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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터키의 위대한 종교사상가 사이드 누르시Bediuzzaman Said Nursi

Author
kislam0
Date
2019-02-20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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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터키의 위대한 종교사상가

사이드 누르시Bediuzzaman Said Nursi, 1873-1960

지식과 실천을 동반한 무슬림 양성

 

 

 

터키는 물론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이슬람 운동을 가장 활발하게 전개하는 집단들 중 하나는 누르주 그룹이

다. 누루주는 수피 종단인 나끄쉬반디야 지도자였던 사이드 누르시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다. 그는 후일 베

디유자만(시대의 성인)으로 추앙되었다. 사이드 누르시는 1920-1930년대 이스탄불이 아닌 터키 주변부에

서 성공적인 나끄쉬반디야 종교운동을 시작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터키가 배출한 20세기 중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사상가였다. 사이드 누르시의 가르침은 '꾸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독단적이고 폐쇄적인 이슬람의 도그마가 아니라, 현실 사회에서 매우 유연

하고 합리적인 이슬람 생활을 영위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첨단과학과 서구의 앞선 제도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과 자기화를 통해 이슬람 공동체를 개혁하고, 이슬람의 정신적 가치를 극대화하자는 일종의 계몽운동

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길을 교육에서 찾았다. 고답적인 종교적 가르침에 치중한 교육이 아니라, 가장 첨

단의 매체를 활용한 과학과 기술의 습득은 서구를 앞지르는 교육의 질적 향상을 강조했다. 정신과 이상만

있는 무슬림이 아니라 정신과 실천, 지식과 전략이 함께 있는 무슬림들을 양성했다. 그의 가르침은 현재

터키최대 이슬람 조직의 정신적 지침이 되었으며,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현재 터키

는 물론 중앙아시아 터키 문화권으로 확산되고 있다.

 

 

 

생애

 

사이드 누르시는 1873년 터키 동부의 비틀리스 주에 있는 누르스 마을의 유복한 쿠르드 가문에서 태어났

다. 그는 후일 그 마을의 이름을 따서 누르시로 지칭되었다. 그는 9살부터 그의 형인 물라 압둘라와 함께

할리디파 나끄 수반디야 교육을 받은 후, 아나톨리아의 비틀리스 히잔 반 지방을 중심으로 새로운 나끄쉬

반디야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주변부에서도 이슬람의 부흥이 가능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의

미있는 계기가 되었다.

 

 

사이드 누르시의 유년기와 청년기는 매우 자유분방하고 지적인 욕구가 강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시르트,

비틀리스, 틸로 등과 같은 아나톨라아의 도시들을 순회하며 당시의 저명한 울라마(이슬람 학자)들과 거침

없는 신학적 논쟁을 벌였다. 한편 그의 번뜩이는 예지와 저돌적인 비판은 지적 교만으로 비춰져 그가 머물

던 도시에서 추방되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스스로 엄격한 금욕주의 생할을 수행하며 한 겨울에 얼음물 속

에 뛰어들기도 하였고, 며칠 동안 눈이 쌓인 아나톨리아의 언덕을 빵 몇 조각으로 연명하며 방황하는 수도

승의 생활에 젖어들기도 했다.

 

 

하지만 1890년 이후 누루시의 관심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향하였다. 그는 비틀리스에 거주하면서 이슬

란 신학과 근대과학의 공부에 동시에 몰입했다. 그는 근대화의 물질주의에 맞서 '꾸란'의 메시지를 새롭게

해석하고 적절한 대안을 마련할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근대과학은 위협적인 측면이 없진 않지만

시대의 요구에 따라 신학을 보충하고 조절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지적 성숙의 과정에서 사이드 누루

시는 나끄쉬반디야 종파의 쉐이크 무함마드 쿠프레비, 까디리파의 세이드 누르 그리고 역시 나끄쉬반디야

파 종단의 쉐이크 페힘과 같은 동부 아나톨리아의 뛰어나 수피 지도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따라서 수피 사

상이 젊은 사이드 누르시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어떤 특정 수피 쉐이크의 주장

에 얽매이지 않았고, 당시 수피 종단의 구조와 관심사가 그 시대의 상황에 부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 후 사이드 누르시는 반에서 15년간이나 머물면서 새로운 이슬람 신학의 틀을 마련했다. 이 때 그가 구

성한 계획은 이슬람 세계 최고의 대학인 이집트의 알 아즈하르 대학을 본뜬 '메드레세트웃 제흐라'를 세우

는 것이었다. 종교대학 성격의 이 마드라사의 특징 중의 하나는 아랍어, 터키어, 쿠르드어 등 세 언어가 강

조되어 모든 강의에서 사용되는 것이었다. 더욱이 근대과학은 전통적인 과목과 함께 가르칠 예정이었는데

'종교과학은 의식의 빛이고, 문명의 기술은 지성의 빛이기 때문에, 진리는 이 둘의 결합으로 더욱 명백해

진다'는 신념을 실현하고자 했다. 결국, 그가 대학을 의도했던 주된 목적은 3개의 적대적인 지적집단 간의

화해와 융합이었다. 즉, 근대 지식의 신봉자, 전통 학문 추종자 그리고 수피 종단 추종자들의 통합이었다.

 

사이드 누르시는 초기에 오스만 왕정의 민감한 정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행동을 보였다. 술탄 압

둘 하미드에 반기를 들었다가 투옥되기도 하였고, 석방된 후에는 오스만 왕정의 개혁 세력인 청년 터키당

과도 관계를 유지하면서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였다. 그는 술탄 하미드에게 전적으로 적대적이지는 않

았지만 입헌제의 오스만 헌법을 지지하는 연합 진보회를 옹호했다. 그것은 입헌주의자들의 업무와 기능

을 술탄의 독재에서 샤리아에 근거한 법의 토대에 두는 것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의 순수한 의도와

는 달리 당시 이스탄불의 정치적 풍조는 이슬람 정신의 충실한 구현보다는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원칙

과 명분도 없이 소용돌이치는 음모의 산실과도 같았다.

 

 

이러한 상황에 절망한 사이드 누르시는 다시 동부 아나톨리아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마드라사의 건립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위기에 처한 오스만 제국 말기의 상황은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았다. 제1차 세

계대전과 함께 러시아가 진격해 왔고, 이런 와증에 그는 러시아의 포로로 2년간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

을 하게 되었다. 시베리아에서 겨우 탈출한 그는 다시 1918년 유럽이 장악하고 있는 이스탄불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사상의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사이드 누르시가 이스탄불에 도착한지 약 2년 후에 그는 골든혼의 끝자락 언덕에 있는 에윱을 방문했다.

이곳은 이슬람 역사에서 뛰어난 성인이었던 아부 아이윱 알 안사리의 묘지와 모스크가 있는 곳이었다.

오스만 시대의 공동 묘지가 그러하듯이 에윱 모스크 주변은 마치 내세의 안락함과 달콤함이 이 지상으

로 스며든 것과 같은 비길 데 없이 평화로운 분위기와 평온 그리고 영원에 대한 확신이 배어나는 곳이었

다. 높은 에윱의 언덕에서 이스탄불 시내를 굽어보면서 명상과 사색에 잠기던 사이드 누르시는 이곳에

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0년대 이후 사이드 누르시는 이슬람 운동의 비정치적 성향을 분명히 했다. 특히 자신의 거점인 동부

아나톨리아에서 쿠르드족들의 반정부 투쟁이 고조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쿠르드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쿠르드족에 대한 지원을 거부함으로써 반정부적인 이미지를 벗었다. 그의 주장은 터키인과 쿠르드인들

의 이슬람을 통한 형재애의 발현이었고, 이것이 국가 통합을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라는 것이었다. 이러

한 태도는 지금도 누르주들이 동부 지역의 쿠르드 문제에 갖고 있는 기본적인 시각의 바탕이 되었다. 대

신 그는 종교적인 동원의 극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정치적 영향력의 증대를 꾀했다. 그것은 새로 탄생

한 세속주의 터키공화국 체제가 강력한 이슬람 억압정책을 강화하는 당시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매우 현

명한 정책적 선택이었다. 그러나 사이드 누르시의 종교적 영향략은 세속주의를 표방하는 중앙정부의 입

장에서 보면 매우 위험한 수준이었으며, 결국 그는 1934년 13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투옥되었다. 감옥에

서 혹은 석방된 후에도 그의 주된 할동은 이슬람 강연과 저술이었다. 논리의 과학성을 갖추면서도 대중

성을 띈 그의 저서들은 암울한 시대의 한줄기 빛이었고, 이슬람과 무슬림들의 소명을 명쾌하게 제시하였

으며, 특히 무슬림 중산층들로부터 호의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저술을 통한 그의 명성과 영향력은

아나톨리아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추종자들의 숫자가 갈수록 늘어났다. 그가 저술한 책은 700권을 넘

었다.

 

 

에윱에서의 명상과 깨달음 이후 사이드 누르시는 세속주의가 극성을 부리는 현실 정치의 위험성을 예리

하게 분석하였다. 그는 직접적인 정치적 대결과 이슬람 가치의 표면화가 가져올 위험성을 충분히 예견하

였다. 따라서 그는 직접적인 이슬람 논쟁을 회피하고 철저한 비정치적 노선을 추구하게 된다. 이제 사이

드 누르시는 터키의 현실정치에서 이슬람 공동체가 생종할 수 있고, 이슬람적 가치가 유지될 수 있는 진

정한 전략은 이슬람의 원천인 '꾸란'의 올바른 이해를 통해 대중들을 개조시키는 작업이라고 보았다. 그

는 '꾸란'의 연구와 그것의 현실적인 적용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작업이 집대성되어 있는 그의 저술

이 바로 '리살레이 누르' (빛의 서)다.

 

 

사이드 누르시는 앙카라에서 신군부 혁명 세력들을 향해 목소리 높여 주장하였다.

 

"유럽의 문화는 붕괴의 시점에 와 있다. 국가의 통합을 위해서는 이슬람 신앙으로의 통일이 필요하다. 꾸

란의 가르침을 이미 쇠퇴한 문명의 규범으로 대체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그러나 앙카라의 정치 실력자들은 사이드 누르시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견고한 세속

주의자들의 목표와 자신의 무능력을 동시에 감지하고 아나톨리아로 돌아와서 반 호수의 동굴에서 예배와

명상에 전념하였다. 그의 '리살레이 누르'집필은 계속되었고, 그 책의 내용과 영향력에 두려움을 느꼈던

세속주의자들은 감시와 연금, 투옥과 재판 등을 통해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다. 이러한 고통의 과정은 거

의 2년 간의 구금으로 이어졌으며, 1949년 9월 사이드누르시가 사면 되면서 그의 고통은 끝났다.

 

사이드 누르시가 고통을 받고 있던 동안 '라살레이 누르'는 더욱 유명해졌다. 전에는 종교적인 전통이 강

했던 아나톨리아의 작은 마을에 국한되었던 '라살레이 누르'는 이제 터키의 가장 큰 두 도시인 이스탄불

과 앙카라에서 교육 받은 이슬람 계층 사이로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특히 대학생 신봉자들의 숫자가 늘어

갔다.

 

 

 

 

신의 소명, '리살레이 누르'

 

'리살레이 누르'는 사이드 누르시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서구물질주의자와 세속주의에 물든 타락한 신세

대들을 위해 준비되었다. 그는 스스로 이 작업을 신의 소명이라고 믿었다. 그는 형이상학적이고 논리적인

복잡한 문제를 '꾸란'의 구절에 근거하여 재해석하였다. '꾸란'이 해라면 달에 비유되는 '리살레이 누르'

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적절한 '꾸란'의 해설서였다. 그의 일생을 통해 정리한 130장의 '리살레이 누

르'는 '꾸란'의 구절 순서나 어떤 체계적인 타프시르(주석)의 기준을 가지고 집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

려 사이드 누르시 자신의 삶을 통해 투영된 사실들을 신비주의의 담론 형식으로 전개해 나갔다. 여기서

'꾸란'의 가르침과 논리들은 사이드 누르시의 사상과 이러한 방식이 가장 잘 압축되어 나타난 작품은 서

른 세 가지의 말씀이었다.

 

 

사이드 누르시의 작품에는 새로운 시대의 기술적 진보와 물질적 번영을 어떻게 전통적인 이슬람의 틀과

융합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뇌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는 신앙에 바탕을 둔 과감한 혁신과 신문물의

수용을 강조하였고, 첨단 기술과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더욱 절실한 영적인 정화와 종교적 일상을 영감과

비유로서 제시해 주었다. 이것은 낡은 틀에 머물렀던 이슬람의 새로운 빛이었고 가능성이었다. 지식인들

이 몰려 들었다. 대학생, 언론인, 작가, 정부 관료, 변호사 등이 사이드 누르시의 주된 추종자 그룹을 형성

했다. 세속주의 정부의 끊임없는 감시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누르주 그룹이 세력을 확장해 갈 수 있었던

배경은 사회의 주도 계층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한 것이었다.

 

 

 

 

끊임없는 박해

 

1950년 5월14일, 터키 공화국 수립 이후 처음 다당제가 허용되면서 실시된 총선에서 20년 이상 집권했던

국부 아타튀르크의 정당인 공화당이 참패하고 아드난 멘데레스가 이끄는 민주당(DP)이 단독 집권하였다.

국민의 종교인 이슬람의 가치를 존중하겠다는 그의 정책에 따라, 그리고 멘데레스 수상의 사이드 누르시

에 대한 개인적인 존경으로 인하여 수도 앙카라에서 그의 활동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그의 이슬람 활동에

대한 민주당의 비호는 당시 야당인 공화당과의 가장 첨예한 정치 문제로 비화되었고 후일 멘데레스 수상

이 혁명 군부에 의해 처형당하는 한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인해 누루주는 지금까지 민

주당 성향의 정치 집단을 지지하고 있다.

 

 

멘데레스 집권하에서도 군부를 중심으로 한 세속주의자들은 다시 사이드 누르시의 활동을 박해하기 시작

했다. 그리하여 그는 1952년 초 이스탄불에서 또 다시 재판에 회부되었다. 혐의는 '리살레이 누르'에 있는

여성의 옷차림과 관련된 반세속적 표현 때문이었다. 이슬람식 의복이 서구의 유행하는 의복보다 여성의

아름다움과 위엄에 더욱 적합하다는 내용과 모든 단계의 교육에서 종교적인 가르침이 장려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문제가 되었다. 반세속적인 것은 곧 반국가적인 것을 의미함으로 그의 기소는 상당한 위험성을 안

고 있었다. 그는 역사에 남을 단호한 입장을 재판부에 전달했다.

 

 

"국가가 존속하기 위해서 여성들이 그들의 몸을 노출시키고, 아이들이 종교를 무시하고 자라야 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러한 국가가 보존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가?"

 

이 재판에서 사이드 누르시는 종교에 적대적인 세속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설

파하면서 재판부를 설득했다. 그는 결국 사면되었다. 그렇다고 박해가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거의 말년

까지 체포와 재판이 되풀이 되었다. 박해가 가해질수록 그의 추종자들도 그만큼 늘어갔다.

 

'꾸란'의 전통적인 해석을 근대적인 모습과 결합시키고 전통적으로 종교적인 삶을 살아오고 있는 아나톨

리아 사람들의 신앙을 격려해왔다는 것이 사이드 누르시의 업적이라면, 도데체 왜 그는 일생을 통해서 끊

임없는 박해를 당해야만 했는가? 왜 지금도 '리살레이 누르'를 소지하고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체포와 기

소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세속 터키 정무가 사이드 누르시를 집요하게 괴롭히고 적용한 죄목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쿠르드인인 사이드 누르시가 쿠르드 분리주의를 조장하여 민족국가 건설을 사주한다

는 것이었다. 둘째는 1925년 수피 종파를 해산한 이후에도 사이드 누르시가 새로운 수피종단의 건설을 꾀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셋째는 가장 그럴듯한 명분으로, '리살레이 누르가 이슬람의 독립을 추구하고 반

이슬람적인 세속주의 정부의 타도를 조장하는 이데올로기를 전파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혐의는 박해를 위한 구설에 불과했다. 첫째, 사이드 누르시는 이슬람의 통합을 저해하는

쿠르드 민족주의에 분명히 반대했다. 그는 쿠르드인의 안녕과 복지는 터키인과의 공존을 통해서만 가능

하다고 인식하였고, 1925년의 쿠르드 분리주의 반란을 일으킨 쉐이크 사이드를 설득하여 터키 군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도록 종용했다. 둘째, 사이드 누르시는 수피주의에 탐닉한 인물이 아니었다. 수피 의례인

'아인'을 행하지도 않았다. 다만 통상적인 기도인 '두아'에 몰입하고 학자로서 수피관련 서적들을 폭 넓게

탐독했다. 오히려 그는 수피의 의례나 방식이 동시대의 변화를 수용하기에 부적절하다고 보았고, 수피가

정통 샤리아의 종교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경향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명했다. 그의 수피관은 다음의 표현

에 잘 드러나 있다.

 

 

"인간은 빵 없이는 살 수 없어도, 과일 없이는 살 수 있다. 수피주의는 과일이다. 그러나 '꾸란'의 가르침

은 빵과 같다." 셋째, 사이드 누르시가 가진 세속주의 정부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은 과장되었다. 그와 터키

공화국의 관계는 결코 우호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는 정부의 부정이나 타도보다는 세속주의의 틀 속에서

고유한 이슬람적 가치의 극대화를 꾀했다. 그리고 그는 근대화의 부정적인 측면을 비판하면서도 철저히

비정치적인 태도를 견지했으며, 근대화의 부정적인 측면도 비판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사이드 누

르시의 방향은 소위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주창하는 이슬람 국가의 건설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탈종

교를 근본으로 하는 세속주의자들 입장에서는 사이드 누르시의 활동은 매우 위협적일 수 있었다.

 

한편 누르주 그룹에 대한 비판은 사이드 누르시를 향한 것이라기 보다는 다양한 그의 추종자 그룹의 잘못

된 성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터키 내 다른 이슬람 그룹의 비난의 초첨은 누르주들이 이슬람의

기본 지침서인 '꾸란'이나 하디스의 탐독에는 소홀하면서도 '리살레이 누르'에만 전적으로 매달려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사이드 누르시는 '리살레이 누르'란 '꾸란'이라는 태양을 비추는 달빛에 불과하다고 표현

했다. 이는 누르주 그룹이 안고 있는 내부적 모순의 한 단면이었다.

 

 

일부 신봉자들이 가진 결점에도 불구하고 '꾸란'에 들어있는 신앙을 강화하고 재생시키는데 '리살레이 누

르'가 기여한 점은 적어도 터키내에서는 엄청난 것이었다. 나아가 사이드 누르시와 그의 추종자들이 혹독

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이슬람에 대한 충성심을 지켜갔다는 것에 대해서도 존경을 표시해야 할 것이다. 오

늘날 터키의 이슬람이 과거의 영광과 전통을 잃지 않고 존속될 수 있었던 것은 사이드 누르시의 역할이었

으며, 이는 분명 위대한 업적이었다.

 

 

투옥과 석방을 거듭하던 사이드 누르시는 말년에 이스파르타에서 기거하다가 1960년 우르파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은 후에도 줄곧 감시를 받아야 했다. 1960년 5월 27일, 멘델레스 통치를 전복시킨 군사 구

테타 후에 세속주의 신봉자들인 케말주의자들은 사이드 누르시의 시신을 발굴해서 알려지지 않은 장소로

옮겨 다시 묻었다. 그의 무덤이 주는 상징성이 세속주의 정부에 얼마나 커다란 위협인가를 잘 알고 있었

끼 때문이다. 이 사실은 심지어 사이드 누르시의 친형제들에게도 통보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이드 누르시의 추종자들인 누르주들은 사이드 누르시 한 개인에게 헌신하기 보다는 그가 남긴

인생의 귀중한 열매인 '리살레이 누르'에 대해서 보다 더 열광적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이후 '리살

레이 누르'가 더 많이 배포되었고, 그의 사상에 대한 관심이 더욱 확대되었다는 것은 이를 반증한다. 196

4년 이후 에르주름에서 터키와 이슬람 세계의 소식과 함께 '리살레이 누르'의 내용을 선별해 싣는 주간지

'행동'이 출간되었다. 이와 비슷한 형태와 내용으로 구성된 잡지인 'Zulfikar'가 이즈미르에서, 그리고 'Be

diuzzaman'이 코냐에서 각각 발간되었다. 이 잡지들은 다시 1968년 이스탄불에서 무스타파 폴라트에 의

해 편집되어 터키 전역에 배포되었던 주간지 통합으로 대체되었다. 이 주간지는 1970년 2월에 일간지가

되었고, '예니 아시아'란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

 

 

 

 

현재의 누르주 그룹

 

여기서 우리는 '라살레이 누르'의 배포와 확산에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어떠한 뚜렷한 조직체나 체계적 활동을 주도한 뛰어난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물론 '리살레

이 누르" 정신을 주간지 형태로 출간했던 유명한 편집인 무스타파 폴라트나 사이드 누르시의 법정 변호를

맡았던 베키르 베르크 같은 인물이 있기는 하지만, 사이드 누르시 정신적 계승자 다수는 대중인 수많은

대중이었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사이드 누르시를 잇는 정신적인 혹은 직접적인 계승자는 없다. 수십명 규

모의 수많은 소규모 그룹들이 '리살레이 누르'를 탐독하며 스스로 누르주(사이드 누르시의 제자)라 일컫

고 있는 것이다. 누르주 그룹은 사이드 누르시의 사후 4-5개의 소분파로 나뉘어졌으나, 현재 가장 큰 집

단을 형성하고 있는 세력은 베디유자만 사이드 누르시의 열렬한 추정자였던 패툴라 귤렌이 이끄는 자만

그룹이다. 누르주 그룹의 구성원은 공식적으로 밝혀진 것이 없으나, 1840년대 500,000명 정도이던 것이

현재 약 5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더욱 특기할 사항은 대도시의 무슬림 지식인들은 물론,

아나톨리아 무슬림들의 거의 대다수가 누르주가 아니더라도 사이드 누르시의 가르침에 심정적으로 동조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누르주 그룹의 주된 목표는 첨단교육을 통한 머리와 정신을 동시에 갖춘 무슬림 엘리트의 양성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는 수 천개의 교육기간을 운영하고 있으며, 터키의 경계를 넘어

중앙아시아나 아시아 전역으로 교육기관을 확산시키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이 그룹의 문화원과 학원

이 설립되었으며, 이를 통해 터키 문화와 이슬람의 보급에 힘쓰고 있다.

 

 

이희수. 한양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