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AMP OF ISLAM

잘랄 앗 딘 알 루미

Author
무스타파
Date
2015-08-04 09:33
Views
501

잘랄 앗 딘 알 루미


루미는 1207년 9월 30일, 아프카니스탄의 발흐에서 법관과 종교학자로 이름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바하 앗 딘 왈라디는 "학자들의 술탄" 이라 칭송받는 저명한 신학자이자 수피였다. 그는 철학과 도그마를 넘어 신을 향해 깊이 들어가 곧은 열정과 용기, 장엄한 가슴으로 아들에게 깊은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루미가 태어난 때는 역사적으로 극도의 혼란기였다. 오스만 제국은 안으로는 종교적 방종과 정치적 쇠락, 밖으로는 기독교 침략자들과 칭키즈칸의 몽골 군대와 맞서고 있었다. 이런 혼란의 공포는 루미의 어린 시절에 찾아왔다.

루미가 열 두살이되던 1219년, 그는 일찍이 종교적 박해와 몽골의 침략을 예견한 아버지를 따라 고향을 떠난다. 그리고 일 년 뒤인 1220년 압바스 왕조와 사만 왕조의 수도이자 학문의 도시라는 명성을 얻었던 발흐는 칭키즈칸의 몽골 군대에 의헤 폐허가 된다.

그 뒤 루미의 가족은 10년 동안 아시아의작은 왕국들과 아라비아를 떠돌며 지낸다. 그 10년의 세월 동안 루미는 잊지 못할 만남을 갖는다. 메카를 향한 순례 도중에 루미는 이란의 니샤푸르에서 페르시아의 위대한 수피시인 아타르를 만난다. 그를 본 아타르는 "이 소년이 장차 위대한 사랑의 문을 열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루미는 아타르와의 만남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루미는 "내가 이 좁은 골목 모퉁이에 사는 동안 그는 아름다운 일곱 도시를 여행했다" 며 아타르를 회상하곤 했다. 또 아버지와 다마스쿠스를 여행하던 중에 루미는 당대 최고의 수피 철학자였던 이븐 알 아라비를 만난다. 이븐 알 아라비는 아버지의 뒤를 좇아가는 루미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신에게 영광이 있기를... 바다가 호수를 뒤따르는구나."

열일곱 살의 루미는 사마르칸드의 귀족 집안 출신인 고어 카톤과 결혼한다. 그리고 두 아들, 술탄 왈라드와 알라 앗 딘 텔레비를 낳는다. 아르메니아에서 머물던 루미의 아버지는 코니아의 술탄, 케이코바드의 초청을 받아 코니아로 간다. 1229년의 일이다. 루미라는 그의 이름도 그가 소아시아에 정착해 살게된 데 에서 유래했다. 코니아의 술탄은 루미의 아버지를 위해 마드라사라는 종교 학교를 지었고 그곳에서 루미의 아버지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그 기간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2년 뒤, 루미의 아버지 바하 앗 딘 왈라드가 죽자, 24세의 루미가 아버지의 후계자로 대ㅣ를 잇는다.

물론 루미의 영적, 지적 교육은 그 뒤로도 지속되었다. 루미는 아버지의 제자였던 부르한 앗 딘 무하키크가 코니아에 와서 루미에게 이란에서 발달한 몇 가지 신비적인 이론들을 더 깊이 알려주는 등 잘랄 앗 딘의 정신 세계 형성에 커다란 공헌을 했주었다. 이미 수학, 물리학, 법학, 천문학과 아랍어, 페르시아어 등 꾸란에 능통해진 루미는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로 다시 여행을 떠난다. 30세에 코니아로 돌아온 루미는 아버지의 영적 은총을 지닌 명석하고, 신실하고, 섬세한 젊은 학자가 되어 있었다. 루미의 명성은 곧 널리 퍼졌다. 그의 아들 술탄 왈라드의 기록에 의하면 1224년에 이미 루미의 제자는 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244년 11월 30일, 37세의 루미에게위대한 분해와 파괴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 사랑의 영광이 그를 구해낸다. 타브리즈의 샴스를 만난 것이다. 이 날 그는 전에 시리아에서 첫 대면을 했던 떠돌이 상인인 타부리즈 출신의 수도승 샘스 앗 딘을 코니아의 길거리에서 다시 만난다. 샴스가 어떤 전통의 신비주의 교단 출신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그의 압도적인 개성이 루미에게 신의 권위와 아름다움에 관한 신비함을
가르쳐 주었다. 샘스를 처음 본 순간을 훗날 루미는 이렇게 묘사했다.

수많은 거리의 사람들 중, 오직 그만이 내 눈을 채웠다. 나는 모든 경전을 알고 있었고, 그 경전 속의 신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신이 한 사람을 통해 나에게 현현한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샴스의 스승인 루큰 앗 딘 산야비가 샴스에게 루미를 알려주었고 코니아로 가서 가르침을 베풀도록 했다고도 한다. 샴스와 루미는 그날 이후 40일 동안을 둘이서만 지낸다. 루미는 모든 것을 배웠고, 샴스는 루미와의 만남 이전에 이미 모든 것을 주었다. 그 뒤 수개월 동안 이 신비주의자는 가까이 붙어지냈다. 그러나 이미 거대한 집단의 지도자인 루미에게 이런 특별한 시간들이 측근들에게는 많은 오해와 불만을 키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결국 측근들은 1246년 2월, 샴스를 마을에서 강제 추방 한다. 루미가 그로 인해 그의 제자와 가족을 소홀히 대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루미가 비탄에 빠지자 그의 큰아들인 술탄 왈라드는 결국 샴스를 다마쿠스에서 다시 데리고 온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샴스와 루미의 특별한 관계를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1247년 어느 날 밤, 샴스는 영원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살해되었고, 루미의 아들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코니아에 아직도 남아 있는 한 우물 근처에서 그의 주검이 발굴되었다.

샴스가 죽은지 몇 년 후, 루미는 오래동안 친구이자 제자로 지낸 대장장이 자르쿠브의 가게에서 황홀감을 경험한다. 어느 날 코니아의 장터에 있는 자르쿠브의 가게 앞에서 망치질 소리를 듣고 있던 루미가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때의 환희의 경험이 루미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다고 한다. 자르쿠브가 죽은 뒤 그의 딸은 루미의 맏며느리가 되었다. 그리고 후삼 앗 딘 첼레비가 그의 새로운 징신적 연인의 자리를
대신한다.

루미의 대표 작품인 (영적인 마스나위)는 바로 이 후삼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다. 후삼은 일화. 우화. 이야기. 격언. 비유 등의 글을 군데군데 넣은 긴 시들을 통해 신비주의의 가르침을 전하려고 했던 아타르와 사나이의 시작 기법을 따를 것을 루미에게 권했다. 루미는 후삼의 충고에 따라 수년 동안 거의 2만 6천행에 달하는 마스나위(2행 연구로 된 페르시아 문학의 독특한 형식)을 지었다.

그는 후삼을 데리고 다니며 거리나 목욕탕에서도 자신의 시를 낭송했으며, 후삼은 이를 받아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샴스를 통한 진정한 수피가 되고, 사랑과 동경, 결별의 경험들을 겪으면서 시인으로 성장한 루미는 자신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30년 동안 수많은 시와 우화를 통해 이슬람 문학의 정수를 꽃피웠다. 루미의 마스나위는 700여 가지 이야기를 중심으로 수피즘의 교의, 역사, 전통을 노래하여 오늘날 신비주의의 바이블, 페르시아의 코란 등으로 불리고 있다.

그의신비한 시들은 루미의 신성을 향한 사랑의 여러가지 단계들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신비주의적 교의와 페르시아의 전통과 역사, 그리고 일상 생활의 그로테스크한 묘사와 가벼운 익살과 풍자를 동시에 아우름으로써 성, 속을 넘나들며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상황에 따라 거침없이 드러냈다. 따라서 때로는 서로 모순되거나 상징물들이 뒤바뀌어 독자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 이야기의 바탕에는 늘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신의 사랑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사랑을 얻음으로써 인간은 자아를 잊고 신과 하나가 되는 "파나"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대부분의 서정시 끝 부분에 자신의 필명 대신 샴스의 이름을 적어 넣음으로써 그 스스로 샴스의 새로운 현현이자 사랑하는 사람과의 완전한 하나됨을 꿈꾸었다.

이런 루미의 법열의 삶은(영적인 마스나위)를 완성함으로써 끝났다. 그의 후계자는 후삼 앗 딘이 되었고, 후삼의 뒤를 술탄 왈라드가 계승했다. 그리스도교 수사들과 고위 관료들조차 루미의 제자들을 찾아다니자, 왈라드는 제자들의 느슨한 조직을 마울라위 교단으로 통합, 조직했다. 마울라위야란 명칭은 루미를 가르켜 부르던 마울라나(아랍어로 우리의 지도자 라는 뜻)에서 비롯되었으며. 터키어로는 메블레비야 라고 부른다. 이 교단은 아나톨리아 전지역으로 확산되어 15세기에는 코니아와 그 주변 전역을 지배했고, 17세기에는 이스탄불까지 세력을 넓혔다.
이 교단은 의례적 기도인 지크르의 음악 반주에 맞추어 오른발로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어 서양에서는 이들을 빙글빙글 돌며 춤추는 데르비시 라고 부르기도 했다.

1925년 9월, 새로 들어선 터키의 공화정 정부는 법령에 따라 터키의 모든 수피 교단을 해체시켰다. 이에 따라 마울라위야 교단은 시리아 ㅇ알레포에 있는 몇몇 수도원으로 옮기거나 중동의 소도시에 흩어져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1954년, 터키 정부는 코니아의 마울라위야 교단의 데르비시들이 해마다 2주 동안 관광객을 위해 의례적인 춤을 출 수 있도록 특별 허가를 내렸다.

코니아에 있는 루미의 무덤과 유물은 공식적으로는 코니아 박물관에 속해 있다. 그러나 그를 기리는 순례자들에게 코니아의 박물관은 단순한 유적지가 아닌 지금까지 살아 있는 정신의 요람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지난 30년 동안 루미의 작품들은 이슬람 세계를 넘어 세계 곳곳에서 되살아나 연구되고 번역되는 등 놀라운 속도로 확장되고 있다. 특히 1990년 후반, 콜맨 바크의 번역물이 미국에서 베스트셀라가 되면서 루미에 대한 관심이 더 이상 허상이 아님을 입증했다.

이는 예술 세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언어와 종교를 초월한 수 많은 음악가들이 루미의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르고 있으며, 대중들은 그 음악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화답하고 있다. 루미가 오늘 날 시름시름 앓으며 죽어가고 있는 인류 문명을 신비의 르레상슬르 펼쳐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가 새로운 뿌리이자, 친절한 스승, 영혼의 치료자로 다시 살아나, 더 늦기 전에 우리 자신과 우리의 행성을 파괴하는 행탤를 멈추고 새로운 깨달음의 비전으로 옮아가도록 우리를 돕는 것이다.


이슬람에서 이단시하는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교의 잘랄 앗 딘 루미. 출처: 사막을 여행하는 물고기