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AMP OF ISLAM

이슬람에 대한 완전한 헌신 (오스만)

Author
kislam0
Date
2016-03-10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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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

1400년 이슬람 문명의 길을 걷다 (오스만)

이슬람에 대한 완전한 헌신


오스만 빈 아판은 574년 메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준누라인(두 빛의 소유자)이라는 영예로운 이름으로 불렸는데, 예언자의 아름다운 두 딸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는 우마이야가 출신이다. 이 가문은 꾸라이쉬 부족 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던 씨족 중의 하나이다. '꾸란'이 계시된 후 앞장서서 이슬람에 반대하며 무슬림들을 박해했다.

그의 부친은 메카에서 이름난 부자 상인이었다. 그래서 오스만은 어려서부터 매우 좋은 환경 속에서 자라났고 커서는 조상대대로 이어져 온 상업에 종사하는 상인이 되었다. 젊은 나이에 부친으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기도 했지만 부전자전인지 그 역시 상업수완이 뛰어나 이슬람에 귀의 했을 때 그는 엄청난 재력가였다. 부자이면서도 그는 유독 검소하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수려한 외모에 부드럽고 넓은 마음씨를 가져 메카 사람은 누구한테나 인기가 있었으며 특히 자비심이 많은 것으로 유명했다. 히자즈 지방 너머까지 그의 이러한 고결한 성품과 선행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오스만은 아부 바크르의 절친한 친구였다. 이슬람의 메시지를 접한 것도 그를 통해서였다. 아부 바크르의 소개로 예언자를 만났고, 친구 딸라하 빈 우바이달라와 함께 예언자의 손에 의해 나란히 무슬림이 되었다. 이슬람 포교되기 시작한 지 1년 반이 지나고 있는 때였다. 그의 귀의 소식은 우마이야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누구보다 가족들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의 두 부인은 이슬람을 거부하고 반대하면서 그와 이혼했다. 삼촌 아비 수피얀은 꾸라이쉬 부족을 이끌고 이떤 최고 지도자 중의 한 사람었는데 오스만이 무슬림이 된지 얼마 지나지지 않아 꾸라이쉬 족장이 되어 이슬람에 반대하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최고 적대자가 되었다.

또 다른 삼촌 하킴은 계속 새 신앙을 포기할 것을 강요하며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오스만은 부드러운 성품과 강인한 의지력을 함께 지닌 전형적인 외유내강형 인물이었다. 생명을 잃는다 해도 신앙은 지키겠다고 선언하며 신앙포기 권유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무슬림이 된 후 그는 예언자의 딸 루카이야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불행이도 그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예언자는 그녀의 다른 딸 움무 쿨쑴을 그와 다시 결혼시켰다.

그는 거의 전 재산을 이슬람에 바쳤다. 독실하고 열렬한 신자가 된 메카의 이 부자 상인은 이슬람에 헌신하는 지름길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친구 아부 바크르가 행한 선례도 귀감이 되었다. 자진해서 그는 예언자가 펼치는 전도 사업에 자금조달을 하는 일을 맡았다. 꾸라이쉬들의 박해가 메카에서 극에 달했을 때 예언자는 무슬림들을 이웃 기독교 국가인 아비시니아로 잠정 이주시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 때 오스만은 이주자 70명 중의 일원이었을 뿐 아니라 이주에 소요되는 경비를 조달하는 지금책이었다. 622년, 메디나로의 이주 때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값진 자산들을 메카에 남겨두고 그는 미련 없이 떠나왔다. 메디나 정착 후에도 그는 꾸준히 상업적 일들에 매진하였고, 그의 사업은 날로 번창해 갔다. 메디나에는 비으르 루마라는 우물이 있었다. 소유주인 유대 부족들이 무슬림들에게 과중한 물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예언자는 이를 매우 안타까워했다. 이 때에도 오스만이 나섰다. 즉각 그는 3만 디르함을 지불하고 그것을 사서는 공공자산이 되게 만들었다.그 뿐만이 아니었다. 메디나의 예언자 모스크 주변의 땅을 구입하여서 모스크를 확장하였으며 거기에 무슬림들을 위한 편의 공간을 조성하는 일도 떠맡았다.

바드르 전투 외에 예언자 생애 동안 치러진 모든 전쟁에 그는 참가하였다. 바드르 때에 불참한 것도 실은 부인 루까이야가 위독한 상태였으므로 부인을 돌보라는 예언자의 명령 같은 간곡한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칼리파 아부 바크르와 오마르의 위대한 통치기 내내 오스만은 중대한 결정마다 자문역할을 하는 높은 지위에 있었다. 내정 위원회의 상임 고문으로서 그가 내놓는 정견들은국정 현안들의 해결과 시행에 그대로 반영되곤 하였다. 죽음의 병상에서 아부 바크르가 차기 계승자(오마르)에 대한 자문을 구할 때에도 가장 먼저 상담역이 되었던 두 원로 중의 한사람이 바로 그였다.


제3대 정통 칼리파 오스만의 시대가 열리다

이슬람 움마의 세 번째 정통 칼리파로 그가 선출되는 경위는 논쟁이 되는 주제다. 다양한 역사적 주장들이 제기되어 있지만 칼리파 오마르가 죽기 전에 6명의 원로들을 후계자 후보들로 선정하였고, 이들에 의해 최종적으로 오스만 빈 아판이 칼리파로 뽑혔다는 사실은 분명하고 이에 대한 이견은 없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동시에 가진 이6인 선거인단을 칼리파 선출을 위한 슈라 위원회라고 부른다. 이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 알리 빈아비 딸립, 오스만 빈 아판, 압둘 라흐만 아우프, 사아드 빈 아비 와까스, 앗 주바이르 빈 알 아윔, 딸라하 빈 우바이달라.

칼리파 오마르는 부재중이던 딸라하를 제외한 모두를 불러 놓고는 그들 중에서 다음 칼리파를 호선할 것을 유언하였다.

"여러분이야말로 움마의 지도자들입니다. 신의 사자는 여러분 모두에게 만족해하며 돌아가셨습니다. 나는당신들 사이에 반목이 생길까 두렵습니다. 부디 협의하여 당신들중에 한 사람을 뽑으시오."

오마르의 장례 후, 유언에 따라 슈라 위원들이 모였는데, 그들 중 네 명이 기권을 하고 오스만과 알리, 둘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 두 사람은 회중을 이끌던 압둘 라흐만 아우프의 최종 판결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하였다. 결정권을 쥔 압둘 라흐만이 이 때 두 사람에게 차례로 던진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만약 당신이 칼리파가 된다면 '꾸란'과 예언자 순나, 그리고 아부 바크르와 오마르가 세워놓은 관행들을 그대로 따르겠습니까?"

압둘 라흐만이 먼저 알리에게 물었다. '꾸란'과 예언자 순나는 따르겠으나, 두 칼리파가 내린 결정들과 관행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답하였다. 그는 '꾸란'과 예언자 순나에 의거 할 수 없는 경우, 스스로의 양심과 최선의 판단에 따른 독자적인 법적 견해(이즈티하드)에 의해 올바른 결정을 내리겠다고 말한 것이다. 반면에 오스만은 그 모든 것을 그대로 따르겠노라고 답하였다. 알리는 앞선 두 선임 칼리파들 통치기에 추구되었던 지난친 군사적 팽창과 경제적 부를 위한 정책들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일부 무슬림 지도자들이 종교적 열정을 잃어버리고 세속적 이득에 눈이 멀어 있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선대 칼리파들의 정책을 그대로 계속해야 한다는 조건적인 정책을 그대로 계속해야 한다는 조건적인 칼리파 지위에 대한 제의에 거부의사를 표한 것이다. 그러나 오스만은 온건하고 보수적인 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기존의 이권들에 익숙한 우마이야 가문의 일원으로서 경제관념이 다른 사람이었다. 결국 압둘 라흐만은 오스만의 손을 들어 주었다. 오스만을 칼리파로 선언하고 그에게 충성선서를 하였다. 알리도 즉석에서 바이야를 행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해서 제3대 정통 칼리파 오스만의 시대가 열렸다.

계속되는 영토 정복 전쟁

오스만의 통치 전반부는 오마르 때와 마찬가지로 제국의 위대한 영토팽창에 몰두하는 시기였다. 칼리파 위에 오른 지 불과 6개월 만에 페르시아인들이 무너져가던 사산 조를 되살리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야즈다기르드 3세는 동란의 막바지에 쫓겨 다니는 신세였지만 살아남아 페르시아인들의 봉기를 선동하였다. 칼리파 오스만은 신속히 진압군을 파견했다. 페르시아인들은 이제 아랍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쫓기는 반란군을 페르시아 국경 너머로 추격해 가면서 오히려 아랍-무슬림군은 기대하지 않았던 영토들을 병합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슬람력 30년에 이르자 페르시아 북부와 동부의 발크, 투르키스탄, 헤라트, 카불, 가즈니, 후라산, 투스, 네샤푸트, 페르브가 파죽지세의 무슬림군의 수중에 떨어져 이슬람 제국에 통합되었다. 야지디기르드는 도망만 다니다가 피난지에서 이슬람력 32년에 마침내 생을 마감한다. 페르시아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그리고 새로운 이슬람 역사시대를 맞게 되었다.

오스만의 즉위 두 번째 해인 645년, 비잔틴군이 전의를 불태우며 소아시아를 거쳐 시리아로 쇄도해 왔다. 시리아 충독, 무아위야 휘하의 무슬림 북방수비대로서는 처음에 엄청난 수의 침입군에 압도당하고 방어에 역부족이었으나 급파된 증원군이 계속 도착하자 전세는 곧 뒤집혔다. 흑해까지 비잔틴군은 내몰려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과 소아시아가 무슬림군에 장악되고 흑해의 티플리스는 점령되었다.

북아프리카에서도 무슬림군의 승리는 이어졌다. 비잔틴은 이집트 땅을 되찾기 위해 트리풀리에 새로운 도약을 위한 전진기지를 구축하였고, 646년 알렉산드리아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므르 빈 알 아스에 의해 알렉산드리아는 다시 수복되었다. 트리풀리의 비잔틴 사령관 그레고리 휘하에는 120,000명의 대군이 있었다. 그래서 칼리파 오스만은 계속 위협받고 있는 서아프리카를 지키기 위해 압달라 빈 주바이르 같은 명장들로 주축을 이룬 새로운 아랍-무슬림군을 메디나로부터 진군시킨다. 그리고 양군의 대결은 압달라 빈 주바이르의 승리로 끝나고, 그후 튀니지(아프리끼야)는 이슬람의 땅으로 영속되었다.

오스만 때의 군사적 업적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해군의 창설이다. 일찍이 무아위야는 키프러스에 대한 공격을 수차례 계획했었다. 키프러스에 세워진 비잔틴군의 요새는 시리아의 안전에 지속적인 위협이었다. 이제 때가 되었다. 칼리파의 명을 받은 무아위야는 유능한 총독이었다. 시리아인들이 주축이 된 무슬림 해군은 예상과는 달리 큰 저항없이 키프러스를 점령하였고 이어 르데스 섬까지 차지하게 된다. 그 뒤 654년, 비잔틴군은 500척의 배로 다시 이집트에 대한 침공을 시도했으나 이것도 역시 패배하였다. 무슬림 해군은 칼리파 오스만 때부터 이같이 동부 지중해의 주인이 되었다.

칼리파 오스만의 통치기는 앞선 칼리파 시대와 여러 면에서 달랐다. 앞 시대 무슬림들은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나 오스만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정복지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부와 재화들로 국가재정이 넘쳐나고 생활이 풍요로워졌다. 이슬람 공동체는 아라비아 반도 뿐만 아니라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 아프리끼야, 페르시아와 지중해에 이르는 여러 섬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통치하는 세계적 국가가 되었다. 지방 도시들과 그곳의 부족 지도자들 또한 권세와 부가 믿지 못할 만큼 신장되었다. 그들은 메카와 메디나 못지않게 풍요를 누리며 지방마다 그들 나름의 정체성을 부각시키려 했다. 통치권역의 광역화는 복속민의 수에 엄청난 증가를 가져왔고 이것은 새로운 무슬림 세대가 등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들은 신앙을 토대로 공동체의 번영과 이슬람 전파에 매진했던 무슬림 첫 세대와는 달리 종교적 열정보다는 개인주의적 욕구와 이익을 우선시하며 종족, 민족, 지역마다의 집단연대감정(아싸비아)에 바탕을 둔 새로운 정치적 요구들을 만들어 냈다.

칼리파 오스만의 죽음

오스만 통치의 전반부는 선임자들의 정책을 기본적으로 따르면서 매우 성공적이었으나 후반으로 갈수록 지방 도시 여러 곳에서 정치적 요구가 반정부적인 주장과 불평의 목소리로 증폭되더니 급기야는 칼리파가 임명한 지방 총독의 해임을 요구하는 사태가 불거졌다. 칼리파는 지방에서 자라날 수도 있는 독립적 기운을 통제하고 효율적인 지배권을 강화하기위해 지방총독(왈리)들을 칼리파 자신이 잘 알고 신뢰하는 우마이야가 친족들을 임명하였다. 오스만은 출중한 인격의 공정한 칼리파였다. 총독 임명권이 어디까지나 칼리파에게 있었고 전체적으로 볼 때 그는 능력있는 적임자들을 적소에 총독으로 선임하였다. 그렇지만 친족 중심의 정실 인사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시리아에서는 오마르 때부터 사촌 무아위야가 쿠파에는 모계 쪽 이복동생인 알 왈리드 빈 우끄바가 총독으로 있었다. 처음 총독의 해임을 요구하는 사건은 쿠파에서 일어났다. 칼리파는 주민들이 음주하던 알 왈리드의 해임을 요구해오자 다시 외사촌 동생인 사이드 빈 알 아스를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바스라의 총독도 그의 또 다른 사촌이었다. 이집트에는 오마르 때부터 유임해온 아므르 빈 알 아스가 총독이었는데. 그를 면직하고 그의 젓형제인 압둘리 빈 사아드 아비 앗 샤르하를 보임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이집트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총독 해임과 같은 이러한 정치적 요구가 있게 된 근원적 배경에는 무엇보다 먼저 움마 사회에 신흥부유층이 생겨난 데 있다. 그들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불평불만이 지방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칼리파 오마르가 묶어놨던 점령지의 토지구입 문제를 푼 오스만의 경제개혁 조치와 국고인 바이툴 말의 재원을 유용할 수 있게 한 신축성 있는 재무정책이 이러한 경제, 정치적인 불만 세력을 키우는 주요인이 된 것이다. 이것은 특정계층, 특히 칼리파의 씨족인 우마이야 가문 사람들에게 부를 쌓을 수 있는 특혜를 준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부유층이 생겨나고 반면에 지방 호족이나 유력인사들 사이에서는 이에 대한 반발기류가 한층 거세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꾸란'은 부를 축적하지 말라고 거듭거듭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지옥에 떨어지는 지름길이다. 예언자 동료인 아부 다르르 알 가파리가 오스만의 이 같은 재무정책을 비판하고 이 문제를 가지고 무아위야와 논쟁을 벌인 이야기는 유명하다.

반 오스만 정서의 일각에는 종교적인 이유도 있었다. 이슬람 세계는 넓어질대로 넓어졌고, 정복지에서 개종자들이 크게 늘어감에 따라 '꾸란' 독송법이 지역마다 달라지거나 '꾸란'의 이본들이 생겨나는 사태가 속출하였다. 이에 칼리파는 아부 바크르 때에 최초 집성되어서 오마르 사후에는 예언자의 미망인이자 오마르의 딸인 하후사가 보관하고 있던 '꾸란' 본을 원전으로 하는 복사본들을 만들어 정통 하피즈('꾸란' 암송자)와 함께 이라크, 시리아, 이집트 등의 무슬림 주요 도시에 '꾸란' 정본들을 보급하였다. 이것은 오스만의 큰 공적이었다.

오늘날까지 '꾸란' 원문이 한 자 한 획의 첨삭 없이 온전히 보존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헌이 일부 무슬림들에게는 오히려 종교적 반감을 갖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 때에 칼리파는 그의 '꾸란' 정본 외에 다른 이본들 모두를 수거하여 소각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는 즉각 시행되었다. 일부 독경사들이 이에 반발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압달라 빈 마스우드다. 이들은 그들 소유의 '꾸란'판이 불살라지는 것에 분노하고 칼리파를 원망하였다.

이보다 오스만 칼리파제에 대한 정변을 일어나게 한 결정적 요인 중의 하나는 이븐 사마가 계획했던 반 오스만 운동이다. 그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예멘 유대인이었는데 일부 사가들은 그가 무슬림 사회 기반을 붕괴할 목적으로 위장하여 개종한 반 이슬람주의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후일 쉬아파의 시조 이맘이 되는 알리 빈 아비 딸립을 신격화하는 빗나간 종교사상을 유포시키기도 하였다. 어쩻든 그는 처음에 바스라에서 총독 해임을 요구하는 반정부 성토를 하기 시작하더니 쿠파, 다마스쿠스, 카이로로 옮겨 다니며 비밀리에 반정 선동가들과 접촉하여 반 오스만 운동을 펼치며 여러 음모를 꾸미고 주도한 장본인이다.

칼리파 오스만의 죽음을 불러온 비극적 사건은 총독인 압둘라에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난 이집트에서 시작되었다. 총독의 교체를 요구하던 청원에 답을 듣지 못하자 소요의 대표자들이 메디나로 몰려왔다. 동시에 이라크 쪽에서도 대표단이 결성되어 메디나에 도착하였다. 결국 칼리파는 이들을 만나 총독 교체를 약속하고 무함마드 빈 아부 바크르를 새 이집트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이집트인들은 만족하여 철수를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메디나로 다시 돌아와 칼리파 자택을 포위하고는 농성을 재개했다. 그들의 주장으로는 이집트로 가는 길에 한 노예 전령을 붙잡아 조사해보니 칼리파가 서명하여 총독 압둘라에게 보내는 비밀 편지가 발견되었고, 거기에는 소요 주동자들이 도착하면 즉시 체포하여 처형하라는 명령이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칼리파는 그 편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실상은 오스만의 사촌인 마르완이 칼리파 서명을 날조하여 만든 것일 가능성이 컸다. 그들은 마르완의 소환을 요구했고 칼리파는 명확한 증거 없이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다. 시위자들은 폭도로 변하여 오스만에게 칼리파 위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물론 오스만은 이 요구도 거절했다. 그리고 운명의 시간이 왔다. 40일간이나 칼리파의 집을 포위하였던 이 폭도들은 마침내 담을 넘어 들어가 서재에서 '꾸란'을 읽고 있던 칼리파를 살해하고 만다. 이 순간 이를 막으려했던 부인 나일라의 손가락들이 잘려 나갔다. 656년 6월 18일 칼리파 오스만은 이같이 무슬림의 손에 의해 살해되었다. 당시 82세였다. 칼리파가 된 지 12년째 되는 해였다.

'꾸란' 정본의 보급

오스만은 거의 전 재산을 이슬람에 바친 독실한 신앙인의 표본이었다. 그는 예언자의 하디스를 전한 전승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146편의 하디스를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매우 관대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성실하고, 정직하며, 검소하고, 겸손하며, 중용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는 칼리파가 된 이후에도 국고(바이툴 말)로부터 한 푼의 급료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는 이슬람 움마가 대제국으로 발전해 가는 시대적 전환기였기 때문에 그가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세수를 늘리고 인구가 늘어나는 도시들에 시장을 만들고 제국의 곳곳에 많은 마스지드를 지었다. 운하를 파고, 관개 시설과 다리와 도로를 건설하는 등 국가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무엇보다 그가 남긴 가장 큰 공적은 '꾸란' 정본을 보급한 일이다. 그 '꾸란' 원본 중의 하나가 현재 우즈베키스탄에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어느 '꾸란'이든 겉표지를 넘기면 '오스만 본'이라고 명시되어있다.



손주영. 한국외국어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