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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제국의 실제적인 건설자 오마르(Umar b, al-Kattab)

Author
무스타파
Date
2016-02-18 08:47
Views
465

1400년 이슬람 문명의 길을 걷다

 

이슬람 제국의 실제적인 건설자 오마르(Umar b, al-Kattab, 583-644)

 

 

꾸라이쉬족의 영웅, 이슬람으로 귀의하다

 

제 2대 정통 칼리파 오마르 빈 카탑은 메카 꾸라이쉬 부족의 아디 가문 출신이다. 583년 중산층의 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으며자랐고, 보통 사람과는 다른 건장한 육체와 강인한 정신을 지닌 특별한 젊은이로 성장하였다.

 

이슬람을 받아들이기 이전의 그는 불같은 성격에 대단한 애주가였다. 이슬람을 이단적 교설로 단정하고, 앞장서서 이슬람에 적대하던 꾸라이쉬족 사람들 중 하나였다. 심지어 그는 무함마드를 살해할 의도까지 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누이동생이 이슬람 신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여동생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의 누이동생이 읽고 있는 '꾸란'의 일부 구절들을 듣게 되었을 때, 그는 깜짝 놀랐다. 그 내용의 심오함뿐 아니라 수려한 문체, 언어적인 미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다. 그는 주체할 수 없이 오묘하고 신비한 염감을 느끼며 그 자리에서 마음을 바꾸어 개종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알라의 뜻이었다. 이 같은 그의 삶 자체의 급속하고 완전한 반전은 기독교사에서의 사도 바울의 경우를 연상케 한다.

 

이슬람으로 귀의하기 이전의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메카에 사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 같이 그도 상인이었다. 대맥류의 곡식들을 취급하는 곡물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지만 그는 동시대 사람들과는 여러 면에서 다른 독특한 인물이었다. 단지 글을 읽고 쑬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그는 시를 사랑하고 수사와 웅변에 능한 문장가였으며, 이보다 더욱 그를 유명하게 했던 것은 뛰어난 그의 기마술과 검술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메카의 격투기 참피언이기도 했다. 그는 총 9명의 여인과 결혼하고 세 차례 이혼을 하였으며, 슬하에 9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두었다.

 

그가 이슬람을 받아들인 때는 무함마드가 포교를 시작한지 5년째 되는 해로 그의 나이가 32세였다. 그의 귀의는 이슬람 전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꾸라이쉬족 내에서 차지하던 그의 높은 위상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꾸리이쉬족의 영웅이었다. 타 부족과의 분쟁이 발생했을 때 꾸라이쉬족의 대표 사절이었고, 능변과 정의감, 용맹스러움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예언자 무함마드와 소수의 무슬림들은 그 때에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로 심한 박해 속에 있었는데, 그는 자신이 이슬람 신자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꾸라이쉬족 중 아무도 정면으로 그에게 맞서려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는 메카 사회에서 영향력을 가진 남자였다. 이제 그는 예언자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가 되었다. 무함마드가 치른 군사적 원정에 전회 참가하였고, 움마 통치의 중대사마다 자문하는 충실한 보좌역이 되었다. 오마르는 약간 불그스레한 갈색 피부에 키가 유난히 크고 몸집이 큰 매력적 외모의 소유자였다. 거구면서도 매우 민첩하고 걸음이 빨랐으며, 숙련된 검투사로서의 기능은 누구도 당해 낼 수 없는 상대였다.

 

무함마드는 그를 알 파루우끄 라고 불렀다. 진리와 정의의 수호, 영웅적 행동에서 그를 따를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언자가 오마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고 전해진다.

 

"만약 나 다음에 신의사자가 있다면 아마도 그는 오마일것이다."

 

무함마드가 죽었을 때, 오마르는 초대 칼리파로 아부 바크르를 추대하고 그에게 충성 서약을 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아부 바크르 칼리파 시대 동안에는 최고 까디(재판관) 역할을 하였고, 칼리파의 수석 고문이었으며 진정한 칼리파의 오른팔이었다. 그는 수많은 정통 하디스들의 전승자이기도 하다. 예언자의 언행을 무려 537편이나 전하고 있다.

 

 

원로들의 만장일치로 칼리파 추대

 

스스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었음을 느끼게 되었을 때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 때와 같이 칼리파 계승자에 대한 언급을 남기지 않는다면, 무슬림들이 분열되거나 그가 즉위했을 때처럼 배교주의가 다시 일어나 움마가 난국에 처하지 않을까 염려하게 되었다. 그는 당대에 어울리는 카리파 위의 적합한 인물상은 뛰어난 통치력에 단호하고 결연한 의지를 지닌 강한 인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는데, 그 최적임자는 아무리 심사숙고해 보아도 오마르 빈 알 카땁이었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 오마르는 사실상 권좌 뒤에 있던 실권자였다. 그는 먼저 압둘 라흐만 빈 아우프와 오스만 빈 아판 같은 대표급 원로들과 이 문제를 먼저 협의하였다. 오마르를 다음 칼리파로 추대하고 싶다는 그의 의견에 그들은 진심으로 찬성하였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마르는 예언자 시대나 그의 시대에서나 움마의 통수권자가 될 만한 충분한 자격과 능력을 증명해 보였으므로 아마도 그의 선택과 추대가 이니었다 해도 자연히 후계자 1순위에 오를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칼리파는 만족해하며 모스크에 나아가 군중 앞에서 새 칼리파 옹립에 대한포고령을 발표하였다.

 

"나는 오늘 오마르 빈 알 카땁을 여러분의 칼리파로 선출하였습니다.그에게 복종하십시오."

 

 

대대적인 영토 정복 사업

 

오마르는 아랍의 실질적 건설자로 불린다. 그의 치세 10년(재위 634-644)동안 페르시아의 거의 전역과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등 비잔틴 로마의 동방 영토가 정복되어 이슬람 영토가 되었고, 이슬람 움마는 광대한 지역을 다스리는 제국이 되었다. 국가의 통치체제에도 다양한 변화가 요구되었다. 따라서 오마르는 새로운 군사와 행정제도를 확립하고 거대해진 국가예산과 조세, 수입,연금 등 국가 재정임무를 관장하는 국가채무기구, 다완을  설립하였다. 또한 그는 정복 전쟁에 참가한 이랍-무슬림 전사들을 위해 정복지에 새로운 아랍 병영도시인 암싸르를 건설하였는데 이 도시들은 지역권의 군사와 행정을 통괄하는 지방의 중심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칼리파 오마르의 최대 업적인 그의 정복 사업은 크게 세 갈래로 추진되었다. 첫째는 이라크-페르시아 쪽으로의 것이다. 첫 원정은 아비우바이다 빈 알 자라히 앗 사까피에게 맡겨졌는데 그는 페르시아군과 수 차례 접전 끝에 알 자스르 전투에서 그만 패하고 말았다. 사산 조의 야즈다키르드 3세는 맹장 루스람휘하에 대규모 군대를 보내어 이라크쪽 수비를 크게 강화해 놓고 있었다. 패배 소식을 접한 오마르는 사아드 빈아비 와까스를 다시 파견한다. 아랍의 위대한 장군이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메디나를 떠나며 약 2000명의 병력을 모집하여 진군하기시작했는데 그 중 많은 수가 예멘 출신이었다. 이것은 당시 아랍인들이 얼마만큼 군사 원정에 관심을 갖고 자진하여 참여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다.

 

사아드의 아랍군은 이라크의 관문인 까다시야에서 3만 명에 달하는 루스탐 휘하의 페르시아군과 대치하였다. 이때 아랍-무슬림군의 수는 만 명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루스탐은 아랍군을 오합지졸이라 비웃었다. 637년(이슬람력 15년)에 일어난 이 까다시야 전투는 이슬람 역사의 가장 중요한 전투 중의 하나로 기록된다. 치열했던 전황은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시아 사산 조의 멸망을 초래하게 만드는 페르시아군의 대패로 끝난다. 티그리스강의 서북 이라크 전부가 무슬림군의 손에 놓이게 되었다. 루스탐과 수많은 군사들이 전사하였고 페르시아 군대는 강을 건너 도망했다. 아랍인들은 전에 본 적이 없는 엄청난 전리품을 얻었다. 그 후에도 아랍 군대는 페르시아군에 백전백승하고 드디어 수도 크테시폰을 두 달 동안 포위한 끝에 점령하게 된다.

 

이제 페르시아의 기운은 쇠잔하였고 야즈다기르드 3세는 도망 다니는 군주가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패배가 640년 이슬람력 21년), 나하완드에서 뒤따랐다. 페르시아 제국은 방어에 최선을 다했지만 새롭게 떠오르는 아랍의 기운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 후 칼리파 오스만(644-656재위) 시대에  제국의 최동북부 지방으로 쫓겨 간 야즈다기르 3세는 다시 옥시스강(아무 다리아강)까지 추격당하다가 결국 651년(이슬람력 31년) 후라산에서 살해당하고 만다. 페르시아 사산 조가 역사에서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페르시아는 모두 무슬림의 소유가 되었다. 찬란한 문명의 대 제국이 아랍의 한 속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아랍은 페르시아를 정복함으로써 엄청난 부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런 부와 재물은 검약하고 절제된 생활에 익숙해 있는 아랍인들을 현혹시켰다. 헐벗고 단순하던 삶에서 풍요로운 정착민의 삶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칼리파 오마르는 강직하면서도 지혜롭고 정의로운 통치자였다. 전리품은 공정하게 분배되었다. 그리고 오마르는 정복지의 토지 소유만큼은  무슬림들에게 엄격히 금했다. 이러한 여러 긴급조치들은 급속히 성장하고 있던 국가를 강성하게 만드는 초석이 되었다. 무슬림들은 쿠파와 바스라를 건설하고 쿠파는 이지역 무슬림 통치의 본부가 되었다. 페르시아인들은 점차 이슬람을 그들의 종교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페르시아는 아랍-무슬림들의 통치를 받게됨으로써 이슬람 역사, 문화의 중요한 한 요소가 되었다. 중과세에 허덕이던 페르시아인들은 대체로 사산 조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준 아랍을 환영하였다.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병역의 의무 대신에 인두세를 바치면 보호받는 신민이 될 수 있었다. 이슬람은 평화와 관용, 화합의 종교다. 예언자의 외손자, 후세인은 빈 알리는 페르시아의 최후의 왕, 야즈다기르드의 딸 중 하나와 결혼하였다. 그 때문에 페르시아 후대인들은 후세인의 혈통을 중시하였고 이것은 이슬람 전파에도 일조하였다. 또한 후일 쉬아인들의 페르시아 정착에도 일익이 된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번 째 길은 시리아 팔레스타인 쪽으로 이 지역 정복의 꿈을 실현한 대결전은 요르단강 지류인 야르무크 강변에서 벌어져 야르므크 대전이라 불린다. 636년 8월 20일이었다. 헤라클리우스의 비잔틴군을 이끈 총사령관은 황제의 동생인 티오도루스였다. 그들 군의 대다수는 아르메니아인이었는데 용맹스런 아르메니아 장군 마한의 지휘 아래 있었다. 그의 군대에는 8만 명의 주력군 외에도 갓산의 기독교인들이 상당수 합류하고 있었다. 따바리와 이븐 알 아시르 같은 아랍 역사가들은 이 때 무슬림군은 약 4만 명을 넘지 않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비잔틴군이 수적으로 두 배가 넘으면서도 이 전투는 칼리드와 사령관 아부 우바이다 알 지르라힌의 군사적 천재성과 아랍 무슬림들의 용맹성을 증명해주는 아랍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그날은 모래 바람이 세차게 불어 대는 흐리고 몹시 더운 날이었다. 아랍군의 지휘부는 전술상 이날을 격전의 날로 택하였다고 한다. 비잔틴의 패배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살아 돌아간 군사의 수는 극히 드믈었고 알렉산더 이래 서방의 지배를 받던 시리아는  다시 아랍의 땅이 되었다. 시리아 전 지역이 637년 완전히 병합되고 예루살렘은 638년에 떨어졌다. 칼리파 오마르가 즉위한 지 4년만에 거둔 쾌거였다. 무슬림들이 이라크에서 시리아, 팔레스타인으로 이어지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새 주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집트쪽으로 진격이 시작된다.

 

세 번째로 이집트 쪽 정복의 영웅는 아므르 빈 알 아스였다. 그는 지략과 대담성에서 칼리드와 필적할 만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군대는 아이리쉬를 점령하고 640년 1월에는 비잔틴의 카이로 요새 바빌론 성을 공략하기 시작한다. 칼리파 오마르는 지원군 5천 명을 급파하고 난공불락이라던 이 요새는 일곱 달만의 항전 끝에 함락 당한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당시 수도였던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함으로써 이집트 정복 전쟁이 마무리 된다. 이집트도 이슬람 움마의 한 속주가 되었다. 이집트 콥트인들은 비잔틴의 압제를 벗어나게 해준 아랍-무슬림군을 페르시아인들보다 더 환영하였다. 간명한 교리, 단순한 체제 때문에 페르시아인과 이집트인들은 이슬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집트 정복은 곧 북아프리카 이슬람화의 씨앗이 되었다. 그리고 이집트는 그 뒤 불과 70년만에 스페인까지 이슬람이 팽창하게 되는 전초 기지가 된다.

 

아랍이 페르시아와 비잔틴 양대 제국을 상대로 하여 이런 군사적 성공과 영토확장을 단기간에 이룰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그 요인을 간추려보면 먼저 아랍군이 비잔틴과 페르시아군보다 병력면에서나 무기, 장비면에서 보잘 것 없었지만 기마술과 정신력, 사기면에서는 양 대국을 앞질렀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모든 아랍군 전사가 종교적 열정을 지닌 무슬림 신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무슬림 주력군은 모두 신앙으로 무장되어 있어서 그들은 천국으로 가는 지름길로써 순교와 신의 정명(定命)을 믿었으며, 따라서 부대마다 강한 신앙심, 정신력으로 사기가 드높았다. 무슬림군에게는 모든 전쟁이 곧 지하드(성전)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양자 간 오랜 싸움으로 비잔틴 로마나 페르시아 사산 조 모두 지칠대로 지쳐 있었고 게다가 비잔틴 치하의 시리아인, 이집트인들은 오랜 예속된 생활, 높은 세금으로 허덕이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더불어 종교적 이유도 있었다. 비잔틴 제국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인정하는 교리를 내세웠으나 이집트의 콥틱과 시리아의 기독교도는 예수의 신성만을 믿는 단성론자들 같이 신학적인 이견을 보였다. 따라서 시리아와 이집트의 기독교도인들은 아랍-무슬림들의 내습이 오히려 비잔틴의 교리적 속박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아랍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고유 종교를 고수한다면 단지 2디나르의 지즈야(인두세)를 내면 되었다. 그것도 여인과 노인, 어린이들은 제외였다. 칼리파는 그들 교회의 보호도 약속하였다. 이와 같은 포용정책은 그들에게 아랍 무슬림 통치에 만족감을 느끼게 하였다. 더욱이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비반틴 로마의 오랜 박해에서 벗어나는 것을 무엇보다 기뻐하였다.

 

이상에서와 같이 정복 사업으로 칼리파 오마르 시대에 하자즈의 이슬람 메디나 정부는 페르시아,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지배하게 된다. 그리고, 점령지 통치를위해 새 무슬림 도시들을 각지에 건설하였던 것은 칼리파 오마르의 가장 중요한 치적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슬람력 16년에 건설한 바스라 시는 인도와 중국으로의 중세 동방 무역에 중요한 교역 중심지가 되었다. 다음해 다시 쿠파시를 건설하는데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이 도시는 처음에는 아랍군 병영도시로 출발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정치, 경제 특히 학문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로 발전해 간다. 또한 일렉산드리아 정복 후인 이슬람력 20년에, 아므르는 칼리파의 명을 받고 이집트에 새로운 도시 푸스따뜨를 건설했다. 이는 후일 카이로시가 된다. 무함마드 사후 불과 12년 만에 그의 뒤를 이은 두 칼리파는 종교와 정치 양면에서 대단한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이상적인 이슬람 통치의 모범

 

칼리파 오마르는 10년 동안 이슬람 움마를 통치하였다. 그리고 644년, 아부 루울리야라는 페르시아 노예에게 피살당하였다. 그는 독이 묻은 칼에 6차례나 찔렸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도 그는 정신력으로 3일을 견뎌냈는데 그동안 그는, 다음 칼리파 선출을 위한 6인으로 구성된 선거인단을 위촉해 놓았다. 후일 무슬림 법학자, 정치사상가들이 이슬람 칼리파제 이론을 세우면서 칼리파 선출의 모범적인 예로 제시하는 한 방법을 남겨 놓은 것이다. 그는 결코 전제 군주가 아니었다. 오로지 '꾸란'의 가르침에 따라 통치하려 하고 무함마드와 아부 바크르가 남긴 관행을 그대로 따르려 한 신앙심 깊은 민주적 칼리파였다. 따라서 그는 이상적인 이슬람 통치의 모범을 보인 으뜸가는 칼리파로 후대인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다. 그는 아미르 알 무으미닌(신자들의 총통)이라고 불린 최초의 칼리파였다. 광대한 영토 획득과 더불어 새로운 통치 문제가 난제로 대두했지만 그 필요에 잘 대응하였고 죽는 날까지 검약하고 경건하며 소박하고 독실한 신앙인의 삶을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오늘날까지 무슬림들로부터 가장 훌륭한 칼리파로 존경받고 있다.

 

 

 

손주영, 한국외국어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