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AMP OF ISLAM

십자군과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

Author
무스타파
Date
2015-07-08 09:05
Views
446

예루살렘 탈환의 영웅



십자군을 격파한 영웅 살라딘은 공정하고 관대한 이슬람교도의 지도자로 이슬람 세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왔다. 그의 기사도적 관용은 이슬람을 싫어하는 서구에서도 높이 평가되어 단테의 신곡에는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함께 최소한의 벌을 받는 고결한 이교도로 등장한다. 살라딘은 유럽에서 부르는 이름이고 정확히는 사라흐알딘이다

예루살렘을 다시 빼앗을 때 살라딘은 살육과 파괴를 철저히 금지했다. 무슬림 병사에 의한 학살과 폭행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에서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의 비전투원에 가한 포학과 약탈과는 대조적이다. 살라딘은 많은 포로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항복 조건이었던 몸값조차 받지 않고 도망치게 해주었다고 한다.

살라딘은 쿠르드족 출신으로 북이라크의 타크리트에서 태어났다. 이슬람 신학을 배운뒤 아버지를 따라 다마스커스 궁정으로 들어가 장기 왕조의 누르 알 딘 밑에 있었다.

셀죽 왕조 쇠퇴 이후 중동에서는 많은 지방 정권이 분립해 있었는데 장기 왕조는 그중 하나로 북이리크에서 시리아로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당시에는 장기 왕조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수니파의 여러 세력들, 이집트의 시아파 정권인 파티마 왕조, 그리고 십자군 국가 등 여러 세력들이 서로 대립하거나 결합하여 복잡한 정치 판도를 이루고 있었다. 살라딘은 숙부와 함께 구원을 요청하는 이집트로 파견되어 1179년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이때 사실상 아이유브 왕조(시조는 살라딘으로 그의 아버지 아이유브를 왕조의 이름으로 삼았다가)가 이집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파티마 왕조 칼리프가 죽은 후에는 시아파를 부정하여 압바스 왕조 칼리프의 권위를 이집트에 확립시켰다. 수니파의 깃발 아래 이슬람 세계의 중심부를 오래만에 통일한 것이다. 이것은 살라딘 최대의 정치적 업적이다. 그는 이 통일된 이슬람의 저력을 가지고 십자군에 승리하였다.

살라딘의 인간상

측근이 전하는 살라딘은 용기와 두터운 신앙심을 겸비한 정의로운 인물이었다. 싸움중간에 조카가 죽었다고 눈물을 흘리고 아이를 유괴당한 어머니의 하소연에 눈시울을 적시는 인간미 넘치는 모습도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도가 지나치다고 할 정도의 기분파로 돈에는 무관심했다. 살라딘은 이슬람 세계에서의 이상적 군주의 한 전형이자 이상적인 인간상이었다.

그러나 정치 활동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에게도 몇몇 정치적 대립이 있었다. 주군 누르 알 딘은 살라딘이 이집트의 재상이 되었을 때 그의 야심을 의심했다. 살라딘은 주군에게 편지를 보내 충성을 맹세했지만 결코 주군과는 행동을 같이하지 않고 주군의 요구(시아파 칼리프를 당장 퇴위시키는 일)에도 응하지 않았다. 여기서 주군의 대리로 이집트에서 영화와 안락함에 만족할 수 없는 그의 야심을 엿볼 수 있다. 또 그는 이집트의 정권을 탈취할 기회가 올 때까지 신중히 기다리는 정략가의 모습도 보였다. 시리아와 이집트를 통일한 뒤 그는 10년 동안 십자군과의 결전을 기다렸다. 이 사이 그는 이태리 여러 도시와 군수물자 수입 게약을 맺었다 이 무렵 십자군의 무장 루노가 메카를 공략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일어났다. 십자군에 대한 이슬람교도의 적의가 높아졌을 때 그는 결전에 나섰다. 그는 대단히 주도면밀한 정치가였다.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나서는 십자군의 싸움에서 고전하는 일도 있었다. 1192년의 휴전 협정으로 팔레스타인의 영유권을 지키고 다음 해 다마스커스에서 병을 얻어 죽었다. 휴전협정에는 예루살렘에 대한 기독교의 순례는 어디까지나 자유라고 인정되었다. 어느 한 구석에도 성지를 독점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었다.

이슬람세계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관용의 전통이 살라딘적 휴메니즘의 배후에 있었을 것이다.


관용의 대명사, 살라흐 앗 딘

예루살렘은 기독교도와 유대인과 이슬람이 서로 이웃하며 사이좋게 살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1차 십자군전쟁 때인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은 이슬람과 유대인의 모든 재산을 약탈하고, 집을 불태우고, 이슬람 사원과 유대인 성지를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남녀노소 안 가리고 이슬람과 유대인을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잔인무도하게 학살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의 머리를 미늘창 끝에 꽂았는가 하면, 노인과 여자들을 고문하고 불태웠습니다. 거리에는 피의 강이 흘러 넘쳤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십자군의 잔인무도한 학살극은 전체 아랍인들의 연대와 지하드(성전)를 부추겨 90년 뒤인 1187년 이슬람 연합군은 하틴 전투에서 기독교왕국을 궤멸시키고 예루살렘 땅을 되찾았습니다. 그 당시 이슬람 연합군을 이끈 총사령관은, 이슬람 역사상 최고의 영웅인 술탄 살라흐 앗 딘입니다.

그는 키가 작고 가냘픈 몸매에 단정하게 수염을 기른 사색적인 풍모의 소유자로 더 유명합니다. 겸손하고 동정심이 많으며 절제의 미덕을 지닌 그는 하루에 한 끼 저녁식사만 제대로 할 만큼 아주 검소하고 소박했습니다. 또한 시와 예술, 그리고 학문을 사랑했고,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기독교의 신앙을 존중할 줄 아는 관용의 황제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탈환한 뒤 복수의 혈전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아랍의 몇몇 아미르(제후)들은 예루살렘 거리에 기독교도들의 피가 흐르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는 모두 성서의 사람들이며 이 도시는 성서를 믿는 모든 사람의 것”이라는 말로, 그들을 잠잠케 하고 그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혔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도들에게는,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 재산도 가족의 생명도 보장해주었고, 개종하지 않을 경우에도 전 재산과 가족을 데리고 예루살렘을 떠날 것을 명했을 뿐입니다.

3차 십자군 전쟁 때 살라흐 앗 딘과 맞선 십자군 총사령관은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처드 1세였습니다. 그는 조약을 맺고도 밥 먹듯 어기는가 하면, 만 명이 넘는 사람을 재미삼아 참수한 잔인무도함으로 악명을 떨쳤습니다. 그의 이름은 까맣게 잊혀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반면에 살라흐 앗 딘은 인류역사에 심어놓은 관용의 정신으로 영원히 우리에게 남았습니다.

천년이 더 흘러도 인류가 그를 잊지 말아야하는 이유입니다.

2008년 12월 겨울, 하얀 눈 위에 ‘관용’이란 두 글자를 새겨 봅니다. 그리고 올 한 해 동안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지구상의 수많은 분쟁지역에서 숨진 희생자들과 부상자들, 고통 받는 난민과 고아들을 생각합니다. 앞으로 지구 위에 더 이상 전쟁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살라흐 앗 딘은 이슬람 발음이고, 살라딘은 영어 발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