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역사

간추린 이슬람역사 십핀전투와 정통 칼리파 시대

작성자
무스타파
작성일
2015-05-06 11:28
조회
543

간추린 이슬람역사 정통 칼리파 시대

3. 십핀전투와 정통 칼리파 시대

칼리파 오스만의 죽음은 무슬림 움마 내의 정변과 분열이 일어나는 출발점이 되었다. 최초의 무슬림 분파가 출현하는 격변기가 이어지게 된 것이다. 암사르의
전사들이 오스만을 살해했지만 정작 그들을 선동하고 조정한 배후인물들은 무슬림의 상류계급이었다. 당시 메디니의 대표적 원로들 중에는 딸라하 빈 우바이
달라와 앗 주바이르 빈 알 아왐 등 고명한 예언자의 교우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 이 두 원로는 칼리파 알리가 살해자 무리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체포하지
않는다고 보고 예언자의 아내로서 신도의 어머니로서 존경받던 아이샤와 연합하여 알리를 문책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또 우마이야가 출신이며 오스만의
6촌 동생인 시리아의 총독 무와이야도 오스만의 복수를 부르짖으며 칼리파 알리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하였다.

알리는 우선 자기의 주위에서 자신을 위협하는 딸라하와 앗 주바이르와 교전하여 656년 6월 이들을 격파했다. 딸라하와 앗 주바이르는 전장에서 전사했고 포
로가 된 아이샤는 메디나로 이송하였다. 이 전투는 낙타 전투로 불린다. 그 후 아이샤는 메디나에서 하디스(예언자의 언행)를 수집하는 일에 여생을 보냈다.
알리는 낙타전투에서 승리하여 자신의 세력권이 안정되자마자 시리아에서 우마이가를 중심으로 시리아 결맹군을 형성한 무아위야를 토벌하기 위하여 657년 9월,
유프라테스 강 상류 십핀으로 군대를 이끌고 갔다. 그의 군대는 무하지룬, 안사르 그리고 쿠파의 주민들로 구성되었다. 반면 주로 샴(오늘날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 요르단)지역의 용병으로 구성된 무아위야의 군대는 약 8만 명에 이르러 수적으로는 알리의 군대보다 우세했다. 이들은 알리의 군대가 십핀에 도착
하기 이틀 전에 이미 이곳에 도착하여 알리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알리는 무아위야 측에 통합을 촉구하였고 다음해 1월까지 대치상태에서 대화를 계속했으나 결
국 대화는 무산되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 초기에는 무아워야군이 승리하는 듯했으나 전세는 알리의 정규군 쪽으로 기울어져 무아위야 군대는 패색이 짙어졌
다. 이에 무아위야는 그의 편에 서 있던 이집트 정복의 영웅 아므르 빈 알 아스가 제안한 계략에 따라 그의 군인들의 창 끝에 꾸란을 달고 협상을 요구했다.

즉 무력이 아닌 신의 의사의 결정에 따르자고 요구한 것이다. 꾸란의 심판에 따르자 고 외치며 중재를 요청한 이 책략은 성공하여 알리의 진영은 이 협상을 받아
들이자는 측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는 측으로 나누어져 심한
분열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내부 분열에 직면한 알리는 부득이 협상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무아위야측의 책략이었기 때문에 협상이
제대로 진행될 리 없었으며 결국 장기화 되고 말았다. 일개 반란자와 협상함으로서 알리는 군사적으로도 손해를 보았지만 정치적으로도 칼리파로서의 그의 지위
가 반란자와 대등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반발한 협상 반대파들은 알리의 진영을 박차고 나갔다. 이슬람 역사에서는 이들을 나간 자들이라는 뜻으로 카와리
지 라고 부르게 되었다. 주전론자들이었던 이들은 무슬림사회의 주류에서 갈려나간 이슬람 최초의 종파를 형성하게 된다.

1년 반에 걸친 양측 중재인의 판결은 책략을 쓰는 무아위야측에 유리하고 알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결국 이슬람세계는 양분되고 칼리파의 지위
는 하락하고 말았다. 이라크로 돌아온 알리는 카와지리들을 설득하거나, 무력으로 진압하여 거의 그들을 전멸시키는가 싶었다. 그러나 소수의 카와지리들은 더
욱 과격한 신앙의 실천주의자로 변해갔고 움마를 분열시킨 장본인인 알리와 무와이야를 불신자로 선언한 후 이 두 사람을 죽일 자객을 파견하였다. 무와이야는
살아났으나 알리는 쿠파 사원에서 예배를 보고 나오다가 661년 1월 자객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알리가 죽자 결국 힘의 균형은 무아위야에게로 기울었고 결국 그
는 분열된 이슬람세계를 재통일하여 아랍제국의 새 칼리파가 되었다.

알리의 죽음과 함께 선출방식의 칼리파제는 종식되고 무아위야에 의한 세습제가 도입된다. 이것이 곧 정통 칼리파제의 종식이자 우마이야 세습 왕조의 시작이다.
이슬람 역사에서는 선출로서 칼리파 위에 오른 아부 바크르, 오마르, 오스만, 알리를 알 쿨라파 알 라쉬둔(정통 칼리파)이라고 부른다. 이 네 칼리파는 순니 무
슬림의 눈에는 이슬람의 얼을 그대로 시행한 인물들로 여겨진다. 즉 무함마드가 움마를 통치를 위해 수행한 역할과 기능을 그대로 계승한 인물들로 여긴다. 즉 무
함마드가 움마통치를 위해 수행한 역할과 기능을 그대로 계승한 자들로 종교를 수호하고 동시에 움마통치의 모든 세속적 일을 올바르게 관장하였던 모범적인 칼리
파들이라는 것이다.

아랍의 관습에는 부족장이 그의 직계자손을 후계자로 정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아랍의 부족적 관습과 초기 이슬람의 전통은 우마이야조의 창건자인
무아위야의 눈에는 칼리파의 사망시마다 제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비쳤다. 너무나 커져버린 제국에서는 선거를 통한 칼리파의 선출은 적합하지
않고 또 아랍인들의 상습적 분열과 내란을 조장할 뿐이었다. 결국 그는 근 20년의 통치 후 무슬림 원로들과 상의하는 형식을 갖춘 다음 자기의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그렇지만 무아위야 정부는 무력과 군의 힘으로 정권을 탈취했다는 인식 때문에 많은 무슬림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고 정치력이 뛰어났음에도 불
구하고 무아위야는 종교지도자로서의 권위를 갖지 못했다.

 

 

저자: 손주영
전 한국 외국어 대학 아랍어과 교수, 전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