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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 이슬람 문명의 길을 걷다 (예언자 무함마드)

Author
무스타파
Date
2015-12-29 09:19
Views
473

1400년 이슬람 문명의 길을 걷다


예언자 무함마드

신의 계시와 예언자의 출현


서기 610년, 사려 깊고 섬세한 감성을 지닌 어느 중년의 남자에게 신의 계시가 내려지면서 한 위대한 예언자가 아라비아에서 출현하였다. 압달라의 아들 무함마드는 메카에 있는 히라 산의 한 동굴에 자주 찾아가 명상과 사색에 잠기곤 하였는데 어느 날 밤-라마단 달의 이밤을 무슬림들은 '운명 지어진 권능의 밤'이라고 부른다 -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새벽의 여명처럼 훤이 밝아오는 먼 지평선 상에 신비한 현상이 나타나 그에게 다가오며 말하였다.

"오, 무함마드여, 그대는 신의 사자니라."

놀란 무함마드는 두려움과 차가운 냉기에 싸여 온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떨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부인 카디자에게 자꾸 후들후들 떨리는 자신의 몸을 무엇인가로 덮어달라고 청하였다.

"나를 덮어주시오, 감싸주시오."

그는 오한과 두려움이 가실 때까지 두터운 외투에 덮인 채로 있었다. 이것이 그와 대천사 가브리엘이 조우를 한 장면이다.

평정을 되찾은 그가 다시 동굴을 찾아가자 가브리엘 천사가 그의 앞에 또 한 번 나타나 아름다운 무뉘가 있는 능라의 덮개 같은 것으로 심하게 그를 누르면서 명령하듯이 말하였다.

"읽어라(이끄라)!

무함마드는 이것이 신의 사자로서의 위대한 영적 사명이 그에게 내려지고 있는 역사적 순간임을 알 수 없었다.

"저는 읽을 줄을 모릅니다."

무함마드가 답하자 가브리엘 천사는 더욱 세차게 덮개로 그를 압박하면서 말하였다.

"읽어라!"

"무엇을 읽으라는 말입니까?"

참기 어려운 억눌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간신히 그가 이렇게 외쳤을 때, 가브리엘을 통하여 신의 첫 계시가 내려왔다.


"읽어라! 만물을 창조하신 너의 하나님 이름으로 그는 한 방울 응혈로 인간을 창조하셨도다. 읽어라! 너의 주님은 가장 관대한 분, 펜으로 쓰는 것을 가르쳐 주신 분. 알지 못했던 것을 인간에게 가르쳐주셨다." (꾸란 96:1-5)


'하나님의 말씀' 꾸란은 이렇게 인류에게 내려지기 시작했다. '꾸란'이라는 아랍어 단어는 '읽는것'. 암송하는 것'을 뜻한다. 무함마드가 두려움에 떨면서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한 이 날 이후 23년 동안 '신의 말씀'은 무함마드의 입을 통해서 암송되어 이땅에 전해졌다. 가브리엘을 통해 전해지는 이 '말씀'은 와히(영감)에 의해 무함마드에게 내려지고, 그는 암송의 형식으로 이를 쏟아놓아 이 땅에 전달한 것이다. 무함마드는 마흔 살이 되던 해에 이같이 신의 예언자가 되었다. 그것은 팔레스타인에서 신의 사자 예수를 통해 '신의 말씀'이 내려진 이래 약 6세기 만의 일이었다.


무함마드는 570년 4월 22일, 꾸라이쉬 부족의 하심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메카는 카아바 신전이 있는 종교도시이자 한창 번창해 가는 상업도시였다. 카아바 신전에는 신성한 돌이 있으며, 아랍 부족민들이 숭배하는 여러 우상들이 모셔져 있었다. 그의 부친 압둘라는 시리아 쪽으로 나가던 대상이었는데, 그가 태어나기 바로 직전에 죽었다. 어머니 아미나도 그가 여섯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된 그는 할아버지 압둘 무딸립에게 맡겨졌다. 그런데 불괴 2년 뒤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시게 되자 그는 하심가의 새 가장이 된 숙부 아부 딸립에의해 양육되고 그의 보호 아에 자라게 된다. 아부 딸립은 무함마드가 신의 예언자가 된 후, 우상숭배자들이었던 메카의 기존 지배 계층으로부터 박해를 받게 되었을 때 그를 지켜주던 하쉼 가문의 가장이자 진정한 보호자였다.


대개의 위대한 예언자들이 찬란한 후광을 배경으로 하여 등장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무함마드는 이렇게 유복자로 태어나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냈고 평범한 젊은이로 성장하였다. 어려서는 양치기였으며 커서는 죽은 아버지처럼 무역 일에 종사하는 상인이 되었다. 성인이 된 그는 남달리 근면하고 정직하여서 메카 사람들로부터 아민(성실한 사람)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고 한다. 아랍 사람들은 그를 보통 키에 구부러진 코, 커다란 눈, 두터운 입술, 굵고 약간 곱슬인 머리카락을 지녔으며, 언제나 조용하고 매사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간명하게 요점을 말할줄 아는 능력을 지닌 젊은이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부유하고 고결한 성품의 미망인 카디자와 25세에 결혼하여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그녀는 무함마드의 고용주였다. 시리아 쪽으로 나가는 그녀 소유의 대상의 대리자가 되어 성실히 일하였던 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 때가 595년 경인데 당시 카디자는 40세였다고 전해진다.그렇지만 이 둘 사이에 4명의 딸과 2명의 아들이 태어난 사실을 감안해보면 아마도 실제 그녀의 나이는 더 적었을 것 같다. 두 아들은 모두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며 딸 들 중에서도 파띠마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함마드보다 먼저 죽었다.


카디자는 첫 번째 무슬림이 되었다. 그리고 메카에서 심하게 박해를 받던 포교 초기의 수난기 동안 그녀의 조력과 위안은 무함마드에게 큰 힘이 되었다. 아랍인 무함마드가 받은 계시는 과거에 유대인 예언자들이 받았던 계시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신의 말씀이자 신의 명령이었다. 그것의 원형은 천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신은 자신의 의지가 무엇인지 인류에게 전할 수동적인 전달자를 선택하여 메시지를 보내곤 하셨다. 이제 무함마드가 앞선 예언자들의 경우처럼 신의 말씀을 수령하여 전달하는 '신의 사자'로서 선택을 받은 것이다.



꾸란의 초기 계시, 유일신과 최후의 심판



"실로 우리(하나님)는 노아와 그 뒤를 이은 예언자들에게 계시를 주었던 것처럼, 그대에게 계시를 주노라. 우리는 또한 아브라함, 이스마일, 이삭, 야곱과 그의 자손들, 예수, 욥, 요나, 아론, 그리고 솔로몬에게도 계시를 주었고, 우리는 다윗에게 시편(자브르)을 주었노라." (꾸란 4:163)


꾸란의 초기 계시들은 모든 형태의 우상숭배 행위를 즉각 중단하고 절대자 알라께 복종하는 것과, 세상이 끝나는 종말의 날에 인간에게 내려질 신의 심판에 대한 내용을 주로 다루고 있는 것들이었다. 부활의 날에 죽은 자 모두가 일어나 신 앞에 줄지어 설 것이며, 최후 심판의 날에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며 살거나 지옥에 떨어져 불의 형벌을 받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계시의 내용 중에서 이 보다 훨씬 강조되고 핵심적인 것은 '신은 유일하시다'는 것이다. 하나님 그분은 한분이시다.그분께 견줄 것은 없다. 꾸란에서 가장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쉬르크.를 두는 것이다. 쉬르크란 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비견되는 자'를 말한다. 결코 이런 대상을 두어 서는 안된다. 그런 사람은 우상숭배자이고 다신교도이다. 이들을 통칭 무슈리쿤(쉬르크를 둔자)이라고 부른다.



아랍 사회의 근원적 개혁 의지와 박해



무함마드를 따르는 초창기 추종자의 수는 극히 적었다. 부인 카디자와 사촌동생 알리, 친구 아부 바크르 등 그와 가까운 소수에 불과하였다. 대중 앞에 나서 외치기 시작한 그의 설교는 아랍인들에게 너무나 생소하고 허망한 것이었다. 특히 내세가 있다는 주장은 사막에서 살아온 그들에게는 터무니 없고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의 교설들은 한결같이 아랍사회의 기존 가치관에 반하는 것이었다. 다신교적 우상숭배를 부정할 뿐 이니라 고리대금, 도박, 음주 난혼, 등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아랍의 고대 관습 모두를 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기존의 종교관, 기존의 사회가치관에 근원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극히 도전적인 내용이었다. 메카 대상인 지배층의 강한 반발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 내용들이었다.


게다가 무함마드가 이들로부터 소외당하고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요인으로는 경제적인 이유가 있었다. 무함마드가 말하는 일신교 체제 아래에서는 전통적으로 지속되어 오던 아랍 부족들의 우상숭배를 위한 메카 순례 행사가 없어져야 할 터인데, 이것은 메카에 해마다 이익을 가져오는 막대한 순례 수입금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순레는 메카의 꾸라이쉬족에게는 교역 다음으로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실상 이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부의 소유와 가치관에 관한 견해 차이었다.


무함마드의 교설에 따르면, 메카의 대상인 계급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재물들은 모두가 신의 것이며, 그들은 단지 신탁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는 부자가 재물을 쌓아놓고 인색하게 사는 것은 결국 지옥에 떨어질 가장 위험한 삶이라고 경고했다. 반면에 고아나 가난한 자가 갖고 누려야 할 권리, 부의 분배와 같은 그의 새로운 설교는 메카의 하층민과 신세대 젊은이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점차 그들이 무함마드를 지지하고 추종하게 되는 첫 번째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인 여러 요인들 때문에 메카인들은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한다. 처음에 그들은 하쉼가의 가장인 아부 딸립에게 무함마드를 설득하여 종교운동을 포기하게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다음에는 무함마드를 지지하는 사람에게는 상업적 봉쇄 조치를 취하고 경제적 보복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특히 하인이나 노예 같은 하층 계급의 무함마드 추종자들에게는 가혹한 박해가 가해졌다. 그들은 몰매를 맞거나 감금되고 음식과 물을 빼앗겼으며, 심지어는 한낮의 뜨거운 햇볕에 알몸을 드러내 놓고 살을 태우는 고문을 받기도 하였다. 하쉼 가문에는 경제, 사회적인 제제가 가해져 결국 격리되고 불거래 대상이 되어고통스러운 고립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포교 10년째가 되는 619년 무함마드에게 가장 어려운 해였다. 역경 속에서도 마음의 기둥이 되어주던 숙부 아부 딸립이 세상을 떠났고, 훌륭한 내조자였던 부인 카디자도 죽어 그는 실의와 절망 속에 놓이게 된다. 이제 무함마드는 전보다 훨씬 더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기 어렵게 되었다. 계속 새로운 신자들이 생겨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로서 그의 활동과 위치는 더 위축되었다. 이와 같이 메카 포교 10년간은 박해와 수난의 시기였다.그는 메카를 떠나 종교적 기반을 닦고 쌓을 새로운 도시를 찾아야만 했다.







신앙 공동체 움마 건설



포교 11년 째에 접어든 620년, 좌절에 빠져 있던 그 앞에 서광이 비쳤다. 메카 북방 400km 떨어진 야스립에서 온 순례객들이 무함마드의 설교를 들은 후 깊은 종교적 감명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다음 해인 621년 순례 때에도, 그 다음의 622년 순례 때에도 메카에 와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알라와 그의 사자 무함마드를 위해 싸울 것을 맹세한다. 그리고 같은 해 무함마드는 신으로부터 이주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 이에 따라 약 200여명의 메카 무슬림들은 고향을 떠나 야스립으로 옮겨가는 이주를 단행한다. 622년 7월 16일의 일이었다. 이슬람 역사에서는 이 이주의 해를 매우 중시하고 있다. 이슬람 공동체가 만들어져 이슬람 국가가 태동하는시점인 동시에 이슬람력의 원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무함마드는 가장 늦게 메카를 떠나왔다. 그 날은 꾸라이쉬들이 잠든 그를 공격하여 살해할 계획을 세웠던 날이었다. 사전에 이를 안 무함마드는 침소에 사촌 동생 알리를 대신 남겨 두고 친구 아부 바크르와 사지를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야스립으로 가는 도중에 한 동굴에서 그와 아부 바크르는 3일 동안 숨어 지냈는데, 그를 추격해 온 꾸라이쉬 수색대가 동굴 안까지 들어왔지만 잔뜩 쳐져 있는 거미줄을 보고는 그냥 되돌아 간다. 후대 무슬림들은 이 사건을 신의섭리에 의한 기적적인 일로 말하고 있다. 무함마드는 9월 24일, 무사히 야스립에 도착하였다. 야스립은 이 때부터 메디나(원래는 메디나 안 나비, 예언자의 도시)로 개명되어 불리게 된다.



히즈라는 이슬람교의 새로운 장을 열게 하였다. 무함마드는 메카에서부터 그를 따라 이주해온 무하지룬(이주자들)과, 메디나에서 그를 지지하며 받아들인 메디나 원주민들인 안사르(지원자들)를 형제애로 묶어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인 움마를 건설한다. 메디나 헌장을 만들어 채택하고 후일 이슬람 대제국으로 번성해갈 이슬람교국의 기초를 닦아 놓은 것이다.





전 아라비아 반도의 이슬람화



메디나에서 움마 건설에 성공한 무함마드는 메카의 꾸라이쉬들과 세 차례 중요한 전쟁을 치른다. 첫 교전은 624년 4월(라마단 달)에 치러진 바드르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불과 300명 남짓한 무슬림군은 천 명에 가까운 메카군을 격파한다. 승리의 요건은 무엇보다 신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무함맏의 지위는 크게 격상되었다. 전투에 참가한 무슬림들에게 메디나에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기적적인 이 승리는 곧바로 신앙이 되어 그들의 가슴 속에 남게 되었다.



바드르 전투는 메디나의 이슬람 공동체와 메카의 꾸라이쉬족 사이에 계속 치러야 할 전투들의 시작에 불과했다. 만 1년만인 625년 3월, 메카 쪽에서는 복수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전투는 메디나 북방 약 4-5km 지점인 우후드에서 벌어졌다. 우마이야가의 가장이었던 아부 수피얀이 이끈 메카군 3천 명과 무슬림군 7백 명이 대결하였던 이 전투에서 무함마드는 75명의 무슬림을 희생시키는 큰 패배를 맛보았다.


그 후 2년 뒤 메카의 꾸라이쉬들은 사막의 유목민과 메디나에서 쫓겨난 유대인들과 결탁하여 600기의 기병을 포함한 약 1만 명 규모의 대 연합군을 다시 조직하였다. 그리고 627년 3월, 최후 결전의 다짐하며 메디나 원정에 나선다. 무장 기병대를 앞세운 메카 측 대군은 메디나를 포위 공격하면서 쉽게 대승을 거둘 것 같았다. 그러나 전황은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져 갔다. 무함마드군은 1개월 가까이 버티면서 메카 연합군의 산발적인 공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오히려 메카 연합군 내에서는 병참조달 문제로 끝내 분란이 일어나 퇴각을 해야만 했다. 이 전투는 참호를 파 방어에 승리하였기 때문에 칸다끄(참호) 전투라 불리고 있다. 이 전투 이후 무함마드의 권위는 급속히 신장되었다.


그는 꾸라이쉬 뿐만 아니라 대다수 아랍인들이 그의 종교를 받아들이고 알라의 예되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는 메카인들의 적대감을 없애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들을 어떻게 해서든 설득시켜 이슬람을 받아들이도록 해야 했다.그는 주변의 여러 유목민들과 차례로 동맹을 맺거나 우호 조약을 체결하여 힘을 배양해갔다.


630년 1월,무하마드는 무슬림군 1만 명을 거느리고 대망의 메카 원정에 나선다. 메카의 꾸라이쉬들은 이제 그의 적수가 못되었다.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메카 입성이 거의 무혈로 이루어졌다. 카아바 신전의 우상들이 폐기되고 카아바는 이슬람 성전이 되었다. 아브라함의 유일신 신앙을 되찾게 되었다. 360여개에 달하던 우상들을 버리면서 무함마드는 다음과 같이 크게 외쳤다.


"알라 아크바르(신은 위대하시다) 진리가 왔도다. 거짓은 사라져라!"



메카의 이슬람화는 곧 전 아라비아 반도의 이슬람화를 의미하였다. 아랍 부족 중 가장 강성했던 꾸라이쉬들이 무슬림화한 것은 또한 아라비아 반도의 거의 모든 아랍 부족 집단들이 이슬람화 하는 과정을 낳게 하였다. 이슬람력 9년(631)에는 자르바, 아드루흐, 마끄나의 유대인들과 아끄바흐의 기독교도인들과도 평화조약을 맺었다. 아라비아의 여러 다른 지역과도 병합하거나 조약을 맺었다. 각 대표단들이 신의 주권에 충성을 표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모여 들었다. 아랍 부족들은 특별한 신앙심이나 종교적 확신도 없이도 병합되었고 무슬림 공동체는 이들로부터 단순한 '신앙고백'이나 혹은 인두세를 받는 것으로 만족했다. 지금까지 어떤 인물에 의해서도 통솔되거나 어느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았던 아랍인들이 무함마드에 의해 지배당하게 되었다. 그의 고귀한 사명과 신앙, 높은 도덕성을 따르게 된 것이다. 움마는 이제 단순한 메디나 공동체가 아니었다. 전 아라비아를 지배하는 이슬람 공동체가 되었다. 아라비아 반도에 역사상 처음으로 이슬람에 의한 통일 아랍국가가 일어나는 그런 시점을 맺은 것이다.



예언자의 죽음



이슬람력 10년 째인 632년, 23년간 계속되던 신의 계시가 끝닜다. 이 해 무함마는 대 순례단을 인솔하고 메카 순례를 행하였다. 이것을 이슬람 역사는 무함마드의 고별순례 여행이라 부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와함께 순례를 했으며, 카아바 주위를 7번 돌고, 신성한 흑석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 후 순례자들의 정례 의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 순례에서 돌아온 3개월 후 그는 병으로 누워 6월 8일, '신의 길'을 위해 살아온 위대한 한 예언자로서의 생을 마친다. 그날은 기록적으로 무더운 날씨였다. 카디자 이후 가장 사랑했던 부인으로 알려져 있는 아이샤의 무릎을 베고 이 마지막 신의 사자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지막 예언자에 대한 종교, 정치, 사회적 평가



서구인들은 무함마드가 인류에게 끼친 종교적 영향이나 역사적 역할을 폄하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신의 예언자, 신의 사자로서 그에게 맡겨진 사명과활동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과 엇비슷하다. 중세 기독교인들은 무함마드를 거짓 예언자로 말하고 경멸의 대상이 되는 인물로 그려 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사기꾼으로 대하였듯이 그들의 눈에 비친 무함마드도 역시 한 가짜 예언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십자군 전쟁을 비롯하여 오랫동안 이슬람 세계와 서구가 적대해 온 역사적인 갈등관계 때문일 것이다. 서방 세계는 적어도 8세기에서 18세기까지 문화적, 경제적으로 이슬람 세계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었고, 그러한 열등의식과 종교적 이유 때문인지 사실상 중세 내내 무함마드를 왜곡시키는 정치적, 문화적 선전을 일삼아 왔다. 그 결과 무함맏의지위와 위상에 대한 편견과 오해의 층이 겹겹이 쌓이게 된것이다.


무함마드는 세상에 온 예언자들 중에서도 가장 현실적 삶을 산 인물이다. 그리고 신으로부터 이 땅에 마지막으로 파견된 예언자였다. 그는 아직 경전을 알지 못하던 메카지역에 파견된 예언자였다. 그가 전한 계시는 보편적 진리였다. 다시말해 그가 가져온 경전 '꾸란'은 이전의 경전들인 모세의 오경과 다윗의 시편, 예수의 복음서를 확증해주고 보완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꾸란'이 '순정의 경전'임을 거듭 강조하였다.

'꾸란'에서 이슬람은 유대교도 기독교도도 아니었던 이브라힘(아브라함)의 신앙에 기초하고 그 종교전통을 이어받은 종교임을 표방하고 있다.


"성서의 백성들이여 너희들은 어찌하여 아브라함에 대해 논쟁을 하는가. 구약이나 신약이

아브라함 이후에 계시되었다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아브라함은 유대인도 아니고

기독교인도 아니었다. 그는 하니프 무슬림이었다. 그는 우상숭배자가 아니었느니라."

(꾸란 3:67)


'꾸란'에서 언급한 예언자의 수는 25-28명인데, 이들은 모두가 동등한 지위이며 대다수가 구약의 인물들이다. 자카리아, 요한, 예수 등 신약성서의 인물도 포함된다.그 중 가장 돋보이는 예언자는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무함마드이다. 이들 모두가 하니프들이다. 하니프란 순정의 일신교도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들 중 끝자락에 있는 무함마드를 통한 계시에서 신은 앞선 경전들을 순화, 보완, 종합하여 종교를 완전케 하였다는 점을 이슬람은 거듭 강조한다. 무함마드는 예수의 뒤를 이어 이 땅에 보내어진 신의 사자이자 최후 예언자인 것이다. 그리고 종교는 그를 매개로 하여 인류에게 전한 '이슬람'으로 이제 완벽히 완성된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계시, 더 이상의 예언자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까 무함마드는 '예언자들의 봉인'으로서 예언자 체인의 마지막이다. 무슬림은 이것을 믿는다. 이것은 '알라는 유일하신 분'이라는 유일신 신앙에 다음가는 그들의 믿음이다. 이슬람 신앙의 다섯 기둥은 신앙증언, 예배, 구빈 종교세, 단식, 순례인데 그 중에서도 첫 번째인 다음과 같은 신앙증언을 하면 곧 바로 무슬림이 된다.


"알라 이외에 신은 없다. 무함마드는 신의 사자다."



무함마드의 가장 두드러진 정치적 업적은 종교와 국가라는 개념을 가진 이슬람 공동체, 움마를 건설한 일이다. 이 공동체는 '꾸란'의 가르침에 따라 통치가 이루어지고, 어려운 국사 결정은 슈라(협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예언자는 예배 인도자이자 합법적인 최고의 통치자였다. 움마는 종교 공동체 국가로 무함마드 생전에 이미 전 아라비아 반도를 지배하게 되었고 그의 사후 불과 20년 후에는 페르시아 사산조를 무너뜨렸으며 비잔틴 로마 제국에 속해 있던 시리아, 이집트 지역을 병합하였다. 나아가 그의 사후 100년째 되는 때에는 편잡에서 피레네에 이르는, 사마르칸트에서 스페인에 이르는 이슬람 대제국을 이룩하게 된다.



그가 이룩한 사회적 업적 또한 놀랄 만하다. 그는 고대 아랍 유목민 사회에 만연되어 있던 악습과 부도덕한 전통을 깨 사회적 개혁 운동가였다. 미신과 우상숭배 사상에 종지부를 찍고, 신생여아의 생매장, 음주, 난혼, 도박 등 구시대의 패덕하고 방종한 생활 악습들을 종식시켰다. 그리고 사회윤리, 도덕에 관한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하였다. 특히 그의 시대까지 상호 안전보장을 위해 사회 규율로 지켜지던 동태복수법의 피의 복수를 금하게 하고 보상금 또는 속전으로 그것이 대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는 개인 재산과 생명의 신성함, 존엄성을 강조하였다. 여인의 상속권, 결혼권 등 가족사회에서의 여성존중과 지위보장을 주장하였다. 더 중시할 것은 그가 '꾸란'에 근거하여 만민평등사상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가 타계하던 632년 소위 '고별의 순례'에서 그는 인류 평화선언이라 할 만한 유명한 마지막 설교를 하셨는데, 여기서 그는 사유재신의 신성함, 유산상속 문제, 이자의 금지, 살인 복수의 금지, 부부간 동등한 권리, 노예 처우와 해방 문제 등 인간 상호간에 필요한 평화 지침을 제창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간 모두는 인종, 민족, 국가, 피부색, 계급, 신분, 언어에 관계없이 신 앞에 평등하다는 인간평등선언을 하였다.


그는 인간의 우열은 선행을 실천하고 신을 경외하는 정도 이외의 어떤 경우에서도 가늠될 수 없다는 진리를 가르쳤다. 또 겸손이 교만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과 관대함, 덕, 인내가 무엇인지도 스스로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박애정신과 인도주의의 실천가이기도 했다. 20년간 박해하고 자신의 생명까지 위협하던 적대자들을 받아들였고 신의 용서를 빌어주었다. 그가 주창한 형제애와 평등사상은 아마도 이슬람이 세계화하고 보편적 종교로 퍼져가는 데 가장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내세뿐만 아니라 현세에서도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길을 가르쳐준 성인이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고 알라께서 창조한 모든 피조물은 인간에게 유용하게 쓰이고 봉사하기 위해 창조된 것임을 가르쳐, 인간이 곧 지상에서의 진정한 신의 대리인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는 또한 어는 정도의 금욕과 자아 수련이야말로 인간이 현세를 사는 정도임을 설교하였다. 부의 가치관에 대해서도 새로운 정의를 내렸다. 만물이 알라께 속하고 인간은 단지 신의 창조물과 재물에 대한 관리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가졌던 인품은 자애, 인자, 중용, 독신, 용기, 인내 등으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인류가 인생살이의 귀감으로 본받아야 할 것들이다. 그가 알라의 사자로서, 그리고 가족과 교우들 속의 한 구성원으로서, 사회 정치가, 행정가, 재판관, 군인으로서 걸어온 인생은 모든 무슬림들이 따라야 할 바른 인생의 표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무슬림들은 그의 언행이 담긴 '하디스 집'을 '꾸란' 다음가는 교리서로 채택하고 있다. 경전은 아니지만 이 하디스의 내용들은 무슬림 신앙과 실천의 원리적 가르침이 된 것이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자신의 신의 소명을 받은 예언자 이상의 존재가 아님을 스스로 거듭 강조하였다. '꾸란'에서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무함마드는 사자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니... ." (꾸란 3:144, 18:110, 48:29)


그렇기 때문에 무슬림들은 무함마단(무함마드 신봉자)이라고 부르는 것은 큰 오류다. 무슬림은 글자 그대로 '신에게 복종하는 자'이며, 이슬람은 '신의 뜻에 복종하는 종교'다. '이슬람'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스마일을 바치라는 복종의 시험에서 보인 것처럼 신께 '절대 복종하다'라는 뜻인아랍어 동사 '아슬라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메카 정복 이후 절대군주가 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평범한 통치자에 머물렀다. 신권정치를 펴는 교황이나 황제 같은 통치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예언자, 신의 사자라는 지위를 빌려 영적권위나 초인간적 힘을 과시하며 인간 위에 군림하는 어떤 초월적 존재나 절대적 권위자가 결코 되지 않았다. 그는 왕관을 쓰지 않았으며 옥좌 대신 마룻바닥에 앉아 통치했고, 스스로 옷과 신발을 수선했으며, 대추야자와 보리빵을 즐겨먹는 소박하고 겸손한 한 인간으로 살았을 뿐이다.


손주영. 한국외국어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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