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역사

간추린 이슬람역사. 정통 칼리파 시대

작성자
무스타파
작성일
2015-05-06 11:22
조회
720

간추린 이슬람역사. 정통 칼리파 시대

2. 칼리파 오마르의 제1차 정복사업

오마르는 선임자인 아부 바크르가 생존시에 원로 무슬림들과 상의한 끝에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여 메디나의 무슬림들로부터 충성의 서약을 받아두었으므로 아무런 잡음 없이 2대 칼리파로 즉위하였다. 오마르는 아랍 이슬람제국의 실질적 건설자로 불린다. 그의 치세 10년(634~644년 재위) 동안 페르시아의 거의 전 지역과 팔레스타인, 시리아, 이집트 등 비잔티 로마의 동방 영토를 정복(636~640년)해 이슬람국가의 영토가 되게 하였으며 새로운 행정 체제와 재정제도 등을 확립하였다. 이렇게 아랍, 이슬람제국의 영토가 급격히 확장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랍전사의 기마술을 바탕으로 한 우수한 전투력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외에도 아랍 전사들이 이슬람전파를 위한 죽음은 곡 천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종교적 열정에서 비롯된 지하드(성전)정신으로 무장하였고 정복된 지역의 일반 백성과 지배계급간의 정치적, 종교적 갈등이 존재했던 것이 큰 요인이 되었다. 정복된 지역의 백성들은 아랍 이슬람군을 자신들의 해방자로 받아들였다.
오마르의 정복 사업(아랍의 1차 정복)과 이슬람의 팽창은 크게 세 갈래로 추진되었다.

1) 이라크 페르시아 정복

이미 칼리파 아부 바크르 때에 시작되었던 이라크 지역으로의 원정은 알라의 검이라고 불리던 칼리드 빈 알 왈리드가 주도하여 페르시아 군을 무찌르고 유프라테스 강가의 히라와 알 안바르를 (633년)점령한 바 있었다. 칼리파 오마르는 즉위 3년째인 637년 페르시아 정복의 대 역사를 이루는 중요한 전쟁을 치른다. 오마르가 파견한 사아드 빈 아비와 까스는 일크의 관문이던 알 까다시아에서 루스탐 휘하의 페르시아 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무슬림군은 패르시아 군에 연전 연승하여 수도인 크데시폰을 두 달 동안 포위 공격한 끝에 점령하였고 640년 안 나하완드에서의 결정적인 승리를 끝으로 사산조를 멸망시키게 된다. 마지막 왕인 야즈다 키르드 3세는 도망다니는 군주가 되었다가 멀리 후라산에서 살해당한다. 찬란한 문명의 대제국이 아랍의 한 속주로 전락하고 페르시아는 모두 아랍의 소유가 되었다.

2) 시리아 팔레스타인 정복

무슬림들의 시리아 지역 정복의 꿈을 실현한 대 결전은 요르단 강 지류인 야르무크 강변에서 벌어진 대전이다. 630년 8월 비잔틴 로마군을 이끈 총사령관은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동생인 티오도로스 였고 무슬림 군은 무적의 용장 칼리드 휘하에 있었다. 비잔틴 군은 수적으로 두 배가 넘었지만 아랍 무슬림군의 대승으로 끝이 났다. 이 전투는 칼리드의 군사적 천재성과 용맹성을 증명해준다. 이 전투로 시리아 전 지역이 637년에 병합되고 예루살렘이 다음해에 함락되었다. 칼리파 오마르가 즉위한지 4년만에 비옥한 초생달 지역 전역을 석권하고 거대한 이슬람제국 건설의 기초를 닦아 놓은 것이다.

3) 이집트 정복

이집트 정복의 영웅은 아므르 빈 알 아스였다. 아므르는 주저하던 칼리파 오마르를 줄기차게 설득하여 640년 1월 비잔틴의 카이로 요새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난공불락이라던 이 요새가 일곱달 간의 항전 끝에 함락시키고 이집트 정복 전쟁도 끝나고 이집트 역시 이슬람 움마의 한 속주가 되었다. 콥틱인들은 비잔틴의 압제를 벗어나게 해준 무슬림군을 환영하였다고 한다. 간명한 교리와 단순한 체제 때문에 이집트인들은 이슬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집트 정복은 북아프리카를 이슬람화하는 씨알이 되었다.
오마르는 정복전쟁에 참가한 이슬람 전사들을 위해 정복지에 새로운 아랍 병영 도시인 암사르를 건설하였다. 이도시들은 주변지역의 군사와 행정을 통괄하는 중심도시로 성장한다. 이라크에 건설한 쿠파, 바스라와 이집트에 세운 푸스타트 등이 그러한 도시이다. 또 거대한 국가 예산의 균형과 조세, 연급, 급여 지급 등 국가 업무를 다루기 위한 디완이 설립되었다. 국고를 담담하는 디완의 설립은 후일 이슬람 국가의 재무, 행정을 관장하는 여러 관청제도의 효시가 된다.

칼리파 오마르는 644년, 아부 루울라아라는 페르시아 노예의 독 묻은 칼로 여섯차레나 찔렸는데 3일간을 버티면서 그의 후계자를 뽑을 6인 위원회의 구성인물을 지명해 놓은뒤 사망하였다. 슈라(협의)위원회라 불리며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동시에 가진 이 6인 위원회는 결국 가장 연장자인 우마이아가 출신의 오스만 빈 아판을 제 3대 칼리파로 선출하였다. 오스만 통치시대의 이슬람 움마는 메카 메디나를 중심으로 주로 아랍민을 다스리던 종래의 이슬람 움마가 아니었다. 오마르 때의 정복 이후 아랍반도뿐만 아니라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페르시아와 지중해의 여러 섬까지 통치하게 된 세계적 국가가 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통치 권역의 광역화로 인해 복속하는 신민들의 수가 엄청나게 증가하게 되었고 새로운 무슬림 세대가 등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들은 여러 면에서 메디나에서 움마를 세운 무슬림 첫 세대와 달랐다. 새로 이슬람을 받아 들이기된 이들 신생 무슬림들은 첫 세대와 같은 종교적 열정이 없었다. 개인적 욕구가 바탕이되어 종족, 민족, 분파마다 집단 연대 감정인 아싸비아가 되살아나고 새로운 정치적 요구들을 만들어 내었다.

또한 아부 바크르와 오마르 시대의 무슬림들은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나 오스만 시대에 이르러서는 정복지에서 들어오는 엄청난 부와 재화들로 인해 국고가 넘치고 풍요로워졌다. 이러한 요인들이 작용하여 그의 12년간에 걸친 통치기간 중에 무슬림들의 관심은 외부세계에 대한 정복보다 점차 내부의 권력구조로 방향전환을 일으킨다. 즉 지방정부와 메디나 중앙정부의 이해관계와 중앙정부 내의 세력다툼 등에 눈을 돌린 것이다. 이 다툼에서 칼리파는 중앙정부의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일가 친척을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이 때문에 오스만은 족벌정치를 한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또 오스만은 메카에서 무함마드의 포교를 박해한 우마이야 가문 출신이었으므로 그의 편파적인 인사행정은 반대파로부터 반발을 사게 되었다. 결국 656년 6월 불만을 가진 암사르의 전사들이 칼리파 오스만의 집안에 난입하여 그를 살해하게 되었다. 그 뒤를 이어 예언자의 사촌 동생이며 사위인 알리가 칼리파에 선임되었으나 그는 죽은 오스만을 지지하던 세력의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저자: 손주영
전 한국 외국어 대학 아랍어과 교수, 전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