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AMP OF ISLAM

이맘 후세인

Author
무스타파
Date
2015-06-13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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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3

이슬람의 시아파는 그 탄생 초기부터 이라크와 관련되어 있었으며, 시아파의 초기 형성과정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은 모두 이라크에서 발생하였다. 이슬람 정통 칼리파 시대의 4대 칼리파이자 시아파의 초대 이맘인 알리 븐 아비 딸립은 이라크 쿠파의 한 모스크에서 암살되었다. 칼리파 알리의 계승자로 인정되었던 알리의 아들 후사인(또는 후세인)은 680년 이라크의 카르발라 전투에서 동료들과 함께 피살되었다. 시아 열두 이맘파의 이맘들 중 상당수도 그들의 일생 대부분을 이라크에서 보냈다. 시아파 이슬람의 4대 성도인 나자프, 카르발라, 카지마인, 사마르라는 이라크에 위치하고 있다. 학문적으로 이슬람 역사 초기부터 시아파 이슬람에서 가장 적극적인 연구 활동을 수행했던 도시는 이라크의 쿠파, 힐라, 바그다드, 나자프, 카르발라였다. 또한 이라크는 시아파 부와이드 조(945-1055)가 지배했던 지역이었다.

이라크의 나자프와 카르발라는 시아파의 성도이면서 시아파의 활동이 가장 왕성한 지역이다. 원래 이라크의 도시형성과 인구분포는 물 사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카르발라는 나자프보다 물 공급사정이 비교적 나은 편이었다. 이곳의 대추야자 농업은 14세기부터 이미 유프라테스 강의 물을 이용하고 있었다. 1533년 오스만 터키가 카르발라를 점령한 직후 술탄 술레이만 1세는 카르발라로 물을 공급하기 위해 후사이니야 수로의 건설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나자프와 마찬가지로 카르발라도 물 부족 현상을 겪었으며, 이로 인해 16세기 말에는 순례객들의 발길이 완전히 끊겨버렸다. 카르발라가 다시 물을 공급받게 된 시기는 이라크의 오스만 터키 통치자 하산 파샤(1704-1723)가 후사이니야 수로에 댐을 건설한 후였다. 카르발라에 대한 지속적인 물 공급은 1737년 경 이 도시를 시아파의 최초 학문 중심지로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전에 시아파의 학문 중심지는 이스파한이었는데, 이 도시의 연구 역량은 아프간의 침략을 받고 페르시아 출신 울라마들이 이라크로 이주한 이후 크게 약화되었다. 카르발라의 지위는 하산 파샤가 바그다드에서 카르발라에 이르는 길목에 대상 숙소들을 건설하고 시아파 순례객들에 대한 편의시설이 확충되면서 더욱 향상되었다.

나자프와 카르발라가 이라크 내 시아파 이슬람의 본거지였다면, 카지마인과 사마르라는 시아파의 성소들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거지로 간주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카지마인은 수니파 정권의 본거지인 바그다드로부터 너무 가까운 지역에 위치했으며(바그다드 북서쪽 3마일), 사마르라는 원래부터 수니파 무슬림들이 상당수 거주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시아파에서 카지마인은 7대 이맘 무사 알-카짐과 9대 이맘 무함마드 알-자와드의 성소를 보유하고 있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20세기 초 이 도시의 인구수는 9천명이었는데, 이중 시아파 무슬림은 약 7천명이었다. 이 도시의 무슬림 대부분은 아랍인들이었으며, 이란인들은 천명을 넘지 않았다. 오스만 터키는 나자프나 카르발라보다 이 도시를 훨씬 수월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 카지마인이 바그다드와 근접해 있다는 지리적 요건은 이라크 내 수니파와 시아파의 사회정치적·종교적 접촉을 용이하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 이들은 이라크 입헌군주제를 수립하는 데 공동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사마르라에는 시아 10대 이맘 알리 알-하디와 11대 이맘 하산 알-아스카리의 성묘가 있다. 또한 이 도시는 현재 은둔 중이지만 마흐디(Mahdi)로 다시 등장할 12대 이맘 무함마드 알-마흐디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바그다드 북쪽 66마일에 위치한 이 도시에는 20세기 초 약 8500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다. 1875년 시아파의 대 무즈타히드 무함마드 하산 쉬라지가 나자프에서 사마르라로 이동하기 전까지 이 도시의 주민 대부분은 수니파 무슬림들이었다. 이 도시는 9세기 말 압바스 조의 수도로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가 점차 쇠퇴하였으나 쉬라지의 이동으로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쉬라지의 이동은 시아 이슬람의 바그다드 북쪽 지역 공략을 의미했기 때문에 오스만 터키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 도시에 대한 시아파 기부금의 증대, 시아파 학생들과 순례객들의 유입 증가는 시아파의 영향력 확대라는 의미와 수니파 지배력의 약화라는 의미를 동시에 부여해 주었다. 쉬라지는 오스만 터키뿐만 아니라 이란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확대했는데, 그는 1891-92년에 이란에서 발생한 담배 폭동에 개입하기도 하였다.

19세기 말부터 이라크와 이스탄불의 오스만 터키 관리들과 수니파 울라마들은 이라크 내의 시아파 확산을 통제해주도록 이스탄불에 거듭 요청하였다. 전직 이슬람 쉐이크였던 후사인 후스누 에펜디는 바그다드의 수니파 마드라사들의 역할을 강조하였고, 시아파 울라마들의 영향을 차단하기 위해 수니파 울라마를 이라크로 파견하도록 정부에 촉구하였다. 오스만 터키는 사마르라에 2개의 마드라사(종교 학교)를 설립했는데, 이는 수니파 교육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목적과 시아파 쉬라지 마드라사의 기능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또한 오스만 터키는 사마르라의 시아파 관련 문제들을 통제하기 위해 시아파 성소의 관리자로 수니파를 임명하였다. 사마르라는 1895년 쉬라지의 죽음 직후 그 중요성이 급격히 감소되었다. 그의 죽음 직후 채 1년도 되지 않아 그의 제자들은 사마르라를 떠났으며, 주로 나자프에 정착하였다. 이로 인해 나자프는 다시 한 번 시아파의 학문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쉬라지 제자들이 사마르라로 이동하고 최고 무즈타히드 미르자 무함마드 따끼 쉬라지가 1917년 사마르라에서 카르발라로 이동한 후 사마르라는 이라크 내 시아파 본거지로서의 역할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이라크에서 나자프와 카르발라가 오늘날까지도 시아파의 근거지로 남아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거리상의 이유로 오스만 터키가 이 두 도시의 시아파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충분한 군사력과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이 두 도시는 18세기 말부터 시아파의 학문적·종교적·사회경제적 중심지로 성장하였으며, 이라크 내 시아 전파의 전진기지로 발전하였다. 이라크 중부와 남부에 거주했던 많은 아랍 부족들이 나자프와 카르발라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고 결국 시아파로 개종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슬람 정통 칼리파 시대의 마지막 칼리파였던 알리는 661년 시핀 전투의 해결방식에 불만을 품고 이탈한 카리지파(이슬람 최초의 분파)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후 이슬람 세계의 대부분 무슬림들은 시리아의 통치자였던 무아위야를 칼리파로 인정하였다. 처음에 수니파 이슬람은 무아위야를 비난했다. 왜냐하면 그가 정통 4대 칼리파 당시의 칼리파 선출 방식인 슈라 제도를 폐기하고 세습 군주제로 변경시켰기 때문이다. 무아위야는 수니파의 역사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로 간주되고 있는 반면, 시아파의 역사에서는 그의 아들 야지드와 함께 매우 중요한 인물로 간주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시아파의 초대 이맘인 알리에게 대항했고, 알리의 장자인 시아파 2대 이맘 하산을 박해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의 아들 야지드는 시아파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3대 이맘 후사인을 박해했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후사인은 시아파에서 “순교자들 중 순교자”(Sayyid al-Shuhad#257;")로 간주되고 있는 인물이다. 시아파의 전통에 의하면, 무아위야는 하산이 자신에게 복종하는 조건으로 자신이 죽으면 하산에게 칼리파직을 계승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무아위야는 이 약속을 어기고 하산을 독살하였으며, 680년 그의 아들인 야지드에게 칼리파직을 승계하였다.

위와 같은 이유로 시아파는 무아위야를 비난했지만, 시아파 이슬람에서 악의 상징이자 제1의 공적은 이맘 후사인을 살해하도록 명령한 그의 아들 야지드였다. 시아파에서 선과 순교의 상징이었던 후사인은 671년 형인 하산의 뒤를 이어 이맘 직을 계승하였다. 680년 칼리파가 된 야지드는 후사인에게 자신에 대한 충성의 맹세(바이아)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할 마음이 전혀 없었던 후사인은 성소였던 메카의 하람 사원으로 피신하였다. 후사인은 이곳에서 약 4달 동안 기거하였다. 메카에 있는 동안 그는 이라크 남부에 위치한 쿠파의 백성들로부터 서신을 받았다. 그들은 후사인에게 야지드의 폭정에 대항할 혁명의 지도자가 되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후사인과 그의 가족 그리고 측근들은 메카의 성소를 떠나 쿠파로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메카를 떠나기 전 후사인은 그곳에 순례를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자신은 순교를 당할 지도 모르지만 야지드 정권의 불의와 폭정에 대항하기 위해 떠나야만 한다고 말했다.

칼리파 야지드는 쿠파로부터 후사인에게 편지들이 전해졌다는 소문을 듣고, 먼저 쿠파의 시아파 지도자들을 처형했으며, 군대를 파견하여 이라크 남부 유프라테스 강 근처 카르발라에서 이맘 후사인과 추종자들을 포위하였다. 히즈라(이슬람력) 61년(680) 1월(Mu#7717;arram) 야지드의 군대는 이맘 후사인과 추종자들을 사막에서 포위한 후 9일 동안 물의 공급을 차단하였다. 10일째 되던 날 이맘 후사인과 추종자들은 밤 예배를 마친 후 3만 여명의 야지드 군대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 거의 모든 남자들의 머리는 신체로부터 절단되었으며, 후사인의 여동생인 자이납(Zaynab)을 포함한 여자들은 포로가 되었다. 후사인의 머리는 다마스쿠스의 야지드에게 보내졌다. 시아파의 전통에 의하면, 야지드는 후사인이 다시는 코란을 낭송하지 못하도록 막대기로 그의 머리를 정신없이 후려쳤다고 전해진다.

이슬람력으로 매년 1월 10일은 시아파의 가장 성스러운 날인 아슈라("Ashura) 기념일이며, 이 날 시아파 무슬림들은 680년의 사건을 재현하고 후사인과 추종자들의 고통을 함께 공유하였다. 이맘 후사인의 참수된 몸체가 묻혀있는 카르발라는 시아파 이슬람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7717;aram)이며, 매년 수많은 시아파 무슬림들이 순례를 하기 위해 방문하는 장소이다. 1979년 이란 혁명 당시 가장 대중적이었던 구호는 후사인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매일 매일이 아슈라 날이며, 모든 장소가 카르발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