 족장이며 자신의 보호자였던 삼촌 아부 딸립과 그의 정신적 안정처였던 아내 카디자가 메카 포교 10년째 되는 해에 사망하자 정신적으로 심한 고립감을 느끼게 되었다.이러한 좌절의 시기에 메디나에서 구원의 손길이 온다. 메디나 주민들이 그를 그들의 중재자로 선택한 것이다. 당시 메디나는 씨족간의 장기간 불화와 유혈 투쟁으로 주민들이 평화를 원했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을 중재해줄 공정한 인물이 필요했는데 그들은 그 적임자로 무함마드를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메디나 주민의 요구에 응해 수백 명의 추종자들을 먼저 메디나로 보내고 무함마드도 622년 메디나로 이주한다. 이 해는 후에 이슬람력(헤즈라)의 원년이 된다.

무함마드는 혼란에 빠져 있던 메디나 주민을 이슬람의 기치 아래 통합시키고 그와 함게 메디나로 이주한 추종자들을 합쳐 최초의 움마(이슬람공동체)를 만들었다. 메카에서 온 사람들은 이주자 의미에서 무하지룬 이라고 불렀으며 망명처를 제공한 메디나 원주민들은 돕는 자라는 의미에서 안사르 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이 종교 공동체에 헌신하는 진정한 신앙인 즉 무슬림이 되었다. 무함마드는 이 공동체를 세우고 아라비아반도에서 전형적인 부족의 요직인 부족장, 중재자, 전시 지도자의 기능 모두를 가졌다. 즉 그는 예언자이자 신의 사자로서, 예배인도자로서, 중재자로서, 군사령관으로서, 재판장으로서, 행정수반으로서, 제정 일치의 권한을 한 손에 쥐고서 기존 아랍사회의 여느 부족장들과는 차원이 다른 강력한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메디나에 이슬람 공동체를 수립한 무함마드는 메카와 전쟁을 한다. 물론 처음에는 이것이 메카와의 힘 겨루기 측면도 있었지만 그들의 생계와도 연계되어 있다. 무하지룬들은 메카를 떠날 때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주하였기 때문에 메디나에서의 생활은 안사르들에게 의존하여 지내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무하지룬이 당한 피해를 보상받기 위해서 그들은 메카대상들을 습격하고 약탈하였다. 그 당시 아라비아반도에서 약탈은 생계수단이자 복수 방법이었다. 이것은 결국 메카와 메디나의 대결이 되었으며 바드르 전투(624년)를 시작으로 세 차례의 전투가 있었다. 이러한 전투의 결과 메디나는 정치적 헤게모니를 잡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무함마드는 메디나의 무슬림군을 이끌고 630년 메카를 평화적으로 점령한다. 632년 그가 사망 할 즈음에 아라비아반도는 이슬람 깃발 아래 통일이 되었다. 무함마드는 신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로서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을 세상에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로서 종교를 바탕으로 하는 이슬람 공동체를 실질적인 정치세력으로 아라비아 반도에 형성시켜 놓았다.


저자: 손주영
전 한국 외국어 대학 아랍어과 교수, 전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