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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아파와 순니파 모두에게 존경받는 초기 지도자 알리 빈 아비 딸립

Author
kislam0
Date
2016-03-19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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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 이슬람 문명의 길을 걷다 (알리)

쉬아파와 순니파 모두에게 존경받는 초기 지도자

알리 빈 아비 딸립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이자 사위로, 정통 칼리파 시대(632-661)의 마지막 네 번째 칼리파다. 예언자의 교우들 중에서도 그는 가장 높은 서열에 있는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불과 10살 밖에 안된 나이에 예언자가 전한 계시를 믿었고 여러 위기에서 예언자를 구하였으며 예언자를 도와 사명을 완수케 한 가장 가까운 예언자의 측근이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의 사랑하는 딸 파띠마와 624년(이슬람력 2년)에 결혼하였고 둘 사이에는 두 아들(하산과 후세인)과 두 딸(자이납과 움므 쿨숨)이 있다.

그가 이슬람 역사에서 다른 누구보다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특히 쉬아 무슬림들 때문이다. 쉬아들에게 알리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종교적 권위를 이양해 주었다고 믿는 그들의 첫 이맘이다. 쉬아들에게는 오직 그만이 움마의 정교지도권을 계승 받아야 할 올바른 상속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알리의 삶과 가르침은 존경을 넘어서서 본받고 따라야 할 것으로, 때로는 신화적 전설속에 가려져 있거나 때로는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는 경우도 발견된다. 그는 일반 무슬림들로부터도 높이 존경받는다. 쉬아에 비판적인 순니 비평가들에 의해서도 그는 명철하고 신실하며 문무에 뛰어난 이슬람 초기 시대 지도자로 칭송받고 있다.

이슬람을 받아들인 첫 번째 남성

알리는 예언자 탄신 약 30주년이 지날 때 태어났다. 예언자의 삼촌 아부 딸립이 그의 아버지이다. 직계 족보를 알아 볼 수 있게 하는 그의 이름은 알리 빈 아비 딸립 빈 압둘 무딸리브 빈 하심이다. 아부 딸립은 어려서 고아가 된 무함마드를 키웠는데 부양가족이 많던 아부 딸립이 알리를 낳은 뒤 어린 그를 돌보기 어렵게 되자, 무함마드가 알리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사실상 알리는 예언자 가정에서 성장한 것이다. 아들이 없었던 무함마드(그의 두 아들은 어린 나이에 죽었다)는 알리를 어렸을 때나 성인이 된 후에나 아들과 같이 대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알리는 이슬람을 받아들인 첫 번째 남성이다. 나이 10살이던 때였다. 성인이 된 후에는 여러차례 예언자를 위해 생명을 거는 용기를 내기도 했다. 예컨데 메카에서 메디나로 예언자가 이주하던 밤, 꾸라이쉬 적대자들이 예언자의 살해를 모의하고는 숙소로 습격해 왔을 때 마치 예언자가 자고 있는 것처럼 침대에 누워 있었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메디나 무슬림들과 메카인들 사이에 벌어진 첫 교전, 바드르 전투(623년)에서 알리는 날 끝이 둘로 갈라진 모양의 검을 휘두르며 종횡무진 전장을 누비면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용맹스러운 전사임을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 그는 전사 중의 전사였다. 양군의 대표 장수끼리 목숨을 걸고 무용을 겨루는 일전이 벌어질 때 예언자의 명을 받고 나가는 무슬림군의 전사는 대부분 일리였다. 또한 그는 항상 예언자 곁에 있던 서기들 중의 하나였다. 계시가 내려오는 장면을 자주 목격하고 가장 가까이서 예언자를 보필하던 비서였다. 그러므로 가장 내밀하고 중요한 사안의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임무가 주로 그에게 맡겨졌다. 그가 수행한 임무 중 그가 잊지 못하는 것 중의 하나는 마침내 메카가 무슬림의 손에 떨어졌을 때 예언자 앞에서 카아바 신전 안에 있는 우상들을 꺼내어 파괴한 일이었다.

제4대 칼리파 알리

예언자가 서거한 뒤 알리는 칼리파가 될 적임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친자를 갖지 못한 무함마드에게 그는 가장 가까운 직계 가족이었으며 그의 충성, 영민함, 신앙심은 공동체 내의 어느 누구보다 뛰어났다. 예언자로부터도 최고의 사랑과 신뢰를 받아왔다. 그러나 계승권 문제는 움마의 원로들이 모여 논의한 칼리파 추대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아랍 부족 사회 전통에서 공동체를 이끌 새로운 지도자를 뽑는 회의에 연륜있는 원로들을 제치고 젊은이가 추대되는 경우는 기존의 관습에 어울리지도 맞지도 않는 일이었다. 알리의 능력과 자질은 검증되었지만 그의 나이가 겨우 30대 중반이었기에 때문인지, 이 회의에서 그의 이름은 거론되지도 않았다. 게다가 예언자는 분명히 계승자를 결정 할 수 있는 정신적, 실제적 역량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움마를 이끌어야 할지에 대한 어떤 지침도 남겨놓지 않았다.

그렇지만 쉬아파 무슬림들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그의 후계자로 알리를 명백히 지명해 놓았다고 주장한다. 쉬아 전통에서는 알리가 예언자의 장레를 준비하고 의식을 치르느라 분주해 있던 시간에 움마의 원로들이 잘못된 회의를 개최하고 진행하여 칼리파제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그 사건은 쿠테타와도 같은 일이었다. 쉬아파 주류에서는 오늘날까지 알리에 앞서 선출된 칼리파들의 지위는 잘못된 것이고 그들이 알리의 지위를 찬탈했다고 주장한다. 파티마를 비롯한 예언자 가문의 사람들과 일부 예언자 동료(사하바)들이 당시의 이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계승권에 도전하지 않았던 것은 통일과 화합이 요구되던 때인 만큼 분란이나 불필요한 당파주의가 생겨날까 우려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상 아부 바크르에 대한 알리의 바이야(충성 서약)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는 칼리파 아부 바크르 때에 계속된 배교(릿다)전투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그는 신학과 학문에 전념하며, 정치적인 일들에 대해서는 가능한 부동적이고 무관한 태도를 보였다. '꾸란'과 예언자 순나에 대한 그의 지식과 해석은 앞선 세 칼리파의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했다고 전해진다. 쉬아들은 알리의 '꾸란'편집이-오늘날에도 쉬아 무슬림들에 의해 애독되고 있는 - 칼리파 오스만에 의해 권위화된 '꾸란' 표준본과 동등하게 오래되고 전통성이 있다고 말한다.

오마르 사후, 알리는 오마르가 지명해 놓은 칼리파 선출을 위한 6인의 선거인 중 한 명으로 슈라 위원회에 들어갔고 그 때 그는 자신에게 칼리파 위가 선임되리라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그 직위가 오스만에게 돌아가자 그는 바로 충성 서약을 하였다. 사실 그는 앞선 두 칼리파의 영도력에 누구보다 먼저 존경을 표하였고 칼리파들 역시 국가의 중대사에 늘 그의 조언을 경청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승리에 대한 성취감과 경제적 부에 집착하고 빠져드는 움마의 세속화 현상에 비판적이었다. 엘리트 아랍 부족 중심의 정책들보다 예언자 시대에서처럼 종교적이고 인류 평등주의가 실현되는 통치를 그는 갈망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슈라 위원회에서 선대 두 칼리파의 국정 운영방식을 그대로 승계한다는 조건하에서의 칼리파 직위를 그에게 제시하였을 때에 '칼리파의 역할은 조건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칼리파 오스만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자, 알리에 대한 칼리파 위 추대가 신속히 진행되었다. 그것은 격동과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선택할 수 있는 필연적인 움직임이었다. 알리 이외에 혼돈과 무질서의 위태로운 상황을 수습하고 안정을 되찾게 할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 알리는 원로들의 강압과 간청 속에 칼리파직을 수락하는 충성 서약을 받기 시작했다. 656년 11월 13일, 알리는 이렇게 제 4대 정통 칼리파 위에 올랐다.

이슬람 공동체의 분열

그렇지만 알리에 대한 충성 서약은 이슬람 공동체 전체가 합의한 것은 아니었다. 칼리파로 등극하자마자 그는 움마 내 분쟁을 종식시키는 데에 전력투구해야만 했다. 첫 번째 일은 오스만이 임명한 총독들과 그에 의해 중용되었던 우마이야 가 사람들을 해직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오히려 우마이야 가문을 중심으로 반 알리 세력들이 생겨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시리아의 무아위야는 총독 자리를 내놓기는커녕 오스만의 죽음에 대한 진상 조사와 칼리파를 살해한 자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며 새 칼리파 체제에 반대하는 무리의 중심에 섰다. 그는 다마스쿠스 거리에 오스만이 살해될 때 입었던 피묻은 옷을 내걸고는 군중을 선동하며 오스만의 피값을 요구하는 성토대회를 열었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그리고 움마 안에는 알리 칼리파제에 반대하는 두 세력이 생겨나게 되었다. 한편은 무아위야가 꾸준히 규합해 간 시리아 결맹군들이고, 다른 한편은 '신도의 어머니'라고 불리며 무슬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던 무함마드의 미망인, 아이샤가 이끄는 그룹이었다. 알리는 이 두 세력을 꺽어야만 그의 칼리파제를 바르게 세울 수 있었다.

아이샤가 반 알리 쪽에 서게 된 것은 부분적으로는 그녀와 알리 사이에 오랜 불화가 있어 왔던 탓도 있지만 그보더 더 큰 요인로는 두 무슬림 원로인 딸라하와 앗 주바이르의 권력욕과 그들의 부추김 때문이었다. 이 두 예언자의 교우들은 과거 오마르가 뽑은 6인 슈라 위원회의 멤버였고 사실상 알리와는 칼리파 위의 경쟁자였다. 이들은 병력을 모으고 군사행동을 계획하더니 이라크 남부도시 바스라에 진을 쳤다. 알리는 사태가 이렇게 급진전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으나 이제 전투는 불가피하게 되었다. 656년 6월 중순이었다. 전투는 7일간 지속되었고 많은 수의 사상자가 생겼다. 딸라하와 앗 주바이르는 전사하고 아이샤는 포로가 되었다. 이 전투는 아이샤가 낙타를 타고 낙타 등위의 가마에서 지휘했기 때문에 낙타 전투라고 불린다. 알리와 아이샤는 화해했다. 그녀는 메디나로 돌아와 여생을 하디스 모음에 바친다.

무슬림 간의 첫 내전인 낙타 전투는 이처럼 칼리파 알리의 성공적 진압으로 끝이 났으나 유프라테스 서안의 십핀에서 치러진 두 번째 전투는 전후 결과와 그 영향력이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오스만의 사촌, 무아위야는 오스만의 죽음의 진상이 밝혀지고 살해자에 대한 복수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알리에게 충성 서약하기를 거부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칼리파 쪽에서 보면 명백한 반역일 뿐이었다. 657년 9월 21일 십핀에 도착한 알리는 무아위야 측에 통합을 촉구하였으나 결국 무산 되고 끝내 전투로 번졌다. 전투 초기에는 무아위야군이 우세한 듯 했으나 전세는 점차 일리군 쪽으로 기울어졌다. 알리군의 승리가 목전에 다다랐을 때 무아위야는 패전을 모면해 볼 방책으로 군사들에게 창끝에 '꾸란'을 매달고 다음과 같이 외치며 중재를 요청하게 하였다.

"꾸란의 심판에 따르자."

이 책략은 효과를 보았다. 칼리파 알리가 중재 제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알리와 알리 진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 단지 속임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전쟁이냐 평화냐의 갈림길에서 칼리파는 주저 없이 후자를 선택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무슬림들 간에 고귀한 피를 흘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미 수천에 달하는 전사자들이 생겨났고 그는 자신이 모든 무슬림들의 칼리파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는 이슬람이 평화와 평등의 종교임을 굳게 믿는 진정한 신앙인이었다. 그리고 평화 제의를 받아들인 그의 결정은 어디까지나 '꾸란'에 근거한 것이었다. '꾸란'은 이교도와의 전투에서조차 화친의 제의가 있으면 즉각 전쟁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만약 그들이 평화쪽으로 기운다면, 너희도 주저없이 그쪽으로 향하라. 그리고 모든 것을 알라께신탁하라. 실로 알라께서는 모든 것을 들으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로다." (꾸란 8:6)

다른 '꾸란' 4장 90 절에서도 "적들이 물러나 싸우지 않고 평화제의를 해 온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알라의 명령사항인 것이다." 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렇지만 알리 진영은 중재 제의에 찬동하는 화친파와 이에 반대하는 주전파로 갈라졌다. 그리고승리를 목적에 두고 중재 제의를 받아들인 칼리파의 결정에 반대하며 주전파들이 진영을 이탈하여 나갔다. 이들을 카와지리(나간 자들)라고 부른다.

양측은 659년 1월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무아위야가 알리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한 데서 비롯된 둘 간의 갈등과 분쟁에 대한 어떠한 해답도 이끌어 내지 못했다. 결국 이 문제는 움마의 원로들에게 회부하여 최종 합의를 이끌어 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 후 움마의 원로들이 참여하는 슈라(협의)회의는 열리지 못하였다. 그러니까 장기간 끈 이 중재회담은 이슬람 사회를 더욱 분열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하였을 뿐이다. 반 알리, 반 무아위야, 반 우마이야 가문을 외치는 카와리지라는 이슬람 최초의 분파가 출현하게 되었고, 통일되어있던 움마 사회에는 정치적 소요와 분란이 계속되었다.

중재회담은 아무런 결론도 없이 유야무야 끝났지만 무아위야의 입지는 상승하였다. 중재회담을 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칼리파 알리와 대등한 지위가 된 셈인데, 이와 반대로 알리 진영은 둘로 갈라졌고 그만큼 알리의 권위는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알리는 안으로는 카와리지, 밖으로는 무아위야라는 이중의 적을 만들게 된 셈이다. 다마스쿠스로 회군한 후 무아위야 세력은 날로 커져가 샴 지역에서 지지를 얻게 되더니 마침내 660년 5월, 예루살렘에서 스스로 칼리파임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반면 이라크에서 돌아온 알리는 카와리지 설득에 전념하였으나 오히려 그들은 점점 더 과격하게 변해갔으며 결국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2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알리는 쿠파에서 새벽 예배를 마치고 나오다가 압둘 라흐만 빈물잠이라는 과격 카와리지 자객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당한다. 661년 1월 15일이었다. 그리고, 이틀 뒤 알리는 운명하였다. 비정상적으로 혼란스러운 정국이었으므로 칼리파 알리의 무덤은 더럽혀질 것을 우려하여 아무런 표시도 없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무덤은 압바스 조 5대 칼리파 하룬 라쉬드 때에야 발견되어 하룬에 의해 이라크 나지프로 이장되었다.

알리에 대한 평가

이슬람 사회에서 알리에 대한 평가는 세 가지로 나누어졌다. 첫 번째는 카와리지 같이 중재는 알라의 정명(定命)에 따르지 않은 잘못된 결정이라고 단정하며 협상 수락 이후의 알리를 중죄인으로 보는 그룹이다. 이들은 신앙의 순결성과 청교도적인 행동의 실천주의를 표방하며 그들 나름의 독특한 교리관을 내세웠다. 그리고 알리의 칼리파 통치 후반에 그에 적대하고 결국에는 그를 살해하였다. 다음 그룹은 반대로 그의 신앙과 인격을 높이 찬양하고 그의 가르침을 신봉하며 추종한 쉬아 알리들(알리 당파)이다. 이들은 신의 사자 무함마드 이후 움마 통치권을 오직 알리와 그의 자손에게만 한정시킨 그의 추종세력으로 오늘날의 쉬아들이다. 또 다른 세 번째 그룹은 이러한 양극단의 어느 쪽에도 동조하지 않은 중립적인 사람들로 이들이 오늘날의 순니 무슬림들이다.

정통 칼리파 시대가 열린 후 무슬림들의 정복 사업이 가져다 준 과실로 인해 점차 세속화 된 움마를 정치, 종교 양면에서 무함마드 시대의 모습으로 되돌리고자 했던 칼리파 알리의 열망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계속된 내전으로 아무런 뜻을 펴지 못하고 정치적 업적을 남기지 못하였으나 그는 앞선 칼리파들과 마찬가지로 무슬림 사회의 화합과 발전, 그리고 번영을 위해 불철주야 헌신하였고 이슬람의 승리를 이끌어 내는 데에 항상 최선을 다하였다.

알리의 인격은 매우 고매했다. 예언자와 함께 산 영향일까?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범인 같지 않은 생애를 살았다. 그는 영성적 합일의 경지에 이른 참 신앙인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수피들에게 그는 종교 이슬람을 이해하는 비법의 근원으로서 추앙받고 일반인들에게서도 그의 경건함, 빼어난 지성, 심오한 학식으로 높이 존경받고 있다. 그는 '꾸란' 해석의 권위자였으며 586편이 이르는 하디스를 기록하고 전한 가장 중요한 하디스 전언자 중의 하나이다. 그의 신학적 지식과 해석은 지금까지 순니와 쉬아 가릴 것 없이 누구에게나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또한 세속적인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도 그가 보여준 선견, 명확한 판결, 올바른 지도와 자문 등은 무함마드 시대와 정통 칼리파 시대 내내 움마 통칭에 유용한 시금석이 되었다. 그는 유창한 언변과 수사, 언어적 재능을 지닌 문인으로도 손꼽힌다. 그에 대해 '아부 바크르가 시인이고 오스만도 그렇다면, 알리는 그 셋 중 가장 뛰어난 시인이다.'

이라크 나지프에 있는 그의 무덤은 무슬림들의 중요한 순례지이다. 알리는 살아서보다 죽어서 더 큰 영향력이 있다. 그의 추종자들인 쉬아들이 그를 이 세상에서 인간과 신의 중재자로, '신의 대리지'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얼마나 이슬람의 이해에 중요한 인물인가는 그의 설교, 격언, 연설 등을 후대 학자가 모아 편집한 '나흐즈 알 발라가(웅변으로의 길)'라는 유명한 책에서도 찾이볼 수 있다. 그러나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은 그를 흠모하고 추종하는 탁월한 후대의 쉬아 학자들이 그의 생애와 신학세계에 대해 연구하고 기록해 놓은 그의 가르침들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들이 쌓이거나 바탕이 되어 오늘날의 쉬아 교리관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쉬아들은 그를 시조로 섬기는 쉬아 종파를 형성하였다. 그들에게 알리는 예언자의 빛을 받은 예언자 지식의 보고이다.

예언자가 지명해 놓은 와씨(상속자)이고 이맘이 될 비전의 지식을 전수 받은 거룩하고 성스러운 초대 이맘이다. 쉬아파에서 차지하는 그의 이미지와 위치는 한마디로 예언자 다음으로 가장 훌륭한 인물이다. 그렇지만 급진적 성향의 일부 쉬아들은 알리가 예언자와 거의 동일한 '무오류의 이맘'이자 완전무결한 인격의 소유자라고 칭하기도 했다. 심지어 소수의 극단적 쉬아 분파에서는 알리에게 신성을 부여하여 '지순한 존재인 신의 화신'으로까지 그를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광신적 극단주의는 정통의 일반 쉬아 무슬림들에 의해서도 전면 배격 당하는 이단적 사상이고 주장이다. 이슬람에서 신격은 어느 누구에게도 결단코 허용되지 않는다. 신은 절대자이시고 견줄 자 없는 유일의 존재자이시다. 순니이든 쉬아이든 무슬림 신앙의 근본은 '유일하신 알라'를 믿고 '예언자 무함마드가 최후 사자'임을 증언하는 것이다.

손주영 한국외국어 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