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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스페인의 가장 뛰어난 통치자 압둘 라흐만 3세 (Abd ar Rahman)

Author
kislam0
Date
2016-08-21 07:09
Views
506

압둘 라흐만 3세 (Abd ar Rahman 111 ar-Nasir 889-961
이슬람 스페인의 가장 뛰어난 통치자


이슬람 스페인은 무지에 빠져 있던 중세 유럽에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아랍-이슬람 문화를 전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슬람 스페인의 영향으로 유럽은 고대 과학과 철학을 회복했고 이를 더욱 발전시켜 근대 르네상스를 꽃피웠다. 유명한 동양학자인 히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슬람 스페인의 통치는 중세 유럽의 지성사에서 가장 뛰어난 시기였으며 8세기 중반과 15세기 초까지 아랍인들은 전 세계에 문화와 횃불을 나르는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이슬람 스페인의 가장 뛰어난 통치자로 평가 받는 사람은 압둘 라흐만 나세르 (압둘 라흐만 3세, 재위 912-961)이다. 그는 정치적으로 안정된 국가를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과학, 예술, 상업, 공업, 교육, 문화 분야를 뛰어나게 발전시킴으로써 안달라루스를 영광의 시기로 이끌었다.


압둘 라흐만은 22세 때 그의 조부인 압둘라를 계승하여 왕위에 올랐다. 그의 나이 3살 때, 황태자였던 아버지가 재정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압둘라 왕의 명령에 의해 사형을 당하였다. 압둘 라흐만은 아버지 없이 성장하였으나 조부 압둘라 왕은 이러한 상황에 어린 압둘 라흐만이 상처받지 않도록 많은 애정을 쏟았다.


바그다드의 압바스 칼리파가 쇠락의 길로 기울어져 전 무슬림 세계, 특히 성스러운 도시들에 대한 통제를 거의 할 수 없게 된 이 시기에 압둘 라흐만 나시르는 '아미르 알 무으미닌'(신자들의 총통)'이라는 직책에 취임한다. 대규모의 백성들이 모인 곳에서 그는 '알 나시르 알 딘 일라'라는 명칭하에 칼리파 직책을 수여받는다.


912년 젊은 압둘 라흐만이 즉위했을 때 안달라루스의 우마이야 왕국은 내부와 외부에 모두 적을 두고 있었다. 왕국 내부는 귀족들의 파벌 싸움으로 인해 혼란에 빠져 있었고 이는 백성들의 삶을 고통으로 내몰았다. 또한 외부의 적으로는 북쪽의 기독교 국가들과 아프리카의 파띠마 조가 있었고 이들은 호시탐탐 우마이야 왕국을 공격하기 위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압둘 라흐만은 강력한 정책을 통해 이러한 내, 외적인 도전과 위협을 타파하였다. 이제까지 행해진 조부의 부드러운 정책을 과감히 버렸다. 반역자들은 처절하게 응징하고, 항복한 자들은 너그럽게 용서하는 단호한 정책을 폈다. 그 결과 안달루스 대부분 지역의 귀족들은 자발적으로 압둘 라흐만에게 항복하였다. 항복하지 않고 남아있던 엘비라와 하엔 지역 그리고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산적들도 그가 왕위를 계승받은 지 채 일년이 지나지 않아 모두 항복하였다. 또한 북쪽의 바다호스와 톨레도도 완전히 정복함으로써 그는 안달루스 우마이야 왕국의 진정한 군주가 되어 왕국을 내적으로 안정시켰다.



반란군 진압을 위한 출정



그러나 압둘 라흐만은 여전히 외부의 두 강적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는데, 하나는 안달루스의 비옥한 땅을 노리고 있는 북쪽의 기독교도 부족이고 다른 하나는 아프리카의 파띠마 조였다. 당시 기독교들은 광신적이고 무자비 했기 때문에 무슬림 도시를 점령했을 때 사람들을 거의 살려두지 않았고, 무분별한 성교와 학살을 저질렀다. 압둘 라흐만은 이러한 기독교 반란자들과 북쪽의 기독교 세력들의 위협을 뿌리 뽑지 않고서는 그의 제국에 평화가 유지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강력한 힘으로 그들을 진압하기로 결심하였다.


914년 오르도노 2세 하의 레온 사람들은 메리다 지역에 난입하여 마을을 황폐화 시키고 수많은 무 슬림들을 학살하였다. 당시 아프리카에서 파띠마 조의 군사들과 교전 중이었던 압둘 라흐만은 토벌 원정대를 파견하였다. 하지만 이 원정대는 목적을 성취하지 못했다. 918년에 그는 하집 바드르의 지휘아래 또 다른 군대를 파송하였고 920년에는 본인이 몸소 출정하였다. 오르도노는 패배하였고 산으로 쫓기게 되었다. 왕은 다음으로 그의 관심을 나바레로 돌려 그곳의 모든 요새들과 성채들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파괴함으로써 나바레의 우두머리인 산초로부터 확실한 승리를 거두었다.


921년 오르도노와 산초는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수많은 무슬림들을 학살하였다. 압둘 라흐만은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서둘러 출정하였다. 레온의 오르도노는 압둘 라흐만이 출정했다는 소식에 도망하였고 산초는 압둘 라흐만의 길을 막으려고 노력했으나 참혹하게 패배하였다. 이로써 압둘라 라흐만은 북쪽의 레온과 바스크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광대한 국가에 완전한 질서와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933년에 라미레 2세가 레온의 통치자 직위를 계승하여 무슬림 국가를 급습하고 약탈하기 시작하자 압둘 라흐만은 그를 공격하기 위해 출정하였다. 칼리파는 북쪽으로 진격하여 카스틸레와 알바를 휩쓸었으며 갈라시안의 성채들과 도시들을 황페화 시키고 북쪽의 끝에 있는 사라고사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라미레는 패주하였고 이제 스페인 전역은 칼리파 압둘 라흐만의 발아래 놓이게 되었다.


939년 갈라시아인들과 바스크인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칼리파는 슬리브 장군이 지휘하는 나즈드라는 군대를 파견하였지만, 아랍인들은 슬라브 장군 밑에서 싸우는 것을 거부했다. 표면화된 내부 갈등 때문에 무슬림군은 칸다크 전투에서 참패하는 대재앙을 맞았다. 압둘 라흐만은 다른 군대를 보내 갈라시아인들과 바스크인들을 혹독하게 징벌하였다. 나바라와 레온의 우두머리들은 마침내 화평을 청했고 칼리파에게 매년 공물을 바치는데 동의하였다.


이제 칼리파는 그의 모든 관심을 아프리카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오르도노가 사망하자 갈라시아인과 레온은 산초의 영향권 하에 있게 되었다. 산초는 그의 형이 체결해 놓은 계약을 따르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칼리파는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능력있는 장군이자 톨레도의 총독인 아흐마드 빈 일라 장군을 보냈고, 갈라시아인들과 레온인들을 상대로 기념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산초는 그의 영토에서 추방되었고 레온과 카스티야, 갈라시아와 나바라는 부분적으로 우마이야 조의 속국이 되었다.



압둘 라흐만에 관한 평가



반세기 이상에 걸쳐 우마이야 조에 영광을 가져다 준 위대한 칼리파 압둘 라흐만 나시르는 961년 10월 16일 73세의 나이로 모든 백성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압둘 라흐만 나시르는 의심할 여지없이 가장 위대하고 능력있는 이슬람 스페인의 통치자였다. 아미르 알리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압둘 라흐만 나시르는 파벌에 의해 찢겨지고, 다양한 종족들에 속한

다수의 봉건 영주에 의해 분할되고, 무질서와 내전으로 고통받으며,

북쪽의 기독교 부족들에 의해 끊임없이 공격에 노출되어 혼돈 상태

에 있던 왕국을 바로 세웠다. 뿌리깊은 수많은 역경과 어려움에도 불

구하고 그는 안달라루스를 구했으며 이전 안달라루스보다 훨씬 더 크

고 강력한 안달루스를 만들었다."



이슬람 스페인은 전례 없던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국가의 질서는 회복되었고 길 위의 안전이 확보되었다. 이로 인해 상업과 산업이 번창했다. 소비자 상품들의 가격은 하락하고 백성들의 삶의 질은 높아졌다. 수력과 관개의 과학적 시스템은 농업과 원예 발달에 훌륭한 추진력이 되었다. 풍성한 들판과 찬란한 정원들은 국가의 눈부신 농업발전을 대변했다. 수많은 제조업자들이 스페인 전역에서 출현하였다. 코르도바, 세비야, 알메리야는 중요한 산업 중심지였다. 압둘 라흐만은 그가 통치하는 동안 끊임없는 열정으로 과학, 문학, 예술과 문화를 육성하였다. 이슬람 스페인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교육과 문화의 증심지가 되었고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학생들이 모여드는 곳이 되었다. 또한 이곳의 대규모 교육 기관들에서는 후예 유럽 르네상스를 일으킬 미래 지도자들이 훈련받았다.


알둘 라흐만은 강력한 육군과 지중해에서 파띠마 조와 싸워 이긴 강력한 해군을 보유하였다. 압둘 라흐만이 북부의 기독교인들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잘 훈련된 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콘스탄티노풀의 비잔틴 황제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왕들을 포함한 유럽의 위대한 통치자들은 칼리파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원했기 때문에, 그들의 대사들로 하여금 칼리파와 교류를 갖도록 하였다. 도지는 압둘 라흐만의 지도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중앙집권적이며 국민과 군주 의 통합성을 이룩하고, 동맹을 통해

정치적 균형을 유지하며 관용을 베풀어 인종과 종교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하였던 이 현명한 군주는 중세 시대의

통치자라기보다는 근대의 군주였다고 할 수 있다."







이종화. 명지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