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AMP OF ISLAM

정통 칼리파 (아부 바크르 (Abu Bakr))

Author
무스타파
Date
2016-01-20 14:23
Views
442

1400년 이슬람 문명의 길을 걷다.





정통 칼리파



632년 예언자 무함마드가 세상을 떠나자 무슬림들은 그의 뒤를 이어 공동체를 이끌어 나갈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했다. 그들은 새로운 지도자를 칼리파 라고 불렀다. 칼리파라는 용어는 원래 '후계자 또는 대리인'이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칼리파의 자리를 놓고 이슬람 공동체는 순니파와 쉬아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순니 무슬림들은 최초 네 명의 칼리파인 '아부 바크르, 오마르, 오스만, 알리'등을 특별히 정통 칼리파 라고 부른다. 하지만 쉬아 무슬림들은 알리를 최초의 칼리파이자 유일한 칼리파로 여긴다는 점에서 의견을 달리했다.정통 칼리파 시대 632-661년 동안 이슬람 세력은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 비잔틴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아부 바크르 (Abu Bakr)



후계자 선출과 첫 번째 칼리파



632년 6월 8일 예언자의 죽음은 무슬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대다수가 그 소식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신의 예언자가 범인과 똑같이 타계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서거가 사실로 알려지자 이슬람을 받아들인 아라비아의 일부 부족들이 예언자 무함마드가 전파한 복음과 진리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배교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슬람교가 이직 뿌리를 내리지 못한 때였다.



움마의 원로들은 닥쳐올지도 모를 공동체에서의 혼돈에 대처해야 했다. 무엇보다 급선무는 지도체제를 갖추는 일이었다. 그러나, 누가 움마를 이끌어 가야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신의 사자 무함마드는 그리 심각하지 않은 상태로 3개월 정도나 병석에 있었는데 자신의 후계자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남기지 않았다. 공동체의 조직과 건설에 천부적 재능을 보였던 그가 아직 미성숙한 공동체의 장래를 위한 대비를 과연 소홀히 하였을까? 훗날 출현하는 쉬아파 전통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자신의 사촌 동생이자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 딸립을 계승자로 지명했다고 말하지만 무슬림 공동체의 주류가 되는 순니 무슬림 사회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예언자는 아랍 부족 사회에서의 전통적 관행처럼 이 문제를 공동체의 선택으로 남겨놓은 것 같다. 부족장이 죽었을 때 고대 아랍 관습은 부족 회의를 열어 후계자를 선출하는 것이었다. 부족장의 지위가 세습이 아닌 부족 내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에게 이양되게 하는 방식이다. 그가 지닌 지도력과 덕망, 카리스마로 공동체 원로들의 추대를 받아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함마드는 이점을 숙고했던 것 같다. 누군가를 그가 지명하더라도 그 지명자가 무슬림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 '꾸란'에 의하면 예언자권은 분명히 그에게서 끝이 났다. 무하마드 이후에는 예언자, 신의 사자가 없다는 것이 거듭 강조되었다. 따라서 어떤 지도자도 예언자권을 내세우며 통치의 합법성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경륜과 영향력, 공동체의 번영과 복지를 위해 얼마만큼 봉사할 수 있는 인물인지와 같은 여러 조건들을 고려하여 최고의 적임자를 지도자로 뽑아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관습에 따라, 일단 수장이 선출되면 부족원들은 한 사람씩 그와 악수를 하며 축하의 인사와 함께 그에 대한 복종의 예를 행하였다. 이러한 복종의 예가 이슬람 공동체에서는 바이야(충성서약)라는 관행으로 자리 잡는다.



아부 바크르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는 572년 메카에서 태어났으며, 예언자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꾸라이쉬족의 타임 가문출신이었다. 원래 이름은 압둘 카아바(카아바의 종)였는데, 이슬람을 받아들인 후 압달라(알라의 종)로 개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예쁜 딸 아이샤(후일 무함마드와 결혼)를 낳은 뒤부터 즐곧 아부 바크르(소녀의 아버지)라고 불렀으며, 예언자에 의해서는 주로 앗 싣디끄(신실한 자)로 장해졌다. 그는 메카의 부자 상인이었다. 하지만 소유 재산 전부를 아낌없이 이슬람 선교를 위해 바치고 일생을 검약하고 가난하게 산 것으로 유명하다. 아에 예언자에게 재산 처분권을 양도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그는 이슬람을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고 있던 많은 무슬림 노예들을 사서 해방시켜 주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해방 노예 빌랄이다. 빌랄은 청아한 목소리를 가져 무함마드 시대에 첫 무앗진(예배 시간을 육성으로 알리는 사람)이 되었다.



아부 바크르는 가장 먼저 이슬람을 받아들인 첫 무슬림 중의 하나다. 첫 계시가 내려졌을 때 그는 상업 여행을 떠나 예멘에 머물고 있었다. 메카로 돌아온 뒤 그는 아부 자흘 아타바, 쇼바와 같은 꾸라이쉬 지도자들이 친구인 무함마드가 선포한 예언자 지위를 비웃고 조롱하는 것을 목격하고는 격분하였다. 그리고는 곧장 무함마드의 처소로 달려가 예언자 앞에서 이슬람에 귀의하였다. '칼리파들의 역사'의 저자 수유티에 의하면, 예언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내가 이슬람 신앙을 권하였을 때 대개가 주저함을 보이는 것이

상례인데, 아부 바크르는 전혀 망설임 없이 즉각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그는 예언자의 가장 가까운 동료이자 고문이었다. 충심을 다해 예언자를 보필하고 많은 위험과 시련을 함께 견뎌냈다. 그는 메디나에서 메카로 이주할 때 메카의 꾸라이쉬 추적자들을 피해 사흘 동안 동굴에서 예언자와 피신해 있던 동반자였으며, 무함마드가 병중에 있을 때에는 예언자의 요청에 의해 예언자 대신 집단 예배를 인도하는 이맘(예배 인도자) 의 역할을 맡아하였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로는 최초의 무슬림은 예언자의 부인 카디자이고, 다음으로는 사촌동생 알리이며, 세 번째가 아부 바크르라는 것이다. 이슬람 초기 역사에서 큰일을 하는 여러 인물들이 그의 손을 거쳐 이슬람에 입문하였다. 오스만 빈 아판, 앗 주바이르 빈 아왐, 딸라하 빈 우바이달라 등이 그들이다.



무함마드의 사후 움마 원로들의 의견은 처음에는 갈라져 있었지만 아랍인들이 꾸라이쉬 부족 출신의 지도자 외에는 결코 복종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자 점차 이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것은 메카에서 무함마드를 따라 이주한 무하지룬(이주자들) 중에서 무함마드의 후계자가 나와야 한다는 견해였다. 사실 그들은 첫 무슬림들이고 누구보다 헌신적인 신앙인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아부 바크르와 오마르가 최적의 인물로 거론되었다. 둘 다 예언자의 장인이고, 똑같이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신뢰받던 동료이고, 무하지룬은 물론 안사르(메디나 원주민들)들에 의해서도 높이 존경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부 바크르는 61세였고, 오마르는 그보다 12살 아래였다.이 때 오마르가 회의의 흐름을 장악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과 같이 말하며 아부 바크르를 추대하였다.



"예언자께서는 당신들에게 예배를 인도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칼리파(후계자, 대리인)이십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렵니다."

그리고는 원로들을 향하여 말을 계속하였다.

"그는 가장 덕망 있는 분입니다. 두 분이 함께 했을 때(메디나 이주 때 예언자와 동행하여 동굴에 3일간 은신) 그가 두 번째 분이었고, 예배를 위해 예언자가 명한 예언자의 대리인이었습니다. "



열정과 진실에 찬 그의 말이 좌중을 감동시켰다. 그리고는 말하였다.

"손을 펴십시오, 충성 서약을 하겠습니다."

아부 바크르가 손을 내밀자 충성 서약을 했고 원로들이 차례로 그 뒤를 이었다. 아부 바크르의 칼리파 선출은 이같이 회중의 만장일치로 이루어졌다. 아부 바크르는 곧 군중이 모여있던 모스크로 나아갔다. 이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연설을 남긴다.



"더 훌륭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이제 나는 여러분의 통치자입니다. 만약 내가

잘한다면 나를 도와 주십시오. 그러나 만약 내가 잘못했다면 나를 바르게 이

끌어 주십시오."



이렇게 아부 바크르는 무슬림의 첫 칼리파가 되었다. 이슬람 공동체 국가의 통치 제도로 근세까지 존속(1924년 오스만 터키에서 폐지)해 온 이슬람 칼리파제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칼리파는 선거로 뽑으며 그에게 충성선서를 하는 관행(순나)이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협의(슈라), 공동체의 합의(이즈마아), 선거제 등 민주적이며 공화주의적인 것들이 이슬람의 정치 원리로 세워지게 된다. 아부 바크르에게 주어진 공식 명칭은 칼리파 라술룰라(신의 사자의 대리인)였다. 이를 줄여 칼리파라는 칭호가 만들어졌다.





움마의 정치적 통합



아부 바크르는 예언자와 같은 권력과 권위를 갖지 못하였다. 그의 통치권은 움마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종교적 권위도 제한된 것이었다. 그의 사명은 신의 명령들과 가르침, 예언자의 순나를 그대로 수호하고 지켜내는 일이고, 무함마드에 의해 만들어진 정치, 종교적 체제를 그대로 유지시키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이슬람의 수호와 움마 통치의 책임이 부여된 일인데,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원심분리적인 아랍인들은 언제든지 다시 부족주의 사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의 칼리파 재위 기간은 불과 2년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무너질 개연성이 짙었던 공동체를 굳건히 지켜내는 위대함을 보여주었다. 아라비아 반도 내에 이슬람 통치의 기초를 확고히 해 놓은 것이다. 아랍사가들은 그의 가장 큰 공적으로 무함마드의 죽음과 동시에 일어난 배교자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반도 내에 다시 정치적 통합을 일궈 냈다는 것을 뽑고 있다. 아랍 부족들이 친 이슬람 연대의 길을 걸었던 것은 단지 무함마드의 권위에 굴복하였기 때문이었다. 무함마드가 죽자 이제 그들은 그 동맹관계에서 벗어나려 했다. 거의 모든 베두인족들이 자카트(종교세) 내기를 거부하고 배교의 길을 택했다. 칼리파는 무슬림 공동체의 통일을 위해 무력으로 이를 단호히 다스려야만 했다. 칼을 뽑아들고 무슬림들 앞에 서서 자신을 따를 것을 외친 다음의 말은 그의 유명한 연설로 남아 있다.



"너희 중 누구라도 무함마드를 믿었느냐? 보라! 그는 죽었다. 그러나

너희가 알라를 믿었느냐? 그분은 살아계시고 결코 죽지 않으신다."



무함마드 시대가 이슬람 국가 건설의 초석을 놓은 단계였다면 칼리파 아부 바크르 시대는 그 국가의 기초를 굳게 다진 강화단계의 시대였다. 그의 칼리파제 아래에서 무슬림들은 재단합하여 통일된 움마를 이루었다.

수많은 배교자들이 이슬람으로 되돌아오다



즉위하지마자 칼리파로서 첫 결단을 내렸던 것은 우사마 원정대의 파병 문제였다. 무함마드는 임종 수주일 전에 팔레스탄인 지역에 나가 비잔틴군과 싸우다가 순교한 그의 양아들 자이드의 원수를 갚게끔 자이드의 아들인 우사마 빈 자이드에게 시리아 쪽 원정대의 군 지휘권을 맡겼다. 그러나 급변해 가는 아랍 부족민 사회의 정세도 그렇거니와 우사마의 연령(18세)이 그런 대임을 수행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파병 계획 철회안이 제기 되었다. 칼리파는 숙고 하였으나 예언자가 정한 것을 변경하지 않았다. 아부 바크르는 행군을 시작하는 군사들을 전송하면서 우사마에게 '어린이, 노약자, 부녀자를 살생하지 말것. 수목을 해하거나 불사르지 말 것, 인명과 재산을 보호할 것, 소나 낙타 등 짐승을 도샇하지 말 것, 신앙에 충실할 것'등을 당부하였다. 우사마군은 예언자 서거 3주 후에 메디나를 떠나 40일 후 큰 승리를 안고 회군한다. 어려운 상황에서 결연히 내린그의 결정은 실효를 거두었다. 그의 강한 신념의 승리이기도 했다. 술렁이던 많은 수의 배교자들이 스스로 이슬람으로 다시 돌아왔다.



중앙아라비아 나지드 고원 동남 쪽 야마마 지방에서 세력을 떨치던 무사일라마 알 카답은 자칭 예언자로 등장한 대표적인 배교자 무리의 본보기다. 하니파 부족 출신인 그는 기독교적 색채가 짙은 교리를 내세우며 그의 부족을 중심으로 추종 세력을 이끌었는데 사자흐 알타미야와 결혼한 뒤에는 타밈족이 그에게 가담하여 두 부족이 연대하게 되었다. 처음에 아부 바크르는 이크라마를 보내 이들을 토벌하려 했으나 실패 하였다. 다시 칼리드 빈 알 왈리드를 사령관으로 하는 두 번째 토벌군이 조직되었다. 그리고 633년 초 아끄라마에서 4만의 베두인군과 대결한 칼리드는 격렬한 전투 끝에 무사일라마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후일 '알라의 검'이란 칭호로 불리게 되는 무적의 용장이 칼리파 아부 바크르의 신임에 보답하는 승전이었다. 이 승리는 배교자들이 보인 내란의 실제적 종식을 의미했다. 무사일라마 외에 예언자를 참칭하며 봉기했던 자들로는 예멘 지역의 알 아수와드 알 안시와 남부 아라비아의 아사드 가문의 뚤라이하 빈 카와일리드 등이 있었지만 모두 진압당하거나 살해되었다. 아라비아는 이슬람 통치 아래 재통합되었다.





페르시아 제국과 비잔틴 제국을 향한 군사 원정



배교전쟁 이후 칼리파군은 북방으로 아랍-무슬림 세력을 뻗어 나가게 하는 새 길을 연다. 아부 바크르는 이러한 아랍-무슬림군의 원정 계획에 동의했다. 하나는 북동쪽 이라크로 진출하여 페르시아 제국으로 향하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북서쪽 시리아로 진출하여 비잔틴 치하에 있는 여러 지역들로 뻗어나가는 길이었다. 633년 4월, 칼리드는 이라크 쪽으로 아랍 무슬림 원정대를 이끌고 페르시아 국경을 넘었다. 그리고는 유프라테스 강의 히라와 안바르를 함락한다. 히라는 페르시아 제국의 후원아래에 있던 아랍-페르시아 완충 지대의 위성도시였다. 이로써 아랍-무슬림군은 아라비아 반도 밖으로의 첫 정복지를 갖게 되었다. 히라 정복은 페르시아 제국을 향한 정복 사업이 펼쳐지는 전주곡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커가는 이슬람 움마의 국가재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이슬람 신앙이 아라비아의 국경 너머로 퍼져나가게 되는 전기이기도 했다.



두 번째 방향인 샴 지역, 즉 팔레스타인-시리아 쪽의 첫 원정은 633년 가을에 결행되었다. 수세기에 걸쳐 다듬어진 비잔틴 제국의 군사력과 거친 사막의 아랍군의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칼리든 빈 왈리드는 아부 바크르의 명을 받아 동부 쪽으로 진격하던 것을 멈추고, 팔레스타인 서부 전선에서 비잔틴군의 반격으로 곤경에 처한 무슬림군을 돕기 위해 급파하였다. 이 때 칼리드의 군대가 끝없는 긴 사막을 통과하며 18일 간의 위험한 행군을 감행한 것은 중세 아랍 전사에 기록되었다. 칼리드는 634년 6월 동부 시리아의 아랍군과 연합하는 데 성공한다. 아랍어와 아람어를 사용하는 비잔틴의 기독교계 아랍 복속민 갓산인들이 이슬람군에 협력하였다. 중과세에 시달리던 시리아 지역권의 주민이나 아랍 부족들이 비잔틴 제국에 등을 돌린 것이다.



다마스쿠스는 여섯 달 동안의 저항 끝에 635년 9월 드디어 항복한다. 이와 같이 아랍인 전위 정복군이 팔레스타인과 아라크에서 싸우는 동안에 정통 칼리파 시대의 문을 연 초대 칼리파, 아부 바크르는 634년 8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오마르가 칼리파 위를 계승한다. 오마르는 아부 바크르가 시작한 북벌 계획과 그 역사를 완수해야 할 임무를 띠고 칼리파 위에 즉위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대임을 완수하며 대 아랍 제국을 건설하는 큰 인물이 된다. 아부 바크르의 칼리파제는 2년 3개월 11일 간 지속되었다. 영면할 때 그는 63세였으며, 예언자 곁에 뭍혔다.





손주영, 한국외국어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