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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바이다 알라 알 마흐디 (Ubayd Allah-Mahdi)

Author
kislam0
Date
2016-08-13 10:16
Views
414

우바이다 알라 알 마흐디 (Ubayd Allah-Mahdi 873-934)





우바이드 알라 알 마흐디의 혈통에 관한 논란



우바이드 알라 빈 후세인 알 마흐디는 쉬아파 무슬림으로서, 자신을 알라의 인도된 작은 종이란 뜻의 이름 우바이드 알라 알 마흐디라 칭했다. 그는 추종자들로부터 마흐디(인도된 사람), 즉 무슬림들을 순결과 평화의 새 시대로 인도할 이맘으로 숭앙받는다. 하지만 그의 혈통에 관해서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그는 아부 압드 알라 앗 쉬이와 손잡고 동으로는 인도의 신드 지방에서 서로는 이집트에 이르는 광대한 땅을 정복하였고, 파띠마 조(969-1171)의 기초를 확립했다.


우바이드 알라 알 마흐디는 873년경 시리아 홈스의 살라미야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이 쉬아파의 일곱 번째 이맘인 이스마일의 후손이며, 따라서 제4대 정통 칼리파 알리 빈 아비 딸랍과 예언자 무함마드의 딸 파띠마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순니파 학자들은 알 마흐디란 칭호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족보를 조작하여 예언자 가문을 참칭한 사기꾼으로 간주하였다. 심지어 일부 학자들은 우바이드 알라의 부모가 유대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바이드 알라 알 마흐디의 역사적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정황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첫째, 쉬아파에서 이스마일파 무슬림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둘째, 당시 해당지역의 역사적 상황이 어땠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스마일파의 한 갈래가 부유한 상인 집단을 이루어 활동하고 있으며, 그 정점에 억만장자인 아가 칸이 있다. 이스마일파는 원래 암살과 정변을 일으키고 반란을 도모하는 세력이었다. 이집트에서 신드까지 장악했던 파띠마 조 시대가 바로 이스마일파의 활동이 가장 융성했던 시기였다. 이스마일파는 무슬림 세계의 다수 를 이루는 순니파에 맞서 도전했던 쉬아파의 일파였다. 4대 정통 칼리파 알리가 661년에 살해되면서 칼리파 위는 우마이야 조의 손으로 넘어갔다. 알리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알리의 직계 후손이 정권을 계승해야 한다면서 우마이야 조의 집권에 거세게 반발했다. 야지드 재위 (680-683)가 우마이야 조의 칼리파로 재위하던 시기에 알리의 아들 후세인이 칼리파에 반기를 들었다가 호위 병사들과 함께 카르발라에서 칼리파 군대에 의해 참살되었다. 서기 680년의 일이었다. 이후로 후세인의 순교는 쉬아파 무슬림들에게 잊을 수 없는 대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알리를 따르는 쉬아는 적법한 상속자인 알리에게 돌아가야 할 권리를 우마이야 조가 찬탈했다고 보며, 칼리파 위를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쉬아파는 알리가 예언자 무함마드를 곧바로 계승했어야만 했다고 믿는다. 이는 곧 알리 이후의 칼리파 뿐만 아니라 그 이전 세 명, 정통 칼리파까지도 부정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것이 칼리파제를 받아들이는 순니파와 이맘제를 따르는 쉬아파의 근본적인 차이점이었다. 칼리파는 선택되거나 선출된다. 반면에 이맘은 신성하고 오류 를 범하지 않으며 죄를 짓지 않는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로서 첫 번째 이맘인 알리의 직계 혈통이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이맘은 예언자는 아니지만 그 바로 아래의 위상을 갖고 엄청난 권위를 지니고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쉬아파는 이맘 위의 승계를 놓고 내부적으로 대립하여 3개의 주요 분파로 갈라졌다. 자이드파, 이맘파(또는 열두 이맘파), 이스마일파 등이 그것이다. 자이드파가 후세인의 손자인 자이드 빈 알리를 제 5대 이맘이라고 주장한 반면, 대다수의 쉬아파 무슬림들은 무함마드 븐 알 바키르와 그의 아들 자으파르 앗 시디크를 적법한 후계자로 인정했다. 자이드파는 864년 카스피 해 연안의 타바리스탄 지역에 왕조를 세움으로써 쉬아파 가운데 최초로 정치적 독립을 이룩하는데 성공했다. 이어 893년에는 예멘에 자이드파 국가를 세워 1963년까지 존속시켰다.


8세기에 들어서면서 제6대 이맘 자으파르 앗 시디크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분란이 일어났다. 훗날 이맘파로 불린 대대수는 작은 아들 무사 알 카짐을 7대 이맘으로 승계를 옹호했다. 이맘파는 계속하여 모두 12명에 이르는 이맘 계보를 이어갔기 때문에 열두 이맘파로도 불렸다. 이 파는 874년에 잠적한 제12대 이맘이 언젠가 마흐디로 세상에 귀환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한편 이스마일파는 일곱 이맘파로도 불리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이 제 7대 이맘인 이스마엘의 후예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바이드 알라 알 마흐디가 이스마일의 손자이자 무함마드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스마일파는 또 내부적으로 여러 분파로 분리되었다. 어떤 분파는 이스마일의 서거로 이맘위가 시실상 종식되었다고 보고, 다른 분파는 이맘파와 유사하게 이스마일이 잠적했지만 마흐디로 귀환할 것이라고 믿는다. 또 다른 분파는 이스마일의 아들 무함마드가 제8대 이맘이고 그 이후로 계보가 쭉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우바이드 알라 알 마흐디의 행적에 관한 최초 기록은 905년으로 거슬로 올라간다. 그 해에 그는 아내와 아들 알 카심과 함께 살라미아를 출발하여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를 거쳐 마그립으로 향했다. 그는 살라미아에서 이미 소규모 종파의 지도자였기 때문에 이동할 때 제자들이 동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이주한 것은 이스마일파 집단의 아부 압드 알라 알 쉬아로부터 서한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앗 쉬이(쉬아의 신봉자라는 뜻)라는 호칭으로도 불렸던 아부 압드 알라는 정치적 수완과 탁월한 군사 능력을 겸비한 인물로서 후에 파띠마 조의 성립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 아부 아부 압드 알라 앗 쉬이 일파는 국가를 세우기를 원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구심점이 필요했으며, 알 마흐디가 정통성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했다. 파벌을 불문하고 모든 쉬아파는 자신들의 이맘이 순니파를 포함한 전체 무슬림들의 적법한 통치자라고 믿는다. 우바이드 알라 알 마흐디는 예언자 무함마드와 알리의 직계 후손으로 간주되었다. 앗 쉬이는 우바이드 알라 알 마흐디가 인간을 구원하고 지구상에 순수한 무슬림 공동체를 확립할 진정한 이맘이자 마흐디라고 판단하였다. 본래 열두 이맘파였던 앗 쉬이는 자신이 갖고 있는 인간적인 매력과 설득력, 카리스마를 동원하여 마흐디의 재림을 알리는 얘언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앗 쉬이는 북아프리카 일대를 이스마일파의 세상으로 바꾸고자 하였다. 당시 북아프리카에는 순니파와 쉬아파를 비롯해 갖가지 종교와 종파들에 기초한 작은 나라들이 난립해 있었다.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경제적으로 피폐한 상태였다. 앗 쉬이는 우선 895년 무렵에 북아프리카의 카타마 베르베르 부족 지역으로 들어갔다. 이 부족의 구성원들은 대부분이 쉬아파였고, 강한 영지주의적 전통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앗 쉬이의 가르침을 친숙하게 받아들였다. 알제리의 북동부를 차지하고 있던 카타마 베르베르의 일부 사람들은 예전에 메카에서 앗 쉬이를 만난 적도 있었다. 앗 쉬이는 '해가 서쪽에서 뜰 것이다'라는 예언자의 하디스를 유포시켰다. 카타마 부족의 관심을 끌만한 하디스도 퍼뜨렸다. '마흐디가 출현하여 먼 땅에서 정직하고 카트만(비밀)과 같은 어근의 이름을 가진 백성들이 그를 옹립하게 될 것이다.' 또 앗 쉬이는 이 마흐디가 죽은자를 살리는 것과 같은 기적을 행할 능력을 지니고서 이 땅으로 오고 있다고 말했다. 마흐디의 도래가 실현되기 전에 카타마 부족민이 무기를 들고 일어나 주변 부족을 제압하였고, 마흐디를 맞이할 준비를 시켜야 한다는 선전도 곁들였다.


한편 우바이드 알라 알 마흐디는 상인으로 변장한 후 이집트로 들어갔다. 압바스 조의 감시를 피해 이집트에서 계속 서쪽을 향해 이동하다가 결국 마그립의 시질마사에서 체포, 투옥되었다. 앗 쉬이는 20먄명을 끌어 모았고 그의 강압적인 회유에 여러 부족들이 차례로 굴복했다. 909년 앗 쉬이가 지휘하는 이스마일파 병력이 알 카이라완의 성문 앞에 집결했다. 알 카이라완은 튀니지 지역에서 강성하였던 순니파 아글라브 조의 수도이자,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아프리카 대륙의 가장 견고한 요새이다. 당시의 왕 지야다 알라 3세가 패전해 도주하였고, 이로써 그의 왕조는 멸망하였다. 앗 쉬이는 손쉽게 알 카이라완을 접수하였고, 왕궁에 들어가 앗 쉬이가 우마이드 알라 알 마흐디 구출을 포기하고픈 유혹에 빠졌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알 마흐디를 구세주로 믿고 있는 추 종자들로부터 찬탈자로 낙인찍힐 것이 뻔했다. 그리하여 앗 쉬이는 병사들을 이끌고 우바이드 알라 알 마흐디가 갇혀 있는 시질마사 감옥으로 향했다. 도시가 함락되고 우마이드 알라 알 마흐디와 아들이 구출되었다. 그리고 우바이드 알라 알 마흐디와 앗 쉬이는 40일간 시질마사에 머물렀다.


군대가 다시 알 카이라한으로 돌아오고 우바이드 알라 알 마흐디와 그의 가족들은 왕궁에서 살게 되었다. 알 마흐디의 아들이 후계자로 책봉되고 앗 쉬이가 군사 총책임을 맡으면서 쇠약해진 순니파에도 새로운 세력이 형성되었다. 알 카이라한에서는 구세주 마흐디를 향한 민중의 기대가 고조되어 정권 담당자들에게 오히려 부담이 될 정도였다. 그래서 우바이드 알라 알 마흐디는 군사적 팽창을 자제한 채 화해와 통합 정책을 펴고 내부 결속을 강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순니파 무슬림으로 구성된 행정 조직을 유지하면서 종파적인 전향을 강요하지 않는 정책을 폈다. 우바이드 알라는 가능한 마흐디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그가 마흐디라는 것을 의심하는 무리가 생겨났다. 그들은 기적을 사용하여 마흐디로서의 징표를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알 마흐디는 소외된 앗 쉬이가 이 같은 소문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 간의 대립은 피할 수 없었다. 마침내 알 마흐디가 승리하여 개국 일등 공신 앗 쉬이를 처형했다. 그런데도 우바이드 알라 앗 마흐디에 대한 의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특히 앗 쉬이와 유대관계가 강하고 승전에 공이 컸던 카타마 부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다른 부족들은 각기 나름의 마흐디를 세우기도 하였다.


불안을 느낀 우바으드 알라 마흐디는 912년에 알 카이라완에서 남동쪽으로 16km 떨어진 곳에 새 수도를 건설하고 알 마흐디라고 명명했다. 반도 지형에 높은 성곽, 금속제 성문, 성 주변으로 깊은 강이 흐르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리고 내부의 힘을 억우르기 위한 방법으로 외부와 전쟁을 벌이는 것을 택했다. 우바이드 알라 알 마흐디는 군대를 이끌고 순니파 압바스 조의 보루 이집트를 공격했다. 914년에 이루어진 첫 원정에서 우바이드 알라는 바그다드의 압바스 조 중앙정부에서 급파된 지원군 때문에 퇴각했다. 2년 후에 있었던 2차 원정은 4년 동안 계속되었다. 우바이 알라 알 마흐디는 한동안 점령했던 지역을 다시 빼앗겼다. 그는 끝내 이집트를 정복하지 못하고 934년, 자신이 건설한 알 마흐디에서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파띠마 조의 상징적 존재



우바이드 알라 알 마흐디가 이루었던 성공의 대부분은 앗 쉬이의 공적을 제외하면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우바이드 알라 알 마흐디는 25년간 부족들의 숱한 반란과 봉기를 극복하고 결속을 유지하였으며, 파띠마 조의 상징적 존재로서 번영을 이끌었던 점은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집트는 969년 이르러 그의 증손자 알 무잇즈에 의해 정복되었으며, 새로운 수도 알 카히라(현재의 카이로)가 건설되었다. 이어서 알 무잇즈의 아들 알 아지즈(재위 965-996) 시대에 파띠마 조는 전성기에 도달했다. 파띠마 조는 강력한 중앙집권 군주국으로서 북아프리카와 이집트, 시실리, 시리아, 페르시아, 아라비아 반도 서부, 인도의 신드 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파띠마 조는 쉬아파 제국이었지만 제국의 구성원 대부분이 순니파 무슬림이었다. 파띠마 조는 경제적, 문화적으러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 때 설립된 카이로의 알 아즈하르는 이슬람 세계 최고의 종교 중심이자 이슬람 학자를 배출하는 대학교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파띠마 조가 잠시 바그다드를 점령한 적도 있었으나 무슬림 세계 전역을 지배하지는 못하였다. 171년 살라흐 앗 딘이 정복함에따라 순니파가 다시 지배하게 됨으로써, 파띠마 시대의 영광은 종말을 고했다.



박재원. 한국외국어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