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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통치자 (무아위야)

Author
kislam0
Date
2016-06-26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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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통치자 (무아위야)



정통 칼리파 시대(632-661)이후 이슬람 세계는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 메소포다미야,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인도, 동남아시아를 아우르는 대제국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최초의 이슬람 제국인 우마이야 조(661-750)는 수도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퍼져나가 스페인까지 그 영역을 확장했다. 스페인 남부의 안달루스에서 번창했던 알 무라비뜨 조와 알 무와히둔 조는 선진 이슬람 문물을 서유럽에 전파하는 가교 역활을 했다.


두 번째 이슬람 제국인 압바스 조(750-1258)는 수도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중세 이슬람 문명의 황금기를 구가하며 과학, 철학, 문예 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압바스 조는 10세기 이후 셀주크, 몽고르 맘루크 등의 등장으로 점차 분열되어 갔고, 마침내 1258년 몽골군이 바그다드를 초토화시킴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그 후 이슬람 세계는 잠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가 또 다시 대제국을 건설했다. 아나톨리아의 오스만 제국(1299-1923)은 1453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풀을 함락시킨 후 기세를 몰아 베오그라드, 헝거리, 빈까지 진격하여 유럽을 위협했다. 한편 무굴제국(1526-1764)은 인도에서 이슬람 제국을 건설한 후 힌두교를 융합한 독특한 이슬람 문화를 발전시켰다.



우마이야 조를 세운 칼리파



무아위야는 이슬람 초기의 정치, 군사 지도자였으며 우마이야 조(661-750)를 세운 칼리파다. 그는 630년 무슬림들에 의하여 메카가 함락되었을 때에서야 비로서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와 그의 가문, 우마이야 사람들은 새롭게 출발한 이슬람 국가에서 제일가는 명문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자중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가문 출신으로 가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찍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던 오스만이 칼리파가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오스만은 자신의 국가에 대한 지배력을 안정시키려고 자신의 가문 출신 인사들을 여러 고위 관직에 앉혔으며, 그중에서도 군사적으로나 행정적으로 유능한 다마스쿠스 지사였던 무아위야를 전 시리아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시리아 총독으로 있던 20년 동안 무아위야는 시리아를 이슬람 제국 내에서 가장 번영하고 발전한 지방으로 성장시켰으며 어느 누구도 그에게 도전할 수 없는 강력한 지배자가 되었다. 그런데 오스만이 그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아랍 전사들에게 살해되고,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가 칼리파가 되었다. 그러자 무아위야는 자신이 소유한 부와 권력으로 칼리파 알리에 도전하는 세력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새롭게 선출된 칼리파 알리는 아랍 전사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그 와중에 전임자 오스만이 샇해된 것은 오스만이 임명한 총독들이 잘못된 정책을 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전임자가 임명한 총독들을 교체하려고 하였다. 알리는 제 2대 정통 칼리파였던 오마르의 제도를 다시 채택하였는데, 전임자가 호의로 베풀었던 봉토를 회수하여 국가에 지불할 조세로 부과하였고, 무슬림들에게 연례 급여금으로 분배하였다. 이러한 칼리파 알리의 정책은 전임 총독들과 지위와 재산을 잃어버린 다른 고위 관리들의 적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오스만이 피살되든 자연사를 하든 다른 사람이 칼리파가 되면 어차피 자신은 총독 자리에서 밀려날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무아위야는 살해된 칼리파 오스만의 죽음에 대해 복수해야 한다고 신임 칼리파 알리에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칼리파 알리를 보위하던 중심 세력에는 전임자 오스만을 살해한 아랍 전사들이 있었기에 무아위야의 주장을 들어 줄 리가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무아위야와 그의 가문 우마이야 가는 오스만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외치는 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656년 낙타 전투 이후 오스만의 복수를 외치던 주요 인물들이 이슬람 세계의 정치 무대에서 사라졌다. 657년 칼리파 알리와 무아위야는 이라크와 시리아의 경계선 상에 위치한 십핀에서 전투를 벌였다. 전투에서 알리에게 밀리던 무아위야는 신의 중재를 외쳤는데 알리가 이를 받아들이자 알리 지지자들 중 일부가 알리의 진영을 뛰쳐나갔고, 후일에 알리를 살해하였다. 알리가 죽자 그의 장남 하산이 칼리파직을 맡았으나, 그는 아버지 알리에 비해 모든 능력이 떨어졌고 아버지가 남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거기다가 하산의 군대는 무아위야의 군대에 패하였고, 그의 지지 기반이던 이라크마저 등을 돌리자 할 수 없이 중재를 통하여 661년 무아위야가 칼리파가 됨을 이라크 쿠파에서 인정하였다. 이후 무아위야는 다마스쿠스로 돌아가서 그곳을 이슬람 제국의 수도로 선언하였다. 하산과 그의 가족들은 메디나로 돌아갔고, 하산은 그곳에서 무아위야가 준 보조금으로 많은 수의 처첩과 함께 호사스럽게 8년을 살다가 669년에 사망하였다. 무아위야는 하산의 죽음을 기뻐하였다. 하산의 존재를 거추장스러워한 무이위야는 아들 야지드의 사주로 하산의 부인이 그를 독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 명확하게 사실로 증명이 된 적은 없다.



무아위야의 통치체제



칼리파 위에 오른 무아위야는 칼리파직의 권위와 권력을 회복하고, 지배엘리트 계층의 분열적인 파벌주의를 없애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거대한 이슬람 제국이 더 이상 메디나 정부와 같은 신정적 공화체제로는 유지될 수 없음을 깨닫고, 아랍부족의 세습적인 신분제에 바탕을 두면서 사산 조나 비잔틴 제국이 취하고 있는 왕정제를 국가의 통치체제로 만들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국가의 군사적, 행정적 권한을 강화하면서, 칼리파에 대한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도덕적,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정부의 주요 기관으로는 슈라와 우푸드가 있었다. 슈라는 부족장 협의체로서 칼리파나 지방 총독이 소집하며, 자문과 권력 집행의 두 가지 기능을 맡았다. 우푸드는 각 부족의 협의체와 관련되어 있었다. 이 기관은 각 부족이 중앙 협의체나 지방 총독의 협의체에 보내는 대표자로 구성되었으며, 충성심을 바탕으로 각 부족의 자발적인 동의를 이끌어냈다. 그는 이 두 기관을 통하여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였다.


그는 부족 연합체 같은 군 조직을 해체한 후 비잔틴 방식에 따라 훈련되고 규율이 잡힌 새 군사 편제로 바꾸었다. 많은 신병들이 기독교 시리아인과 예몐 아랍인으로 보충되었으며, 안정적으로 넉넉한 봉급을 지급함으로써 그들의 충성심을 유지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군대가 대다수 아랍 전사였음은 바꿀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는 이슬람 제국에서 처음으로 큰 규모의 해군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그의 군 개혁은 이슬람 제국이 계속 확장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그는 군의 개혁을 하면서 부족장들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북부아프리카와 동부 이란에 대한 정복 활동을 재개하였다. 한편 정권 초기에는 비잔틴 제국과 평화를 유지하면서, 시리아의 병력을 내부의 치안 유지에 시용하였다.



무아위야는 국가 세입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사적인 수입원을 찾고 비잔틴 제국과 사산 조 페르시아 왕실로부터 몰수한 토지를 활용하였으며, 개간사업과 관개시설을 확장하였다. 재무 회계부서인 다완이 완성되었으며, 이슬람 세계 최초 우편제도가 마련되었다. 그가 마련한 우편 제도는 사건의 신속한 신고를 위한 것이었다. 이 일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하여 역마다 잘 훈련된 말을 상비해 두고, 기사가 목적지까지 매 역마다 지친 말을 새로운 말로 바꿔 타면서 빠른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그는 칼리파가 발송하는 모든 공문에 봉인 제도를 도입하였다. 각 서한의 사본을 만들어 초로 봉하였으며, 이것은 관청 봉인제도의 시발점이 되었다.



무아위아는 경찰권과 재정권의 확대에 대한 의도를 화해, 협의, 관용, 부족 전사의 존중과 같은 미덕으로 포장하였다. 무아위야의 재능은 어떤 제도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 무아위야의 개혁으로 제국은 번성하였고, 그 영토는 동쪽으로는 헤라트, 카불 및 부하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그는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을 재개하여 자신을 이슬람의 용사, 성전 지도자로 자처하면서 교묘하게 무슬림들이 그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유도했다. 무아위야의 명령에 따라 668년 시작된 콘스탄티노풀의 정복 전쟁은 나중에 칼리파가 된 야지드의 지휘 하에 아랍 군대가 콘스탄티노풀에 도착하여 포위한 상태로 오랜 기간 지속되었으나 실패하였으며, 674년 재차 육로와 해로로 다시 재개되어서 7년간이나 지속되었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이 전쟁은 비록 실패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제국의 막강한 군사력과 아랍 무슬림들의 재단결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정권의 안정적 계승 발전을 위해서 무아위야는 제1대 정통 칼리파, 아부 바크르 때부터 시행되었던 선출식 칼리파제를 폐하고 비잔틴 식의 혈연에 의해 세습되는 양위계승식 칼리파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세습적 칼리파제는 당시 아랍 무슬림들에게 너무나 생소했기 때문에 그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그는 이에 대하여 시대와 상황에 마추어 절충안을 만들어 냈다. 절충안은 그와 다마스쿠스 슈라가 공동 논의하여 아들 야지드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이었다. 이 과정은 부족적 협의 과정이 선거 기능을 위한 좋은 본보기였다. 이 결정은 다시 우푸드를 통하여 각 부족의 협의에 의하여 인준되고 난 후에 공표되었다. 이에 대한 반대는 주로 설득과 뇌물로 무마되었고, 부득이 한 경우에는 무력으로 통과시켰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세습적 칼리파제는 필연적으로 많은 아랍의 반발을 야기하였다. 따라서 후계자로 결정된 야지드는 아버지 무아위야를 닮아 유능하고 재치있는 인물이었으나 당시 사람들에게 최고의 지도자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야지드는 이슬람에 반하는 음주를 좋아하였고, 술에 취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군사적 업적 또한 콘스탄티노풀 정복 전쟁에서 실패한 것 이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알리의 둘째 아들 후세인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실패했다. 이 사건은 후에 하나의 정치적 파당 운동의 시작이 되어 '쉬아'라는 종파 운동으로 발전하였으며, 현재까지 존재하는 이슬람 세계의 분열 요소가 되어버렸다.



무아위야는 비록 군주적 칼리파제의 기초를 놓기는 하였으나, 스스로 군주적 지배자가 되지는 않았다. 그가 행사한 지배자의 권력은 본질적으로 이슬람적이었다. 이 권력은 종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군주적인 것, 다시 말해 왕권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슬람이 등장하기 전에 존재한 부족장의 권위가 재생되어, 확대 강화된 모습이었다. 비잔틴의 역사가 테오파네스(817년 사망)는 무아위야를 왕이나 황제로 기술하지 않고, 제일통령으로 지칭하였다. 무아위야가 행한 지배권을 보면 이 표현이 잘 어울린다.



무아위야는 이슬람 제국의 통일을 깰 수 있는 내란을 진압하였으며, 이것은 결코 강력한 힘과 타협하지 않는 지도력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장들은 독자적으로 통치하기 원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그들에게 허락해야 했고, 무아위야는 자신의 권위를 주장할 때와 유보할 때를 잘 판단하여 지배해야 했다. 그의 능숙한 타협은 지방의 권력자들이 금고를 채울 많은 전리품을 얻게 만드는 동시에 제국을 학장할 수 있는 커다란 힘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뛰어난 능력으로 제국의 안정을 제공하였으며,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것을 막으면서 무슬림 유산의 유지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정권 초기에는 기독교들에게 많이 의존하였으나, 점차적으로 그 자리를 무슬림들로 채워나갔다. 그는 칼리파 알리처럼 애매한 종교적 위치를 차지하고 싶지 않아서 종교적 권위를 주장하지 않았으나, 무슬림의 요지가 될 지역에는 이슬람 사원을 세우도록 하였다.





엄격하고도 관대한 통치자



성공적인 지도자는 때로는 엄격하면서도, 때로는 아주 관대해야한다. 이런 면에 무아위야는 아주 능하였다.그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단호하면서도 무자비한 조치들을 거침없이 취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 없이 관대하였다. 한 아랍 백성이 그에게 '옳지 않은 일을 하면 꾸짖을 것이며, 그 방법으로 매를 사용하였다'고 하자 아무런 불쾌함 없이 그러자고 한 일화가 있다. 또한 그의 수많은 정치적 라이벌들에게 지위에 맞는 연금과 주거를 제공할 뿐 아니라 친절히 대하였으며, 감시는 하였지만 그들의 언행을 간섭하지 않았다. 제2대 정통 칼리파 오마르는 그를 아랍의 카이사르라고 칭했다고 한다. 무아위야는 말썽은 많지만 중요한 이라크를 통치하기 위해서 그에게 절대 충성하면서도 능력이 있는 총독이 필요했다. 이 때에 그가 이라크 총독으로 보낸 인물은 지야드 이븐 아비히(그 아비의 아들 지야드, 즉 아버지의 이름을 모르는 자, 사생아라는 뜻)였다. 지야드는 어느 누구보다 능력이 출중하였으며 용기가 있었다. 이런 지야드를 무아위야는 그의 아버지 아부 수피안과 그의 생모 사이에서 태어난 형제라고 선언하였다. 한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지야드는 모든 험한 일을 피하지 않고 행하면서 이라크의 정세를 안정시켰다.다음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무아위야의 말 중에 그의 현실적인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나는 채찍으로도 일이 잘 될 때에 검을 쓰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말로 해도 될 때에는 채찍을 사용하지 않는다. 비록 단 하나의 머리카락이라도 나와 나의 백성들을 결속할 끈이 되도록 할 것이다. 난 그 머리카락이 끊어지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백성들이 느슨해지면 내가 끌어당길 것이요, 내가 느슨해지면 백성들이 나를 끌어당길 것이다."


"오늘 인정을 받은 것이라도 전에는 비난을 받았다. 지금 혐오스런 것이라도 언젠가는 환영받는 날이 올 것이다."


"아부 바크르는 세상을 구하지 않았고, 세상도 그를 구하지 않았다. 오마르가 세상을 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오마르를 구하였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그 세상 속에서 그 허리까지 가라 앉아 있는 상태이다."




송경근 조선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