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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무함마드 전기

작성자
무스타파
작성일
2015-03-25 23:23
조회
2340

이슬람 이전 시대의 아라비아와 멕카

메카는 홍해에서 48 마일 떨어진 아라비아 사막의 황페한 암석 계곡에 자리잡고 한 도읍으로서 북쪽의 시리아와 남쪽의 예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다 무함맏 출생 당시의 아라비아인은 대개가 유목민이었으며, 사막의 가혹한 기후로 한 곳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낙타와 양떼를 몰면서 초원지대를 찾아 다니며 살아가는 수 밖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사막의 유목민에게 있어서 낙타야 말로 가장 귀중한 동물이며,수송 수단으로 볼때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것이었다.낙타는 사막의 배다.

사막에 낙타가 번성할 때 아라비아는 번성한다.고 제2대 칼리프 우마르가 술회할 정도로 그만큼이나 사막의 낙타는 귀중한 것이었다 아랍인은 낙타의 양의 젖과 고기에 생계를 의존하였고,두발,털,가죽으로 의복과 천막을 만들었다.그들의 궁핍한 생활은 행동면에 나타나게 되었으니 반목 공격은 다반사였다.남성다운 태도 환대를 가장 으뜸가는 미덕으로 여기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미신과 괴이한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멕카 북방 약 300마일 지점에 있는 야스립이나 해발 700 피트에 자리잡고 있는 따이프 같은 곳에서는 조야자 (야자나무과며 대추만한 열매가 열림)와 포도가 생산되는 오아시스가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거주지는 역시 멕카를 손 꼽았다. 멕카는 시리아와 예멘의 중간 지점에 있어서 고대에는 이곳이 가장 중요한 상거래의 중심지였다.대상들이 겨울엔 예멘 여름에는 시리아를 내왕하면서 멕카를 부유하게 만들었다.

멕카를 중심으로 해마다 큰 시장이 벌어졌다.이렇게 해서 멕카가 부의 축적지가 되자 귀족 상인 계급이 생기게 되고 그들은 자기들의 공동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의회를 설립하였다. 멕카의 토후의 추장으로 공인을 받게된 부족들은 아라비아 전역에 걸쳐 대단한 명성과 영향력을 떨치게 되었던 것이며, 특히 예언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후예들인 쿠레이쉬 족이 그러하였다. 원래 멕카에는 도읍이 없었고 토암계곡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고 역사가는 전하고 있다.그러나 예언자 아브라함은 그의 여노예 하갈을 그 몸에서 태어난 아들 이스마엘에게 약간의 조야자와 물을 주어 지금의 멕카에 두고 갔다.하갈과 아들은 홀로 떨어져 있게되고 물이 떨어지자 싸파 마루와 구릉을 일곱번 오르내리며 물을 찾아다닌 동안 기적이 일어났다 이스마엘 발밑에 샘이 솟는 것이 아니가 하갈은 물이 흘러 내리지 못하게 물을 막으면 서 멈춰라 물이여 (잠잠)하면서 외쳐 대었다. 이제까지 황무지였던 사막에서 샘물이 솟아나 멕카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지금도 성지 순례시에는 사파와 마루와 언덕을 일곱번 뛰어서 왕복하고 잠잠 성수를 마시면서 속죄 하는 것이다 성지 순례자들은 순례를 마치고 돌아 갈때 이 잠잠 성수를 가지고 가 가족과 이웃에게 나누어 마신다  이후 예멘의 한 부족이 이곳에 자리잡고 살게 되었으며 마을이 형성 되었다. 어린 이스마엘은 예멘 부족의 아랍어를 배우고 그 부족의 여자와 결혼하였다 아브라함은 가끔 아들을 찾아와 돌 보고우물 근처에 카아바를 건립 하였으며 매년 순례 기간에 이슬람 신도들이 이곳을 찾아와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이슬람 이전의 아랍족의 종교

이와 같이 무함맏이 탄생하기 수천년 전부터 멕카는 아랍인의 정신적,상업적 중심지 이며 이곳을 종교적,경제적 목적으로 방향을 잡아 놓은 것이다.그리고 멕카에 장이 서면서부터 문화적 행사와 웅변대회며 백일장이 성행하였다.이것이 아라비아의 자랑인 언어의 발달을 이룩하였던 것이다.이리하여 북부 아랍인의 방언 특히 쿠레이쉬족의 방언이 모든 언어를 제압하고 군림하게 되었다.그러나 예언자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의 교리는 멕카와 그 주변 부족들에의해 한때 지속되어 왔으나 세월의 흐름과 외부의 영향을 받아 일신교의 신앙은 점차로 쇄퇴하여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숭배로 바뀌게 되었다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지존지고 하신 알라의 관념은 막연하게 내려가 우상 숭배의 사교적 신앙과 혼합해 버렸던 것이다 카아바에는 거대한 우상들이 세워져 예배의 대상이 되었다.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를 무명 시대라고 한다. 그것은 신앙적 암흑 시대로서 우주 창조자인 신을 믿는 것이 아니고 자연 숭배와 허다한 신령이 있다고 믿는 우상 숭배의 사교도들이었다.

코끼리의해

이브라함 때부터 발전해 온 유태교와 기독교는 아라비안에게는 그다지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였다.그러나 예멘이 크리스찬 아빗시니아의 식민지가 되면서부터 아빗시니아 총독 아브라하는 멕카의 사원과 대치할 목적으로 그의 수도에다 사원을 건랍하였다.그러나 이 목적이 실패로 돌아가게되자 그는 카아바 사원을 없애버리기 위하여 멕카로 진격해 들어갔다.무함맏의 조부 압둘 뭇딸립이 토족의 수령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멕카인들은 침략군 앞에서 무능하여 멕카를 버리고 멕카 주변의 동굴로 피신하였다.그러나 원정군은 형편없이 패배하여 멕카에는 손도 못되고 철수하여 예멘으로 돌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이 원정대의 패전은 아라비아인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로서,원정대가 코끼리부대였다는 점에서 그 패전의 해를 코끼리 해라고 부르게 되었다. 무함맏이 탄생한 것은 이 코끼리 해의 4 월이었다.

 

 무함맏의 탄생과 어린시절

멕카.

아라비아 반도에 자리잡고 있는 이 도읍은 고대로부터 아랍족의 신전이 있는 곳이어서 아주 옛적부터 번창해오고 있었다. 이 멕카를 중심으로해서 쿠레이쉬족이라 불리는 아랍부족이 정착하여 살고있었다.

서기 6 세기 중엽에 이르러 아부 뭇딸립 이라는 사람을 족장으로 하는 쿠레이쉬 족의 가문에서 카아바의 관리인을 하고 있었다.

서기 571 년 4 월 22 일 (어떤 문헌에는 570 년) 압둘 뭇딸립에게 손자가 태어났는데 유복자였다.그의 부친 압둘 뭇딸립의 아들 압둘라는 아들이 태어나기 얼마전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압둘 뭇따립은 손자의 이름을 무함맏이라고 지었다.무함맏이라는 이름은 쿠레이쉬족 에서는 흔한 이름이 아니었으므로 왜 이런 이름을 지었는지에 대해 물어 오는 사람들에게 무함맏이라는 이름 그대로 이생과 천국에서 칭송받는 자가 되라는 뜻이라고 대답하였다.

당시의 아라비아 귀족들 사이에는 유아를 유목민 유모에게 맡겨서 키우는 습관이 있었다.그것은 비좁은 멕카를 떠나서 어린아이를 광대한 사막에서 키우기 위해서였다.사막 유목민의 품에서 자라는 아이는 나이 7~8 세가 되면 부모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압둘 뭇딸립의 손자를 맡은 유모는 아비 없는 어린애를 양육해도 푸짐한 보수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므로 탐탐해 하지 않았다.유모는 아기를 맡은지 얼마되지 않아서 아기를 생모인 아미나에게로 돌려 보냈다. 모자가 다시 합친 후 어머니 아미나는 아들에게 생면하지 못한 아버지의 무덤을 보여주기 위하여 아들을 데리고 친정이자 고향인 남편의 무덤이 있는 메디나로 갔다. 무함맏의 나이 6 세 때였다.

이 머나먼 나들이에서 초열의 태양,구름 한점 없는 사막의 하늘, 밤하늘의 달과 별,끝없이 펼쳐 있는 사막의 적막이 어린 무함맏을 사로잡았으리라. 그런 어머니는 친정에 도착하자마자 병석에 누워 버렸고 며칠있다 세상을 떠나고 만다. 낮설고 외로운 곳에서 어린 무함맏은 이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가장 사랑이 깊은 어머니가 임종하는 고통을 눈여겨 보았다.이 가슴을 에이는 슬픔을 함께 나눌 사람이라고는 계집 종 한 사람뿐이었으며, 계집 종은 이 아이 무함맏을 다시 멕카의 조부에게로 데려갔다.

이렇게 해서 무함맏은 나들이를 떠날 때는 아비없는 아이였으나,나들이에서 돌아올 땐 어머니 마저 없는 고아가 되었다.

양친이 없는 어린 손자에게 조부 압둘 뭇따립은 아비 겸,어미겸 노인 가슴에 그윽히 차있는 모든 사랑을 쏟아가며 키웠다.그러나 조부의 양육도 오래가지 못하여 무함맏이 나이 8 세 되는 해에 조부도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리하여 숙부 아부 딸립(무함맏 별세후 제 4대 칼리프가 되는 알리의 아버지)과 숙모 두분이 친자식으로 키웠다.

무함맏은 조용하고,온순하고, 품행이 방정한 소년이었다.그는 혼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그러나 아랍 부족들의 잡신에 대해서는 선천적으로 싫어하여 그런 것에 예배 하거나 제물을 올리는 일은 전혀 없었다.

조실부모한 어린 시절의 무함맏은 매우 애처러운 고아로 성장 하였다.온순하고,인간을 사랑하며,동정심이 많고, 관대하며,정직한 그의 인품속에 특히 고아에 대한 자애와 무슬림의 형제애를 거듭거듭 가르치고 있음은,어릴 때부터 고아로서 자라난 탓인지도 모른다.그의 애정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에게까지 미쳤다.그는 제왕이 부럽지 않은 권세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헤진 옷을 손수 꾀메어 입는 인품이었고, 남의 괴로움에 끝없는 동정을 베푸는 인격이었다.

무함맏의 가문은 명문이었으나 거의가 가난하여 숙부역시 가난하였으므로 혹은 양치기로 혹은 심부름으로 숙부를 도와야만 했다.글 읽기며 셈놓는 법조차 배울 겨를이 업었으므로 그는 무학이었다. 이렇게 자라난 어린 시절의 무함맏에게는 사막이 학교였고 밤 하늘의 별이 그의 스승이었다.

무함맏은 이제12 세가 되었고 인덕이 많은 숙부를 무척 따랐다.어느날 숙부 아부 딸립이 장사차 시리아에 갈 채비를 차리자 어린 무함맏은 이 먼 여행에 함께 가겠다고 나서는 것이 었으나 멀고 험한 길이라서 숙부는 허락하지 않았다.그러나 끝내 고집하므로 동행을 겨우 허락하였다.

 

그는 이제 제법 자라서 호기심과 관찰자의 눈으로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그러나 눈에 보이는것으로 해서 몹시 괴로워했다.

당시의 아랍 부족 간에는 도박 주벽 난혼 우상숭배가 세상을 휩쓰는 때였다. 여자는 마치 낙타 양 식량을 거래하듯 매매 또는 물물교환하는 물건이 었으며 남자들의 노름 밑천이기도 하였다. 결혼이 성립되는 법이 없었고 남자들은 얼마던지 여자를 차지할 수 있었으며 한 남자는 한 여자에게 만족할 수 없었다. 음탕은 악덕이 아니었고 난혼은 죄가 아니었다.

남자가 죽으면 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과 아내들을 유산으로 받기도 하였다.계모들을 정식으로 아내로 삼기조차 하였다.딸을 수치스럽고 불명예로 생각하여 딸이 태어나면 교살 하거나 생매장 하였다.데릴 사위는 남자의 명예에 일대 오점으로 여겼다. 부자는 많은 노예를 소유했고 생사여탈을 마음대로 하는 큰 권한을 가졌다.정부와 국가 관념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였고 각 부족마다 자기들의 족장 밑에서 독립적인 생활을 하였다.

부족간에 끝없는 싸움이 계속 되었고 생명에는 생명 피에는 피로 대결하고 경마 가축의 방목 우물물을 가지고 유혈 보복이 끊일  몰랐다. 패자의 머리는 자랑스런 상배 였으며 두개골로 술잔을 기울였다.

아랍족은 글읽기와 글쓰기에는 마음이 없었다.그러면서 그들은 시 언어 우아에 대해서는 긍지가 대단했고 따라서 그들에겐 다른 종족들은 귀머거리와 벙어리로 보았다.그리고 미신을 숭배하여 점패 마술사 고대신화에 몰두 하였다.여러 타 지방에서도 불 숭배 애증의 신 숭배 나무 돌 동물숭배 심지어는 곤충 숭배가 만연해 있었다

아랍족의 남자들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낙타나 양의 숫자 과수원의 숫자 여자 노예등의 수 재산 명문 출신에 의해서 귀 천이 따져지고 선 도덕 경건 따위는 안중에 없는 아라비아의 이교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사막의 아랍족은 그들 나름대로 영웅주의 자유애호 환대 충성심 자존심 자신의 천성이 있었다.그들이 아기를 사막의 유목민의 유모에게 양육을 맡기는 것도 이렇한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유목민은 정주하는 풍습도 없었고 푸른 목초나 대추 야자나무 물이 솟아 나는 곳은천막을 치고 살다가 이것이 다하면 다른 장소로 옮겨 다니는 사막의 유랑민이다. (예전에 베두인들이 아랍 전지역을 이동 하며 살면서 평생에 3 번 같은 장소에 오면 오래 산다고 한다 요즘은 않그렇지만) 사막의배 낙타 낙타는 그들 유목민의 식량이고 유일한 재산이고 유일한 교통 수단이며 의류와 천막의 원료이자 공에품의 원료이기도 했다.

온갖 잡것을 피하고 생각이 많은 젊은이로 성장한 무함맏은 이것을 보고 난 후 부터는 생각에 잠기곤 하였다.말이 적고 얼굴과 몸가짐에 고뇌와 내적 갈등의 표정이 뚜렷해 보였다.

그에게는 병자를 돌보아 주고 이웃에 마음을 쓰고 젊은이에겐 친절하고 노인에겐 존경을 베풀며 고아 과부 생활 능력이 없는 사람들 약자 괴로운 사람들의 구조에 대한 성향이 자라고 있었다.그러나 오만한 멕카인들은 약자나 무력자를 동정하는 법없이 잡스런 일에 낭비하기만 하였다.

이에 젊은 무함맏은 약자를 지켜주고 피압박자의 권리를 위하여 투쟁할 운동을 조직하였다.그의 품행 정직 성실 의로움이 멕카인들을  감동시키게 되자 자기들의 재산 관리를 의탁해 오고 모든 쟁의를 상의하여 무함맏을 비공식 신탁인으로 추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알 아민 (성실한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우상숭배와 잡신 숭배의 풍습으로 아랍족은 멕카 신전(카아바)을 신성시 하였다.이 카아바에는 흑석이 박혀져 있는 곳이 있는데 이것을 특별히 신성시했으며 신전 건축에 이 흑석을 끼우는 일에 지명 받은 사람들은 모든 경쟁자의 우위에 서는 우선권을 가지게 되는데 모든 종족들이 서로의 권리를 주장하며 이 일을 맡고자 하여 일촉즉발의 유혈 사태를 몰고 오게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되자 무함맏에게 중재와 사태 수습을 의뢰하게 되었다 무함맏은 자기 옷을 펴서 흑석을 가운데 놓게 하고 모든 경쟁자들로 하여금 함께 들도록 하여 카아바 신전으로 운반 하여 무함맏이 손으로 이 흑석을 끼웠다 이리하여 유혈 사태를 방지하게 되었다.

무함맏의 결혼

무함맏의 보호자인 숙부 아브 딸립은 대가족에다 사업은 부진하고 가세가 기울어 이제는 무함맏을 제 치닥거리는 제가 하도록 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멕카에는 하디자라는 부자 과부가 살고 있었는데 대리인을 놓아서 인접 국가와 교역을 하고 있었다. 숙부 아브 딸립은 무함맏을 이 과부에게 추천하여 대리인으로 채택되었다.  근면하고 정직한 무함맏은 알 아민(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불릴만큼 신용있는 사람으로 알려져 주인의 대상을 이끌고 시리아 바스라 예멘 방향을 여행하였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주인의 재산을 축내거나 대상을 송두리채 몰고 잠적해버리는 것이 보통이었덩 그 당시에 있어서 무함맏은 대상을 이끌고 갔다올 때마다 막대한 이익금을 그대로 주인에게 갔다 바치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러한 무함의 성실성과 나무랄데 없는 행실에 감복한 하디자는 아브 딸립에게 중매를 청해서 무함맏과 결혼하게 된다. 하디자는 40 세이고 무함맏은 25 세였다. 하디자는 무함맏에게 선물로 노예 자이드를 주었던바 무함맏은 그 노예를 해방시켜 주었다. 노예 자이드는 이런 주인은 생전 본 일이 없는 일이라 자유의 몸이 된 후에도 주인을 떠나지 않고 은인의 곁에서 일생을 살았다.

행복한 결혼 생활 속에서 무함맏은 멕카 사람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경제적으로부유했을 뿐 아니라 덕망과 총명으로 하여 칭찬이 자자했다. 이 행복한 결혼 생활은 15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와 부자의 가장으로 행복하게 살면서도 마음 속엔 어두운 그림자가 떠나지 않고 있었으니 발치에 끼여자는 고양이를 깨우는 것조차 애처러워 일어나지 못할 만큼 마음씨 고운 사람이였던 무함맏을 괴롭히는 일들이 그의 주위에 너무나 많았다.

 

히라 동굴에서의 명상

무함맏이 결혼 생활을 하고 있을 그 당시의 아라비아 세계와 멕카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던가. 당시 멕카는 아라비아 대상물을의 중심지였다. 멕카의 지배 계급인 쿠라이쉬 족은 독점 단체를 구성하여 세력을 남용하고 무역의 폭리를 일삼고 있었다. 이들 호상은 재력과 권력을 남용하여 온갖 수단으로 민중을 압박 호탕과 부도덕한 생활을 향락하고 있었다. 빈부위 차가 극심하여 가난한 자는 가공할 영아 살인을 상습적으로 하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를 만큼 타락해 있었다.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를 암흑 시대라고 하는데 여자는 남자의 재산 목록의 일부에 자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아내는 남편의 노름 밑천이기도 하였고 가난한 집에 딸이 태어나면 팔아 버리든가 부채의 댓가로 주어버리도 하였다. 그리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구하는 것은 그 어떤 종교적 위안이었다. 그러나 그것 마저도 저급한 미신에 빠진 사교였다. 신성한 카아바 신전에는 우상숭배가 성행하고 있었다.지배 계급은 이것을 기화로 순례자로부터 많은 참배료 신탁료 혹은 헌납의 제물을 공공연히 약탈하고 있었다.

무함맏은 이런 사회적 종교적 경제적 부정에 대해 무관심한 성품이 아니었다. 주위의 부정 모순에 번민한 그는 자기 혼자만의 안주와 행복한 가정에 파묻혀 있을 수 만은 없었다.

나이 40 이 가까워지자 성실하고 고상한 성품의 무함맏은 생업을 멀리하는 경향이 짙어 갔다. 그는 히라 동굴속에 파묻혀서 여러 날을 어떤 때는 수 주일씩 혼자 보내면서 이교도들의 행사와 물질 생할의 혼란을 멀리하고 명상에 잠기어 우주의 신비 뒤에 놓여 있는 비밀에 대하여 명상으로 나날을 보냈다. 무함맏은 무학자로 스승한테 배운 바도 없으나 이교를 혐오하고 우상숭배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그는 종교에 대해서 그 어떤 상념도 가진바 없었으나 삼라만상의 제행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나무나 돌조각의 우상을 믿을 수는 없었다.

최초의 계시

히라 동굴에서 명상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날 무함맏의 나이 40 세(서기 610 년) 되던 때였다. 히라 동굴에서 돌아온 무함맏은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으로 이상스러워 보였으며 큰 눈은 더욱 크게 어리둥절해 있었다. 하디자 날 좀 덮어 주오. 하고는 온몸이 열에 들떠서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잠시후 냉정을 회복한 그는 말했다. 오늘 저녁이 었는데 히라 동굴에서 이상한 것이 내앞에 나타났소.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디다. 나는 천사 지브라엘이다. 하나님이 보내셨다. 그리고는 날더러 읽으라고 명령하였소. 나는 무학자입니다. 라고 말했더니 나를 그의 가슴에 끌어당기더니 꽉붙듭디다.그리고는 나를 떼어 놓고 재차 읽으라고 하였소.나는 똑 같은 대답을 하였소..그는 나를 다시 한번 끌어 당기면서 또 읽으라고 합디다. 나를 세번째 껴안으면서 말합디다. 읽으라 나는 말했소. 내가 무엇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천사의 목소리는 말했소. 읽으라 조물주인 주의 이름으로  . 한덩어리의 응혈에서 인간을 창조 하시도다. 읽어라. 너희의 주는 더없이 감사한 분이시니라. 주께서 펜으로 가르쳐 주시고 인간에게 미지의 것을 가르쳐 주셨음을 (쿠란 69:1-5) 그 소리는 갑자기 내 가슴 속에 살아나더니 사지가 덜덜 떨리면서 이대로 죽는 것만 같아서 겁이났소.

무함맏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하디자는 처음에는 몹시 근심스러워 무함맏의 덜덜 떠는 모습을 찬찬히 보고 있다가 침묵을 되찾고는 그를 위로 하는 것이었다.

나의 고귀한 분 염려 마시고 기뻐하십시요. 이 일은 신께서 당신을 포기하시고 욕을 보게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좋은 분이시고 친절하고 정직한 분이시니까. 당신은 지나가는 낮선 사람에게 후하고 가난한 사람과 천한 사람을 도우시고 의로운 행동을 지지하는 분이시니까요.

계시의 첫 경험은 그에게 괴상하게만 여겨질 뿐 첫 계시를 전하고 사라진 천사도 그것이 천사였는지 어떤지를 알아 차리지도 못하였다. 그는 미신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인기척 없는 적막한 사막의 동굴로 예고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린 이 방문자는 악령의 통념적인 관념과 혼합이되어 그를 경악시켰고 그런가 하면 여러가지 형상으로 변모해서 사생활을 해롭게 간섭하는 정신 상태에 사로잡히게 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여러날 동안 무함맏은 자기가 만난 영광스런 방문자를 고대하면서 동굴속에서 은거하는 사람으로 변해 버렸다. 여러날을 기다리고 있자니 천사가 다시 나타나서 오 그대 담요로 몸을 싸고 있는자여 일어서라. 그리고 뭇 생명들에게 하나님의 벌을 말해주라. 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목소리는 이번엔 무함맏의 가슴을 전처럼 괴롭히지 않았으며 자기에게 내려진 새로운 사명임을 알게 되자 마음이 가볍고 후련하게 느껴졌다. 그는 집에 돌아와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음을 부인 하디자에게 이야기 하였다.

하디자는 조금도 주저없이 그의 말이 진리임을 받아들여 무함맏의 최초의 추종자가 되었다. 이리하여 후에 이슬람으로 알려지게 된 새로운 종교가 시작된 것이다.(히라 동굴은 후에 광명의 동굴로 불리었다)

하디자 다음으로 무함맏의 친구 아부 바크르 사촌 알리 석방한 노예 자이드가 그의 말이 충실함을 서약하고 나섰다. 이 세사람은 무함맏과 오래 전부터 친한 사이였다. 이들에게 있어 무함맏의 생애와 인격은 비밀이나 애매함이 추호도 없는 펴놓은 책과 같은 것이었다. 무함맏의 친근이 그들로 하여금 무함의 정직과 독신을 믿게 하였던 것이며 무함맏의 불과 몇마디 말을 했을 뿐이었으나 그들은 조상의 종교를 포기하고 잡신과 미련 없이 결별을 고했던 것이다.

무함맏의 말은 인자하고 누구에게나 알아 들을 수 있는 것이 었으나 특히 신의 유일성과 인류 평등 사상에 있어서 당시 멕카 귀족들이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부합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그들의 우상이 무용지물로 모욕 당하고 있는 것이든가 종복과 노예를 재산으로 간주해서 치부 하고 있는 것을 지적 비난하여 만민평등이라고 선언하는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은 그냥 넘겨 버릴수 없는 일이었다.부활의 관념은 격론의 회오리바람을 몰아왔고 이슬람에서 말하는 윤리의 교훈은 그들의 관습 방종한 행위 특히 음주 여자 고리대금 도박이 상습인 그들에겐 동의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어려운 점을 알게 된 무함맏은 처음에는 그의 신앙을 공공연히 설교하는 것을 삼가했다. 그 대신 무함맏은 조용한 속에서 조심 조심 설교하러 다니면서 자기의 말에 귀를 기울일 만한 사람과 받아들일 듯한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그리하여 3 년동안에 40 명의 추종자들을 얻었는데 이들을 최초의 중요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러자 어느날 계시가 내려졌다. 명령을 받은 것은 무엇이든 널리 선언하라. 진리와 허위를 구별하도록 하라. 욕하고 거절 하는 자들에게 마음을 쓰지 말라. 믿는 자들에게 인자하게 대하여 모든 사람에게 선언하라. 진실로 나 무함맏은 보복을 마련하는 자들을 경고해 주고자 이 세상에 보내어졌느니라.

그리하여 무함맏은 사파 언덕에 올라가 멕카 사람들에게 외쳤다. 꽤 많은 군중이 모이자 그는 우선 자기의 정직과 옳은 신앙을 맹세했다.그리고 그들의 가짜 신을 버리고 참다운 유일신 외엔 숭배하지 말 것과 난혼 음탕을 금할 것과 깨끗하고 덕있는 생활을 할 것과 서로 친절히 대할 것과 모든 미신과 잡신의 의식을 버릴 것을 간청하였다.

멕카 사람들은 무함맏의 말을 듣고 있자니 분노가 치솟았다. 그들의 우상과 잡신을 모욕하는 것을 듣고 고함을 쳤다. 특히 숙부 아부 라합의 말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쿠레이쉬 족은 무함맏의 말을 그리 대수럽게 여기지 않았다. 일시적으로 머리가 돈 자가 바람결에 지나가는 소리를 지껄인다고 웃어 넘겨 버렸다

 

 

 

무함맏의 포교와 멕카의 반응

무함맏은 이제 40 대가 되었다.
어린 시절을 빼놓고 그는 진리에서 어긋나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길을 모색하기 위한 정신적 고뇌에 여생의 전부를 보냈다. 그 진리는 드디어 그에게로 왔으니 계시로서 길이 트인 것이다.. 그리하여 무함맏은 신종교를 위한 끊임없는 희생과 헌신을 위하여 여생을 바쳤다.

이무렵 멕카에서 해마다 성시와 축제가 벌어졌으며 모든 아랍 부족들이 모여드는 기회였다. 축제 동안 모든 문물이 집산 하였고 전쟁놀이 말타기 검술대회 씨름 백일장 등이 대성황을 이루웠다.

점잖은 연설가 이름없는 음유 시인들이 광란의 청중들에게 무용담 유혈 전쟁담 여인 술 노래의 방탕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축제분위기를 부채질했다. 이 축제는 다시 없는 음주난동 가무음곡의 광란의 기회였다. 난폭한 음주와 축제가 끝나면 각 아랍 부족들은 카아바의 잡신과 우상 주위를 축제 기분으로 돌았다.

무함맏은 계시를 받기 전에는 이러한 축제에서 몸을 피하고 근신하였으나 이제 새로운 교리를 선언하는 계시를 받은 그는 이 축제 대회로 가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설교했다. 군중들은 무함맏을 비웃고 조롱했다.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참을성 있게 견디며 화내지 않고 다소라도 반응이 좋은 곳에서는 같은 설교를 몇번이고 되풀이 했다.같은 아랍 부족들이 집합하는 멕카 순례의 연례행사에서도 같은 설교를 했다.무함맏의 숙부인 아부 라합 아부 자할 쿠레이쉬 족의 추장들은 그의 고집에 약간 지치기 시작하였다.개구장이 아이들을 선동해서 무함맏의 뒤를 따라 다니며 조롱하고 괴롭히고 소리를 지르게 하고 소음을 내어서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였다. 숙부 아부 라합은 돌아다니며 이렇게 말했다.불쌍한 내 조카가 머리가 좀 돌았으니 미친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요.숙부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이렇게 수근거렸다.제가 하나님의 예언자라고 하면서 쏘다니는 그 자는 정말 미친 사람이 틀림없네.친 숙부까지 미친 사람이라고 하니 말일세.

멕카 귀족들과 지지자들의 조롱 멸시 중상에도 불구하고 무함맏의 전도는 날로 번성하여 추종자들은 점점 늘어났다.숙부 아부 라합과 친구들의 격노는 점점 높아져서 이제까지는 모욕적인 언사로 조롱 멸시하던 것이 그 정도를 넘어 가해를 자행하기에 이르렀다. 무함맏의 머리에 흙과 돌을 던지는 하면 맨발 밑에 가시덤불을 깔기도 하고 쓰레기와 똥을 퍼부었다. 한번은 그의 목에 보자기를 걸어 비틀어댐으로써 무함맏은 하마터면 숨이 끊어질 뻔한 일도 있었다. 이때 마침 친구 아부 바크르가 지나가다가 이 광경을 보고 제지하면서. 도대체 이 착한 사람이 무슨 죄를 졌기에 죽이려 하는가? 그에게 죄가 있다면 유일신을 숭배하고 잡신과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주장했을 뿐이다.

이 말이 떨어지자 군중들은 무함맏을 내버려 두고 아부 바크르를 덮어씌어 넘어뜨려서 마구 때려 의식을 잃게 하였다.

이제까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멕카의 귀족이며 덕망이 많은 사람으로 추앙 받아오던 무함맏은 가장 불쾌한 별명과 비난의 대상으로 일변하였다. 멕카인들은 무함맏을 가르켜 마슬사 거짓말장이 사기꾼이라 부르면서 갖은 압력을 가해왔다. 추종자가 늘어 남에 따라 박해도 더해 갔다. 추종자들을 대낮의 초열속으로 끌어내어 불처럼 타는 사막에 눕혀 놓고 가슴을 무거운 돌로 짓눌러 놓거나 엎드려 놓고 등에 무거운 돌을 짊어지워 하루 종일 기어다니게 했다.

온 몸을 갓 잡은 짐승 껍데기 속에 넣어 꿰메어 가지고 햇빛 속에 내놔 두었다. 그런가 하면 또 여러 사람을 쇠사슬이나 밧줄로 목이나 발목을 한데 묶어 가지고 끌고 다녔다. 무함맏의 추종자들은 가장 포악 무도한 박해의 대상이 되었으나 끝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자 쿠레이쉬 족은 무함맏의 운동이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사태이거나 보잘것 없는 변동 따위기 아니라 가공할 혁명의 시초임을 알게 되었다.

이 운동은 선언하기를 신은 오직 하나이고 지존지대하며 모든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유일한 판사이자 조정자라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수락한다면 그것은 즉 다름아닌 우리의 조상 전래의 특권인 부족 전용의 잡신 승려 의식 우리의 재산 그리고 이런 것이 우리에게 특혜를 주는 영향력 구사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 운동은 선언하기를 모든 인류는 평등하고 또한 모든 인류는 형제라고 한다.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수락한다면 그것은 즉 부족 일가의 가문과 혈통의 종언인 것이며 또한 아랍 기질의 상표인 아랍 부족의 긍지의 끝장이라고들 생각했다 이 운동은 또한 육욕의 탐닉도 안되고 방탕한 향락이며 가무 음곡과 술타령도 안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다름이 아닌 인생을 화려하게 하고 인생을 살맛나게 하는 모든것을 끝장내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무함맏이 증오하는 이와 같은 쾌락이 없다면 인생은 무슨 살맛이 있겠는가? 이런 쾌락이 없다면 인생은 무미건조하고 살풍경일 것이리라.

우리의 잡신의 상실 부족 관계의 종말 우리의 재산과 쾌락의 소멸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그들은 생각했다. 이것을 등한히 하기에는 위험은 너무나도 큰 것이었다.따라서 그들은 급기야 무함맏의 운동을 분쇄하고 저지할 것을 결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살해 계획은 난관에 부딪쳤으니 아랍족의 불문율에 의하면 한 사람의 부족의 생명은 부족 전체에게 신성한 것이었으므로 같은 부족의 손으로 동족의 피를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아직도 그들의 토속 종교를 주관하고 있고 부족 사회의 존경을 받고 있는 아부 딸립에게 무함맏의 운동을 제제해 줄 것을 호소하기로 결정하고 대표단이 아부 딸립을 찾아왔다. 대표단의 의사를 정중히 듣고 난 아부 딸립은 그 취지를 그의 조카인 무함맏에게 대표단의 의사를 부드럽고 애정어린 말로 전했다.그러나 신이 보낸 사람  무함맏은 한마디의 대꾸도 없이 자신의 일을 멈추지 않았으며 그의 설교는 여전히 열광적이고 고집불통이었다.

멕카의 추장들은 다시 회합을 갖고 아부 딸립에게 대표단을 다시 한번 보냈다. 우리들의 인내는 한계에 도달했소. 라고 그들은 말했다. 당신 조카는 우리의 조상을 욕하고 잡신을 모독하고 사람들을 선동해서 우리에게 반기를 들게 하고 있소. 우리는 참을 만큼 참아왔소. 당신이 조카를 제지시키든가 아니면 어는 한쪽이 죽어야만 할 것을 결의했소.

아부 딸립은 이 위협에 대하여 몹시 근심하였다. 쿠레이쉬 족은 일단 말을 내면 그들의 말대로 행동하였다. 무엇이고 결정만 하면 하고야 마는 그들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카에게 슬픈 목소리로 애걸해서 말했다. 오 너의 사랑하는 숙부의 간청이니라. 내게 견디기 힘든 짐을 지워주지 말아 다오.

무함맏은 즉각적으로 알아 차렸다. 숙부는 더 이상 자기에게 힘을 써 주고나 보호해 줄 수 없으며 책임을 면하고 싶어함을 알 수 있었다. 무함맏은 부드럽게 그리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오 나의 숙부님 그  사람들이 내 오른손에 태양을 갖다주고 왼손에 달을 갖다준다 해도 나의 사명을 막지는 못 할 것입니다. 나의 사명을 신께서 완수하시던가 사명 도상에서 그들이 나를 파멸시키든가 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일어서서 나갔다.

그러자 아부 딸립은 그를 부르며 말했다. 슬퍼하지 말아라 조카야 네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대로 하여라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으리라.

이 숙부와 조카는 사랑이 깊었으므로 숙부가 조카로부터 발길을 돌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쿠레이쉬 족은 숙부의 사랑을 무함맏과 동등하게 대체시킬 수 있는 딴 젊은이 하나를 찾아 내기로 하고 멕카에서 가장 잘생겼고 앞날이 촉망되는 무그히라의 아들 암마라를 택하여 아부 딸립에게로 데리고 갔다. 우리는 잘생긴 이 청년을 당신에게 선물로 주겠소. 아부 딸립 이 청년을 당신 아들로 받으시오. 그리고 당신 조카 무함맏을 내놓으시오.라고 그들은 제안했다. 내 조카를 주리다 라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죽이시구려. 그 대신 당신들의 친척을 내게 갖다주고 날더러 키우라 하는구려. 여러분 나의 동족들이여  대체 이 무슨 흥정이오?

이 말에 쿠레이쉬 족은 대답할 바를 모르고 당황해서 물러가 버렸다.

추종자들에게 내려지는 잔혹과 곤욕이 날로 늘어가는 것을 보는 무하맏의 가슴은 무척 아팟다.드디어 그는 아빗시니아로 이주 하도록 추종자들에게 권유했다. 남자 11 명과 여자 4 명이 대상으로 구성되어 비밀리에 아빗시니아로 길을 떠났다. 이것을 안 쿠레에쉬 족은 추적대를 급파 하였으나 대상은 벌써 멀리 사라진 뒤여서 눈에 뛰지 않았다. 격노한 쿠레이쉬 족은 아빗시니아 왕에게 선물과 함께 대표단을 파견 하였다.

아빗시니아 왕 앞에 나선 대표단은 이렇게 연설했다.

오 왕이시여 길을 잘못 들었고 난동을 부리는 자들이 선조의 종교를 배반하고 왕의 나라로 피신을 왔습니다. 그들이 왕의 종교에 입교 하였다면 그냥 두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왕의 종교에도 입교하지 안았군요. 그들은 왕께서도 우리들도 알수 없는 새 종교를 만들어 냈읍니다. 오 영특한 왕이시여 멕카의 쿠레이쉬 족이 왕께 그들을 돌려 주십사 하는 말씀을 올리라고 우리를 보내서 온 것입니다.

왕은 대표단의 말을 듣고 난후 멕카에서 온 피난민들을 불러 오게하여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고 하였다. 아부 딸립의 아들 자팔과 알리의 형제가 왕 앞에 나서서 대답했다

오 왕이시여 우리들은 무지에 빠져있는 무리로부터 빠져나온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아비와 할아비들은 우상을 섬기고 사육과 불결한 것조차 먹습니다. 도박이 심하고 죄를 저질릅니다. 연민도 모륵 사랑과 동정을 모릅니다 또한 약자와 무력자를 압박하고 박해합니다. 그들은 양심의 가책없이 남의 것을 훔치거나 사람을 죽입니다. 우리들은 수천년을 이런 속에서 살아왔는데 신은 자비롭게도 우리에게 신의 예언자를 보내셨는데 그 사람은 멕카 삶에게 믿을수 있는 사람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인물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행동이 순수하고 선량하고 귀족 출신임을 증언하고 있읍니다. 이 사람은 우리에게 유일신만 섬기도록 말해주었으며 우리는 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받아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가짜 잡신과 우상을 버리고 한분이신 하나님을 숭배할 것을 맹세한 것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정직 친절 애정 정의를 가르쳐 주었으며 우리들은 그의 가르침에 복종 하였읍니다. 그는 우리에게 말해 주기를 이유없이 살상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남을 때리지말고 모욕하지 말라.고 하였으므로 우리들은 그의 말대로 하였읍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허위 속임수 사기 이중거래는 죄라고 하였으므로 우리들은 이런 죄를 멀리 했으며 결백한 여인을 중상 모략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말했으므로 우리들은 우리의 입을 봉했읍니다. 훔치지 말라.고아의 재산을 약탈하지 말라고 했으므로 우리들은 이런 부정 소득을 포기했으며 의롭고 신을 두려워 하고 신의 명령에 복종하라고 했으므로 우리들은 그의 말에 복종할 것을 맹세했던 것입니다.

자팔은 잠시 쉬었다가 다시 계속해서 말했다.

오 왕이시여 우리들은 이 예언자에게 충성을 맹세하였읍니다.그의 말을 믿기에 그 명령대로 해왔으며 그러자 우리들의 생은 완전히 기적적으로 변화 하였읍니다.모든 악덕과 죄를 회계하고 의롭고 경건한 생활을 시작했읍니다.그랬더니 우리 고향 사람들은 화를내며 갖은 무서운 방법으로 우리들을 박해하고 고문했읍니다. 우리들이 올바른 길을 택하고 그들과 함께 무지 속에서 살기를 거부했다 해서 우리들을 못살게 굴었읍니다. 이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신앙을 포기하고 다시 한번 우상 숭배로 돌아오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 찾아 낸 선, 순수, 진, 정직을 버리고 다시 한번 예전의 죄많은 길로 돌아올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거부했읍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신앙을 포가할 것을 거부했고 우리들의 적은 박해를 포기할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적의 잔혹성이 도를 넘어 우리들의 생명이 위태로워지자 정든 땅을 버리고 이민 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을 후히 대해줄 땅을 찾아 다녔고 피난처를 줄 인정 많고 의로운 왕을 찾아다니다가 우리들은 당신을 택한 것입니다. 이리하여 당신의 왕국을 찾아 왔으니 우리들을 무자비한 압박에서 구해 주시어 정의를 베푸소서.

학교라고는 다닌 일도 없고 책을 읽은 일도 없는 무학자인 그가 황제 앞에 나서서 점잖고 감동적인 연설을 함으로 왕은 크게 감동 되었다. 왕은 멕카의 대표단에게 말했다.

나는 이왕국을 차지하고자 신에게 뇌물을 바친적이 없고 인간에게 불의를 가하고자 뇌물을 받을 생각이 없노라. 피신처를 찾아 내 땅으로 온 이들을 그대들에게 인도하지 않으리라.

물론 멕카의 대표단은 빈 손으로 돌아갔고 쿠레이쉬 족은 분에 못이겨 이를 갈았던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무슬림들은 다음 해에 백세대가 넘는 무슬림들이 아빗시니아로 정착하러 떠났다. 무함의 포교 6 년째 되는 해의 일이다.

이 해에 쿠레이쉬족의 유력한 족장인 함자와 우마르가 이슬람에 입교 하였는데 무슬림들은 이에 용기 백백하여 합동 예배를 드렸다.

멕카인들은 최고위층을 회동해서 무함맏에게 찾아왔다. 무함맏 너에게 할 얘기가 있다.모든 신을 걸고 하는 말이니 들으라. 아랍인 치고 동족에게 고통의 씨를 뿌린것은 너 말고 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네가 불화의 씨를 뿌려 놓았고 단결을 깨뜨렸으며 모든 사람에게 슬픔을 안겨 주었다. 재물이나 보화가 탐이나서 한 일이라면 말하라. 너를 이 나라에서 제일 가는 부자로 만들어 주리라. 권력이 필요하다면 말하라. 너를 우리의 통치자로 만들겠다.

혹은 너의 가슴을 사로잡는 여인이 있다면 그 이름을 대어 보라.그녀를 너의 것으로 주겠다. 너에게 나타났다는 그것이 악령이 었다면 우리에게 말하라. 이 나라에서 제일가는 마술사들을 모아 네 병을 고치고 그 악마를 쫒아 내 주겠다. 그러나 무함맏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나는 재물도 보화도 원치 않는다. 왕이 될 생각도 없다. 내 심금을 울린 여인도 없다. 나는 병자가 아니며 마귀에 걸린 것도 아니다. 나는 보잘것 없는 하나님의 종복일 뿐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경전을 제시하여 네가 하나님을 거역하면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 것이며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축복이 온다는 것을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땅위의 어떻한 힘도 나의 포교를 막지는 못하리라.네가 나의 말을 귀담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린다면 네게는 이세상과 저 세상에서 좋은 상을 받게 되리라. 네가 나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나는 참고 기다리겠다. 언젠가는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분쟁을 해결 할 것이다.

쿠리이쉬 족의 족장들은 이제 정말로 절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은 적을 굴복시킬 만한 계략을 이것 저것 다해 보았으나 하나도 적중하는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공동 선언문을 카아바에 붙였다.

지금으로부터 멕카인은 누구를 막론하고 무함맏과 그의 가족이나 추종자들과 어떠한 거래도 하지 말라는 합의문을 써 붙였다. 그들에게 식량도 팔지 못하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도 아니된다. 이 금지는 무함맏의 무리들에게 벌의 대가이며 무함맏을 우리측에 인도할 때가지 존속된다.

이 사화적 보이콧은 너무도 가혹한 것이어서 무함맏과 그의 추종자들은 멕카시를 등지고 은신처를 찾아 사힙 아비 달립 이라고 불리는 계곡을 찾아갔다. 무슬림에게는 혹독한 곤욕의 시기였다.

여러날 동안 굶을 때도 있었고 음료수는 동이 났고 식량이 떨어진 상황 아래서 어린아이와 병자와 허약자들이 고통스런 최후의 숨을 거두기도 하였다. 무슬림 천막촌에서는 신음 소리와 울음소리가 소용돌이 쳤으나 배신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 속에서도 순례의 시기가 되자 무함맏은 멕카 행을 감행하여 군중을 헤치고 들어가 전과 다름없이 설교를 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3 년간 계속 되었으며 쿠레이쉬 족 가운데는 마음을 누그려 무슬림들을 제집으로 돌아가게 하자고 설득하는 동정파도 있었다.

쿠레이쉬 지도층과 무함맏의 추종자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멕카의 투쟁은 현상 유지를 바라는 특권층과 진보적인 인도주의의 혁명적 주장자 사이의 유서깊은 싸움이었다. 다라서 반복되는 반대에 부딪쳐 가면서도 쿠레이쉬 족 지도층들은 저항해 온 것이다.

힘과 유혹으로 굴복시키려던 수단 방법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들은 이제 외교 수단과 화해를 해 보자고 시도했다.

그들은 임종이 머지 않은 무함맏의 숙부 아부 딸립을 찾아와서 말했다. 당신이 눈을 감기전에 당신 조카를 설득해서 단 한가지만 맹세해 달라고 해 주시요. 우리들의 신앙을 간섭 말라는 것이요. 그 대신 우리들은 그의 하는 일을 간섭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리다.

아부 딸립은 조카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 안을 제시 하였다. 무함맏은 이에 대하여 그들이 수락하겠다는 거을 다 동의 하겠읍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읍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 말이 끝나자 아부 자흘이 큰 소리로 그렇소 그렇소 우리가 한 말에 동의한다면 한 가지가 아니라 열 가지 조건이라도 수락하겠소. 이에 무함맏은 나의 조건은 간단한 것이오. 당신들의 우상 숭배를 포기하라는 것이요. 그리고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다는 것을 진심으로 받아 드리는 것이오. 이것을 받아들이면 당신은 모든 아랍인들의 주인이 될 것이며 외국 사람들이 당신들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될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쿠레이쉬 족은 두말할 것 없이 화를 내며 가버렸다.

무함맏의 포교 제10년이 되던 해였다. 이로부터 며칠 후 무함맏의 숙부가 세상을 떠났고 또 그로부터 몇 주일 후 부드럽고 독실한 동반자였던 아내 하디자가 세상을 떠났다. 무함맏은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두 사람을 잃었으므로 이 해는 슬픔의 해로 알려져 오고 있는 것이다.

멕카에서 60 마일 떨어진 곳에 따이프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무함맏은 자기가 해방 시켜준 자이드를 데리고 그곳으로 설교하러 갔다. 따이프에서는 멕카보다 더 심한 학대를 받아야 했다. 몰매 욕설 속에 피투성이가 된 말을 이끌고 무함맏은 어느 과수원 속으로 피신하는 수 밖에 없었다. 무함맏은 포도밭 그늘에 몸을 숨기고 하나님께 고했다. 오 하나님이시여 나보다 훨씬 강력한 박해에 대항할 길이 없는 보잘것 없는 나의 무능함에 비탄을 당신 앞에 갖다 놓습니다. 오 자비로우신 신이여 오직 당신만이 약자와 무력자의 보호자입니다. 당신 외에는 은신처가 없읍니다. 당신께서는 저 잔인무도한자들에게 나를 인도 하시렵니까? 주여 당신의 자비심은 광대 무변 합니다. 이세상의 어둠을 거두시는 당신의 이름으로 애원 하노니 이 몸에 자비를 내리사 당신의 노여움을 거두어 주소서. 당신의 도움 없이는 나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는 갑니다.

그는 다시 멕카로 돌아와서 선교 사업을 계속 하였으며 적의 박해와 집념도 전보다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새로운 종교의 전파는 날로 늘어나 주위를 둘러싼 위기에도 불구하고 무함맏은 해마다 모여드는 모든 부족들의 순례자를 찾아 다니며 전보다 더 우아하게 설교 하였다.

 

예언자의 전도 제11년 되는해에 야스립 (메디나 멕카 다음가는 이슬람의 제 2의 성지이기도 하다.)에서 순례자 6명이 멕카에 순례를 왔다. 무함맏은 이들을 찾아가 쿠란 귀절을 낭송 해주고 그들을 이슬람으로 초대 하였는데 그들 전원이 이슬람교에 입교하여 고향에 돌아가 친구며 친척들 야스립의 마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었다.

이로하여 다음해엔 야스립에서 온 12명의 순례자가 또 입교하였다.그들은 무함맏을 찾아와 우상 숭배를 금하고 잔인성 실언 잡신을 폐지할 것과 난혼 음탕을 금하며 올바른 생활을 할 것과 유일신을 믿을 것을 서약했다.  무함맏은 교우 한명을 뽑아 야스립으로가 선교를 하니 대성공을 거두어 그 다음해엔 순례자 72명이 입교했다.  그런데 이들은 쿠리이쉬 족이 무함맏에게 적의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무함맏에게 갔다. 오 하나님의 사도여 우리는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귀담아 듣고 당신이 명령한 것은 무엇이든 복종하려고 이곳에 왔읍니다. 영원히 당신 편을 들고자 당신이 원하는 대로 서약하겠나이다.  무함맏은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맹세 하나니 그대들에게 싸움을 걸어 오는 자에게는 나도 싸우겠고 그대들에게 평화를 지키는 자에게는 나도 평화를 지키리라 그대들을 괴롭히는 일은 나를 괴롭히는 일이요. 그대들에게 명예로운 일은 나의 명예이니라. 나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대들의 편임을 서약하노라.

이와 같은 서약을 주고 받고 야스립 사람들은 행복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히 즈 라  (메디나 이주 이슬람력 기원 서기 622 년 9 월)


무함맏의 포교 제13 년 때였다.

하루는 무함맏이 교우들에게 알리기를 메디나로 이주 하도록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모든 추종자들은당장에 집,가산.사업,과수원 등을 처분하거나포기하고 45일 간에 걸쳐 그들은 두패 세패의 무리를 이루어 메디나를 향해 떠났다. 정든 땅과 집을 두고 떠나자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겠지만 추종자들은 무함맏의 계시 말씀을 믿고 멕카를 떠나갔다.

이제 멕카에는 무슬림이 거의 이주해 갔고 예언자 자신과 친우 아부 바크르와 사촌 알리만 남았다.그리하여 쿠레이쉬 족은 최종 수단으로 무함맏을 살해 할 것을 결의했다.그들은 이런 생걱을 오래 전부터 해 왔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들은 사전 계획을 세워 무함맏의 침실을 포위하여 기침하는 순간 여럿이 함께 살해하자는 것인데 이렇게 다수의 동족들이 함께 했다는 것을 과시하여 무함맏의 가문인 바누 하심 측에서 감히 복수를 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무함맏은 거사 직전에 음모를 알게되어 멕카인들의 신탁 관리를 맡아보고 있는 재산 일체를 알리에게 넘겼다. 이상스럽게도 무함맏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으면서도 멕카인들은 무함맏에게 재산 관리를 맡겼던 것이다.

무함맏의 사촌인 알리를 자기로 알도록 위장하여 아부 바크르의 집에서 자게 하였다. 내게 여기를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무함맏은 말했다. 이말을 들은 아부 바크르는 기뻐 울면서 함께 메디나로 떠났다.

무함맏의 침소에 새벽 햇살이 비췰 무렵 쿠레이쉬 족들은 일제히 칼을 빼들고 무함맏의 침소로 발거음을 죽이며 잠입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무함맏이 아닌 알리의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당황한 그들은 추격대를 뽑아 무함맏을 추적하도록 하였다.추적자들은 사막의 구릉과 계곡을 오르내리며 큰길 작은길 모두 수색하였으나 무함맏의 모습은 보이지를 않았다. 멕카에서  멀리 떨어진 사우르라는 동굴에 두 사람은 은신하고 있었다. 그들이 3일 동안 동굴속에 숨어 있는데 어느날 수색대가 동굴 입구에 가까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초조해진 아부 바크르는 우리는 겨우 두 사람이고 저들의 수는 많습니다. 들키면 어찌 하겠습니까? 하니 무하맏은 대답했다.겁내지 말라. 우리는 둘이 아니고 셋이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

수색대가 동굴입구에 오자 거미 한 마리가 동굴 입구에 거미줄을 치는 것이 아닌가. 수색대가 동굴을 발견하고 동굴안에 들어 가려는 순간 동굴 입구에 거미줄을 발견하고는 한명이 말했다.이 안에는 무함맏이 없다. 그가 있다면 이 거미줄이 있겠는가? 그들은 동굴 수색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매일 해뜨기전 아부 바크르의 딸 아스마가 먹을 것과 물을 동굴로 날라 오고 그의 하인은 양을 몰고와서 양젓을 짜서 동굴 입구에 놓곤 하였다.3일이 지나자 추격대가 물러 가자 하인이 낙타를 가지고 왔다.

그리하여 무함맏과 아부 바크르는 메디나로 떠났다 낙타에 오르기전 무함맏은 낙타의 값을 지불하였다.

그러나 멕카의 족장들은 무함맏의 생포를 단념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무함맏의 생포나 살해에 낙타 백 두의 현상금을 걸었다. 그당시의 아랍인에게 낙타 백 두는 큰 행운을 뜻하는 것이었다. 아랍인중에서도 말을 잘 타는 수라카 라는 사나이가 현상금을 타고자 추격에 나섰다.그러나 멕카 교외를 벗어나자 말이 앞으로 쓰러지며 굴러 떨어졌다. 그는 일어나서 메디나로 급히 달려갔는데 갑자기 속력을 내고 달리던 말이 부사에 (모래 늪)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그는 걸어서 멕카까지 돌아오고 말았다. 메디나시 근교 쿠바에 도착한 무함맏이 3~4 일 쉬는 동안 사촌 알리가 합류해 왔으며 이곳에서 마스지드를(사원) 세웠으니 오늘날 무슬림은 이곳에 크나큰 존경을 베풀고 있다.

이 해가 이슬람력 기원이다 (서기 622 년).

이 해를 기원으로 하는것은 예언자의 생애에 신기원이 시작 되었고 또한 무함맏의 메디나 도착은 무슬림 역사의 무적의 성공이며 간섭을 받지 않는 진보이기 때문이다. 무함맏이 쿠바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를 환영하기위한 메디나 시민들이 해뜨기전 부터 몰려들어 줄지어 기다리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그러다가 드디어 쿠바를 떠나 메디나로 무함맏이 들어 온다는 소문에 온 시민이 연도에 나와 환영 하였다.웃옷으로 해를 가린 아부 바크르를 대동하고 무함맏은 메디나에 들어왔다. 메디나의 모든 호주들은 앞으로 나서서 환대의 영광을 갖고 싶어했다.그러자 무함맏은 말했다.

내 낙타의 고삐를 놓아라. 낙타가 발을 멈추는 곳을 내가 있을 곳으로 정하리라. 낙타는 이곳 저곳 돌아다니다가 어는 공지에 주저 앉았다. 이곳이 지금 예언자의 모스크의 문 건너편이다. 이 공지는 두 고아 소년의 소유였는데 무함맏은 땅값을 지불하고 그곳에 방이 2개 붙은 모스크를 세우고 주거처로 삼았다.

  메디나에서의 무함맏


무함맏의 메디나 이주 이전의 시를 야스립이라고 하였으나 무함맏이 온 이후 메디나툴 나비 생략해서 메디나라고(예언자의 도시) 부르게 되었다.  멕카 다음인 이슬람의 제 2 의 성지이다.(제 3 의 성지는 예루살렘) 예언자의 유해는 이 메디나에 있는 예언자의 모스크 안에 안치되어 있다. 메디나에 모스크를 건립할 때 무함맏은 일반 노무자처럼 땅파기,돌캐기, 흙 개기를 했다.그것은 소박한 건물이 었다. 건물 한쪽은 집없는 사람들의 거실로 썼는데 돌로 만든 곳이라 하여 이들을 돌바닥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새로운 종교의 선교단이었다. 이들은 스승의 발치에 둘 러 앉아서 스승의 말을 듣고나서 아라비아 사막 곳곳에 전해주러 가는 것이었다. 무함맏의 모든 교우들은 소박하고 근엄한 생활을 했는데 이들 돌바닥 사람들은 일반 교우보다 월등하게 근엄한 금욕주의자들이었다. 무함맏의 다음 과업은 멕카에서 함께 이주하여 온 사람들의 거처와 생계 문제였다. 멕카에서는 유복하게 살던 그들이 었으나 이곳에 와서는 다 같은 운명이 었다. 무함맏은 우선 메디나의 무슬림들에게(안사리,조력자) 멕카에서 온 무슬림(무하지르,피난자)들을 동반자로 맞아들여 부자이건 아니건 간에 가지고 있던 재산을 나누어줄 것을 의무화했다. 이와 같은 의리는 잘 지켜져 피난자들은  메디나 사회에 흡수되었던 것이다.

당시 메디나에는 다수의 유태인이 살고 있었는데 무함맏은 피난자들과 유태인의 관계 조절을 위해 다음과 같이 협정을 맺었다.

1.모든부족 종문들은 사건과 쟁의를 자체내의 법에 의거해 처리한다.

2.메디나에 거주하는 무슬림. 유대인을 막론하고 메디나 외에의 단체와 조약이나 협정을 체결하지 못한다.

3.무함맏이 메디나의 모든 쟁의의 최종적인 조정자가 된다.

무함맏은 메디나네 온 후 이곳의 새로운 신앙의 지반을 굳혀 갔다. 박해와 압박과 조소에 차있던 멕카와는 달리 메디나 시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아 예언자 이면서 메디나 시의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지붕을 야자잎으로 덮은 소박한 모스크이지만 무함맏을 중심으로 공개적으로 집단 예배를 드릴수 있었다. 무함맏은 신의 유일성, 위대함, 무한한 은총을 설교하고 무슬림의 결속, 형제애. 과부, 고아에 대한 사랑과 동물에의 자비를 설파했다.

한편 멕카에 쿠레이쉬 족은 무함맏이 사라진후 한 동안은 마음이 흐뭇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가지 못했다.

메디나 인들이 무함맏을 이의 없는 지도자로 받아 들여 이슬람의 신앙은 날로 번창해 갔다. 이제는 이교도들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알게된 멕카인들은 다시금 복수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메디나에 있는 교활한 야심가 압둘라와 은밀히 만나서 무함맏을 제거 하기로 협정을 하였다. 압둘라는 유대인과 친구들을 소집해서 이 이야기를 하였다. 우리들의 생명과 명에를 구하기 위해 우리들은 무함맏과 등을 지자고 말했다.

이 음모는 곧 무함맏에게 전해져 무함맏은 유혈 사태를 원치 않앗으므로 압둘라와 의논하였던바 이 자는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며 음모를 부인하고 무함맏에게 충성하겠다고 거짓 맹세를 하였다. 그러나 이자는 이미 배신 하려는 생각으로 가득찬 자 이었다.

이 무렵 메디나의 아유스 부족 추장이 멕카 순례를 왔을 때의 일이다. 멕카인들은 그에게 노발 대발 욕설을 퍼 부으며 적의를 들어내어 해치려고 하였다.아뉴수 추장은 말했다. 우리 부족은 당신들의 카라반이 메디나로 통과 하도록 보호해 주었소. 우리들은 당신들의 안전을 보장 해주었는데 우리들에게 적대시하면 앞으로는 교역 대상들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아시요.

메디나의 무함맏은 시민과의 우애와 친목의 양성과 선조때부터 내려오는 부족간의 불신을 없애기 위해 하나의 형제애로 뭉치기를 원했다.

그러나 멕카의 지도층은 메디나를 침공 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멕카인들의 침공 계획은 알려졌고 무슬림들은 무함맏의 지도 아래 정당 방위를 준비하고 대기했다.

멕카인들의 침공은 대군을 준비하고 한편으로는 무법 천지의 유목민들의 모든 부족을 선동해서 메디나에 양면으로 공격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시리아 지방으로 교역의 길을 떠나는 대상들에게 악 선전을 하여 아라비아 반도는 거의 다 악선전의 독소로 물들여 소수 무슬림 사이에 난동의 악취가 온 천지에 충만하기 시작했다.

이제 히즈라 2 년이 되었다.

멕카인은 침공 작전을 끝내고 전쟁의 구실과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하나의 구실이 생겼다.

쿠레이쉬 족의 부자며 유력한 지도자인 아부 수피안은 대상을 이끌고 시리아에 가 있었는데 엄청나게 많은 값비싼 상품을 가득 싣고 돌아가야 되는데 도중에 무슬림의 간섭을 받을수 있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는 멕카인들이 그들을 보호 하기위해 무장 원정대를 파견한다는 구실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무슬림이 공격해 올 위험성은 물론 없었다 . 실제로 아부 수피안의 대상은 아무 저항을 받지 않고 메디나를 통과 하였다.

그러나 멕카인들은 대군을 파견해서 아부 수피안의 대상과 합류 시켰던 것이다. 아무런 공격이 없자 아부 수피안은 파견군의 복귀를 종용했으나 지휘관 아부 자흘은 이를 묵살하고 그길로 메디나 공격을 주장하고 나섰다. 무함맏은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멕카의 피난자와 메디나의 협조자들을  즉시 소집하여 그들의 의견을 들어 보기로 하였다.

위험이 닥쳐올 때나 무슬림 사회가 어느 중요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회의를 소집하여 여러 사람들의 조언을 구하고 특히 현자와 고명한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며 가족과도 상의를 하여 문제를 해결 하는 것이 무함맏의 습관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쿠레이쉬 족의 살육에 정당 방위를 함에 멕카에서 온 무슬림과 메디나의 무슬림들이 결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313 명의 병력에 말 두필과 몇 마리의 낙타뿐이었다. 무기는 돈이 들어야 했으므로 그들의 장비는 빈약했다. 그러나 강인한 결의로 헌신했다. 그들과 대치한 멕카군은 훌륭한 말과 많은 자원으로 장비가 강력하고 보급이 풍부한 천여명의 잘 훈련된 병사들이었다.

메디나에서 60 마일 떨어진 바드르 라는 곳에서 양군이 대치 하였다.

적과 대치하는 전쟁터에서도 예배 시간이 되면 예배를 보았다.전쟁터에서 싸움이 시작되기전에 무함맏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쪽에서 먼저 공격해서는 안된다.전투중 개인적인 증오심과 복수심을 품지 말라. 전투원이 아닌 자에게 무기를 들게하지 말라. 노인과 허약자 아녀자를 살상하지 말라. 싸움이 시작 되었다. 창검은 불을 뿜었다.

이 필살의 전투에서 맞붙은 전사들은 피차간 초면들이 아니었으니 아비가 아들과 싸우고 아들이 아비에게 대들어 싸웠다.

싸움이 절정에 이르자 무함맏은 하나님 앞에 몸을 맡기고 기도를 올렸다.

오 하나님이시여 만일 이 얼마 안되는 사람들이 패한다면 당신의 복음을 전할 사람들이 없읍니다. 사심없이 진심으로 당신을 섬길 사람이 없게 되나이다. 당신의 참 신앙은 영원히 파멸되겠으니 당신의 독신자들을 도우소서. 나의 주여 그들에게 승리가 있게 하소서.

하나님은 이 기도를 받아들여 승리는 무슬림들에게 돌아갔다. 쿠레이쉬 족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도주 하였다. 그속에는 이름있는 지도자와 무슬림의 강적인 아부 자흘도 끼어 있었다. 포로 속에는 무함맏의 숙부 압바스도 있었다.

패전 소식은 패잔병이 멕카에 돌아오기 전에 먼저 들려왔다.멕카는 온통 비통에 젖었다.집집마다 울음 소리가 가득했고 분노에 이를 갈았다. 명문과 노련한 전사들은 부족의 굴욕과 피의 복수를 하기전에는 물러서지 않을 것을 그들의 우상들에게 맹세하는 것이었다.

한편 메디나에서는 전쟁 포로들을 극진한 자비와 관용으로써 대우했다.

보상금을 지불하는 포로들은 신속히 석방했다. 그리고 가난한 자와 노인 포로들은 보상금 없이 석방하였다. 교사와 능력이 있는 포로들은 메디나의 문맹자 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의무를 부과하여 일정기간이 지나면 자유를 갖도록 허용하였다.

무함맏의 교우들은 대추 야자와 죽을 먹고 살면서도 포로들에게는 할 수 있는 데까지 좋은 음식을 주었으며 포로들에게 신앙을 강요 하거나 자유의 댓가로 무슬림이 되도록 하지는 않았다.

복수를 선언한 멕카인들은 적극적인 전쟁 준비를 하였다. 무역 상인들은 그들의 이익금에서 일정금을 내게하고 일반인은 각자 능력껏 헌금을 내어 만 1년동안 준비를 하였다.

히즈라 3년이었다.

완전 무장한 3천명의 멕카 전사들이 메디나로 쇄도해 왔다. 여자들도 전쟁에 동행하여 전사들에게 싸움을 부추기는 응원을 하였다. 멕카군은 메디나 북방 3마일 떨어진 우흐드 언덕에 진을 쳤다.메디나 주민의 목초지와 밭은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무함맏은 다시한번 교우들을 집합시켜 전쟁회의를 열었다.그의 생애를 통해 한 사람의 지도자로서 그는 자유로운 의사 표시의 민주주의 적인 방식을 존중했으며 이 전통은 후세의 무슬림에게 남게 되었다.

우흐드에 진을 친 적 3천명에 비해 메디나는 천명에 불과했다. 이 천명중에 3백명은 배신자 압둘라의 인솔 아래 있었는데 그는 얼마 진격하지 않아 도망치고 말았다.그리하여 메디나의 전사들은 7백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도 갑옷을 입은 병사는 약 2백명 뿐이었고 말을 탄자는 아주 적었다. 인원과 장비가 부족 하였으나 전투 처음부터 끝까지 이러한 약점을 메운 것은 열성과 사기와 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었다.

무함맏은 진격을 명령하여 손수 전투원을 배치했다. 우흐드 구릉으로 통하는 도로 후방의 기습에 대비해서 15명의 궁수를 배치시켜 어떤일이 있더라도 사수할 것을 명령했다.

배치를 마친 무함맏은 이 싸움은 영토나 소유물이나 유혈의 목적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방위하고 진리의 깃발을 높이 올리기위해 싸우는 것이라고 각 전투원에게 말하였다.

우흐드 전투에서도 멕카인이 먼저 공격해 왔고 방위군의 필사적인 노력에 의해 적을 대혼란으로 몰아 넣었다.

멕카인들도 이 전투에서 메디나 군 못지않게 열심히 싸웠으나 혼란이 일어나자 대부분이 도주 하였고 무슬림은 이들을 추격했다. 혼전이 게속되자 후방 도로를 수비하던 궁수들이 전리품에 욕심이 나서 혼전 속에 합류하였다. 이 싸움에서 쿠레이쉬족의 가장 괄목할 당대의 장사는 와리드의 아들 카리드였다. 그는 후방 도로가 무방비라는 것을 탐지하고 2백명을 모아서 후방으로부터 공격해 왔다. 이미 적세에 몰려버린 무슬림의 포진은 혼란속에 빠져 버려 전세의 양상이 변해 버렸다. 그러자 무함맏이 살해 되었다는 소리가 싸움터를 휩쓸었다. 이 부르짓는 소리는 무하맏의 처 아이샤의 귀에 들려왔고 부상병을 치료 하거나 전장으로 먹을 물을 나르던 여인들에게도 들려왔다.

무함맏이 살해 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무슬림들은 갑자기 사기를 잃고 말았다. 사방에서 싸움의 불을 뿜고 있는데 슬픔에 빠져 할 말을 잃은채 검에 기대여 멍하니 서 있는 병사들을 보고 외쳤다.자네들은 왜 싸우지 않는가? 예언자는 칼에 맞아 죽었다. 우리의 영도자가 죽었는데 우리의 목숨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라고 그는 대답 하는 것이었다.

위급한 상황은 겨우 회복이 되었다. 무슬림들은 다시 집결하여 공격해 나갔다. 기진 맥진한 멕카군들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퇴각하면서 무슬림 시체의 귀와 코를 난도질해서 갈라내며 분노를 배설 시켰다. 멕카군 지휘자 아부 수피안의 처는 무함맏의 숙부인 함자 시체의 배를 갈라 간을 꺼내 씹었다.

많은 용감한 남편들을 잃고 슬픔에 젖은 것은 이번엔 메디나였다. 싸움터에서 쓰러진 용사들의 비보가 속속 들어왔다.

그들의 가족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자 자기 가족 이야기는 귀전으로 흘려버리고 우리들의 예언자는 어떻게 되었소? 하고 여인들은 물어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전장터에까지 달려와 예언자의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 예언자 무함맏이 살아있는 것을 확인한 여인들은 무함맏 앞으로 달려와 하나님 감사 합니다. 당신이 살아 있는한 우리의 사사로운 슬픔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철수중이던 멕카 유목민 부대는 도중에서 승전의 유일한 증거인 포로를 끌고 가지 않음을 알았다. 동료 부족들의 사기를 회복 시켜주기 위해서는 이번 싸움에서 자기편이 이겼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일이 절대로 필요한 일인데 단 한 사람의 포로도 끌고 가지 않는다면 좀 곤란한 일이었다. 그들은 철수의 행렬을 멈추고 다시한번 급습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들의 동향을 미행하던 무슬림 수색대원이 이 소식을 알렸다. 이에 무슬림 일단이 급히 그들을 추격하였던바 멕카 군은 그렇한 계획을 포기하고 서둘러서 철수하였다.

우흐드 전투는 승부가 나지 않은 싸움이었다. 그러나 쿠레이쉬 족은 처음으로 부분적 성공을 거두었고 무슬림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따라서 쿠레이쉬 족은 이것은 무함맏의 종말이 가까와 온 시초이며 자기들이 제압해 버리게에 앞서 저절로 종말이 올 것임은 시간 문제라고 선전했다.그들은 무슬림에 대해 더욱 적극적으로 적개심을 갖도록 아랍 부족들을 선동 했다.특히 메디나 주변의 부족들을 선동하는데 성공 하였다.

이 싸움이 있은 직후 한동안 메디나 무슬림에 대한 저항은 전보다 더 널리 확대 대었다.

메디나에서는 유태인들이 무슬림과 채결한 협정에 불만을 품고 한 두번 협정을 위반해 오다가 이슬람의 적과 손을 잡고 함께 음모를 꾸몄다.

그리하여 무슬림은 다시 한번 대 내외의 위협 외부의 침공과 내부의 배신을 겪어야 했다.언제 어디서 공격이 있을지 모를 일이므로 그들은 밤 낮으로 무장을 풀지 않고 부단한 경계를 해왔다. 무함맏은 시련을 위로하며 이렇게 말했다.당분간만 인내하라 평화는 눈앞에 와 있다.

우흐드 전투가 있은지 얼마 안되어서 멕카와 인접 지역은 심한 가믐이 휩슬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무함맏은 메디나 무슬림들의 원조를 호소 하여다. 많은 액수의 기부금이 모아지자 이를 멕카로 보냈다. 이 친절한 마음의 표시는 적에게는 얼마간 감동을 주었다. 멕카인들은 원조를 받기는 받겠으나 마음을 누그려 트리고 항쟁을 풀지는 않겠다고 하였다.

히즈라 4년 바누 아밀 부족의 추장이 메디나로 찾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줄 선교단을 파견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으므로 경건하고 유식한 70명의 선교단을 그와 함게 떠나보냈다.그러나 요청은 하나의 계략에 불과했다.70명의 선교단은 도중에 매복해 있던 적에 죽임을 당하고 한 명만 살아 남았던 것이다.  이 외로운 생존자는 간신히 빠져나와 메디나로 돌아와서 이 비참한 이야기를 전했다.이 일은 무함맏에게 크게 상심을 주었다.

무함맏은 싸울 힘이라고는 없는 선교사들이 당한 무서운 위선에 대하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교화를 요청해 오는데야 이를 거절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일이 두번이나 또 있었다. 8명이 죽었고 쿠바입과 자이드 두사람은 멕카에 있는 적의 손에 넘겨 졌는데 형장에 끌려갈 때 쿠바입은 짦막한 예배를 올리고 나서 형리에게 말했다.

오늘 난 예배를 오래 올리고 싶었소. 이것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예배이니까 말이오.그러나 아주 짤막하게 하였소. 예배를 오래 드리면 목슴을 연장하기위해 그러는 것일 거라고 생각할 터이니까 말이요. 그들은 쿠바입의 형을 집행하고 난 다음 자이드의 차례가 되자 어떤가 네 목슴을살려주는 대신 너의 예언자를 죽일 생각은 없는가? 하고 말했다. 자이드는  대답했다. 나의 목슴은 나의 주인이 발을 가시에 찔린 것만큼도 값어치가 없는 것이다. 주인의 목슴은 주인에게 맡겨 두도록 하라.

히즈라 5년이 되었다. (서기 626년)

메디나 무슬림은 유태인, 사막 유목민 부족, 메디나의 배신자들로 뭉친 동맹군에 의해서 여전히 포위되고 있었다. 무슬림은 끊일줄 모르는 공격을 받는 그때마다 이를 격퇴 시키고 음모를 효과적으로 분쇄시켰다.

적개심과 배신 행위 때문에 메디나에서 추방된 유태족들은 카이바 라는곳에 진지를 치고 멕카의 쿠레이쉬 족과 동맹을 맺고 메디나에 대한 결정적인 공격을 준비했다. 멕카군은 우흐드 전투가 있은지 2년 대군을 소집하여 메디나로 진격해 왔다.

그때의 침입군은 10만에서 24만에 이르렀다고 전하는 기록이 구구하나 어쨌든 이것은 아라비아의 역사상 유래없는 대군이 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무함맏은 또 한번 교우들을 소집해서 협의를 했다. 교우의 한사람인 페르샤 사람 살만이 제안하기를 메디나 주위에 참호를 파서 둘러싸이게 하고 무슬림들 배후에도 참호를 파서 배수의 진을 치자고 하였다. 무함맏은 메디나 시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참호를 팠다. 이 전쟁을 참호의 전쟁이 라고 한다.

침입군은 메디나를 공격했으나 참호의 포위망을 뚫지 못했다. 무슬림들은 아녀자들을 안전한 장소로 피신 시킨후 다음 요새지에 인원 배치를 하였다. 이 포위와 참호의 전쟁은 1개월 이상이나 계속되었다.

식량은 떨어지고 보급은 바닥이 났다. 배고픔의 고통을 참기 어려울 때에는 포위망 안의 병사들은 배에 돌을 칭칭 동여 매었다. 적병들은 효율적으로 분산해서 메디나를 포위한 참호를 따라 배치해있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멕카군도 식량 보급이 바닥이 나가고 유목민 부대 안에는 불평 불만이 일고 있었다.

하룻밤 바람이 일기 시작 하더니 폭풍이 일어나 막사를 뒤집어 엎고 장비와 보급품이 날아가고 군마는 공포에 아우성 치고 무엇보다도 어둠과 전에 없는 추위가 공포와 혼란을 몰고와서 날이 새었을 때에는 침입군은 포위를 풀고 물러가 버렸다.

메디나의 유태인 추방에는 세밀한 계책이 필요했다.

유태인은 강인하고 우수한 민족이었다. 유태인은 대부분 상인 고리대금업자 현자 식자이며 토착 메디나인 들보다 세상일에 경험이 많은 민족이 었다.메디나인들은 대부분 유태인들에게 빛을 지고 있었다.

유태인들은 그들의 재산과 학식을 자랑했다.그들은 가난한 동료 시민을 모욕적으로 손에 넣고 자기들이 메디나의 지도층이라고 자처했다.

그러한 유태인이 신생 무슬림사회의 도전을 받게 되자 그들은 분노하게 되었다. 무슬림 여인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거나 노상에서 희롱을 하며 창피를 주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드디어 무함맏을 살해하려고 음모를 하였고 더 나아가 무슬림에 대한 공개적인 적대 행위를 하고 싸움을 걸어왔던 것이다.

유태인과의 공존이 불가능해지자 무슬림들은 그들에게 싸움 아니면 이주의 양자 택일을 하였던바 그들은 시리아의 변방인 카이발로 이주해 갔다.

그들이 메디나를 떠날 때 모든 재산의 반출을 허락 하였는데 이렇한 관용은 그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리하여 메디나는 하룻밤 사이에 거의 모든 재산과 생활 필수품을 유태인들이 다 가져가 버려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만 5년동안 얼마 안되는 무슬림들은 실질적으로 적들의 포위속에 살아왔다. 그들이 이 곤경을 극복한 것은 신앙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참호의 싸움을 마지막으로 메디나의 침공은 다시 없었다.

 

히즈라 6 년.

멕카 순례의 계절에 무함맏은 1400 명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성지를 향해 길을 떠났다. 순례대는 비무장의 순례복 차림에 희생제에 쓰일 양과 낙타떼만 끌고 갔다. 순례대가 가까이오자 멕카인들이 강제로 길을 막을줄도 모른다는 징조가 보이므로 무함맏은 후데비아 라는 곳에서 추종자들을 멈추게하고 우물을 가운데 두고 야영에 들어 갔다.여기서 무함맏은 쿠레이쉬 족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우리는 평화로운 종교의 사명에서 이곳에 왔다.우리는 유혈도 싸움도 원치 않으며 쿠레이쉬 족이 어는 한정된 기간 동안 휴전에 동의해 주면 좋겠다.

한편 쿠레이쉬 족 속에서도 무슬림 야영지에 정찰대를 보내서 동태를 살펴보게 하였다. 정찰에서 돌아온 보고는 이렇하였다.나는 시저의 궁전에도 가본 일이 있고 코스로스 앞에도 나가 본 일이 있으나 무함맏 만큼 헌신적인 추종자들을 이끌고 있는 것은 보지 못했읍니다.

쿠레이쉬 족에게 보낸 전령은 돌아오지 못했다. 다음 사람을 다시 보냈으나 그 역시 살해되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쿠레이쉬 족은 무장한 한 무리를 무슬림 야영지에 보내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무슬림에게 잡혔다. 무슬림은 싸울 의도가 아니었으므로 포로들을 무장 해제 시키고 전원 석방 하였다.

무함맏은 최종적으로 가장 신임하는 교우의 한 사람인 우스만을 보내어 쿠레이쉬 족과 타협을 갖도록 했다.

그는 붙잡히는 몸이 되었고 무슬림의 분노를 부채질할 목적으로 쿠레이쉬 족은 우스만이 살해되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것은 분명한 싸움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슬림은 비무장이 었으므로 싸움은 곧 무슬림들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무함맏은 전원 소집하여 리드완 이라는 오아시스 근처로 전진해 갔다. 여기서 그는 모두에게 신이 지고한 희생을 요구 한다면 이의없이 목슴을 바치겠다는 맹세를 하도록 하였다. 한사람 한사람씩 나와서 무함맏의 손을 만지고 이것이 신의 뜻이라면 기꺼히 죽을 것을 맹세하였다. 이 맹세는 이슬람사에 리드완의 맹세로 유명하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멕카인 들은 은근히 겁이났다.

애초에는 이슬람 순례대를 직접 공격할 생각이었으나 그렇게 하지않고 전령을 보내어 무함맏과 협상을 하자고 청해 왔다. 쿠레이쉬 족이 제시한 요구 조건은 다음 네 가지였다.

첫째.무슬림은 순례를 포기하고 메디나로 돌아갈 것.
둘째.순례는 다음 해에 허용하되 멕카에 3일 이상 체류하지 못한다.
세째.멕카 거주자를 메디나로 데려가지 못하며 순례 대원중에 멕카에 집이 있는 자는 거주지를 바꾸지 말것.
네째.메디나로간 멕카인들은 이들을 멕카로 돌려 보내야 하며 멕카에 온 무슬림은 메디나로 돌아가지 말것.

멕카인은 될수록 가혹하고 자극적인 조건을 내세웠으나 무함맏은 노하지 않았다. 항상 평화를 원하고 유혈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모든 곤욕과 모욕을 내포한 이 조건을 수락했다.

무슬림을 대표해서 알리가 조약문을 작성하고 끝에 신의 사도 무함맏이라고 섰다.쿠레이쉬 족은 즉석에서 이를 거절하며 말했다.우리는 무함맏을 하나님의 사도로 수락하지 않는다.우리는 그의 이름으로 된 호칭을 수락하지 못하겠다.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이 문구는 내 손으로 삭제할 수 없다. 고 알리가 말하자 무함맏은 펜을 들어 하나님의 사도라는 문구를 지우고 알리에게 그 대신 압둘라의 아들 무함맏으로 삽입하도록 말했다.

이 조약은 후데비아 조약으로 알려져 있다.

조약문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전에 쿠레이쉬 족의 전령인 수헤일의 아들이 예언자 앞으로 나왔다. 그의 이름은 아부 준달로 전에 멕카에서 이슬람에 입교한 무슬림이었는데. 멕카인들은 그를 쇠사슬에 묶어 두고 고문을 했었다. 온 몸에 고문 자국이 남이 있었다. 무함맏이 멕카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간신히 탈출해서 무함맏에게 몸을 맡기고 메디나로 데려가 달라고 했다.이 교도인 그의 아버지 수헤일은 조약문에 의해서 그를 멕카인에게 인도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가련한 몸을 보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을 생각한 교우들과 무함맏의 추종자들은 마음이 괴로웠다. 모두들 그를 죽음으로 되돌려 보낼 수 없다고 말했다. 무함맏은 말했다.

비록 이교도의 불성실한 모사와 맺은 맹세라도 맹세한 말은 지켜야 한다.

그는 체결된 조약은 결과적으로 이 쪽에도 유리한 때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즈음 멕카에는 신종교에 접근해 오는 경향이 많았으나 터놓고 선언하지를 못햇다. 무언의 곤욕과 조약에 매여 멕카를 빠져나가 메디나로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렇한 속에서도 우트바라는 사람은 신앙을 선언하고 나섰다. 무자비한 고문을 받고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되자 그는 메디나로 도망쳤다. 그 직후 멕카에서 2 명의 전권 공사가 와서 그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 무함맏은 저들과 함게 돌아가야 겠다고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우트바는 슬픔에 몸을 떨며 목멘 소리로 말했다.

나더러 하나님을 외면하고 무신론자 쪽으로 돌아가라고 하십니까? 무함맏은 대답하길 나는 한 말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아마 하나님께서 길을 터 주시리라.고 했다.

우트바는 복종을 다짐하고 자기를 잡으로 온 두 사람과 말을 타고 돌아갔다.세 사람이 메디나의 경계선을 넘자 (여기서부터는 조약에 저촉되지 않는다.)우트바는 그들을 덮어 누르고 한 명을 찔러 죽이자 한명은 겁에 질려 도망쳤다. 우트바는 해안 지방으로 도망쳤는데 이곳은 무인 지대이며 멕카인 메디나인 어느쪽에도 조약에 저촉 되지 않았다. 이곳은 압박 받고 있는 멕카의 무슬림들에게 새로운 대로를 개척 하였으며 그들은 한명 두명 짝을지어 해안 지방에 새로운 무슬림 영토가 만들게 되었다. 이 땅은 시리아 지방으로 가는 대상로였으므로 이는 멕카 쿠레이쉬 족에게는 눈에 가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대상의 안전에 위협을 가하는 적이 대상 통로에 있느니 차라리 멀리 메디나에 있기를 바랐다. 따라서 조약 문서에 이 특별 조항을 철페했던 것이다.

히즈라 7 년

무함맏이 후데비아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되서의 일이다. 카이발의 유태인들이 패전의 복수를 하려고 메디나를 다시 공격하려는 계획을 알게되자 무슬림은 선수를 쳐서 1600명의 전사로 카이발 요새지를 공격하여 20일 만에 카이발을 정복했다.

전사한 유태인 귀족의 부인이 무함맏과 그의 교우 몇 사람을 자기 집으로 식사에 초대하였다. 음식에는 독이 들어있었다.무함맏은 배신을 의심하여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으나 교우 바실은 음식을 먹고 죽고 말았다.

당시의 법에 의하면 이 배신 행위에 대해 유태인 사회 전체가 처벌 받아야 하는 것이지만 무함맏은 이를 제지하고 범죄 여인만 처벌하였다.

그러자 유태인은 자기들의 토지에서 추방하지 말 것. 가옥과 재산을 약탈하지 말것. 그 대신 복종과 세금을 내겠다고 맹세하자 이제의를 받아 드렸다.

같은해에 무함맏은 2천명의 추종자들과 후데비아의 조약을 준수하며 멕카 순례길에 나섰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은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서 먼곳까지 전하여야 할 때가 온것이다. 그리하여 무함맏은 로마의 시저, 이란왕,애급왕,아빗시니이왕,예멘의 추장들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그메세지 맨 위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글 아래에는 발신처 그리고 맨 끝에는 무함맏의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당시의 애급왕에게 보냈던 문서가 지금도 남아 있다.

무함맏의 서찰이 시이저 제국에 전달 되었을 때 마침 멕카의 추장인 아부 수피안이 궁전에 와 있었는데 시이저는 그에게 이 편지를 보낸 무함맏에 관해 물어보니 그는 말했다. 압둘라의 아들 무함맏은 귀족 출신입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날로 늘어 나며 그는 정직하고  참다운 사람이며 거짓말을 하지않고 약속을 깨뜨린 적도 없읍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유일신을 섬기고 잡신을 섬기지 말라고 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관대하라고 설교 합니다.

시이저는 이 편지와 아부 수피안의 증언에 크게 감동하여 로마 교회의 지도자들을 불러들이어 메세지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광신적인 성직자들은 시이저의 마음이 동요함을 알고 새로운 신앙을 가혹하게 반대하였다.

그들이 당황한 것은 이 새로운 신앙은 단순하고 민주적이긴 하지만 자신들의 권한 재산 영향력을 위협 당할까  적극적으로 반대 하였든 것이다.

아빗시니아 왕은 온순하고 신을 두려워 하는 인물이었다.그는 편지를 받고 곧 무슬림 대열에 합류하였다.

페르시아 황제 퍼테즈는 편지를 받고 격노하여 예멘의 태수에게 명하여 서한의 발송인을 잡아서 끌고 오라고 명했다. 예멘의 태수는 두 사람을  무함맏에게 데리고 왔다. 무함맏은 말했다.너희들을 이곳으로 보낸 퍼테즈는 이미 죽고 없다. 이들은 크게 당황하여 에멘에 돌아와 보니 과연 퍼테즈는 그의 아들 손에죽고 없었다. 그 후 예멘의 태수는 이슬람에 입교하였고 그 후 몆해 안가서 페르시아 제국은 무슬림 군에 의해서 소탕 되었다.

잔인성으로 악명을 떨치던 아랍추장 쉐지일에게도 편지가 보내졌으나 그는 무슬림 대표를 체포해서 죽였다.당시의 관례상 이것은 공공연한 선전이었다.무함맏은 3천의 군사를 파견 하였다. 이 3천명 가운데는 쿠레이쉬 부복의 명문과 멕카 메디나의이름 높은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무함맏은 그들의 사령관을 추장이나 귀족으로 세우지 않고 자기가 노예의 신분에서 석방한 자이드를 사령관으로 내세웠는데 이는 무슬림 사회에서는오로지 공덕과 선만이 존중되며 재산이나 가문을 보지 않음을 구현하기 위해서였다.

쉐지일은 이 쪽보다 많은 대군을 보내왔고 마우타 라는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무함맏이 석방하여준 자이드,에언자의 사촌 자팔, 압둘라 이븐 라와하등 여러 사움에서 용사인 이름 높은 교우들이 이 싸움에서 쓰러졌다. 그러자 이젠 무슬림이된 카리드 이븐 와리드가 사령관이 되어 분산된 병사들을 재집합시켜 적을 패주케 하였다.

히즈라 8년의 일이었다.

후데비아 조약을 체결한지 근 2년이 되엇는데 멕카의 쿠레이쉬족 측에서 조항을 위반하여 무슬림 동맹군을 공격해서 막대한 생명과 재산의 피해를 내었다. 공격을 받은 부족은 무함에게 불평을 하였다. 무함맏은 멕카에 사신을 보내 피습자의 손해 배상을 하던가 아니면 무슬림측은 임의대로 하겠음을 요구했다.

그들은 양자 택일을하여 조약 폐기를 알려왔다.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얼마나 경솔한 행동이었는가를 깨달고 아부 수피안을 데리고 메디나로 파견하여 이를 수정하고자 했으나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무함맏의 멕카 귀환

8년간에 걸쳐 멕카는 반 무슬림 음모의 온상이었다.아라비아 반도 어느 곳이건 분쟁과 박해가 발생할 때마다 멕카의 적은 이것을 돕고 선동하고 격려했다. 무슬림은 인내에 지칠대로 지치어 급기야 이 고통의 씨를 자기들의 손으로 뽑아 버리기로 결의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대군을 이끌고 멕카 진격을 단행했던 것이다.

초기 무슬림 사회는 영역 밖을 나가는 일에는 공포에 떨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사정은 달라졌다. 무슬림의 명성과 힘은 이미 커져서 진군을 방해하거나 간섭 하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멕카 몇 마일밖에 남지 않은 곳에 다다르자 진군을 멈추고 하룻밤을 야영했다. 무함맏은 명령을 내려 분대마다 불을 밝게 비치게 하여 멕카 사람들에게 전투할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무함맏은 언제나 불필요한 유혈전을 피할 것에 마음을 써 왔드시 어쨋든 충돌은 없었다. 쿠레이쉬 족도 이에 찬동 하였다. 쿠레이쉬 족의 무서운 지도자 아부 수피안이 대표로 무함맏의 앞에 나와서 이슬람교에 입교 하였다.아부 수피안은 멕카에 돌아와서 무함맏을 대신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아부 수피안의 집으로 피신하는 자는 용서받는다. 문을 닫고 집안에 있는 자는 용서받는다.

카아바 (신전)에 들어가는 자는 용서 받는다. 무장하지 않고 자기 일터에 가는 자에겐 평화가 있다. 그들의 신앙을 바꾸도록 강요하거나 신변의 안전 보장으로 정복자의 신앙을 받아드리도록 강요하는 조건은 없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한가지 간단한 조건은 그것은 평화로운 복종이었다.

그리고 소대로 나누어 여러 방향으로 부터 추방당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가장 친근한 사람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잃은 그들이었다.그들은 지금 항복한 적에게 그들이 받아왔던 고통을 잊고 복수나 보복을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멕카의 한 구역에서 쿠레이쉬 족이 저항해 왔으나 카리드 이븐 와리드가 이끄는 병사들에게 화살의 대접을 받았을 뿐이다. 저항은 곧 평정 되었고 15명 내지 18명 만이 쓰러졌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무함맏은 상심하여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랬다. 무함맏은 선두에 서서 카아바로 돌아가 실로 오랜 시간을두고 카아바의 신성함을 더럽히는 우상과 잡신들을 손수 치워 버렸다.

카아바의 열쇠 보관은 명예로운 높은 직책이었으며 고명한 무슬림들 중에는 이것을 은근히 탐내는 사람도 있었으나 무함맏은 지금까지 열쇠를 관리하던 사람에게 되 돌려주며 계속 보관하게 하였다. 이열쇠는 영원히 네 집과 함께 있으리라. 고 그는 말했다. 그때의 가문이 지금도 그 열쇠의 보관인으로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는 무함맏은 일어서서 말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뿐이다.하나님은 배우자가 없으며 하나님에 비길 다른 것은 없다. 오늘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행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하나님의 종을 도우시어 하나님의 적을 누르고 승리를 안겨 주셨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예언자를 믿는 자로서 제 맘대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함은 불법이다. 나는 오늘로서 이교 시대의 모든 관습과 종교 의식을 폐지한다. 카아바의 잠잠 성천은 전과 다름없이 존속한다.

오 쿠레이쉬 족이여 조심할 일이다. 하나님은 너희 이교시대의 파벌 싸움과 혈통과 가문의 자랑을 파괴하셨다. 인류는 다 한 선조 아담의 후예들이다. 아담은 한줌의 흙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성도 멕카는 이제 무함맏의 의심할 바 없는 영역이 되었고 오만한 쿠레이쉬 족은 완전히 그의 자비 밑에 놓여졌다.

무함맏의 피에 갈증을 느끼던 그들이었고 무함맏과 교우들을 박해했고 잔인한 고문과 모욕을 자행하던 그들이었다. 대중앞에서 모욕하고 저주하던 그들 쿠레이쉬 족이었다. 그들은 반 무함맏의 음모자들이었고 배신하는 모반자들이었며 각 부족들을 선동하거나 딴 나라 왕들 앞에서 그를 불신하도록 하였고 가는 곳마다 추적하고 무함맏이 거처하였던 성스러운 곳은 모조리 파괴해 버린 그들이었다.

당시의 아라비아는 전쟁의 규칙으로서 자비와 관용을 모르던 때였다. 패전의 댓가는 노예가 아니면 죽음 뿐이었다. 패전할 경우 정복자에 의해 유배 투옥 또는 대중 앞에서 매질을 당하며 두목들은 예를 남기기 위해 사형에 처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함맏의 자비에 놓인 멕카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여자를 노예로 삼거나 처형을 하자 않고 그들에게 욕 한마디도 없었다. 우리의 몸을 당신께 맡깁니다 라고 무함맏의 적들이 말해오면 무함맏은 평화롭게 돌아가라. 너는 자유이니 누구도 너를 보복하지 못하리라. 무함맏은 맹세나 보복을 요구하지 않았다. 아부 자흘의 아들인 아크라마는 무슬림 2 명을 죽이고 도망쳤는데 그의 처가 대신하여 서약을 하고 용서를 받는 일도 있었다. 우흐드 전투에서 함자의 간을 씹은 아부 수피안의 처는 야만적인 살인자 였지만 그녀도 용서를 받았다. 무함맏의 딸 자이납을 잔인하게 살해한 합발이라는 자도 용서를 받았다. 멕카의 정복은 전쟁사에 관대와 관용의 선례를 만들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이것 뿐이었다.

멕카의 정복자는 승리를 축하하지 않았고 화려한 과시 따위는 없었다.

다만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배를 드렸을 뿐이다.멕카 정복 얼마후 항복하지 않은 적들이 후나인 계곡에 집결했다는 소식이 전해 왔다.

이때 무함맏은 1만 2천명의 무슬림과 2천명의 비 무슬림을 집결하여 후나인으로 진격했다. 대치한 적군은 사키이프와 하와진의 대부대였다.

무슬림보다 한발 앞서 하와진 부족은 전략적 요충 지대를 점령하고 있다가 계곡이 한 눈에 보이는 곳에 매복하여 무슬림 대열에 비 오듯 화살을 퍼부어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무슬림 중에는 도주하는 자가 많았다.

위기에 처한 무함맏은 큰 소리로 도주하는 병사들의 발거음을 멈추게했다. 나는 하나님이 보낸 예언자이다.내말을 의심하는자 없으리라. 나는 압둘 뭇딸랍의 상속인 무함맏이다.

이 소리를 들은 병사들은 다시 집결하여 용감하게 반격하여 적진은 둘로 갈라졌다. 다른 일진은 전장을 버리고 도주하였고 다른 일진은 따이프로 피신하였다. 무함맏은 따이프성을 공격하였으나 유목민의 현자의 충고를 받아들여 철수했다 한편 패주한 하와진 부족은 6명의 추장을 보내어 평화와 자비를 애원해왔다. 무함맏은 이를 수락하여 포로들을 석방해주었다.

사키이프 부족도 이에 따랐다.

어느 누구도 이슬람 종교로 귀의토록 강요하지 않았다. 포로 중에는 무함맏의 유모인 하리마가 있었는데 무함맏은 그녀를 정중히 면접하고 자리에는 무함맏이 상의를 벗어 깔아주고 않게 하였으며 많은 선물을 주어 집으로 돌려보냈다.

무슬림간에 전리품 문제에 있어 메디나 주민들보다 멕카에서 온 무슬림들이 더 많은 혜택을 주었다고 불만의 소리가  무함맏에게 들려왔다. 무함맏은 메디나 무슬림들을 소집하여 말했다. 안사리들이여 암흑 속에서 살때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신이 나를 통해서 광명으로 인도 하였음을 아는가? 안사리들은 진실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예언자의 크나큰 은혜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무함맏은 말했다. 너희들은 가난했으며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부자로 만들어주지 않았는가? 진실로 하나님과 예언자는 우리에게 친절하게 해주었읍니다. 무함맏은 말했다. 너희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거부할 때 우리들은 당신을 받아드려 피신처를 주었읍니다. 당신을 돕는 사람이 없을 때 우리는 당신을 도와 주었읍니다 라고 너희들이 이렇개 말한다면. 오 안사리 형제들이여 너희들의 말에 나의 단언을 추가하여 말하겠으니 여기에서 양자 택일을 하라.

저들 (멕카인)에게 이번 싸움에서 손에 들어온 양과 재물과 나의 여생을 너희들과 함께있을 이 무함맏 중에서 무엇을 택하겠는가?

이말을 들은 메디나 안사리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으며 또한 이리하여 무함맏은 메디나에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따이프에서 저항하던 적과도 평화를 이루게되자 무함맏은 다시 한번 멕카 순례를 하였다. 순례 의식을 다마치고 메디나로 돌아갈 즈음에 교우 한사람인 우드바를 멕카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불과 20세의 약관이었다. 생계에 걱정없이 위임받은 일에 전적으로 집중할 수 있도록 하루에 1드리츠마를 주었다. 또 그외에 마아즈라는 교우를 임명하여 교욕과 선교를 위임했다.우트바는 성지의 총독으로 멕카 지도층으로는 처음으로 순례를 한 무슬림이었다. 그의 순례에는 무슬림과 이교도가 각 각 의식을 가졌는데 서로 간섭 하거나 충돌하는 일은 없었다

이제 멕카에는 이교도들과 무슬림들이 친밀한 사회적 유대를 맺고 살아가고 있었는데 같은 구역안에 살고 있는 무슬림들의 생활과 행동을 눈여겨 보아 오는 동안 많은 감명과 영향을 받았다. 멕카 순례를 마치고 메디나로 돌아온 무함맏은 같은해에 (히즈라8년) 주마 예배에 사용하는 설교대(민바르)를 내부에 설치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에도 지켜지고 있는 전세계 이슬람교 성원 (마스짓드)의 전통이 되고 있다.

이 무렵 바레인의 통치자가 이슬람교에 입교하였다.

이 시대에 이르러 신종교의 조류는 아라비아 반도 전역에 파급하여 이제 무함맏의 말은 한낱 광야의 부르짖음이 아니었다. 먼 곳 가까운 곳 크고 작은 부족들과 인파가 자기들의 새로운 지도자를 만나기 위해 몰려들었다. 추장이며 귀족들 과부와 고아 남녀 노소의 인파가 메디나로 몰려들어 여러날을 묵으며 무함맏의 설교를 들었다 그를 처음본 사람들은 모두가 감탄했다.이 사람의 얼굴은 참다운 사람의 얼굴이지 거짓말하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다. 그를 보고 나서는 모두가 충성을 맹세하고 무함맏의 말을 가슴에 간직하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들은 보았다. 그는 아랍족의 최고 강자로서 큰 영토와 정예 부대를 갖고있으면서도 왕좌 대신 마룻 바닥에 앉아 있고 왕관 대신 누더기 옷을 입고 있는 것을 그들은 보았다.

그는 종족 민족 지위의 높고 낮음에 차별없이 동등한 예의와 친절로서 누구나 다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그의 명령이라면 언제 어디서고 최선을 다할 용기있는 귀의자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신발을 제 손으로 수선하고 옷을 손수 꿰메고 양젖을 짜고 부드러운 손으로 집안 일을 손수 하는 것이었다.

여기 유일무이한 군주가 있었으니 가구라고는 끈이 달린 상자 하나뿐이었다. 침대에는 대추야자잎을 채운 이불 하나뿐이었다.

대추와 오트밀의 빈약한 식량이 떨어지는 날이 허다했다.그의 주변에는 눈치만 살피는 궁중 신하와 대신들이 있지도 않았고 법 제정에 있어서 과시나 화려하고 장엄한 것이 없었다.

그는 최고의 영광 속에서도 검소하게 살았다. 걸인이 문앞에 찾아 왔는데 대추 한 웅쿰밖에 없을 지라도 이것을 주어 가족이 굶는 수가 많았다.

그의 인자한 인격은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발밑에 자고 있는 고양이가 애처러워 고양이가 일어날 때까지 먼저 일어나지 못하며 낙타등을 자주 쓰다듬곤 하였다.

낙타가 고통을 못 이겨 비명을 지르는소리를 듣고 유목민 주인을 엄하게 구짖기도 하였다.

그의 처소는 일인 법정이 었으며 언제나 문을 열어 놓아서 구원을 찾는 자들로 하여금 찾아오게 하였으며 법정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처리되었다.그의 가슴은 인자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퍽 사랑했다.

손자 핫산과 흑인 노예의 아이 우사마를 두 어깨에 얹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이때의 무함맏은 통치자이며 총사령관이며 최고 재판관일 뿐 아니라 예언자이고 입법자 였으나 다른 서민과 다른 점이 없었다.

그의 집은 부자 가난한자 귀족과 농사꾼 차별없이 모든이에게 개방하였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 무함맏의 교우들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과 행동을 기억했다가 기록하였는데 이는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이 복음의 원본을 기록한 것에 비하면 월등히 세밀하고 정확한 것이었다.

신종교의 실제적인 것을 관찰하려고 먼곳에서 찾아온 여러 부족과 사회의 대표단들은 이슬람의 단순성 부담감없는 종교의식을 보았으며 유일신의 신앙과 하나님의 예언자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들은 예배때의 세정은 정결과 위생의 양면의 뜻을 갖는 육체적 정결과 내적 순수성의 상징이며 예배 방향의 통일은 카아바 신전을 우상화 하는 것이 아닌 모든 신도의 초점을 설정 함으로 신도의 이념적 통일을 기하는데 목적이 있음을 알았다.

세째로 합동 예배의 횡대식 정열은 수련과 인간 평등의 상징인 것이다 이 수련과 평등 의식은 멕카 순례시 잘 나타난다. 멕카 순례에는 출신 계급이나 지위의 차별없이 동일한 순례복을 입는데 알몸에 백의의 광목 두장으로 상하를 가린다.

무스림 사회는 모든 종교에 경의를 표하고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관대하고 적대시 하지 말것을 가르친다. 그리하여 그당시 기독교 선교단이 메디나에 오자 그들을 예언자의 모스크에 머물게하고 모스크에서 기독교식 예배를 보도록 허용했다.그러나  이와 같은 관용은 이교적 미신에는 해당하지 않는것이며 따이프의 대표단이 이슬람에 귀의 후 메디나를 찾아와 요청하길 자기들의 미신적인 여인들을 위해 우상에 손대지 말라고 하였으나 이에는 양보하지 않았다.

우상은 초자연적인 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를 전적으로 파괴했던 것이다.

그들 무슬림 사회는 인간은 모든 만물의 영장이며 무함맏과 교우들에게 초인적인 힘이나 카돌릭에서 말하는 교황이 신의 대리인이라는 것은 부정하였다.따라서 무함맏은 인격이지 신격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인간의 우열은 선에서 판단되고 물질에 의해서 판단되지 않는다는 것과 겸손이 교만보다 덕이며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낫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하여 노예를 석방하여 평등하게 대우하고 모욕하지 말 것과 타락하지 않도록 할 것과 술에 빠지거나 난혼 음탕한 마음을 버리는 것이 덕이라고 배웠다.

여인을 인간으로 존중하고 물건 처럼 사고 팔지 말아야 하며 여인의 상속권 결혼권 가정과 사회에서의 지위에 대해서 배웠다.

무함맏은 이 가르침을 요약해서 이렇게 말했다. 천국은 어머니의 발밑에 있느니라

히즈라 9년이었다.
이제 신종교의 명성은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서게 되었으며 인접 왕국들은 힘차게 커 가는 새로운 움직임에 우려를 표시하기 시작 하였다.

갓산왕은 마우타의 패전으 설욕하기 위하여 로마에 사절을보내 구원병을 요청 하였다. 멕카의 승려인 아부 아밀도 같은 목적으로 시이저를 찾았다.

무슬림에 대항하는 전쟁 준비가 진행되고 있음을 안 무함맏은 모든 무슬림 부족에게 메디나로 집결하도록 하였다. 가까운 곳 먼 곳에서 많은 무슬림 병사들이 집합했다.

무함맏은 같은 이름을 가진 살마의 아들인 교우와 사촌 알리를 각 각 메디나의 총독과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자신이 군대의 선봉에 서서 진군하여 메디나 북방 약 300마일 떨어진 타북 이라는 곳에 진을 쳤다.

이 군대에 사기를 잃은 로마 병사와 갓산 병사들은 싸우지도 않고 퇴각하였다. 무슬림 군대는 타북에 20일간을 머물렀는데 많은 족장들이 찾아와 평화와 우정의 선물을 보내왔다.

싸움없이 철수하여 메디나로 돌아왔다 따이프의 대표들도 이 소식을 전해듣고 메디나로 찾아와 이슬람에 입교하였다.

새로운 종교가 아라비아 전역을 장악 하였으나 작은 저항은 계속 되었고 때때로 이교와 모반으로 복귀하는 일도 있었으나 소규모의 정벌대를 보내어 진압하곤 했다.

우메이의 아들 압둘라는 메디나 사회의 가장 흉악한 모반자였다. 그는 기회있을 때 마다 배신해왔다.그의 아들 우메이는 헌신적인 무슬림이었다.

어느날 그는 예언자를 찾아와 말했다.

나에게 나의 아비를 죽이도록 용서해 주십시요. 그이 비행에 언젠가는 다른 무슬림이 그를 죽인다면 나는 복수를 할지도 모를 일이며 그러면 내손으로 무슬림을 죽이게 됩니다. 그러나 무함맏은 아니다 너희 아비가 죽는 것을 윈치 않는다.그가 살아있어서 광명을 보고 개심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압둘라는 광명을 못보고 죽었다. 무함맏은 그의 장례 예배를 주제했고 자기의 속옷으로 그의 시체를 감싸 주었다.

한번은 유력한 부족의 부인이 도둑질을 하다 발각 되었는데 일반인과 같은 유죄를 선고하자 쿠레이쉬 족들이 화가나서 그녀의 변론에 나설만한 사람을 찾다가 무함맏의 신임을 받고있는 자이드의 아들 우사마에게 이 일을 부탁하였다. 그녀를 변론하여 우사마가 입을 열자 무함맏의 얼굴에는 노여움이 스치며 말했다.

오 우사마여 너는 신의 율법에 간섭하려 하느뇨? 그리고는 군중을 향해 말했다. 오 인간들이여 유력자의 죄는 눈 감아 주고 작은 과실을 가지고도 약자에겐 죄를 내리므로 너희들 이전 사람들은 잘못을 저질렀다. 신이 나의 증인이다 나는 설사 나의 딸 파티마가 죄를 지었다 해도 그녀의 손목을 자르라고 명령 하리라.

타북에서 무슬림들이 귀환하자 사절단이며 대표단이 끊임없이 메디나로 밀려와서 대열에 참여했다.

같은해에 무함맏은 아부바크르를 대표로 하는 백명의 교우들을 멕카 순레에 보냈으며 그때 끌고간 희생제에 쓸 낙타가 20 마리였다.

이교도의 성지 출입금지와 카아바 신전에서 이교도의 종교 의식을 금지하는 법령을 강화하기 위해서 알리도 파견되었다.

고별의 순례

히즈라 10년 이었다.
이슬람 국가에 평화와 질서가 회복되고 무함맏은 대순례단을 인솔하고 멕카 순례를 하였는데 그는 이 순례에서 메디나로 귀환 후 3개월 만에 와병으로 별세 하였다. 따라서 이순례를 고별의 순례라고 한다.

 

무함맏의 별세

히즈라 11년 이었다.
무함맏의 사명은 완수되었으며 그의 신앙은 완성을 보아 성공적이었다.
이해에 그는 병에 걸렸는데 점점 더해 가고 있었다. 무함맏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접경의 충돌에 대한 청문회를 소집하여 이야기를 들은 다음 군대의 집결을 명했다. 그는 우사마를 군사령관에 앉히고 병석에서 일어나 지휘봉을 우사마에게 맡긴 다음 군대와 결별했다. 군대는 진격하여 메디나에서 멀지 않은 자라프라는 곳에 진을 쳤다. 알리와 압바스는 뒤에 남아서 무함맏을 돌보았고 우마르와 아부 바크르가 군사령관의 허가를 받아 가끔 자라프 진지에서 그를 보러 왔다.

무함맏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어느날 차도가 있자 그는 밖에 나와서 추종자들에게 연설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나는 그대들을 위해 기도한다. 하나님이 그대들을 옳은 길로 인도한다. 그대들을 하나님께 위탁한다. 나는 그대들에게 영원한 죄와 축복이 무엇인가를 경고해 주었다. 오 인간이여 거만과 자만을 없이하라. 천국과 내세의 축복은 겸손하고 의로운 자의 것이니라. 자만이 살곳은 지옥이니라.

무함맏이 예배 인도를 아부 바크르에게 부탁하자 아부 바크르의 딸 아이샤가 애원하기를 나의 아버지에게 그 일을 시키지 마십시요. 아버지는 마음이 너무 약하십니다. 고 말했으나 무함맏은 그대로 주장하여 아부 바크르에게 위임되었던 것이다.

하루는 몸이 좀 나아져서 모스크에 들어서니 마침 아부 바크르가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무함맏의 발소리를 들은 아부 바크르는 예배 인도를 무함맏에게 맞기로 뒤로 물러 앉으려니 아부 바크를 손을 불러 옆에 앉게 하고 예배를 올렸다.아부 바크르는 무함맏을 다라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다른 사람들은 아부 바크를 따라서 예배를 보았다.(예배는 서서 보지만 병자는 앉은채로 본다는 시범을 남긴 것이다.)

무함맏의 병세가 조금 호전 되자 그는 교우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너희들에게 사절단이 왔을 땐 선물을 주어 보내라. 이교도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우사마의 군대가 사명을 달성하는 것을 보라. 안사리에게 잘 해야되며 그들의 잘못을 관대히 보아 넘기라.

임종이 가까워지자 그는 아이샤에게 말했다. 집에 있는 모든 것은 다 구호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오. 집에 있는 모든 것이라야 5드라츠마 밖에 없는데 이것을 모두 주어 버렸다.

그는 방의 커튼을 들어 올리고 모스크의 안 마당을 내다보며 합동 예배를 올리고 있는 것에 행복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아부 바크르의 아들 압둘 라만이 미스크와 (칫솔대신 사용하는 나무 뿌리. 지금도 중동국가에서는 사용한다)를 들고 들어 오는 것을 찬찬히 보고있는 것에 눈길이 간 아이샤는 미스크와를 물에 적셔서 한 쪽 끝을 이빨로 질근질근 씹어서 이 닦기에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무함맏은 그것으로 이를 닦으며 여러번 옆에 놓인 물그릇에 손을 담가서 타는 듯한 얼굴을 문질렀다. 오 하나님이시여 나의 임종에 고통의 친절을 베풀어 주소서. 라고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사랑하는 처 아이샤가 말했다. 갑자기 다리가 무거워지고 그를 지켜보니 눈동자에서 빛을 내며 마지막 말을 하셨읍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으니라.

이리하여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맏은 히즈라 11년 라비 울 아우왈달 12일 별세하였다.  그를 평안하게 해 주옵소서.

무함맏의 초상

우상 파괴에 기반을 둔 이슬람교에서는 예언자의 초상화가 있을리 없다.
여기에서 무함맏의 초상은 스텐리의 저서에서 발췌한 것이다.

무함맏은 중키에 비대하지 않으나 어깨와 가슴이 넓고 골격과 근육이 강했다. 머리가 크고 잘 발달하였다 흑발에 약간 곱슬머리가 어깨까지 내려흐르고 있었다. 노년에도 윤이나는 머리카락에 백발이 얼마 없었다. 그의 얼굴은 계란형이 었다.길고 숱이 많은 속눈섭 아래서 크고 검은 눈동자에 코가 매우 컸다 매우 소중하게 손질한 그의 치아는 고르고 하얗게 빛났다. 얼굴에 수염이 많았고 피부는 부드러웠고 안색은 붉고 힌빛이었다.손은 여인의 손결 같았고 그가 얼굴을 돌릴 때에는 전신을 돌렸다. 그이 발걸음은 매우 빨랐고 그의 용모는 미소와 생각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는 소리내어 웃기보다는 미소짓는 일이 많았다.

무함맏 연대기

출생에서 히라 동굴 시기
서기 571년
4 월 22 일               출생
1주일 후                 유모에게 보내어짐
5 년  후                 모친 아미나에 돌아옴
6 년  후                 모침 사망
8 년  후                 조부 압둘 뭇딸립 사망
12년  후                 시리아로 최초의 여행
25년  후                 하디자와 결혼
30년  후                 믿을수 있는 사람 (아민) 이름으로 불림
35년  후                 쿠레이쉬족의 조정자가 됨
37년  후                 히라 동굴에서의 명상

사도(예언자 시절)

40 세                   첫 계시
3 년  후                남녀 40 명이 이슬람교에 입교
5 년  후                무슬림의 아비시니아 이민
6 년  후                함자와 우마르의 입교
7 년  후                쿠레이쉬족의 사회적 보이코트
10년  후                숙부 아부 딸립과 아내 하디자의 사망
11년  후                6 명의 메디나인 입교
12년  후                메디나인 12 명 입교
12년  후                메디나인 72 명 입교

히즈라에서 별세의 기간

53  세                 히즈라 (메디나로의 이주)
1 년  후               메디나의 무슬림 사회 발족
2 년  후               바드르 전투
3 년  후               우흐드 전투
4 년  후               바니 아밀의 반란과 무슬림 선교단 학살
5 년  후               참호의 전투
6 년  후               후데비아의 조약
7 년  후               인접 왕국과 추장에게 입교 권유 메세지.  카이발 원정
8 년  후               마후타 원정 멕카에 가다
9 년  후               따북 원정 무슬림의 멕카 순례
10년  후               고별의 순례 최후의 순례
11년  후               와병 사망

 

편저자 하지 사브리 서정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