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역사

아랍제국, 우마이야조(661~750년)

작성자
무스타파
작성일
2015-05-07 04:24
조회
575

아랍제국, 우마이야조(661~750년)

1. 무아위야의 우마이야조 건국

무아위야(661~680년 재위)는 뛰어난 지략과 정치술로 무용과 인격에서 칼리프 오마르에 필적한다. 많은 사람들이 칼리파의 자격으로 볼 때 어느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인정하던 칼리파 알리와의 권력투쟁에서 끝내 승리하고 알리의 죽음 이후 칼리파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의 지략과 상대방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은 범인으로서는 도저히 따라 갈 수 없는 경지였다. 따라서 그의 부하들은 그를 위해서라면 어떤 명령이라도 기꺼이 따르려고 하였고 그가 25년간 총독으로, 19년간 칼리파로 지배했던 샴 지역의 주민들은 그의 뛰어난 통치술 때문에 그 후에도 우마이야조가 끝나는 날까지 우마이야가에 충성을 바쳤다.

알리가 죽자 무아위야가 칼리파 자리에 곧바로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칼리파 알리의 근거지였던 이라크가 몇달 동안이나 그를 적대시했으며 알리의 장남 하산을 합법적 칼리파위 계승자로 지지하였다. 보수적 이슬람의 근거지가 되어 가던 히자즈 지역도 무아위야가 이룩한 정치적 성공에 대해 냉담함을 보였다. 그러나 무아위야는 자신이 지니게된 압도적인 무력과 정치적 수완으로 반대자들을 굴복시켜 갔다. 결국 자신의 무력함을 느낀 하산은 무아위야의 칼리파 등극을 인정하였다. 그는 메디나에서 무아위야가 지급하는 연금으로 8년을 살다가 669년 사망한다. 무아위야가 칼리파에 오르자 그는 메디나 정부 같은 신정적 공화체계로는 더 이상 제국을 확대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아랍 부족의 세습적인 신분제에 바탕을 두면서 사산조나 비잔틴 제국이 취하고 있는 왕정제를 국가의 통치체제로 채택한다.

그는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칼리파위의 계승방법을 장자 상속 또는 가문 중 가장 유력한 인물로 이어지게 하는 세습제로 바꾸었다. 정부의 주요 기관으로는 슈라와 우푸드가 있었다. 슈라는 부족장 협의체다. 이것은 칼리파나 지방 총독관이 소집하며 자문과 권력 집행의 두 가지 기능을 맡았다. 우푸드는 각 부족의 협의체와 관련되어 있었다.이 기관은 각 부족이 중앙 협의체나 지방 총독의 협의체에 보내는 대표자로 구성되었으며 충성심을 바탕으로 각 부족의 자발적인 동의를 이끌어 내었다. 그는 이 두관을 통하여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 하였다. 그는 부족 연합체 같은 군조직을 비잔틴 방식에 따라 새 군사 편제로 바꾸었다. 이것은 이슬람 제국이 계속 확장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그 결과 이슬람제국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해라트, 카불 및 부하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까지 도달했다. 무아위야는 비잔틴제국과의 끊임없는 전쟁을 통하여 이슬람의 용사, 성전의 지도자로 자처하며, 무슬림들이 그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유도했다. 무아위야의 명령에 따라 668년에 시작된 콘스탄티노풀의 정복전쟁은 비록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이슬람제국의 막강한 군사력과 아랍 무슬림들의 재단결을 확인하는 계기를 만들어냈다.

2 카르빌라 참극과 쉬아파의 기원

680년 무아위야의 아들 야지드가 칼리파위에 오르자 이러한 세습적 즉위는 선출로서 칼리파를 뽑는 이슬람 전통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제국 내의 많은 중요 원로들이 그의 칼리파 즉위를 인정하지 않고 칼리파의 권위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 중에서 야지드에게 가장 위험한 인물은 칼리파 알리의 차남 후세인이 었다. 후세인은 형 하산과 달리 지도력을 갖춘 능력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야지드의 하산과는 달리 지도력을 갖춘 능력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야지드의 칼리파 계승은 정통성이 없다고 간주하고 자신이 칼리파에 도전할 꿈을 가졌다. 이때 이라크의 쿠파에서는 그를 칼리파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쿠파의 알리 가문 지도자들은 은밀히 메디나에서 메카로 옮겨가 있던 후세인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에 후세인은 그의 사촌 무슬림 빈 아낄을 쿠파에 파견하여 알리 가문의 지지세력을 살펴 보았다. 무슬림은 지지세력이 확고함을 보았고 이를 후세인에게 통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통보가 후세인에게 전달된 후 상황은 급변했다.

반 우마이야가의 충복들이 후세인의 반 우마이야가 활동소식을 야지드에게 알렸으며 야지드는 쿠파 총독을 해임하고 악명 높은 우마이야가의 하수인이며 바스라 총독인 우바이둘라 빈 지야드를 쿠파 총독으로 겸임 발령하였던 것이다. 그에게 쿠파의 반란음모 세력을 철저히 소탕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는 무슬림 빈 아낄을 재빨리 잡아 처형하였고 그의 동조자와 알리 가문의 지지자들의 중진들도 차례차례로 검거하였다. 그 결과 반란의 싹은 계획이 세워지기도 전에 제거 되었다. 이렇게 상황이 돌변한 것을 모르고 후세인은 그의 가솔들과 함께 메카를 떠나 쿠파로 향했다. 주변에서는 좀더 때를 기다려 보자고 말렸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그의 일행은 기껏해야 200명 정도였으며 성인 남자는 80명에 불과 하였다. 그는 쿠파로 향해가던 도중에 시인인 파라즈다끄를 만나 쿠파의 상황을 물었는데 이때 그 시인은 사람들의 마음은 그대와 함께 있으나 그들의 칼은 우마이야가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답변하였다 한다.

쿠파 주민들은 그대를 지지하나 우마이야가의 위협 때문에 어쩔수 없이 칼리파 편에서 그대에게 대항하여 칼을 들 것이라는 말이다. 후세인은 680년 10월 쿠파에서 가까운 카르발라에서 우바이둘라의 군대와 마주친다. 사태가 절망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자신을 칼리파 야지드에게 보내거나 히자즈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나 이 요구는 거절되고 그와 그의 가솔들은 여인들과 어린이들을 제외한 전원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후세인을 죽인자 들은 예언자의 외손자이자 칼리파위의 정당한 후보자를 죽였다는 오명 때문에 그들에게 돌아올 복수의 후환이 두려워 일시에 그를 공격하여 후세인의 시체를 두 동강내고 말았다. 그들은 후세인의 목을 잘라 다마스쿠스의 야지드에게 보냈다.

이와 같은 후세인의 비참한 최후가 알려지자 이라크 지방은 알리 가문에 대한 동정과 우마이야가에 대한 증오로 들끓게 된다. 쿠파의 주민들은 후세인이 그들을 믿고 오다가 참변을 당하게 된 것을 후회하며 그를 애도하고 추앙하면서 참회자들이 된다. 카르발라의 학살은 알리가의 지지자들을 하나로 단결시키게 하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또한 알리가 지지자들에 대한 우마이야가의 계속적인 탄압과 검거 때문에 글은 적개심에 불타서 더욱 반우마이야 성향을 갖게 되었다. 결국 이들은 후세인의 죽음을 순교로 받아들이면서 하나의 정파에서 종파로 발전하게 된다. 이들을 쉬아 알리(알리의 추종자) 또는 쉬아 라고 불리게 되었다. 결국 카르빌라 참극은 이이슬람사에서 순나와 쉬아라는 무슬림 종파의 양대 산맥을 가르는 분기점이 되었다. 그 후 후세인이 순교한 카르빌라는 쉬아들에게 가장 중요한 장소로 여겼고 반정 무슬림들의 정신적 고향이 되었다. 카르빌라는 쉬아들에게 메카, 메디나보다 더 중요한 순례지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쉬아파의 출현은 넓게는 칼리파 알리와 그의 아들들인 하산, 후세인 등이 우마이야 가문과의 정치적 분쟁과 갈등 속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과 그 과정의 결과이고 좁게는 카르빌라 참극의 결과로 조성된 분위기 속에서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쉬아의 기원을 카르발라 사건보다 훨씬 이전인 칼리파 오스만 시대에 압둘라 빈 사마의 활동에 두고 있다. 그것은 그가 주장한 알 위싸아(상속론)와 알 라즈아(재림론)사상 때문이다. 그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예멘 출신의 유대인이었다. 그는 스스로 깨친 독자적인 칼리파 제관과 예언자관을 전파하기 위해 무슬림 대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비밀조직을 결성하였는데 그것은 당시의 칼리파 오스만 정권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알 위싸야관은 모든 예언자는 유언상속자인 와씨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의 사자인 무함마드의 상속자 와씨가 바로 알리 빈 아비 딸립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의 진의는 알리 이전의 칼리파였던 자들은 아무런 권한도 없이 그 지위를 차지한 칼리파위의 찬탈자들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오스만은 정당한 칼리파가 아니었다. 칼리파위는 무함마드에서 그의 와씨인 알리에게 넘겼어야 했다는 것이다.

이븐 사바가 알리의 생존시에 이미 쉬아 알리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를 쉬아의 원류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아마도 그것은 일부 서구의 동양학자들의 시각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이븐 사바가 오늘날 쉬아 사상의 중요한 골격의 제공자라는 관점에서 이븐 사바와 그의 추종자들을 쉬아의 한 동아리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을 특색있는 한 분파로 분류해야지 정통쉬아의 일부로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알리를 신격화하거나 알리의 재림론을 신봉하는 신앙은 타 종교에서 차용한 것이지 쉬아 본연의 신앙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쉬아는 나름대로 정통 이슬람을 표방한다. 비록 순니와 칼리파제에 대한 정치관은 다를지라도 알라를 절대 유일신으로 믿는 신앙관에는 한치의 차이도 없다. 신은 견줄자 없는 절대자이다. 무함마드는 신의 사자이고 인격일 뿐이지 신격은 그뿐만이 아니라 어느 누구에도 결코 허용될 수 없다. 알리도 신의 빛을 받은 이맘일 뿐이다. 알리를 신의 체현으로 보는 것은 인정 될 수 없다. 따라서 이븐 사바를 쉬아의 원류로 보거나 쉬아 사상의 기원으로 말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

 

3 압둘 말리크의 치세와 칼리파 왈리드의 제2차 정복사업

683년 야지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칼리파는 18세의 어린 아들 무아위야 2세에게 넘어갔다. 무아위야 2세는 어리고 나약한 병자였다. 그는 칼리파위에 오른지 얼마되지 않아 칼리파직을 가장 적합한 후계자를 선택하여 그에게 넘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고 즉위한지 6개월 만에 그는 사망하고 만다. 그가 사망하자 우마이야가는 칼리파 선정 문제를 놓고 위기에 처했다. 칼리파위는 공백이 되었고 그에 따라 무슬림사회에는 제2차 내란(제1차 내란은 656년 칼리파 오스만의 죽음이 있던 때)이 일어나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때는 이미 알리와 낙타 전투를 벌였던 앗 주바이르의 아들 압달라가 히자즈 무슬림들의 추대를 받아 히자즈에서 칼리파 선언을 한 때였고 그의 세력은 이라크에까지 뻗어 있었다. 우마이야가의 중심부인 시리아 내에서도 남 아랍족인 칼브족과 북 아랍족인 까이스족 간에 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마침내 북 아랍족인 까이스족은 우마이야가에 등을 돌리고 마르즈 라히뜨에서 압달라 빈 앗 주바이르와 화합하고 그에게 충성을 서약하게 된다. 칼브족은 많은 논란 끝에 알 자비야 회의(683년)에서 마르완 빈 알 하킴 빈 알 아스를 칼리파로 추대한다. 칼리파에 오른 마르완은 쓰러져가던 우마이야조를 다시 살려 놓는 큰 업적을 남긴다. 그는 684년 마르즈 라히뜨에서 그에게 저항하던 까이스족 군을 쳐부수고 샴지역의 평온을 되찾는다. 그리고 그의 아들 압둘 아지즈와 함께 이집트로 진격하여 그들로 하여금 우마이야조 칼리파의 권위를 인정하게 만든 후 그의 아들을 이집트 총독으로 앉혔다. 그리고 그는 알 자비아 회의에서 칼리파 계승자로 정해진 야지드의 아들 칼리드 대신에 자신의 아들 압둘 말리크를 후계자로 임명하고 나서 685년에 사망한다.

칼리파의에 오른 압둘 말리크(685년~705년 재위)는 즉위 초기에 아랍족 사이에 분쟁을 해결하여 국내질서를 회복하고 북쪽의 비잔틴 황제와 국경 분쟁을 조정하여 비잔틴과 국경지역을 안정시키는 등 국내외 안정을 도모하는 일에 주력했다. 그는 우마이야조의 제2의 창건자로 불리운다. 붕괴 직전에 이른 내란의 위기를 극복하고 번영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쿠파의 참회자들의 무리를 이끌고 봉기한 술레이만 빈 사르드 휘하의 쉬아군을 685년 진압하였고 거의 9년간 히자즈를 지배하며 칼리파로 자처한 압달라 빈 앗 주바이르의 난을 마침내 692년 평정했을 뿐만 아니라 카와리지의 주류파인 알 아자리까파를 소탕하고 이븐 알 아쉬아슈의 난마저 토벌하여 제국전역을 평정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새로운 행정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중앙집권화를 꾀하였다. 행정개혁을 추진하면서 세금의 징수와 지출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였고 꾸란 이 새겨진 아랍 동전을 처음으로 만드는 등 그때까지 그대로 존속하던 비잔틴과 사산조 방식의 행정체제를 아랍식 체제로 바꾸었다. 압둘 말리크가 즉위할 당시 혼란했던 나라는 그가 사망할 때에는 부강하고 전성기를 맞은 제국이 되었다.

압둘 말리크의 아들이자 후계이자인 알 왈리드 빈 압둘 말리크는 중앙아시아에서 북아프리카 서쪽 끝의 모로코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의 이슬람세계를 이루는 광대한 대제국의 터전을 일궈낸 위대한 칼리파였다. 그의 통치기간(703~715년 재위) 동안 우마이야조는 최고의 번영을 구가했다. 이 기간 중에 제국은 3개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1) 이라크 동쪽

중앙아시아 쪽으로 이슬람을 팽창시킨 주인공은 꾸타이바 빈 무슬림이었다. 그는 후라신의 통치자가 된 후 메르브와 발크를 정복하고 다시 사마르칸트를 점령하여 이 도시를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중심지로 만들었다. 현재의 아프카니스탄 지역과 더 나아가 부하라와 사마르칸트까지 점령하여 옥수수강의 건너편 땅까지 아랍제국의 영토로 넓힌 것이다. 이로써 중앙아시아 전 지역이 아랍의 통치권에 들어왔고 동시에 주역민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여 스텝 지역의 터카인들이 이슬람화되었다. 대체로 705년에서 712년 사이에 이루어진 대장정의 역사였다.

2) 이라크 동남쪽

인도 쪽으로의 원정은 무함마드 빈 알 까심이 맡았다. 그는 인도의 신드주를 점령하여 오늘날 파키스탄의 모태를 마련하였다. 710년에서 712년 사이에 발루치스탄, 하이데라바드 등을 점령하고는 북쪽으로 나아가 편잡의 물탄에 이를 때까지 정복 사업을 성공리에 펼쳐간다. 그 후 이슬람은 인더스강 지역과 인도대륙으로 전파되었다.

3) 마그립과 스페인

무슬림군은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의 서쪽 끝 마그립에서 유럽으로 들어가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이 지역 정복의 영웅은 빈 누사이르와 그의 부하였던 따리끄 빈 지야드였다. 708년 아프리카 총통으로 부임한 무사 빈 누사이르는 북아프리카의 이슬람화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는 호전적이고 미신과 토속신앙을 믿었던 거친 베르베르 원주민들을 무력을 무릎끓게 하고 그들 스스로 이슬람을 받아 들이도록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710년 그는 드디어 마그립을 정복하는데 성공하고 북아프리카가 아랍화, 이슬람화되는 기틀을 마련한다. 스페인 정복의 영웅은 베르베르 무슬림인 따리끄였다. 711년 그는 아프리카의 안달루스 사이에 좁은 해협 지블랄터(이 지명은 그 후 지발 따리끄)를 건넜고 그 뒤 무사는 아랍, 베르베르 혼합군을 거느리고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사이에 스페인의 거의 전역을 정복하였다. 그 후 800년간 무슬림들은 스페인을 지배한다. 이와 같이 스페인 정복을 완료함으로써 아랍, 이슬람제국의 영토는 동서로 크게 넓어졌다.

칼리파 오마르 때의 정복사업이 종교의 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이슬람의 팽창을 위한 것이었는데 비해 왈 왈리드 때의 2차 대정복은 영토와 부의 획득을 위한 성격이 강했으므로 아랍제국의 영토 확장을 위한 것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복지들이 처음에는 정치적으로만 아랍제국(우마이야조)에 합병 되었으나 후일 점차 종교적으로 이슬람화하여 스페인을 제외 하고는 오늘날까지 이 지역 모두가 무슬림들이 사는 이슬람의 땅이 되었다. 이 시기까지 무슬림들의 무력팽창은 스페인에서 인도의 신드주까지 옥수수 강 건너에서 모로코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에서 이루어 졌다. 이때는 칼리파가 다스리는 다르 알 이슬람(이슬람 영토)이 극대화한 때였다. 그 후 아프리카 내륙으로, 그리고 인도대륙을 건너 말레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에 이르는 이슬람 전파의 주역은 이슬람 신비주의 종단의 수피들과 무슬림 상인들이었다. 통일 신라시대에 우리나라에 온 처용이 동방 무역로를 따라 표류해온 아랍상인이라면 중동 무슬림이 이미 이 시기에 극동까지 활동을 한 것으로 추종해볼 수 있다.

 

 

저자: 손주영
전 한국 외국어 대학 아랍어과 교수, 전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